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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웅크린 소처럼 누운 우도를 향해 배는 성산항을 떠난다. 꾀돌이 갈매기들이 애완용 새처럼 빙글빙글 파도타기를 하였다.
새처럼 자유로운 나만의 여행이었다. 누구든 여행은 저렇게 두 팔 벌린듯 홀가분하게 하고 여럿이 어울려도 각자의 날개로 날아가는 것이라는...
우도로 가는 배는 1시간 간격으로 있었고 나오는 시간도 모두 한 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우리는 성산항에서 우도의 청진항에 15분만에 닿았다.
우도 걷기는 소의 등을 타는 맛으로 우도의 바람을 느끼며 걷기 좋은 길이었다.
우도봉에서 바라보는 우도 절경에는 봄이 와 있었다. 서빈백사의 하얀 산호사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고
검멀레 해변의 풍광 또한 절경이었다. 우도에는 5시간 살다 나왔다.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까지. (우도에 관한 풍경과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우도에서 함께 나온 일행은 세사람이었다. 아가씨들은 소녀처럼 우도에 폭 빠져 우도에서 조금 더 살다가 나오겠다 하였다.
나머지 세사람은 다시 한 조를 이루어 섭지코지를 잠시 보자고 하여 함께 그곳으로 갔다.
자신의 차를 가져온 창원남자분이 직접 운전하였는데다 어디로 갈지 아직 정해진 것도 없다하여, 마음속으로 김영갑 갤러리를 가보자 말하고 싶었지만
갤러리 두모악까지는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섭지코지는 가까웠기에 일행은 섭지코지에서 한시간여 관광을 하였다.
올인 촬영 뿐만 아니라 많은 드라마를 촬영했다고 했지만, 그 어느것도 내 구미를 당기지는 않았다.
다만 코앞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자그마한 성당의 모습. 그곳에 마치 송혜교가 사는 듯이 자그맣고 예뻤다.
섭지코지 주변에 조금 일찍 피는 유채꽃이 손짓을 하였지만.. 어릴때 엄마가 만들어준 장다리꽃 물김치 생각만큼 좋지도 않았다.
나는 유난히 저 장다리꽃 물김치를 좋아라 했다. 배추에서 길게 솟은 장다리에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는데,
얼핏 보면 유채와 장다리꽃은 구분도 안간다. 우리는 그래서 엄마식으로 대충 그것을 유채라 하고 그렇게 불러버리는 엄마처럼
먹거리로만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나에게 유채꽃은 그냥 장다리꽃이다.
그렇게 섭지코지까지 다 돌았는데도 포도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시간이 겨우 오후 세시를 넘었을 뿐.
돌아오는 차안에서 무언가 마음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내가 섭지코지를 들르지 않고 내가 가보고자 했던 곳으로 자유로이 이동했었더라면
나는 결단코 혼자만의 여행을 단축하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다음날 아침 오름투어를 해도 분명 그날 오후시간이면 다시 외로운 밤을 홀로 울적하게 보낼 것만 같았으니까, 그때에는...
나는 사실 3박 4일의 일정을 계획하고 제주도에 왔었다. 제주도에 홀로 여행을 왔지만, 혼자의 홀가분함이란 여럿에게 신경이 쓰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물론 혼자만의 여행이 좋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목소리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줌마의 운명 같은 것.
나는 급속도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일찍 돌아와버린 숙소... 시간이 남는 사람이 할 일이란 이 여행의 외부적인 요소에 신경이 자꾸 간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가족들, 친구들, 주위 반응들.. 홀로 태평한(물론 아이들 봄방학 기간이었지만) 시간이 못내 신경쓰이기 시작했고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하루 일찍 그냥 돌아가?
그러기 위해선 우선 분명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했다.
다음 목초지로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지금 텐트만 걷어 어딘가로 이동한다면 그곳에서의 일정도 이렇게 오후에 끝난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오름투어를 한다는 소낭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새벽 6시 반에 오름으로 출발하고 아침 9시 정도에 도착한다고 하는데
비가 오면 일정은 취소된다고 하였다. 그때 일기는 내일 비가 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나에겐 일정이 끝난다는 시간이 아침이라는 것이 나를 자극시켰다. 아침 9시에 끝나면...
충분히 다음 하나를 더 보아도 비행기 표만 있다면 당장 내일 돌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항공기 예매를 해두었던지라 혹시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내일로 바꿀 수 있는지....
항공사 직원은 다행 하나가 있다 하였다. 마치 운명이 나를 돕는 것처럼 딱 아귀가 맞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단 하나.
날짜를 하루 앞당기기로 하니, 불현듯 밀린 숙제처럼 참고 있던 일정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소낭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오름을 정확히 하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만 주고 받았다.
비... 문제는 비였다.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오름투어는 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릴 만점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내게 에너지를 주는 이런 복잡한 상황들이 은근 즐겁기조차 하였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적어도 바람이 심하게 불겠구나.
나는 흔쾌히 마음이 기울었다. 예약을 하시겠냐는 말에 거의 했는데 결정나면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며 끊었다.
주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닌 듯한 막연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의 90%가 기울어 있었다. 이미 기울어지니 여행의 발은 움직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낭으로 가는 것이다. 마치 그곳에서 너무도 특별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기라도 할 듯이, 소낭 소낭 예쁜 이름이 나를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포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버스를 기다리자니 택시들만 무심히 지나친다. 찬찬히 기다리며 소낭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지금 버스를 타고 갈 것이라고 하였다.
월정리 라는 동네에서 내리면 된다고 하였다. 월정리.. 오대산 속의 이름같은 마을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월정리 소낭....
택시 한 대가 선다. 제주시내까지 오천원이라고 크게 선심을 쓴다는 듯 외친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며.
사양하는 내게 어디 가시냐고 묻는다. 월정리요. "월정리는 삼천원요."
에라, 모르겠다. 택시를 탄다. 괜히 호사하는 기분까지 든다.
아저씨는 월정리 라는 말에 '소낭'에 가냐고 물으신다. 우와~.
그렇게 소낭이 유명한가요?
대다수 사람들은 월정리에 가면 소낭으로 간다고 한다. 아울러 그곳이 아마도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중에 거의 최초일 걸요.
어머나~... 마치 태국의 홍익인간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예전에 태국으로 갔을 때 그곳에는 남편의 아는 사람이 있었다. '홍익인간'. 태국 최초의 한인 게스트하우스.
한비야의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책에 등장한 '홍익인간'에서의 추억담은 고스란히 잊을 수 없었는데
그때 그곳 주인이 남편의 아는 사람이라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우리 가족끼리 무작정 짐 하나씩 꾸려 태국여행길에 올랐고
그곳 '홍익인간' 주위의 카오산로드, 방람푸시장... 아직도 눈에 선한 태국의 풍경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소낭'을 그렇게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건 어떤 예감이었는지 나는 돌아와 며칠 지난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오래..
'홍익인간'을 닮은 '소낭'을 잊을 수 없을 것을 예감하고 있다.
소낭에 도착하니 4시 40분. 그곳에 들어서니 남자 세 사람이 카운터 주변에서 각자 섬처럼 앉아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접수를 하는 사람에게 아까 전화했던 사람이라며 인사를 했다.
한 사람은 '하악하악'을 읽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그냥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선뜻, 여기 밥은 언제 주나요? 부터 묻고 말았다.
간단한 토스트와 우도에서 먹은 식당밥 한 공기가 전부였으니, 걷기도 제법 걸었지.. 여간 허기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웬 아줌마가 이렇게 밥타령부터 하는지 의아한듯 쳐다보았다. 피식 웃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오늘밤 바베큐 파티에서 이 아줌마가 엄청난 식탐을 보이겠구나,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 동네 식당에서 우선 허기를 면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지만 마음 속에선 바베큐 파티에 잘 먹으려면 식당 보다는 초코파이 같은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방을 안내 받았다. 옆을 돌아서니 가정집 구조가 나왔는데 그곳에 여자 도미토리가 4인실, 6인실, 8인실, 1인실도 있었다.
나는 이제 게스트하우스에 와서 혼자 자고싶어하는 생각일랑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만날까, 그 낯선 사람에 섞여지는 것이 더 여행다워 좋았다.
아무래도 이 방이 좋을 것 같다며 방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ㄱ자 구조로 창이 나 있었다.
그 창을 열면 바깥 카운터가 나왔다. 자그마한 나무 계단을 만들어놓는 센스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방에서 이천에서 온 모녀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천이라는 말은 내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여서 반가움이 여간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며 사음리 얘기를 간단하게 들려주었더니 그들도 반가워했다.
그리고 딸과 함께 하는 여행의 풍경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딸 아들 함께 해외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그건 예전부터 꿔오던 꿈 같았다. 아이들과 함께 터키 여행가자고 했었는데 그 여행은 엄마만 꾸는 꿈인것 같아 마음에 지우기도 했었는데,
이런 엄마와 자녀와의 여행 모습은 나를 또 두둥실 꿈꾸게 하였다.
그 엄마는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며 이 여행이 좋으면서도 힘들다는 즐거운 투정을 부렸는데 딸은 끝까지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느라 즐거워 보였다.
역시 여행은 계획할 때가 즐겁고 여행하는 도중에는 힘들어해도 결국 그 여행의 마지막은 한없이 아름다운 추억임을 보여주는 풍경 같았다.
여행은 그러므로 젊음의 특권 같았다. 젊어지고 싶은 사람 여행하라...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을 너무 믿는 내 습관이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살림살이를 펼쳐놓아도 마음이 그저 편하기만 했다.
나는 월정리를 어슬렁거리며 걸어 보았다. 구멍가게라도 만나면 초코파이라도 사먹을 요량이었다.
마을 아래로 걸어내려 가는데 바다보다 하늘이 압도적으로 시원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저녁을 위한 만찬처럼 구름도 성대했다.
바다는 집들 너머에서 기웃거리고 전봇대는 파도의 너울처럼 출렁 공중에 떠있는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길이었지만
이런 풍경도 여행지에서 만나면 잠시나마 벗어났던 집들의 풍경임을 인식하게 된다. 일상이란 여행이 아니었지만 여행은 일상도 공유하게 하는 것처럼....
소낭의 저녁은 7시 반부터 시작되는 바베큐 파티였다. 숯불 바베큐 냄새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식욕이 용솟음치는 걸 간신히 참는데, 지금 이세상에 나보다 배고픈 자가 또 있을까 싶을만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의 나는 전혀 배고프지 않은 척, 뭐라도 먹은 척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스무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식사 시간이 시작되어 모두 테이블 주위로 모여 앉는데 갑자기 산적처럼 생긴 것도 같고 산악인처럼 생긴 것도 같은 낯선 분이 턱 나타났다.
그러면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잠시 모두 옆자리로 옮겨 설명을 들어 달란다. 목소리와 함께 카리스마 있는 눈빛까지.. 움찔할 정도의 포스가 느껴졌다.
하우스에 모인 게스트들은 옆자리 평상으로 마주 보고 서로 앉았다. 그분은 자기소개를 했는데 바로 소낭의 촌장이라고 하였다.
나는 처음 왔을 때 세 사람의 남자 중 한 분이 주인이겠거니 싶었는데 주인은 숯불구이를 차려서 갑자기 짜잔 하고 나타난 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만났으니 잠시 스치는 인연이지만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순서를 갖자고 한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다 하고 먹어야 하나 싶어 거의 아찔해지고 말았다.
둥글게 마주 보았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부터 자기 소개를 하란다. (에궁)
그런데 소낭의 자기소개 규칙은 아주 특별했다. 자기 나이에서 스무살을 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젊은 자 여행한다는 취지에서 스스로 스무살까지 팍 깎아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먼저 촌장이 자신의 나이는 쉰여섯이지만, 서른여섯이라 소개한다. 모두 와우 박수를 쳤다. 그냥 젊어진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쓱 둘러보아도 이천에서 온 엄마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가짜 나이소개는 조금 부끄러운 것이었다.
적지도 않은 나이를 이렇게 대놓고 거짓말까지 하는데 이십년을 줄여도 이렇게까지 먹어 버렸으니...
첫번째 옆에 앉은 사람이 자기는 여섯살이란다. 순간 하하 웃긴다. 스물여섯이 여섯살이 되는 순간이동이 은근 재밌네~싶었는데 곧 내 차례.
나는 너무도 느닷없어 적응도 안되었는데 덜컥 웃다가 정색하며 얘기했다.
아, 저는 스물여섯이구요..
그런데 촌장이 갑자기 나를 제지한다. 내가 말귀를 못알아 들었는줄 알고...
이때 놀라운 얘기를 듣고 말았다. 나더러 여섯살이라 해야 한단다. 스물여섯 있는 그대로 하는 게 아니라..
완전..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분은 지금 나를 스물여섯 치고는 좀 노티나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나는 그만 가만 있음 될 걸.. 스스로도 너무 놀라 얼결에, 그렇게 해서 스물여섯이라고 이실직고 해버렸다.
그랬더니 조금 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음~ 자세히 봐서 들킬까봐 두려웠지만, 최강동안이라는 영원히 잊지못할 말까지 듣고 말았다.
그래서 소낭은 내게 더 특별해지고 말았다.
모두 자기소개를 하고 짤막하게 자기 여행의 이야기도 했지만 나는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거기서 끝 하고 말았다.
아, 맘껏 좋아라 웃었더니 잠시 서먹하던 자리들이 와락 친숙해진다.
이렇게 하여 모두의 인사가 끝나고 드디어 숯불 바베큐를 포식할 차례.
그럴싸한 포식자의 미소를 머금으며 옆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숯불고기가 4인 접시에 담기고 청정야채와 김치, 양파, 쌈장. 그리고 밥과 된장찌개가 놓여졌다.
그런데 모든 여행자가 다 모여야 수저 하나라도 들 수 있다. 적당한 규제가 있는 자유여행자의 그런 세심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단다. 모두 단체로 카운터의 남자분과 가위바위보 시합을 하는데 마지막 지는 사람이 오늘의 설거지 담당이다.
남녀 각 1명씩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때 또다시 고맙게도 이미 엄마인 사람들은 가위바위보 자체가 생략이다.
너무도 황송한 프로그램이었다. 어쯤....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이곳 분위기.
나이 들었다고 빼주는 아량이 아니라 늘 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다. 자동적으로 이천 엄마와 내가 가위바위보도 않았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설거지 뽑기를 구경하였다.
억울하게 두 명의 남녀 한 명씩이 뽑혔지만, 그것 역시 즐거움이었다.
자기소개를 할때 -3살이었던 17살이 있었는데, 봄방학을 맞아 부모님이 여행을 혼자 다녀오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소낭을 왔다는 것이었다. 여행 도중에 만난 형아들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며.
그 형아들 중 한 명은 까맣게 탄 얼굴이 여행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행에 단련되어 보였고, 한 사람은 대학로에서 연극 조명감독 일을 하다가
한 작품이 끝나면 이렇게 여행으로 충전을 갖는다고 하였다. 모두 그들에게 워워, 박수를 보내줬다.
내 옆에 착하게 생긴 한 아가씨가 어제의 나처럼 완전 얼얼한 표정으로 첫 여행이라고 한다.
그것도 이제 막 도착하고 아직 여행도 못한채 숙소부터 왔으니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제법 클 듯 싶었다. 어제 나 자신을 보는 듯.
그새 제법 여유가 생겼다고 경험담을 들려주는 내가 우습지만, 어쩌면 이모처럼 언니처럼 해줄 말도 적절할 것 같았다.
어디를 가지도 못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연할 때.. 이때의 마음은 이제 막 그 터널을 벗어난 내가 제격일 것 같았다.
길위에는 항상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면... 나도 그랬을까. 그 아가씨의 친밀함이 또 마음에 든다.
나는 카운터의 남자분에게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름에 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모두 저마다 그룹을 만드는지 내일 일정을 즐겁게 주고받는다.
소낭의 자유토론 시간은 밤 11시에 소등을 한다. 그때까지는 각자 자유로이 참여를 하면 되었다.
나는 만약에 비가 오면 어떡하나... 자리에 돌아와서도 날씨에 대해 걱정이 되었다.
날씨는 흐렸고 이왕 올 것이라면 제발 9시 이후에나 와달라고 빌었다.
바람이 불어주겠지. 아니 바람이 심하건 비가 많이 오건.. 투어 자체가 없으면 어떡하나...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평소보다 일찍 스르륵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모든 것 지나고나면 운명처럼 크게 오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그저 이렇게 깜빡깜빡.. 밤은 저문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첫댓글 나도 딸내미랑 여행 할려고 비행기표 예약 해 놓았는데....
웃는 얼굴은 햇빛처럼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듯이
인생을 즐겁게 살아 가려면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