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경상좌도 병영성이 존재 하는데 거기에는 병마 절도사 또는 병마 절제사가 모든 軍을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울산에는 읍성이 있어 군수나 도호부사가 있다.
이것은 두가지로 보여진다.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직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별도의 조직을 관리하는 부사가 이고 병마절도사는 병영만 관리 하는 경우가 있지만 기록에는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
병마절도사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라는 명칭이 있지만 줄여서 좌병사라고 부르고 송덕비에는 대부분 병상국이라 되어 있다.
조선 초기 중기 이전의 송덕비는 드물지만 현재 남아 있는 송덕비의 경우 조선 중후반의 비석으로 병상국이라는 존칭을 남겨 선정을 베푼 좌병사를 기리고 있다.
아래는 역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또는 절제사를 지낸 인물을 글을 써 보았다.,
보통 500년 세월이면 1000정도의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자료를 찾지 못하여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작업한 결과다
허완은 경상좌병사로 좌영(左營)을 통솔하였다.---병자년(1636, 인조14)에 영남좌도 절도사(嶺南左道節度使)로 자리를 바꾸었다
경상좌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미 좌도의 감사가 되었으니
성상 원년(1725, 영조1)에 장공 붕익(張公鵬翼)이란 장수가 --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가 되고 또다시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는데
통제사 유공의 신도비〔統制使柳公神道碑〕
공의 휘는 림(琳)이고, 자는 여온(汝溫)이다. 유씨는 본디 유주(儒州)의 대성(大姓)으로, 차달(車達)이 그 시조이다.
을해년(1635)에 내직으로 들어와 부총관 겸 포도대장(副摠管兼捕盜大將)이 되었다. 병자년(1636)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었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체차되었다
북병사 김공의 묘명〔北兵使金公墓銘〕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10)에 내가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을 때 주장(主將)은 바로 김공 준룡(金公俊龍)이었는데, 서로 간에 뜻이 맞아 잘 지내었다. 김공은 임오년(1642) 11월에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있던 중 졸하였는데, 나이는 57세였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었다가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되었는데, 이 자리는 무관의 극선(極選)이었다. 그러므로 이 직임은 반드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제수하였는데
사산감역(四山監役) 이군(李君) 묘갈명 계사년(1713, 숙종39)
이군 자정(李君子貞)은 휘는 사길(師吉)의 아들인-1남 삼(森)은 무과에 급제하여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이고
경기 도순찰사(京畿都巡察使) 권징(權徵)의 장계와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晉)의 장계가 이곳에 들러서 경기와 영남의 적의 형세를 알고자 동궁께 아뢰고 장계를 열어 본 뒤 다시 봉함하여 올립니다
박영(朴英)
박영은 자는 자실(子實)이며, 호는 송당(松堂)이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조 참판 수종(壽宗)의 아들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의 외손자이다. 신묘년(1471)에 태어나서 성종 임자년 나이 22세 에 무과에 올라 벼슬이 병조 참판ㆍ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에 이르고, 경자년에 죽으니 70세였다.
장언량----중종 임인년에 명 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며 우리나라에 군사를 청하니, 이기를 도원수로, 공을 부원수로, 당시 경상좌병사로 있었는데 체직되어 부원수가 되었다
평행장(平行長)이 그의 장수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진영에 왕래하면서 은근한 의사를 표시하게 하고, 또 청정과 화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증 판서 김공 묘갈명 병서〔贈判書金公墓碣銘 幷序〕
한양 훈련원(訓鍊院) 앞 들판 보수(步數)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바위가 있는데 ‘김억추(金億秋) 바위’라고 --기해년(1599)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올랐고
복(服)을 마치고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제수되어 섬에 있는 산성(山城)을 수리할 것을 청하여 2번이나 계(啓)를 올렸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드디어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대신(臺臣) 홍여순(洪汝諄)이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하였다.’고 탄핵하여 영암(靈巖)으로 귀양갔었는데--곽재우
우리 증조고(曾祖考)인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 부군은 휘(諱)가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니,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 참판 휘 현범(賢範)의 차자(次子)이다. 그 묘소는 참판의 묘소와 같은 동(洞)이면서 언덕을 달리하고 있으니, 그곳은 바로 동쪽 언덕이다.
조씨(趙氏)가 처음 나오게 된 유래와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에 임명되어서는, 이때에 대도(大盜) 팔룡(八龍)이 난리를 일으켰으나 관군이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부군이 방략(方略)을 세워서 그를 체포하였다. 이에 상이 가자(加資)를 명하였으나 대론(臺論)으로 개정되어 임소에서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새 총독의 명을 받아서 장관(將官)들을 나누어 보내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성윤문(成允問),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14일 부산을 함락시키자, 동래(東萊)에 머물러 있던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은 왜군을 협격(挾擊)한다는 핑계로 소산역(蘇山驛)으로 달아나 버렸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최조악은 외람되게도 곤월(閫鉞)의 직임을 맡아 가지고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형장(刑杖)을 너무 지나치게 쳐서 많은 인명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껏 재물을 탐하여 전혀 꺼리는 바가 없으니, 우선 먼저 사판에서 삭제하는 조치를 내리시고 이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게 해서 해당하는 율로 처벌하도록 하소서.”
이것은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김영수(金永綏)의 장계인데
전 교동 수사(喬桐水使) 홍수보(洪秀輔)와 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백동준(白東俊)을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문덕(李文德)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로 삼았다.
제도(諸道)의 수조(水操), 육조(陸操), 순점(巡點), 순조(巡操), 취점(聚點)을 모두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목 ○ 영의정 서명선이 아뢰기를,
“방금 통제사 구명겸(具明謙)의 장계(狀啓)를 보니, ‘삼남(三南)의 수조를 사목(事目)에 의거해서 각각 그 앞바다에서 설행하고, 본영(本營) 소속의 주사(舟師)는 오는 8월 17일에 거행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유진항(柳鎭恒)의 장계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인수(李仁秀)에게 이르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익(金熤), 통제사(統制使) 구명겸(具明謙),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구서오(具叙五)의 포폄 계본에는 변장(邊將) 중에
강오성(姜五成)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경상좌도 병사 최조악(崔朝岳)은 형장(刑杖)을 너무도 범람하게 사용하여 인명(人命)을 죽이는 수가 많았고, 탐오(貪汚)한 짓을 마구 멋대로 하였음을 오만 사람이 다 말하게 되었으니, 먼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실시하고, 엄하게 무거운 죄로 감단(勘斷)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박거겸(朴居謙)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서장(李恕長)과 경상도 병마 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김교(金嶠)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오백창(吳伯昌)이 하직 인사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영유(金永濡)·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김순신(金舜臣
)·경상도 좌도 병마 절도사(慶尙道左道兵馬節度使) 구겸(具謙)·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자행(金自行)과 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경유공(慶由恭)이 하직하였다.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윤말손(尹末孫)·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오순(吳純)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성숙(成俶)·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오순(吳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제신(金悌臣)·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조숙기(曹淑沂)·
병마 절도사로, 백동준(白東俊)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〇 이만오(李萬吾)를 전라도 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候)로, 박종순(朴鍾淳)을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으로, 신홍주(申鴻周)를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이은복(李殷福)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보한(李普漢)의 장본(狀本)은 묘당에서 내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원(李源)이 청한 성역(城役)은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허칙(許侙
, 윤범행(尹範行)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우현(李禹鉉)의 장계에,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받은 밀양의 엄이
정조 즉위년 병신(1776) 11월 5일(계유)
경상 병영에서, 소생(所生)의 남정(男丁)과 타관(他官)으로부터 와서 사는 자에 대해서는 신역(身役)을 시키지 말고, 갑주 모미(甲冑耗米)를 획급해 줄 것을 청한 데 대해,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 좌의정 김상철이 아뢰기를,
“경상 좌병사 김영수(金永綬)의 장계에, ‘성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본관(本官)의 납포군(納布軍)에 대한 응역(應役)의 고통 때문에 날로 점점 달아나 흩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신역(身役)을 자신에게만 한정하고 그 소생의 남정과 타관으로부터 와서 사는 자에 대해서는 신역을 시키지 말며, 성의 정군(丁軍)을 단속하여 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영의 재력이 빈약하여 상사(賞射)를 자주 시행하지 못하니, 비국에서 관장하는 갑주미(甲冑米)의 매년 모곡조(耗穀條) 중에서 200석을 획급해 주어 매달 시사(試射)할 수 있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군정(軍丁)의 일과 갑주 모미 건을 모두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윤희(李潤禧)를 체차하였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남지묵이 포폄을 봉하여 보낸 장계 및 좌수사(左水使) 이홍운의 포폄 계본을 보니, 봉하여 보낸 날짜를 모두 이달 10일로 써넣었습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최동악(崔東岳)의 장계에, ‘본영
이인수(李仁秀)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신철(申㬚)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울상부사 -이계하-1886년
이기혁-경상 좌병사--1879년
심선택-울산군수--1905년
박병숙- 울산군수-1899년
. 1600년(宣祖33) 봄에 慶尙左兵使로 재직 중 風痹로 인해 영해로 돌아왔다. 1608년(宣祖41)에 다시 경상좌병사를 거쳐
첫댓글 이순몽 고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