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역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그 거리 끝에는 솜리 여인숙이 있고,
솜리 여인숙을 왼쪽으로 끼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리 이발소가 나오는데,
그 이발소 옆에 국빈반점이 있다.
1954년에 나무 간판을 내건 이후로 한번도 떼거나 보수하지 않아
국빈반점이란 붉은 글씨가 비와 바람에 퇴색되어 있다.
삐그덕거리는 낡은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서면
민국시대의 흑백 가족사진이 카운터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국빈반점의 주인인 중국인 루꾸웡씨가
오후의 햇살이 겨운듯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한 차례 손님이 지나간 텅 빈 홀에는
벽에 걸린 선풍기가 종업원 하나없는 주인을 대신하며 파리들을 쫓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아내가 맨드라미며 봉숭아꽃을 심어놓았었던
안채의 정원으로부터 바람이 새어들고 있다.
8월의 마지막 화요일에 불어온 첫 가을 바람이다.
늦은 괘종시계는 4시 09분을 가리키고 있고,
서늘한 기운에 잠을 깬 루꾸웡씨는 자신이 오늘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는 비틀거리듯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엽차를 따라 마신다.
손님을 기다리듯 죽음을 무심히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해온 그였으나,
찻잔을 잡은 그의 손은 떨리기 시작한다.
"하오징부창(好景不長)! 좋은 경치는 오래 이어지지 않는 법이지."
체념하듯 자신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가는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온다.
어쩌면 자신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그 소리가
죽은 아내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간다.
그리고 그는 안채에 들어가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깊은 낮잠을 자리라 마음먹는다.
그가 가게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하얀 교복 칼라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다.
"짜장면 주세요."
그가 만류할 틈도 없이, 소녀는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테이블에 앉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짜장면이라.'
그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고 루꾸웡씨는 생각한다.
그는 주방에 들어가 면발을 뽑기 시작한다.
세월을 뽑듯 면발이 그의 손에서 길을 내어 간다.
그의 모든 인생이 줄었다 늘었다 하면서 그의 시야에 펼쳐진다.
도마 위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윤기를 띠며 선명해진다.
소녀의 얼굴이 낯이 익다.
그는 점점 신이 난다.
그녀가 지금 저 쪽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얀 밀가루를 머리 위로 뿌리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목덜미가 유난히 흰 소녀는 짜장면을 맛있게 먹고 있다.
그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그녀를 눈부시게 바라보고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짜장면'을 맛있게 먹어주는 그녀가 기쁘고 고맙다고 그는 생각한다.
루꾸웡씨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괘종시계는 4시 49분을 가리키고 있고, 소녀는 활짝 웃으며 카운터로 걸어나온다.
"맛있어요. 죽어도 못 잊겠는걸요,"
소녀는 하얀 손을 내밀어 루꾸웡씨의 늙고 축축한 손을 꼭 잡는다.
두 사람은 웃으며 홀을 가로질러 안채로 걸어나간다.
맨드라미며 봉숭아꽃을 심어놓은 정원으로부터 바람이 새어들고 있다.
8월의 마지막 화요일에 불어온 첫 가을 바람이다.<史>
<후기> 2003년 8월 29일자 전북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27일 전북 익산시 마동의 K중국집을 운영하는 화교 R씨가 자신의 집 안채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혼자사는 R씨가 여고생으로 보이는 10대 소녀와 안채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웃주민의 제보에 따라, 원조교제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파악하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는 한편, 사라진 10대 소녀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