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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차와 불교 (茶,佛敎)
차와 불교는 선(禪)사상이 크게 자리 잡았다.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것은 수행과 같다고 해서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이규보(1168~1241)는 “스님의 품격이 높은 것은 오직 차를 마시기 때문이라네.” 라고
하였고 서산대사도 “낮이면 차 마시고 밤이면 잠잔다.”로 한 것은 차 마시는 것을 스님의 수행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차를 끓여 마시는 일은 선(禪)에 드는 일이며, 차(茶)와 선(禪)은
마음 상태가 같고, 느끼는 경지가 같으며 깨우치고자하는 목적이 같다고 한다.
차(茶) 문화(文化)는 오래 전부터 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져 차(茶)는 육법공양물(六法供養物)의
하나로서 불교의례에 사용되고 있다.
① 대웅전(大雄殿):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
我今淸淨水 내이제 깨끗한 물 올리오니 變爲甘露茶 감로수로 변해지이다.
奉獻三寶前 삼보전에 올리고져 하오니 願垂哀納受 자비로 거두어주소서.
② 불상 점안 때: (청정명다약 능제병혼침 유기옹호중 원수애납수)
淸淨茗茶藥 깨끗한 차 한잔 能除病昏沈 모든 병액 없애소서
唯冀擁護衆 오직 대중을 옹호하소서 願垂哀納受 자비로 거두어 주소서.
③ 나한전(羅漢殿): (금장감로다 봉헌나한전 감찰건간심 원수애납수)
今將甘露茶 이제 감로차를 가져 奉獻羅漢前 나한님께 올리오니
鑑察虔懇心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펴서 願垂哀納受 자비로 거두어 주소서.
④ 괘불이운 때(掛佛移運): (금장묘약급명다 봉헌영산대법회 부감단나건간심 원수자비애납수)
今將妙藥及茗茶 이제 묘약과 차로서 奉獻靈山大法會 영산법회 올리오니
俯瞰檀那虔懇心 이 간절한 마음 살피시어
願垂慈悲哀納受 원컨대 자비로서 거두어 주소서
⑤ 헌공양(獻供養)
普放光明香莊嚴 널리 광명을 놓고 향으로 장엄하니
種種妙香集爲帳 普散十方諸國土 供養一切大德尊
종종 묘향이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대덕존께 공양합니다.
(보방광명향장엄 종종묘향집위장 보산시방제국토 공양일체대덕존)
又放光明茶莊嚴 다시 광명을 놓고 차로 장엄하니
種種妙茶集爲帳 普散十方諸國土 供養一切靈駕衆
종종 묘다가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영가에게 공양합니다.
(우방광명다장엄 종종묘다집위장 보산시방제국토 공양일체영가중)
又放光明米莊嚴 다시 광명을 놓고 쌀로 장엄하니
種種妙米集爲帳 普散十方諸國土 供養一切孤魂衆
종종 묘미가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고혼들게 공양합니다.
(우방광명미장엄 종종묘미집위장 보산시방제국토 공양일체고혼중)
☀ 구덕 (九德): 차를 마시면 얻는 아홉 가지 이익.
첫째 머리를 맑게 해주고 (이뇌:利腦)
둘째 귀를 밝게 해주고 (명이:明耳)
셋째 눈을 밝게 해주고 (명안:明眼)
넷째 밥맛을 돋구고 소화를 촉진시켜주고(구미조장:口味助長)
다섯째 술을 깨게 해주고 (각주:醒酒)
여섯째 잠을 적게 해주고 (소면:少眠)
일곱째 갈증을 멈춰주고 (지갈:止渴)
여덟째 피로를 풀어주고 (해노:解勞)
아홉째 추위나 더위를 막아준다 (방한보서:防寒陟暑)
☀ 오감작통 (五感作統)이란?
눈은 차의 빛깔을 감상하고,
코는 싱그러운 향기를 맡고,
귀는 차솥에 끓는 물소리를 듣고,
손은 다기(茶器)를 통해 따뜻한 감촉을 느끼고,
혀는 차의 맛을 음미한다.
☀ 제다법에 따른 차의 명칭
① 일쇄차(日曬茶): 찻잎을 전혀 볶지 않고 햇빛에 쬐어 말리는 차
② 부초차(釜炒茶): 볶아서 만드는 차 - 수미차, 보향차, 유비차
③ 증제차(蒸製茶): 수증기로 쪄서 만드는 차 - 설록차, 봉로차
④ 반발효차(半醱酵茶): 청차, 포충차, 우롱차
⑤ 발효차(醱酵茶): 띄워서 만드는 차 - 보이차, 홍차
⑥ 병차(餠茶): 떡처럼 만드는 차 - 떡차, 돈차
⑦ 향편차: 연꽃향차
⑧ 말차(抹茶): 가루차
⑨ 원후차(猿猴茶):절강성의 천태산과 천목산에서 원숭이가 따는 차
☀ 차(茶)의 이름
① 죽로차(竹露茶): 반음 반양의 대숲에서 대이슬을 맞고 자란 부드러운 찻잎으로 만든 차
② 작설차(雀舌茶): 찻잎의 크기가 참새의 혓바닥만한 어린잎으로 만든 차
③ 응조차(鷹爪茶):차의 순(荀)이 매의 발톱을 닮은 것으로 만든 차
④ 맥과차(麥顆茶):차의 순(荀)이 보리의 낱알을 닮았을 때 만들었다는 차
⑤ 설록차(雪綠茶): 눈이 아직 덜 녹은 이른 봄에 일찍 만든 차.
439. 차별 (差別) ☀불교에서 나온 말
원래 차별은 현상계에서 개개(箇箇)의 사상(事象)이 서로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만법(萬法)의 근본원리를 평등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만유의 차별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440. 차제설법 (次第說法)
차제설법(次第說法)이란 ‘순서에 따라 행한 훈화’를 뜻한다. 이러한 방식의 설법을 통하여 부처님은
야사라는 청년을 교화함으로써, 그를 일반인으로서는 최초로 부처님께 출가하여 귀의한 제자로
삼았으며,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어로 된 율장(律藏)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좋은 집안의 출신인 야사가 한쪽에 자리 잡고 앉자, 부처님은 그에게 ‘순서에 따른 훈화’를 설했다.
즉 보시에 대한 훈화(施論), 계율에 대한 훈화(戒論), 생천(生天)에 대한 훈화(生天論), 여러 가지의
욕망에 대한 근심ㆍ해악ㆍ오염과 버리고 떠남이 지닌 뛰어난 이익을 설했다.”
이것이 소위 차제설법의 내용인데, 이는 사성제라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설해진다.
이 중에서 앞의 셋은 각각 시론(施論)ㆍ계론(戒論)ㆍ생천론(生天論)이라는 삼론으로 불리면서 특히
중요시 된다. 그런데 이 삼론은 상식적인 업보설을 믿지 않는 그릇된 사고방식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강설된 것이라 한다.
이 삼론의 차제설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먼저
시론(施論)은 종교가나 곤궁한 자에게 옷과 음식을 베풀라는 것이다.
계론(戒論)은 생물을 죽이지 않고, 사악한 간음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니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의 행위에 빠지기 쉬운 음주 등을 삼가는 오계를 지키라는 것이다.
생천론(生天論)은 그러한 선업(善業)의 결과로 사후에는 천계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론은 곧,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알아야 되고 개인적으로는 윤리규범을 준수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야만 태어나 비참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 삼론은 올바른 업보설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생활을 개선해
나아가면, 내세를 기다리지 않고도 현세의 생활이 평안하고 즐겁게 됨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로 인해 이미 세간적인 도덕이 지켜지게 되니, 사회의 일반인으로서는 일단 이것만으로도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되는 셈이다. 이는 분명히 매우 소박하고 초보적인 가르침이다.
바로 여기에 이 차제설법이 지닌 중요한 의의가 있다. 불교는 상식과 일반윤리를 기초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후대에 발전된 불교가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상이나 경지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상식과 일반윤리에 어긋나거나 별개일 수가 없다.
441. 착의례 (着衣例)
착의례란 법복(法服) 즉 가사를 착용하는 의례이다.
가사란 발우ㆍ좌구ㆍ녹수낭ㆍ삼의 등 비구가 지녀야 할 비구 육물 가운데 승가리와 율다라승, 안타회 등 세 종류의 옷을 의미한다.
승가리는 9조에서 25조까지의 대의를, 율다라승은 7조의 상의를 그리고 안타회는 5조의 내의를 말한다.
원래 가사는 분소의(糞掃衣)를 말한다.
<사분율>에 따르면 비구들이 부처님께 “저희들은 어떤 옷을 가지오리까.”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주인이 없는) 쓰레기 옷이나 혹은 죽은 사람의 옷 등을 모아 그것을 기운 옷(衲衣)을 입도록 했다.
비구들은 조(條)없는 만의를 얻으면 그것을 쪼개어 옷을 만들었다.
만의는 규정에 의해 ‘쪼개지지 않은 옷’ 즉 큰 천을 의미한다.
사미율의의 규정에 의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가사를 수(垂)할 때 게송 및 주(呪)를 송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먼저 가사가 걸려 진 횟대 앞에 이르러 반배한다. 가사를 내려 반으로 접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정대(頂戴)한 다음 정대게를
‘선재해탈복 무상복전의 아금정대수 세세상득피(善哉解脫腹 無上福田衣 我今頂戴受 世世常得被)’
‘옴 마하가바바다 싣제 사바하’(3번)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해탈의 옷이여, 세상에서 가장 높고 높은 복전이 옷이로다. 저희들이 이제 머리에 받들고 받아가지니, 세세생생토록 항상 입고 살기를 원합니다.> 라는 주(呪)를 외운다.
(오조가사를 수할 경우에는 ‘옴 신다야 사바하’)
가사를 몸 뒤로 넘겨 가사 고리와 구멍을 잡고 휘둘러 가사를 입는다.
(오조가사의 경우는 목에 걸고 띠를 맨다)
[정대게: 어진마음 청정한 손으로/ 모든 중생을 섭수하여/ 일체의 액난에서 구해/ 안온하게 하고저/
이 복전을 지으니/ 살아서는 재해가 없어지고/ 오곡이 풍성하며/ 죽어서는 / 왕생극락하여 지이다.]
442. 찰라 (刹那)
‘찰라’라는 말은 요즈음엔 매우 쾌락주의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는 찰라주의자다.’ 라든가,
‘그녀는 찰라에 산다.’ 하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찰라주의란 것은 과거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순간순간을 즐겁게 보내려 하는 생각이다.
이처럼 ‘사람은 어차피 죽는 것이다 지금 즐기지 않을 수 있느냐’ 라고 하고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여 섹스 따위의 쾌락에 빠져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생활태도를 찰라주의니 찰나적이니라고 해도, 니힐리스틱하고 절망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죽음 등의 결정론적, 숙명론적인 요소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라주의의 효용이라고 말할
만한 면도 있다. 과거의 일에 오래오래 구애받지 않고 또한 내일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다만 현재의 순간, 순간에 충실한 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은 확실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 순간이 쌓여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찰나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찰라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크샤나(KSANA)를 옮긴 말이다.
크샤나는 매우 짧은 시간의 단위이다.
<대비바사론>이나 <구사론>등 대표적인 논서에는 다음과 같은 시간의 단위가 이야기되어 있다.
120찰나는 1달찰나ㆍ60달찰나는 1납박ㆍ30납박은 1수유ㆍ
30수유는 1주야(晝夜)ㆍ 30주야는 1개월ㆍ12개월은 1년.
1주야가 24시간이니 1수유는 48분ㆍ1납박은 1분 36초(48/30)ㆍ1달찰나는 8/5초ㆍ
1찰나는 1/75초인 셈이다.
일설에 의하면 힘센 남자가 한번 손가락을 튕기는 동안인 1탄지(彈指)가 65찰나라고 한다.
그러니까 1탄지의 65분의 1을 1찰라 라고 말할 수도 있다.
☀ 찰나(刹那):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 눈 깜짝할 새
1찰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설도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ㆍ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 한다.
443. 참선 (參禪)
참선이란 말에서 ‘참(參)’이란 생각함을 뜻하고 ‘선(禪)’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시 사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참선은 “깊이 있는 사유” 라고 할 수 있다.
참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전해온다. 태국 스리랑카 등의 동남아시아에서는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이
전해오고 있으며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화두를 통해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보는 묵조선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다.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의 구애가 없는 조용한 공간이 좋다.
앉는 방법은 보통 가부좌나 결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양어깨를 펴고 두 손을 포개어 배꼽 바로 밑의
단전부위에 자연스럽게 가져다 놓는다.
무엇보다 참선에서는 호흡이 중요하다.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천천히 호흡하는
단전호흡법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바른 자세다.
☀ 참선, 좌선, 간화선
참선과 좌선, 그리고 간화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참선과 좌선, 간화선의 개념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참선은 ‘들어갈 참(參)’자와 ‘선(禪)’이 결합된 말로 ‘선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즉 선 수행을 한다는 의미이다.
좌선은 글자 그대로 앉아서 선에 들어간다. 즉 앉아서 선 수행을 한다는 뜻이다. 보통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곧추 세운 상태에서 눈을 반쯤 뜨고 선에 들어간다. 이렇게 앉아서 하는 좌선이 선의 일반적인
모습이기에 참선, 좌선, 선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
체험과 직관에 의해 진행되는 참선의 ‘선’은 범어 드야나(dhyana)를 한역한 ‘선나(禪那)’의 약어이다.
선을 통해 얻어지는 공능(功能)이 한량없기에 ‘공득총림(功德叢林)’이라 하기도 하고 사유하여
닦아가므로 ‘사유수(思惟樹)’라 하며 선을 닦아 마음이 적정하고 여실한 지혜가 드러나므로
‘정려(靜慮)’라고도 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사유수’라 한다고 해서 어떤 사태에 직면해 그것을 분석적으로 생각해 간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마음을 모아 집중해 들어가며 닦는 것을 말하며,
고요하게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한편 ‘선정(禪定)’이라고 할 때의 ‘정(定)’은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으로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때문에 참선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하고 한다.
정과 혜가 수행의 증득(證得)측면을 가리킨다면, 닦는 방법인 ‘지(止)’와 ‘관(觀)’을 강조해 ‘지관쌍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선하면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看話禪)을 이르는 말로 통용된다. 화두(話頭)참구가
참선의 핵심적 방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선의 대표적인 형태가 간화선이다.
간화선 외에도 묵조선, 염불선 등이 있지만 한국불교에서 선은 간화선을 의미한다.
한국불교는 일본이나 티베트, 또는 동남아 불교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선이다.
신라 헌덕왕 13년 도의선사가 남종선을 처음으로 전한 이래 우리나라에는 선이 정착해 면면히
계승 발전해 왔다.
선종 즉 조사선, 간화선의 전통을 가장 잘 지켜 온 곳이 한국이다.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정도로 선사상과 ‘실참(實參)실수(實修)’의 면에서 대단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 선 수행을 하면 무엇이 좋은 것인가. 아마 ‘나를 찾는다.’라는 점일 것이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 시시각각 변하는 내가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를 바로 이 자리에서 찾는 것이 선이다.
찾는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내 속에 갖춰져 있는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내 속에 있는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어떤 사태에 직면해도 당황하지 않으며, 불안과 공포가
없어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망상과 번뇌를 다스리며 현실에 즉(卽)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다보니 삶에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고 내면이 자유롭고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집중력이 생기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심신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삶과 강한 정신력을 심어준다. 이처럼 간화선 수행이 바로 ‘최고의 웰빙’인 셈이다.
444. 참회 (懺悔)
참회의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시는 다 뉘우쳐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러므로 참회(懺悔)란 잘못의 뉘우침만이 아니라 다시는 잘못의 뉘우침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만약 뉘우침에 그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기만일 뿐이다. <이참과 사참 참조>
445. 채근담 (菜根譚) 저작자: 홍자성(洪自誠) - 요약 -
1644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간소한 삶 속에 진정한 인생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 잠언집이다.
‘채근담’이라는 제목은 ‘감자나 무처럼 맛있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 책은 처세 잠언집으로서 359개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집(前集,상권) 225개, 후집(後集,하권) 134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후집은 특히 한거(閑居)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전집(前集)
ㆍ권세나 명리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을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 훌륭하다
ㆍ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인격자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악용하지 않는
사람은 더 훌륭한 인격자이다
ㆍ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거리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숫돌이 되어 인격을 수양하고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ㆍ말마다 귀에 즐겁고, 일마다 마음에 흡족하면 그것은 스스로 독주 속에 자기 자신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
ㆍ양념을 많이 한 요리에는 진정한 맛이 없다
ㆍ진짜 맛은 담백한 것이다
ㆍ두드러져 보이는 사람은 인격자라고 할 수 없다
ㆍ인격자는 결코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ㆍ배가 부르면 맛의 구별이 사라지고
ㆍ여자와 자고 난 남자는 여자에게 흥미를 잃는다
ㆍ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나중 일을 마음에 담아 두면 흔들림도 없고 망상도 일어나지 않아
실체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ㆍ남에게 도움을 준 일은 빨리 잊어라 ㆍ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ㆍ남에게 은혜를 입은 일은 결코 잊지 말라
ㆍ남에게 피해를 입은 일은 빨리 잊어라
ㆍ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ㆍ가난하면서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더 낫다
ㆍ재주를 자랑하는 사람은 실컷 고생하고도 남의 원한까지 산다
ㆍ어설퍼도 마음 편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낫다
ㆍ고생 속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ㆍ성취감을 누리는 순간 슬픔과 고뇌의 싹이 돋는다
ㆍ부귀나 명예도 여러 가지이다
ㆍ사람됨이나 인덕으로 그것을 얻은 사람은 자연히 피어나는 꽃처럼 내버려 두어도 잘 자란다
ㆍ노력으로 그것을 얻은 사람은 화분 속의 꽃처럼 잘 자라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한다
ㆍ권력으로 그것을 얻은 사람은 꽃병에 꽂아 둔 꽃과 같이 뿌리가 없기 때문에 금방 말라 죽는다
ㆍ나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모르기를 바라는 것은 그 마음속에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ㆍ좋은 일을 하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 마음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ㆍ가난한 집이라도 청소를 자주 하고, 못생긴 여자라도 단장을 잘하면, 화사함은 없을지라도 무엇인지
모를 기품이 생기는 법이다
ㆍ사나이는 아무리 곤궁에 처해 있어도 스스로 무너져 품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
ㆍ조용한 환경 속에서 조용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평정이라고 할 수 없다
ㆍ진정으로 조용한 평정은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조용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ㆍ즐거운 곳에서 즐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다
ㆍ진정한 즐거움이란 괴로움 속에 있으면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ㆍ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불안해한다
ㆍ모르는 남들끼리보다는 가까운 사람끼리 더욱 서로를 미워한다
ㆍ인간의 마음이란 이렇게 미묘한 것이라 무슨 일을 하든 냉철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ㆍ그렇지 않으면 늘 쓸데없는 일로 고뇌하게 될 것이다.
2) 후집(後集)
산림에 은거하는 즐거움을 말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진정한 맛을 안다고 할 수 없듯, 명리에 관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명리를 버렸다고는 할 수 없다
ㆍ자신이 세상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다툼을 경멸하지 말라
ㆍ스스로의 마음이 고요하고 담백하다고 해서 혼자 깨달은 사람인 양 티를 내지 말라
ㆍ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법에도 얽매이지 않고 공(空)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이다
ㆍ길이란 서로 앞을 다투면 좁아지지만, 한 걸음 물러나면 넓어진다
ㆍ짙은 맛에는 금방 질리고 말지만, 담백한 맛은 오래오래 즐길 수 있다
ㆍ속세를 떠난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관계를 끊거나 산림에 은거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일상 속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욕망과 인연을 모두 끊고 마음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ㆍ그것은 고뇌의 끝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ㆍ병이 들어서야 비로소 건강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ㆍ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ㆍ행복하기를 서두르면 오히려 화를 부르고, 삶에 집착하면 오히려 죽음을
자초한다
ㆍ이러한 진리를 빨리 깨닫는 것을 탁견이라 한다
ㆍ홍자성(洪自誠)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출생과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친구 홍자성이 서문을 요청했다’라는 글에서 서명한 사람이 명(明)나라의 유학자로 만력(萬曆) 8년(1580)에 진사가 되었던 우공겸(于孔兼)이라는 것이 밝혀져, 저자도 그 무렵 사람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청대에 이르러『속 채근담』『오가(吾家) 채근담』 등에 영향을 끼친 흔적이 보이지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나 사상가들에게는 거의 평가받지 못했고, 일반인이나 사업가,
정치가들이 주로 읽고 세상을 살아가는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것은 이 책이 생활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과 처세에 신경을 써야 할 사람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유교와 노장, 불교를 섞은 대중적인 처세서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제목의 ‘채근(菜根)’이라는 말은 송나라 때의 유학자 왕신민(汪信民)이
“사람은 채소 뿌리를 씹는 맛을 알아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생의 고락을 아는 사람이 다듬어 낸 글이다.
446. 천도의식 (薦道儀式)
천도의식은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의식으로 사찰에서 행하는 상용의식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천도의식은 시련ㆍ대령ㆍ관욕ㆍ신중작법ㆍ불공ㆍ시식ㆍ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사찰의 입구에서 죽은 이의 영가를 맞아들이는 시련(侍輦)으로 의식을 시작한다.
이후 먼 곳에서 온 영가에게 우선 간단한 다과를 대접하고 예불하게 하는 대령(對靈)을 행하고
다음으로는 영가가 생사업보의 때를 씻고 법문을 듣는 관욕(灌浴)을 한다.
이어 시식을 통해 법식(法食)을 받는다. 이때 일체의 아귀(餓鬼), 무주유주(無住有住) 고혼도 함께
청하여 법식을 받도록 한다.
끝으로 봉송편에서는 불전에 하직인사를 하고 유족의 인사를 받고 극락에 들어가도록 한다.
죽은 자를 천도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시키기 위해 재(齋)를 올리고 법식(法食)을 주면서
법문을 들려주고 경전을 읽어주며 염불을 해 주는 의식 또는 스님에게 재식(齋食)을 공양하는 것과
아귀에게 음식을 베풀어 먹이는 의식 등을 시식(施食)이라 한다.
전시식ㆍ관음시식ㆍ화엄시식ㆍ구병시식(奠施食, 觀音施食, 華嚴施食, 救病施食) 등이 있다.
전시식(奠施食)은 일체의 외로운 영혼을 지장보살의 위신에 의탁해 음식을 베푸는 것이다.
시식은 영혼에 올리는 불교식 제사의례로 시식전(施食前)에 불보살님에게 귀의하는 일반적인 의식을
하고 나서 하단(靈壇)에서 행한다.
447. 천마 (天魔)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에는 장애(障碍)가 많다.
불교 가운데서도 성불(成佛)의 법인 일승불교(一乘佛敎)를 공부하면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많다.
안으로는 자기의 전생 업이 기승을 부리고 밖으로는 세속적인 증상만인과 도문(道門)의 증상만인,
참된 스님(眞僧)을 빙자한 증상만인들이 비방을 하니 이를 세 가지 큰 장애라 하여 삼장(三障)이라
부른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네 가지 마(魔)가 장애(障碍)를 하나니,
이렇게 공부하다 몸이 쇠약해지면 어쩌나 하는 ‘오온마(五蘊魔)’,
죽으면 어쩌나 하는 ‘사마(死魔)’
세속적인 향락은 이제 다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색마(色魔)’
하늘나라의 영광도 이젠 다 소용이 없게 됐다고 하는 ‘천마(天魔)’가 그것이다.
448.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불교에서 나온 말
석가가 태어났을 때 외쳤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
석가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게(偈)를 외쳤다고 한다.
즉 이 우주만물 중에서는 내(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뜻인데,
이것은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하는 말이며, 석가의 탄생이 속세로부터
성스러운 세계로의 초탈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에 와서는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그런 아집(我執)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전등록(傳燈錄)》의 글귀를 소개하면,
“석가모니불초생 일수지천 일수지지 주행칠보 목고사방왈 천상천하유아독존
(釋迦牟尼佛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였으며,
《대장엄경(大莊嚴經)》 전법륜품(轉法輪品)에는
“천상천하 유아최승(天上天下 唯我最勝)”이라고 되어 있다.
449. 천수관음 (千手千眼觀世音菩薩)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은 여러 관음들 중에서 가장 힘 있는 구제자로 신봉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어떻게 하여 천수천안(千手千眼)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얻고
인연된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과거 무량억겁 전 천광왕정주여래(天光王靜住如來)는 중생들을 어여삐 여겨 대비심다라니를 설하신
다음, 황금빛 손으로 저의 정수리를 만지며 부촉했습니다.
“선남자야, 너는 이 대비심다라니로 악업과 중죄를 지은 미래 세상의 모든 중생을 크게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때 크게 환희심을 느낀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중생의 안락과 이익을 위해 살 것이다. 하지만 중생에게 안락과 이익을 주기에는 이 두 개의 손과 두 개의 눈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적구나, 나에게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이 있다면, 수많은 중생을 동시에 구하고 안락함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내가 오는 세상의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할 수 있다면, 지금 즉시 나의 몸에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이 갖추어지이다.”
그 순간, 1천 부처님께서 방광을 하여 저의 몸과 시방세계를 비추었고 저는 순식간에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천수천안(千手千眼)이 된 것입니다.
천수관음에 대한 의심 없는 굳건한 믿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거나 흔들림 없는 신심으로 기도하면
일체 재앙(災殃)과 업장이 소멸되고 심중소원이 성취되며, 기적과 같은 체험도 능히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이 신라시대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고 지금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오래된 천수관음상이나 천수관음탱화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탱화를 모실 때는 1천 개의 손과 1천 개의 눈을 모두 묘사하지만, 조각상으로 모실 때 아주 큰
불상을 만들 경우를 제외하고는 1천 개의 손을 모두 묘사하기가 매우 힘이 듦으로,
천수 대신 42수(手)만 표출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42수 중 합장한 두 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나머지 40수는 그 하나하나의 손이 25유(二十五有ㆍ본서25유,참조)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25=1000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25유는 지옥부터 천상까지 육도중생을 보다 자세히 분류하여 25계층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1천 개의 손을 약식화한 천수관음의 42수 중, 가운데의 합장한 두 손을 제외한 좌우 40개의 손에는
각각 한 가지의 독특한 물건을 쥐고 있습니다.
여의주ㆍ발우ㆍ석장ㆍ칼ㆍ도끼ㆍ금강저ㆍ활ㆍ화살ㆍ해ㆍ달ㆍ감로병ㆍ연꽃ㆍ부처님ㆍ등등…,
이 손에 쥔 하나하나의 지물(持物)들은 중생들의 갖가지 소원을 성취시켜주는데 사용되는 용구들입니다.
ㆍ여의주는 보배와 재물을 마음대로 얻도록 해주는 것이고,
ㆍ발우는 불안으로부터 안락(安樂)을 구하는 중생을 위한 것이며,
ㆍ도끼는 일체고(一切苦)를 끊는 도구입니다. 또한
ㆍ석장은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해주고, 검은 잡귀를 쫒아내고,
ㆍ활은 높은 벼슬을 얻게 하고, 화살은 착한 친구를 만나게 하고,
ㆍ방패는 맹수를 물리치고,
ㆍ해는 눈 어두운 이에게 광명을 얻게 하고,
ㆍ달은 모든 병을 낫게 하며,
ㆍ감로병은 청량함을,
ㆍ연꽃은 공덕성취와 극락왕생을,
ㆍ부처님은 성불하게 하는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듯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공덕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해줄 뿐 아니라
세간의 낙을 추구하는 이의 소원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450. 천수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
천수다라니는 범어(梵語)를 그대로 우리말로 음역한 것으로 과거 부처님이신 천광왕정주여래
(天光王靜住如來)께서 관세음보살을 위하여 설하신 천수경의 심장부로서
첫째,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여러 가지 의미로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서원을 성취케 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둘째, 다라니를 자꾸 외우면 불망염지(不忘念智)의 지혜를 얻게 된다.
또한 다라니는 예로부터 번역하지 않고 지송되고 있을 뿐이다. 다라니를 번역하지 않는 것은
오종불번<五種不飜:본문참조>중에서 비밀고(秘密故)의 경우로서 그 의미가 미묘하고 깊어서
생각할 수 없는 비밀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산스크리트어를 통해서 그 의미를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신묘장구 대다라니는 여러 가지의 별칭을 갖고도 있다.
① 괴로움을 없애주는 다라니
② 병을 고쳐주는 다라니,
③ 장애(업장)를 소멸시켜주는 다라니
④ 원(願)을 이루게 하는 다라니,
⑤ 마음의 자유를 주는 다라니,
⑥ 보살이 넘어야 할 단계를 넘게 하는 힘을 주는 다라니,
⑦ 천수주ㆍ대비주ㆍ관음주력ㆍ천수다라니ㆍ대다라니 등이 그것이며,
☀ 다라니 독송은 열 가지 이익과 네 가지 과보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그 열 가지 공덕은
① 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는다. ② 모든 병이 낫는다. ③ 오래 산다. ④ 부자가 된다.
⑤ 모든 악업과 중죄를 소멸 시킨다. ⑥ 장애와 어려움을 여의게 된다.
⑦ 모든 선행과 공덕을 더욱 많이 짓게 된다. ⑧ 모든 선근을 성취하게 된다.
⑨ 모든 두려움을 여의게 된다.
⑩ 모든 구하는 바를 속히 이루게 된다.
☀ 또 네 가지 과보는 ① 임종시에 많은 부처님을 볼 수 있다. ②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③ 모든 짐승의 침해로부터 벗어난다. ④ 뒷날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451. 천왕문 (天王門)
불교의 세계관(世界觀)에서 사람들이 사는 곳은 수미산의 기슭에 있는 네 대륙 중(大陸 中)
남쪽의 염부제이고 그 위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이 머무르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다.
사천왕은 바로 위 하늘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자인 제석천(帝釋天)을 도와
불법(佛法)을 수호한다.
<도리천은 욕계육천(欲界六天) 즉 사왕천ㆍ도리천ㆍ야마천ㆍ도솔천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
(四王天,仞利天,夜摩天,兜率天,化樂天,他化自在天) 중 제이천(第二天)인 도리천
(중앙의 제석천과 사방에 각 8천을 합하여 모두 33천이다)을 뜻한다.>
<금강명경>에서는 경전을 받아 지니고 공경하는 자나 그런 국왕과 국가를 보호하고 번영(繁榮)하게
한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원(寺院)의 초입(初入)에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고 사천왕을
초각하여 새기거나 그려 도량을 보호하도록 한다.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이처럼 독자(獨自)의 상(像)으로 봉안되기도 하지만 불법수호의
역할(役割) 때문에 영산탱과 같은 여러 조류의 불화(佛畵)에도 등장한다.
사천왕은 각자 한 방향식(方向式)을 맡고 있고 각자 일정한 지물(持物)을 손에 드는 것이 보통이다.
동방을 맡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제두뢰타천왕으로 음역되는데 건달바 와 비사사를 시종으로 하며
손에는 비파(琵琶)를 드는 경우가 많다.
남방을 맡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비르륵천왕으로 음역音譯되며 구반다 와 벽려다를 시종(侍從)으로
하고 손에는 칼을 든다.
서방을 맡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비루박차라고 音譯되며 용(龍)과 부단 나를 侍從으로 하고 손에는
용龍을 든다.
북방을 맡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사문천이라고도 하며 비사라바나라고 音譯되는데 야차와 나찰을
시종(侍從)으로 하고 손에 보탑(寶塔)을 드는 경우(境遇)가 많다.
사왕천(四天王)은 원래 천상계의 모든 귀신(鬼神)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을 괴롭게 했으나 종래는
부처님께 감화되어 불법(佛法)을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무력(武力)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부처님이 있는 곳이나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곳이나 부처님의 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군사력(軍事力)을 지닌 장군(將軍)이다.
사천왕은 인간의 선악을 관찰(觀察)하고 매월 8일에는 사천왕의 사자(使者)들이,
매월14일에는 태자(太子)가, 그리고 15일에는 천왕(天王) 자신이 도리천에 있는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 보고하여 착한 일을 한 이에게는 상(賞)을, 악(惡)한 일을 한 이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한다.
452. 천축 (天竺)
인도를 가리키는 말. B.C 2세기 경 아리안 족이 서북쪽인 중앙아시아로부터 남하하여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 지금의 인더스 평원에 들어서자 그 푸른 평원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를 발한 신두(Sindhu, 물ㆍ큰 바다의 뜻)라는 말이 이 강과 이 지방의
이름이 되고, 이것을 중국에서 신두(辛頭)ㆍ천두(天豆)등으로 음역하였다.
이것이 차차 달라져 천축이 된 것이다.
천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인도라는 이름도 이 신두 등에서 완전된 것이다.
453. 천혼문,
위패 작성법(薦魂文,位牌作成法)
1. 스님과 신도 모두 손아래 사람이 윗사람 재를 지낼 때에는 복위(伏爲) 라 하고,
손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재를 지낼 때에는 기부(記付)라 한다.
2. 재를 지내는 사람 앞에 ‘行’(행)자를 쓰는 뜻은 이 재를 아무개가 봉 행, 거행한다는 뜻이므로
재를 지내주는 사람, 즉 재를 주관하는 사람 의 이름 앞에 반드시 ‘行’(행)자를 써야 한다.
3. 천혼문은 부처님전에는 천혼재자라고 하고 영단시식에는 봉청재자라고 한다.
4. 신원적(新圓寂)은 원래 스님들에게 쓰는 말이지만 요즘은 승속 함께 쓴다.
다만 상가집에서 장례지낼 때만 쓰고 반혼재와 초재부터는 쓰지 않는다.
5. 본관(本貫),공(公),씨(氏)등의 경칭은 부처님전에는 부르지 않고 영단시식할 때만 부른다.
6. 망(亡),후인(後人),유인(孺人)등은 유교 것이므로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므로 먼저 간 사람이라는 의미로 ‘선’(先)자를 써야 한다.
7. 영가에게는 모생(某生)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8.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돌아가신 분의 부인, 남편 등을 천혼문에 함 께 기재하더라도 불전 축원시
읽는 순서는 첫째 직계인 자녀를 복위로 하여 선부, 선모영가라고 부르고 두 번째 손자 손녀 등을
복위로 하여 선조부, 선조모라 부른다. 돌아가신 분의 남편이나 부인을 먼저 불러 도 된다.
영단 창혼시에는 선조부, 선조모, 선엄부, 선자모라고 부른 다.
9. 위패 한 장에 부모 두 분을 같이 쓸 때에는 이름 밑에 양위영가(兩位 靈駕)라고 쓴다.
10.종조부는 할아버지의 형제로 큰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를 말한다.
11.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 재를 지낼 때 영단시식에는 남자는 본관 다음 에 공(公)자를
여자는 본관 다음에 씨(氏)자를 쓰고 불러도 된다.
예) 先祖父(先嚴父) 전주이공 모인 靈駕/ 先祖母(先慈母) 전주최씨 모인 靈駕
그러나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 재를 지낼 때는 위패에 ‘公’자나 ‘氏’자 을 쓰지 않는다.
천 혼 문(薦魂文) 원아 금차 지극지정성 생전효행 사후건성 (천도재, 49재, 기일재) ~재 지신 천혼재자 000 거주 행효자: 등복위 소천망 선엄부 후인 000 영가 이차인연공덕 앙몽 삼보대성존 가피지묘력 삼탈삼계지고뇌 초생구품지요방 획몽관정 반야낭지 활연개오 즉왕생극락지대원 <생축> 원아 금차 지극지정성 사후 ~재 지신 천혼재자 모처 거주 행효자: 등 보체 앙몽 삼보대성존(지장대성존) 가피지묘력… |
☀ 위패작성법은 본문 ‘위패작성법’항목 참조.
薦 魂 文 願我 今次 至極之精誠 生前孝行 死後虔誠 (薦道齋, 49齋, 忌日齋) ~齋 之辰 薦魂齋者 00處 居住 行孝子(行孝子婦, 行孝女, 行孝壻郞).. 伏爲 所薦亡 先嚴父 后人 000 靈駕 以此因緣功德 仰蒙 三寶大聖尊 加被之妙力 三脫三界之苦惱 超生九品之樂邦 獲蒙灌頂 般若朗智 豁然開悟 卽往生極樂之大願 <生祝> 願我 今次 至極之精誠 生前孝行 死後虔誠 (薦道齋, 49齋, 忌日齋)~齋 之신 薦魂齋者 某處 居住 行孝子(行孝子婦, 行孝女, 行孝壻郞).. 保體 仰蒙 三寶大聖尊(地藏大聖尊) 加被之妙力... |
454. 청규 (淸規)
일반사회에도 지켜야할 규칙이 있듯이 수행납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총림이나 선원에도 지켜야할
규칙이 있다. 이를 청규(淸規)라 한다.
수행 납자들의 불문율인 청규는 중국 선종의 독특한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청규(淸規)라는 명칭은 총림을 의미하는 청정대해중(淸淨大海衆)의 청(淸)과 수행자가 준수해야할
규칙 즉 규구준승(規矩準繩)의 규(規)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용어다.
백장선사는 “내가 주장하는 바는 대승과 소승의 계율 어느 쪽에도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가르침과 다른 것도 아니다. 이 청규의 목표는 불교수행의 규범을 널리 요약하고 절충하여
적절하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청규(淸規)에는 선종 독자의 수계의식, 선원의 설법의식, 선원운영을 위한 여러 가지 직책,
선원의 사무와 경제 출입 경전을 보는 행사, 선승의 장례, 선 수행에 도움이 되는 구경문,
좌선의 자경문, 신도에 관한 사항, 선승의 식사 등이 명기되어 있다.
‘양억’은 청규의 목표를
“ㆍ청정대중들을 더럽히지 않고 겸허한 신심을 내게 한다.
ㆍ수행자의 모습과 품격을 잃지 않게 하고 부처님이 제정하신 제도에 맞게 한다.
ㆍ관청을 소란하게 하지 않고 시비를 없애기 위함이다.
ㆍ여러 가지 과실을 방지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함이다” 고 말하고 있다.
455. 청문 (聽聞) ☀불교에서 나온 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들음을 뜻하는 단어다.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듣고 가슴으로 새긴다면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국회의 00청문회 등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456. 초의선사 (草衣禪師)
초의 선사는 법명이 의순(意恂)이며 속성은 장씨였다. 그는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개울가에 놀러 나갔다가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어떤 젊은이가 건져주어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나이 20세 되던 해에 우연히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그 수려하고 절륜한
자태에 정신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정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남해의 망망한 대해(大海), 그리고 파도 넘어 수평선 저쪽에서 떠오르는 뚜렷한 달,
세상에 태어난지 20년 만에 이렇듯 장엄한 광경은 실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때 그는 매우 희유한 체험을 얻고 가슴이 탁 트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이 있고 난 뒤로부터
온갖 사상(事象)에 아무것도 걸림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벽봉(碧峰)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였고 완호선사(玩虎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이때 당호가 초의였다. 그는 불학(佛學) 외에도 범어(梵語), 도교(道敎) 기타 유학(儒學)과
제가서(諸家書)에도 박학다식했다.
또 당대 교양인들의 필수적 조건이 되다시피 했던 서(書), 화(畵)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하여
대흥사(大興寺)의 가람 배치라던가 경내 도량 미화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 한다.
특히 다도(茶道)에 관해서는 근세에 드물게 보는 대가여서,
그가 저술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는 또한 당대의 양반, 문인 혹은 예술인들과의 교류도 매우 밀접했다. 추사 김정희, 지하 신유,
그리고 정다산(丁茶山) 등과의 교류는 매우 유명하다. 정다산과의 교류는 특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유학과 시문에 관한 교양은 거의가 그로부터 전수했을 정도로 관계가 깊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교양을 토대로 그가 뒤에 교리에 정통하고 아울러 선지(禪旨)에도
매우 밝은 경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가 금강산을 필두로 동서(東西) 산해(山海)의 승지들을 남김없이 답파하고
또 여기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그러다가 40세 이후에는 다시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으로 들어가 수풀 속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
홀로 참구를 계속하니 이것이 곧 일지암(一枝庵)이었다.
초의 선사는 1866년 세납 81세, 법랍 60세 때에 이곳 일지암에서 입적하셨다.
☀ 초의선사 《다신전》 중에서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가 적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차를 마시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소란스럽고 소란스러우면 차를 마시는 아취를 찾을 수 없다.
ㆍ홀로 앉아 마시면 신비롭고 두 사람이 함께 마시면 고상한 경지가 있고
ㆍ3~4인이 어울려 마시는 것은 그저 취미로 차를 마시는 것이고
ㆍ6~7인이 모여 차를 마시면 그냥 그저 평범할 뿐이고
ㆍ7~8인이 모여 앉아 마시는 것은 서로 찻잔을 주고받는 것일 뿐이다.
ㆍ초의선사의 시 한편
風散幽華香滿衣 바람에 날린 그윽한 꽃향기 옷깃 가득하고
白雲深鎖綠巖扉 암비 흰구름이 푸른 돌문 깊게 잠갔는데
多情最是王仙子 너무도 정분 두터운 왕선자가
載酒唫詩月下歸 술 싣고 시 읊으며 달빛 아래 오는구나
(풍산유화향만의 백운심쇄녹암비 다정최시왕선자 재주금시월하귀)
457. 출세 (出世)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 ‘uppada'에서 나온 말로 원어는 ‘출생, 출현’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시는 것, 중생의 세계에 출현(出現)하시어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는 보통 세상에 잘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킴으로 참으로 크게
의미(意味)가 변한 낱말이다. 보통 세상에 잘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낱말은 불교에서는 아주 다른 뜻으로 쓰인다.
첫째 불. 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출세(出世)하여 만 사람이 행복(幸福)을 얻는다는 뜻을 감추고 있다.
둘째 세상의 속연(俗緣)을 벗어나 불도수행(佛道修行)에 전념(專念)하는 것을 뜻한다.
출가(出家)와 같은 뜻이다.
셋째 선종(禪宗)에서 학행(學行)을 마친 뒤에 은퇴장양(隱退長養)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Buddha-utpada, loka-uttara를 의역(意譯)한 말이다.
458. 칠난 (七難)
누구나 일생을 말 그대로 평탄하게 살아 갈 수만은 없고 인재(人災), 천재(天災)등 갖가지의
고난을 체험하기 마련이다.
불경(佛經)에서는 인생에 있어서의 갖가지 고난을 칠난(七難)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 이론상 칠난에 관한 통일된 견해는 있을 수 없었는지 그 내용은 경전이나 논서(論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흔히 ‘관음경(觀音經)’이라고 불리는 ‘법화경(法華經)’ ‘보문품(普門品)’에는 관세음보살의 공덕에 의해
인간의 모든 고뇌 즉 칠난이 제거된다고 이야기되어 있다. 거기에서 무슨 이유로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느냐고 무진이 보살(無盡意 菩薩)이 부처님에게 물음으로써 설법(說法)이 시작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그 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관하여 그 사람을 고뇌에서 해탈하게 해준다고 한다.
즉 큰불(화마,火魔)에도 타지 않고, 큰물(수난,水難)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악풍(風難)에도 날아가지 않고, 해치는 자의 무기(도장난,刀杖難)도 부러지게 하고, 악귀(나찰난,羅刹難)에게도 시달리지 않고,
칼이나 쇠사슬(가쇄난,枷鎖難)에 메이지도 않고, 모든 원적난(怨賊難)에서도 면제되어
무외(無畏)의 은혜를 입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또한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념(念)하는 것, 예배공양을 하는 것의 한없는 공덕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세상의 모든 재난을 뜻하는 칠난의 가르침은 다른 여러 경전에도 이야기되어 있다.
‘인왕반야경’ ‘수지품’에서는
ㆍ일월실도난(日月失度難:태양과 달에 일식, 월식 등 이변이 생기는 것)
ㆍ성수실도난(星宿失度難:별의 운행에 이변이 생기는 것)
ㆍ화재난(災火難:큰 불에 의한 재난)ㆍ우수난(雨水難:홍수에 의한 재난)
ㆍ악풍난(惡風難:태풍에 의한 재난), 항양난(亢陽難:큰 가뭄에 의한 재난)
ㆍ악적난(惡賊難:악한 도적의 발호로 인한 재난)을 들고 있다.
‘약사여래본원경’에서는
ㆍ인중질역난(人衆疾疫難:전염병에 의한 재난)
ㆍ타국침핍난(他國侵逼難:타국의 침략과 핍박에 의한 재난)
ㆍ자계반역난(自界反逆難:내부 반역에 의한 재난)
ㆍ성수변괴난(星宿變怪難,별들의 이변에 의한 재난)
ㆍ일월박식난(日月薄蝕難:일식, 월식 등에 의한 재난)
ㆍ비시충우난(非時風雨難:때아닌 비바람에 의한 재난)
ㆍ과시불우난(過時不雨難:심한 가뭄에 의한 재난)을 들고 있다.
천태 지의(知顗)의 ‘관음의소(觀音義疏)’에는
화난(火難)ㆍ수난(水難)ㆍ나찰난(羅刹難)ㆍ왕난(王難:포악한 제왕에 의한 재난)ㆍ
귀난(鬼難:우상에 의한 재난)ㆍ가쇄난(枷鎖難)ㆍ원적난(怨賊難)이 열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칠난(七難)으로 열거되고 있는 것들은 경전에 따라 다른데 공상적인 나찰난(羅刹難)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다 현실적이고 인간이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한편 칠난은 팔고(八苦)인 생ㆍ노ㆍ병ㆍ사ㆍ애별이고ㆍ원증회고ㆍ구부득고ㆍ오음성고
(生苦, 老苦, 病苦, 死苦,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五陰盛苦)와 함께 ‘칠난팔고(七難八苦)’라는
숙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이러한 갖가지 고뇌나 재난에 당면했을 때 신앙(信仰:예컨대 관음신앙)의 소유여부가
그의 행동이나 대처 방식에 영향을 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459. 칠보 (七寶)
‘칠보’는 산스크리트어 사프타 라트나(saptaㅡrarta), 팔리어 사타 라타나(sattaㅡratana)를
번역한 말이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서방의 극락세계에는 일곱 가지의 보석으로 된 연못이 있다고 한다.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리자야, 행복이 있는 곳(극락) 그 세계에는 금ㆍ은ㆍ청옥ㆍ수정ㆍ붉은 진주ㆍ마노(瑪瑙)
그리고 제 7의 보석이라는 호박(琥珀)등 일곱 가지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연못이 있다.”
또한 그 연못 주위에는 똑 같은 일곱 가지의 보석으로 이루어진 나무들이 무성한데 찬란하게 빛나며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칠보의 내용은 경전이나 논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예컨대 『법화경(견보탑품)』의 칠보는 금, 은, 유리, 산호, 녹옥(綠玉), 붉은 진주, 파리(玻璃)등이다.
이 경전에서는 이런 칠보로 만들어진 불탑이 땅속에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일대 로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또한 ‘마하뷰트파티’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감추고 있던 일곱 가지의 보배로서
금륜보ㆍ백상보ㆍ감마보ㆍ신주보ㆍ옥녀보ㆍ주장신ㆍ주병신
(金輪寶,白象寶,紺馬寶,神珠寶,玉女寶,主藏神,主兵神) 등이 열거되어 있다.
끝으로 『금강경』의 칠보관을 보자.
이 경전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일곱 가지의 보석으로 가득 채우고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은 많은 공덕을 쌓는 것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금강경』 속에서 아무 4행시 하나라도
택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여주고 읽게 해준다면 오히려 이편이 훨씬 더 많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큰 공덕을 쌓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정토 경전에서 보여주는 칠보 이야기와 달리 흥미 있는 비교를 시사해 준다.
460. 칠불통계 (七佛通誡)
불교의 윤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즉 세속적인 차별(差別)의 구속에서 벗어나 지극히 자유로운 해탈(解脫)을 이룩함으로써 이기주의적인 불길이 완전히 꺼진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경지는 모든 번뇌를 여윈 깨끗한 마음 상태이므로 선악과 같은 차별이 아니고 자비(慈悲)에 입각한
꾸준한 수행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악은 짓지 않으며, 뭇 선을 받들어 실천하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이것은 초기 경전인 『법구경』의 제183게(偈)를 비롯하여 여러 경전에 보이는 경구로서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로 부르고 있다.
칠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의 여섯 부처님을 합하여 부르는 말로써,
이 일곱 부처님에 의하여 공통으로 강조된 말씀이란 뜻이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에 의해 청정한 마음을 가진 불자와 가르침으로 더러운 생각과 감정이 사라진 불자는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본서: 과거칠불 참조>
461. 칠성여래 (七星如來/七星幀畵)
칠성이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미한다. 칠성탱의 주불(主佛)인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인 북극성을 의미하며, 이 일곱 개의 별인 북두칠성이 도교에서 칠원성군으로
나타나고 또한 이 칠원성군이 불교에 습합되면서 칠성여래가 되어 지상에서 부처의 모습으로 화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칠성신앙은 중국 도교의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불교화(佛敎化)한 것으로 칠성신앙의 의궤나 탱화를
보면 7성(星)이 7여래(如來)로 신앙됨을 알 수 있다.
칠성탱화는 해와 달, 삼태육성(三台六星), 이십팔수(二十八宿) 등 하늘의 무수한 별자리들이 표현되고
있다. 칠성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으로서 이러한 칠성신앙은 특히 조선 후기에 오면서 당시 불교와 융합하여 대중적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사찰에서 칠성탱화를 조성하게 된 것은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나는 당시의 시대적인 필요성에 의한 현상이다.
도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고구려 영류왕 7년이지만 미미하다가 그 뒤 조선 인조대에 이르러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이 유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도교를 적극 숭상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칠성신앙도 민간에 널리 전파된 것이다.
도교에서는 칠성이 인간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을 관장한다고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는데
이를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일곱 개의 별이 하늘의 해와 달은 물론 모든 별들까지도 통솔하며 다스리는 것으로 믿어 왔다.
일반적으로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主尊)으로 도상화 했으며,
주존은 금륜불정나무치성광여래(金輪佛頂南無熾盛光如來)로서 왼손에 금륜(金輪)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 정도의 높이에 올려 엄지와 장지를 맞대 수인(手印)을 취하고 화면의 중앙이 자리하고 있다.
좌협시(左俠侍)는 일광보살(日光菩薩)로 해(日)를 지물(持物)로 들고 있으며
그 뒤에 밝은 두광을 표현한 4여래(如來)가 자리하고 있으며
우협시(右挾侍)인 월광보살(月光菩薩)이 달(月)을 들고 치성광여래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에 3여래가 모셔져 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은 치성광여래의 좌하(左下)쪽에 3성군(星君)이 우하(右下)쪽에 4성군(星君)이 모셔져 있으며 치성광여래의 뒤로는 좌우에 28수(宿)을 아주 작게 묘사하여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칠성신을 <불설북두칠성연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제1 탐랑성군(貪狼星君) - 동방최승세계 운의통증여래불로서 자손에게 만 가지 덕을 준다. (천추성)
제2 거문성군(巨門星君) - 동방묘보세계 광음자재여래불로서 장애, 재난 을 없애준다. (천성성)
제3 녹존성군(祿存星君) - 동방원만세계 금색성취여래불로서 업장을 소멸 해준다. (천기성)
제4 문곡성군(文曲星君) - 동방무애세계 최승길상여래로서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한다. (천권성)
제5 염정성군(廉貞星君) - 동방정토세계 광달지변여래불로서 백 가지 장 애를 없애준다. (옥형성)
제6 무곡성군(武曲星君) - 동방법의세계 법해유희여래불로서 복덕을 고르 게 갖추게 해준다. (개양성)
제7 파군성군(破軍星君) - 동방유리세계 약사유리여래불로서 수명을 길게 해준다. (요광성)
칠원성군이라는 명칭이나 개인의 명호, 홀을 든 모습, 왕관, 복식 등에서 중국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별들을 다스리는 자미대제(紫微大帝)와 머리가 뾰족한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묘사되어 있다.
삼태육성(三台六星)에서 3태는 상, 중, 하 태성이고 6성(星)은 의, 행, 자, 효, 애, 경(義,行,慈,愛,敬)이다.
별(星) 천구를 이십팔수로 나눈 것은 <주례>에 언급되고 있다.
별자리, 즉 성수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수(宿)라는 글자는 원래 태양과 달이 운행 중에 지나가는 ‘집’
혹은 ‘쉬는 곳’이란 뜻이다.
7개로 이루어진 이 별의 집은 천궁(天宮)의 네 분원(分圓)마다 배치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도(黃道)의 항성(恒星)을 28개의 성좌로 나누었는데
사방에 각기 7수(宿)씩 28수가 되었다.
칠성신앙이 깊어지면서 전쟁과 질병도 다스릴 뿐 아니라, 특히 생산신앙과 연관되면서부터는
자손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칠성 불공까지도 생겨나게 되었다.
즉 칠성신앙이 민간에서 확대되어 갈 때 불교에서 칠성신을 흡수하여 불교화한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민간에서 성행하던 토속신앙과 융화한 한국적 불교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칠성신앙이다.
이러한 이유로 칠성은 천재지변까지도 운영하는 것으로 되었고
재앙을 쫒을 수 있는 신으로서 신앙되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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