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流配)는 잘못을 범한 죄인을 귀양 보낸다는 뜻으로 사실 어감이 좋은 단어는 아니다. 그런데“현대인들이 꿈꾸는 유배지"란다. 지치고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려면 귀양이라도 보내달라고 하는 현대인들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늡다리라는 곳은 왜 현대인이 꿈꾸는 유배지라고 할까?
시작부터 자연의 푸름과 길옆으로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살의 소리가 함께 한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막아주니, 포근함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곧 나타난 건 냇가. 냇가라고 치부하기엔 물살이 거세고 조금은 깊다. 행여 물기가 옷에 튈까 조심조심 해보지만, 까짓 옷 좀 젖으면 어떠랴. 진부한 트레킹이 아닌 오지트레킹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계곡 물가에서 잠시 쉬면 계곡물의 청량감을 온 몸에 흡수시킬 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이지만 도래기재에서 솟아 오른 선달산(先達山, 1,236m)을 정점으로 충북과 경북, 강원도의 삼도 분기점인 어래산(御來山, 1,063.6m)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아래 자리하고 있다. 白頭大幹 도래기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小白山과 太白山을 가르며 흐르는 내리계곡의 늡다리는 널빤지로 만든 '널다리'가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칠룡동,응애골,무쇠점터,늦은목이,사기점터,명생동 등에 살던 화전민들이 이 다리를 건너 경북 춘양, 충북 단양, 영월 5일장을 보러 다녔다.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향하던 사건 이후 白頭大幹 골골이 박혀 살던 화전민들에게는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졌다. 그리고 거기 40여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수풀에 묻혀버렸다.
단종대왕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이 찾던 곳이기도 한다. 수양대군인 세조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된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이들의 영혼도 잠자는 곳이다. 바로 영월 청령포로 쫓겨 왔던 단종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전 본거지가 바로 인근 영주 풍기 순흥면의 <소수서원>이 건립된 자리에 있었던 <숙수사(宿水寺)>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품고 있다. 산중에서 <단종대왕>이라는 비석을 볼 수가 있다.
내리계곡 입구에서 김필봉씨 외딴집 늡다리까지는 4km로, 한두 번 쉬는 시간 포함 1시간 30분쯤 걸린다. 늡다리에서 칠룡골 입구까지는 650m로 15분, 칠룡골 입구에서 칠룡폭포까지는 1.1km, 칠룡폭포에서 칠룡동 산신당까지는 1km 거리이다. 산신당에서 오른쪽 지계곡으로 700m 들어서면 계곡이 갈리는데, 오른쪽 계곡을 따라 올라야 회암골과 이어진 고갯마루다. 회암골로 내려서면 쓰러진 나무둥치와 덩굴식물들 때문에 앞이 안 보일 만큼 울창하지만 사이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골짜기를 따라 1시간 반이면 산신당 터가 있는 옛 회암동에 닿는다. 칠룡골보다 길이 순하고 흔적도 뚜렷다. 다시 40분이면 내리계곡을 만난다.
회암(回岩) 지동(池洞)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큰 명당이 있었다 한다. 의상(義相)대사가 676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을 받고 절터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곳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까치가 대패밥을 물고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北枝里)로 날아갔으므로 그곳에다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할 명당에 큰 너럭바위가 있어 고민하던 중, 이 바위가 저절로 공중으로 떠서 옮겨간 뒤 그 곳에 절을 건립하고 부석사라 하였다. 이때 큰 바위 하나가 이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마을의 지명을 '회암(回岩)'이라 부르고, 바위를 '구들바우'라 하며 바위가 넘어온 고개를 '회암령(回岩嶺)'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칠룡동(七龍洞) 벌때(峰垈) 남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용소(龍沼)에서 일곱 마리의 용이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칠룡동'이라고 한다. 한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칠룡골에는 송이와 함께 산속 깊은 곳 벼랑 위에서 자라는 엽상체식물인 석이(石耳)가 많이 나는 곳으로 석이는 한방재나 음식의 모양을 내는 고명으로 사용된다. 9. 산행지도 및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