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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서재필(徐載弼, 1864년∼1951년) 독립운동가, 의사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 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 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 했다.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그를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 힐만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일과 정원 조경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데, 홀렌 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달러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가 되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1893년 8월 워싱턴 D.C에서 만난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의과대학 졸업 후에도 박물관에 계속 근무하였다.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 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Muriel Mary Armstrong)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시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친지들을 불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해 초대 국장을 지낸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지만, 의붓아버지인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 제임스 화이트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그는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빌려 차렸다.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 참여 등 그가 가정 생계에 초연하여 빚과 파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내 뮤리엘은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는 노예와 시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당연하다는 시각과 흑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당연하다는 시각이 존재했는데 그는 노예 해방론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제임스 뷰캐넌의 사상에 감동, 깊이 공감하게 된다.
서재필은 개업 후 백인들의 인종 차별 의식 때문에 병원을 별로 찾지 않아 매우 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1894년(고종 31년) 3월 김옥균의 암살 소식과, 5월 뉴스와 신문을 통해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선 조정이 상하이에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시신을 환국시킨 뒤 능지처사(凌遲處死)한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참혹한 죽음과 부관참시를 보고 그는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한층 증폭시켰다. 한편 1894년 6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5년 초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 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 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귀국을 결심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추가로 마련해준 여비까지 더 받고, 1895년 11월 10일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출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서재필과 그의 부인 뮤리엘은 출국 전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인력거로 비밀리에 한성부에 당도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외무협판과 학부대신 서리직을 사직한다. 후일 1900년 6월 윤용선은 그가 이름뿐이지만, 당시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된 것을 근거로 을미사변 관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한다.
당시 그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 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역시 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禽獸)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또는 제이슨(Philip Jason),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堤仙) 또는 피제선(皮堤仙)으로 음역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 내각이 들어서자 1894년 김홍집에 의한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청나라의 패망을 두고 그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고 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공개 연설회에서 박영효를 만나,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유길준(俞吉濬, 1856년∼1914년)이 그를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 신용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유길준과 박영효 등의 적극적인 후원과 주선으로 쉽게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으며, 귀국 직후 그는 고종을 찾아가 연좌제와 고문 등 신체를 상하게 하는 악법을 폐지할 것과, 문벌과 집안을 살피지 말고 인재를 등용할 것과, 과거 제도에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지만 가난한 농사와 기술에 종사하는 평민 자제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점을 들어 조정에서 비용을 들여 인재를 기를 것을 건의하였다.
귀국 직후 연설에서 그는 조선이 단군이래의 4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주국임을 전제하고, 과거 조선이 대대로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의 식민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이 살 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길준, 박영효, 박정양 등을 만나 ‘조선이 근대화를 하려면 반드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중국의 노예가 아닌데도 중국에 해마다 인삼과 황금, 석탄, 여성, 환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동시에 평민들에 대한 교육, 계몽활동과 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유길준에게 신문간행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 이어 1월 19일 한성부에서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서재필의 귀향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특히 그가 서양인 부인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서양 사람을 본다는 일 자체가 아주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었다. 거리에 백인 여자가 나타나기만 해도 구경꾼이 모여 들었을 터인데, 서재필이 서양 여자와 결혼했고, 또 그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하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25살인 서재필 부인은 키가 충천하고 1미터 72센티, 피부가 희고, 머리가 갈색이었으니 장안이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서재필이 귀국하자 정부의 외척 고관들은 그가 갑신정변으로 동료들이 처형당하고 가족까지 연좌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 서재필을 제거하려 했다. 그가 미국과 외국의 힘을 빌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이를 서재필에게 알려주고 각별히 조심할 것을 부탁했다. 서재필은 미국인 경호원들을 대동하였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임명받는 것을 거부하는 대신 1896년(고종 33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 부터 10년 계약으로 총리대신과 같은 액수였던 월봉 300원(연봉 3,6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런 우대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한편 그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하였다. 고종 앞에서 자신을 부를 때에도 외국인 고문관과 같이 ‘외신’이라고 하였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개화파들의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배일(排日)을 부르짖으며 반대하는 민중의 무지(無智)와 몰지각(沒知覺)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윤치호, 유길준, 박정양, 이상재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과 거부감을 주게 된다. 한편 그는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그(서재필)의 미국인 고우(故友)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자
그의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한성을 다니던 중 미국인이 구걸하러 오는 조선인 거지를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그는 이를 지켜보면서 못 본 척 방관하였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친구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1896년 7월 그는 한성에 사는 진사 정모를 고소하였다. 1896년 7월 고등재판소 판결문에 ‘한성에 사는 미국 의사 서재필’이 원고로 등장한다. 서재필은 진사(進士) 정모씨가 올린 ‘거짓 상소(上疏)’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금 2,000원을 청구한 사건이다. 재판부는 “서재필을 상하게 하려던 정씨의 나쁜 마음이 드러났다.”며 “피고 정씨는 손해배상금 1,00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 국무총리)의 연봉이 5,000원(현재 1억 2,000만원)인 점에 비추어 손해배상금은 요즘 돈으로 2,400여만원 정도의 고액인 셈이다. 이는 또 한 번 조선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와 조선에서는 명예를 중시 여겨, 탄핵 상소가 사실여부를 떠나 자신에 대한 탄핵상소가 올라오면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거나 반론을 제기하였지, 자신을 탄핵한 사람을 고소하는 일은 없었다.
서재필은 황제가 임명한 의원 일부와 국민 대표자로 구성된 중추원을 본격 국회로 개조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주조선 일본공사 코무라는 중추원 고문이 된 서재필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신청했다.
“제이슨 박사, 외무협판으로 부를 때는 귀국하지 않더니 고문관으로 부르니 귀국하였소. 무슨 까닭이오?”
“비록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미국인이오. 미국인이 조선의 관료를 맡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을 것이오. 반면에 조선의 고문은 늘 외국인이 맡아 왔으니 격식에 맞는 것 아니오?”
코무라는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응당 할 일을 할 것이다. 법률 제정과 심의를 하는 인력들을 키울 것이다.”라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그러나 코무라는 일본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민권 운동과 의회 설립 움직임을 천황 폐하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 곡해하는데 조선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코무라는 백성들이 곡해할 것이라며 서재필이 실패하리라고 전망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무지한 백성들은 반발하기 마련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미국에서 배웠으니 잘 알 것이오. 법률과 정책은 제정 전부터 공론장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져야 합니다. 토론을 통해 정부는 법률 제정의 의미를 충분히 국민에게 알리고 반대하는 국민들은 법률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소. 이런 과정이 몇 차례 계속되었을 때 비로소 국민의 뜻을 반영한 훌륭한 법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반대 측의 불만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단발령만 해도 그렇소. 그것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소? 그렇다고 아침에 법안을 만들고, 반나절 지나 선비의 상투에 가위를 들이대서야 어디 찬성하는 사람조차 주위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소?”
코무라는 “여기는 조선이지 미국이 아니다.”라며 염려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나는 중추원 고문으로서 법률 제정과 심의를 잘 할 수 있는 인재들을 길러낼 것이오. 그러기 위해 교육을 할 것이고, 교육을 위한 모범으로 토론을 가르칠 작정이오.”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과 토론을 통해 깨달은 국민들이 다음 세대에는 분명 민주주의를 작동할 만큼 지적으로 성숙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서재필은 일본이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는 것에도 회의적으로 봤다.
“조선의 개화를 위한 법률을 만드는 일은 우리 일본이 지금도 잘 돕고 있소. 아무래도 전통과 문화가 비슷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조선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르게 개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좋소.”
“고맙기는 한데,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지금과 같은 난리(乙未義兵, 1895년)가 일어나는 것 아니오?”
서재필은 외국 세력이 중심이 되는 개혁은 오히려 반감만 초래하고 국수주의자들에게 좋은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 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 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 하려고 하였다. 그의 포부를 본 박영효는 5천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약속은 박정양 내각이 들어선 뒤에 이행되었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 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고문직으로 계속 돕겠다고 반복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다.
1895년 12월 중순에 그가 귀국한 직후부터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 1895년 유길준은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귀국 직후부터 신문은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신문 발간 계획을 위촉하였으며, 아관파천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침내 독립신문이 창간될 수 있었다. 그는 내무대신 유길준과 교섭,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얻어내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그는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조정이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인민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백성들은 그가 소개한 사회계약론을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괴상한 신사상 정도로 취급하였다.
독립신문을 창간하려고 하던 때였다. 서재필이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궁중으로 들어가는데 안경을 끼고 갔다. 그가 입궐하자 입구에서는 그에게 안경을 벗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임금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죄로 다스렸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말기 이후 192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은 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궐앞에 이르러 나인들이 다시 저지하였다. 나인들이 ‘임금 앞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안경을 벗으라’고 했다. 그때 서재필은 ‘나는 미국시민권을 얻은 외신(外臣)의 신분’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안경을 벗지 않고 빤들빤들한 안경을 쓴 채 고종을 알현했다.
바로 고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 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는데 이는 임석한 조정 대신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서재필의 말대로 그는 ‘외신’이니까 어쩌지 못하고 애꿎은 통역관만 그 안경 사건을 트집 잡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고종은 그 ‘안경’ 때문에 심기가 대단히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범진 등은 이를 계속 소문을 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년∼1910년) 역시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갑오년에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卷煙, 담배의 번역음)을 꼬나 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 다른 나라의 신하)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 — 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서재필은 시종일관 절 한번 하지 않고 뒷짐진 채 짝다리 짚고, 고종 앞에서 손가락 담배를 피운 채 면대하였다. 이는 착안경 함권연(着眼鏡含卷煙), 칭외신 부수이출(稱外臣 負手而出)이라 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가 서양 도깨비에게 홀려서 정신이상이 됐다는 소문도 유포되었다.
서재필은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고종을 찾아가 뵈었다. 이때에도 그는 안경을 끼고 고종을 면담했다. 안경을 끼고 고종을 배알했던 서재필은 친로파로부터 역신이라는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반면에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고도의 근시이면서도 (입궐할 때는) 안경을 벗고 배알한 탓에 고종의 환심을 샀다.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시절의 한글학자 최현배는 “조선민족의 병폐를 가져온 원인으로 온갖 예절이 조선 사람의 생활을 구속했고, 생기를 잃게 했다”며 서재필의 안경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問)》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한다.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취리(이익을 취함)하려는 것이 아닌고로 값을 매우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짓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내 신문에 설명할 터임 - 서재필이 직접 지은 1896년 4월 7일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이승만, 유길준, 신채호,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임명하여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의 논설이며 모든 것은 내가 혼자 원고를 썼다"고 회고하는데, 이보다 전인 윤치호가 1893년 그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 "서재필이 모국어 쓰기와 말하기를 거의 잊어 버려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 발간 추진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번역 업무를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설립 직후 그는 조선도 감사나 수령, 관찰사나 군수, 부윤 등은 주민이 직접 선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관이 황제나 정부에서 임명하는 지방관보다 훨씬 낫고, 훨씬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4월 15일∼4월 16일에는 그는 독립신문 사설에도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할 것을 서술하였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발행신문인 〈독립신문〉이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제를 골간으로 한 지방자치제를 주장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독립신문〉 논설에는 “관찰사와 고을 원은 정부의 내각 대신이나 협판(協辦·구한말 당시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급)이 천거할 것이 아니라, 지방 백성이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91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5월 이 내용을 발견한 경북대학교 물리학과 주창호(朱昌護) 교수(54·양자역학)는 “독립신문 논설을 쓴 것으로 알려진 서재필(徐載弼) 박사 과거의 1세기 전에 자치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