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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청계산 산행기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도 어느 틈에 열사흘을 넘기고 있다.
봄꽃에 묻혀 지내온 짧은 봄날은 단명(短命)이기에 더욱 아쉽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여름을 시기하려는 바람인가,봄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몸부림이런가,
섣부른 연두빛 나뭇잎들이 호된 바람결을 못이겨 숲길 바닥위로 시름없이
나뒹군다.효행공원 초록그늘아래의 호젖한 공원길을 벗어나니
맞은 쪽 지지대 고갯마루 옆으로 프랑스 군 참전기념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의와 승리를 추구하며,불가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바친 288명의 고귀한 이름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유엔깃발아래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청,백,홍의 세로 줄 프랑스 삼색기와 태극기 아래 이런 글귀의 추모사가 깊게
새겨져 있다.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프랑스 군의 생동감 넘치는 형태의
갈색동상이 거센 바람에 맞서며 총검을 겨누며 적을 살피고 있다.
프랑스 국가(國歌) 마르셰예즈가 금방이라도 은은하게 울려퍼질 듯한 분위기다.
기념비 앞에 놓여있던 헌화 바구니가 바람에 아무렇게나 뒤집혀있다.
바람이 작위(作爲)한 퍼포먼스가 의도된 시도였다면 우리의 의식세계를 한 번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한 국가의 안보를 타국에 의지하는 나라는 독립된 국가라 할 수 없다.
결국은 속국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국가의 존립에 관한 안보의식과
준비태세에 대한 실행과 점검은 아무리 지나쳐도 지나침이 없는 법,
안보를 돈으로 사면 인질이 되고,안보를 강대국에 의존하면 속국이 된다는
국제질서의 오랜 경험을 교훈삼아 안보에 빈틈이 없어야 하겠다.
추후로는 "방산비리"와 같은 뉴스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괴롭히지 말았으면,
바람이 작위한 퍼포먼스에 새겨진 의미가 그런 내밀함까지 담겨있음을
관계당국은 가슴에 새겨야 한다.
왕복 8차선의 광폭도로가 넘나드는 지지대(遲遲臺)고개, 삼남대로의 1번국도,
조선의 왕 정조의 효행으로 그 이름을 낳게 한 역사적인 유래가 담겨있는 고개다.
조선의 왕 정조(正祖)는 뒤주속에 갇혀 원사(怨死)한 부왕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양주군 배봉산에서 화성군 태안면으로 옮긴다.그리고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매년 성묘 길에 나서서 능을 살피고 돌아가는 길에 항상 이 고갯마루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 눈물을 짓곤하였다는데, 자연 발걸음은 늦어지게 마련이고
행차는 더뎌지는 법이다.그러한 정조의 눈물이 배여있는 이 고개 이름을
훗날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당시 고개를 넘나들던 길섶에는 소나무들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절개되고 깎여내려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스러운 고개로 바뀌었지만,
길손들의 노고를 풀어줄 주막들도 몇 군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 될 터,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굽어보고 있었을,지금은 늙어버린 노송나무들 몇 그루만이 당시의 솔고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옛주막의 모습은 간데없고 이제는 환골탈태된 화려한
수원소갈비집들로 번듯한 계층상승을 이루고 있음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수와 같은 세월의 흐름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이고 어떠한지.....
거대한 흐름에 피동적으로 휩쓸려 떼밀려 갈 수밖에 없는 미물(微物)에 불과하지만
생각조차 미립(微粒)일 수는 없지 않은가.
프랑스 참전기념비 앞에서 우측으로 발길을 살짝 돌리면 숲으로 향하는
산길이 나타난다.산길을 알리는 팻말이며 산행안내도가 친절하게
등산객을 반긴다.굴다리가 빼꼼이 산객을 손짓한다.
성년기에 달한 활엽수들과 바람의 희롱거림이 산새들의 지저귐을
일순간 삼켜버린 숲길,왁자한 희롱거림만이 귓전을 흔든다.
금빛햇살이 쏟아지는 초록의 그늘은 연두빛 네온등 불빛으로
기하학 무늬에 인상파 색채를 곁들이며 환상의 마술쇼를 펼친다.
"산마루"라고 하는 표시를 하고 있는 말뚝 팻말 뒤쪽 멧부리에 폐허로 변한
작은 건물이 을씨년 스럽다.바람에 쫓기듯 산길을 따르면 왼편으로는
벌겋게 녹이 슨 철조망도 산객 곁을 줄창 따른다.
오래 전 이미 울타리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있는 듯 끊어지고 쓰러지고
넘어져 있는 모습이 눈을 거스르게 한다.완만한 산굽이가 오르락거리며
시나브로 고도를 높여 나간다.언덕이나 다를 게 없는 밋밋한 봉우리에
여러 소나무들이 초록의 그늘을 드리운 곳,범봉이다.
멧부리 생김새로 따져본다면,"범"이란 표현은 사나운 맹수(猛獸)의 범(虎)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고,무릇 범(凡)을 뜻하는 표현일 듯.
겉보기에도 영락없는 평범한 멧부리이기 때문이다.
범봉을 내려서면 곧바로 수의사거리,의왕시와 수원시 파장동으로의
하산길이 난 안부다.사시사철 표변할 줄 모르는,
면종복배(面從腹背)를 지양하는 소나무 숲길이 산길을 인도한다.
끌밋한 소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곳,산불초소와 서넛의 운동기구들이
곁에서 함께 할 손님을 일구월심 기다리고 있다.
산불초소를 지키던 감시인 한 분이 몸이 찌부드듯 했던 모양인지
운동기구에서 허리운동에 여념이 없다.이내 광교헬기장 삼거리봉이다.
헬기장 주변으로 빙둘러있는 벤치에는 등산객들로 빈자리가 남아있지 않다.
생수로 목을 축인 뒤 곧바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울긋불긋한 봄 꽃들은 어느 사이 자취를 감추었고,
초록의 싱그러움이 숲속을 휘어잡고 있다.
솨아 솨아 여름을 재촉하는 바람인가,초록의 덧칠을 부추기는 호들갑인가,
귀를 닦아 줄 산새들의 지저귐도 후각을 매혹시킬 숲향까지도 통째로
집어 삼키고 있다.등산객들의 선호도 1위 산길인 소나무 숲길이
한 동안 이어지다가 내놓은 넓은 통신대 헬기장,
한 무리의 군인들이 한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더 이상 닦아 낼 티없이 맑은 창공 그리고
푸른 숲,바람은 초록의 숲만이 만만한 상대인양 그들을 한없이
흔들어대고 잡아채며 함께 어울리자 채근한다.백운산 멧부리를
차지하고 있는 통신탑들이 초록의 바다위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다.
긴 계단 오르막 산길,연분홍 진달래가 수를 놓았던 길은 초록의 그늘이
대신하고 있다.얼마 전 산불로 피해를 본 산골짜기의 수목들은
늦가을 산등성이처럼 허전하고 삭막하며 쓸쓸하기조차 하다.
아직도 화독내는 간간이 바람결에 실려온다.
백운산 정상에 닿은 시각은 정오를 훌쩍 넘긴 오후 1시 쯤이 된다.
11시 조금 넘어 지지대고개를 출발하였으니 2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다.
다음 행선지인 바라산으로 향하기 전에 속을 채워야 겠다.
막내 며누리가 싸준 김밥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바라산까지의 거리는 2.2km라고 안내팻말은 얘기한다.
백운산 정상 전망데크에서 바라 본 시가지와 수리산 모습이 해질 녁의
어스름한 이내가 낀 것처럼 잿빛 실루엣으로만 아련하다.
백운산 멧부리를 뒤로하면 산길은 초록의 터널이나 다름없이 이어진다.
완만한 내림 산길이 호젖하게 이어지며 귓전에서 멀어졌던 산새들의
지저귐이 이따금 귓전을 울리기 시작한다.
바람 결에서 조금 비켜 난 위치 덕이다.
곁들여서 초록의 그윽한 숲향도 후각을 자극한다.
아아 기분이 좋아진다.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으로는 마약을 맞으면
이런 기분과 환각증세에 빠진다고 했던가? 중력을 무시할 정도로
발걸음은 가벼워져 발품의 고단함도 상당하게 풀어주며,
흥에 겨워 지루함도 없이 자꾸만 더 걷고만 싶어진다.
마라톤 따위의 장거리 육상선수들에게 주행 중 흔히 나타난다는
"러너스 하이"와 다름이 없는 현상,
의사들이 흔히 말하는 기쁨 호르몬이라고도,마약 호르몬이라고도 하는
베타 엔돌핀이라도 솟구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은 감히 나설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지.호젖한 숲길에는 군데군데 아늑하고 호젖한 쉼터가
자리하고 있다.알맞은 높이에 부채꼴의 우아한 몸매의 노송이
그늘을 이루고 있는 쉼터,고분재는 0.6km,
바라산은 1.3km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슬며시 귀띔한다.
이윽고 고분재 사거리,좌측의 하산길은 백운호수 방면이고
오른쪽 산길은 고기동 방면이다.
바라산 정수리 부위가 힐끗 눈길을 끈다.
소나무 숲길,토양은 빗물에 빼앗겼는지 돌조각이나 바위조각들만
가득한 산길바닥을 연체동물의 구불거리는 다리 모양으로
고군분투 의지하나로 맨땅을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있다.
바라산 정상은 데크전망대로 꾸며놓았다.
데크 한 켠에 중년의 아낙 예닐곱 명이 둘러앉아 오찬을 하며
이야기꽃을 한창 피운다.해발 428m를 자랑하는 바라산!
이곳 바라산은 의왕 의일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던 산으로 발아산(鉢兒山) 또는 망산(望山)이라고 불리었으며,
망산의 뜻인 "바라본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말 충신이었던 조견은 청계산에서 바라산으로 옮겨와
왕을 그리며 개성을 바라 보면서 망국의 신하됨을 부끄러워하며,
침식을 잊은채 울고 또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하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다음 행선지인 하오고개를 가리키는 안내팻말의
붉은색 화살표 지시에 따라 음식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라산 멧부리를 뒤로한다.
초록의 숲 그늘은 이미 한 여름답게 깊어만 간다.
바람이 들까불러도 맞받아칠 결기가 돋아났으며 산새들의 호들갑스러운
지저귐에도 통큰 울림으로 화답할 품격을 갖추었다.
산길의 내리막이 점차 가파르게 다가온다.
가파른 내리막 산길에 "바라 365 희망계단"이라고
이름붙인 데크계단길이 나타난다.계단을 내려서기 직전의 길섶에
이 계단에 대한 안내문이 눈에 띠는데,내용을 보면,
바라산을 오르는 이곳은 365개의 계단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 365계단은 태양 황도상 위치에 따라 365일을 15일 간격으로
계절을 구분한 24절기를 소재로 하여,바라산에 오르고 내리는
모든 등산객이 365일 건강하고 희망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정하였으며,계단 우측과 좌측에는 24절기에
대한 의미와 내용이 게재되어있다고.
바라산 정상
365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내리면서 1년 365일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인사와
가파른 365계단을 따라 24절기 각각의 기후의 특성과
그에 대한 바른 생활방식 대처에 대한 정보 등이 24절기순으로
담겨있다.농경시시대에는 퍽이나 유용한 정보가 되었을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365데크 계단을 내려서면 산길은 완만한 숲길로 모습을 바꾼다.
오른쪽으로 철조망이 쳐 있는 산길을 따르면 계수기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힘 드셨죠? 힘 내세요!" 이 계수기는 출입인원을
파악하고 이용객의 편의시설 확충을 위해 소중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설치한 시설물이다.
계수기를 통과하면 곧바로 사거리 안부,좌측으로는 복골방면의
백운호수 그리고 우측으로는 석운동으로의 하산길이 나 있는 사거리다.
맞은 쪽 주능선길을 올려치다보면 송전철탑 곁을 지나게 되고,
백운호수로의 하산길이 기다리는 삼거리 갈림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하오고개로의 진로는 우측이 된다.
시나브로 고도를 높여나가는 산길은 붕긋한 봉우리 하나를
내놓는데 멧부리 모습은 펑퍼짐한 공터에 기다란 의자 서넛이
빙둘러 산객들을 기다린다.짙게 드리운 잿빛 그늘이 아늑한 곳,
안내말뚝에 검은 매직으로 "우담산 425m"라고
누군가 이름표를 대신 달았다.
무선기지탑 곁을 벗어나면 바람을 가르는 차량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린다.하오고개다.성남시와 의왕시 그리고 안양시를 잇는
57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청계산 국사봉이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바람 결이 상상을 초월한다.도로를 건너는 육교,
다리의 폭은 1.5m정도에 높이는 20~30m, 교행에는
비록 비좁은 편은 아니다.그러나 길이는 50여m로 겉보기와는 달리
길게 느껴지고, 고도감도 상당하게 느껴지는 육교다.
해가 지는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살이 금새라도 육교를 송두리채
날려버릴 기세로 몰아친다.배낭을 멘 산객의 비쩍마른 몸매가
잠시 휘청거린다.정신을 바짝차리고 눈에 심지를 돋워봐도
육교까지 흔들거리는 착시까지 느껴진다.
거센 바람을 피할 틈이 없이 맞받을 수밖에 없는 바람받이인 까닭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각고면려(刻苦勉勵) 끝에 하오고개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면 곧바로 비탈진 오르막 계단이 거듭 시험지를 꺼내든다.
극성맞은(?) 바람은 시험에 빠진 산객을 더욱 몰아대고 덩달아
수목들도 아우성을 치며 호들갑을 떨어대며 정신줄을 놓고있다.
바람의 신 에올스(Adls)라도 떳다는 겐가?
한 시름을 넘기고 숨을 고르자 공동묘지가 눈길을 끈다.
망자들의 영원한 안식처,그들이 영면한 곳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결국은 사라져 간다고 했던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빠르게 사라지고,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느리게 사라진다고.
천명에 의한 숙명이라면 훼스트 후드처럼 쏜살이보다는
슬로우 후드식의 느림살이가 어떠할지.
바람이 떼미는대로 묘지를 뒤로하면 쏜살이(?)를 위한
문명의 주춧돌 송전철탑이 앞길을 막아선다.
이곳에서 국사봉의 전모가 몸매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터마을 삼거리,국사봉은 원터마을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이동을 해야하며 그곳까지는 20분이 소요가 될 것이라고
안내팻말은 친절함을 발휘한다.비탈진 산길에는
부서진 돌조각과 크고작은 돌맹이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다.
오가는 산객들이 이러한 돌조각들을 한데 끌어모은
돌무더기가 두어 군데 보인다.
아름들이 노송들이 헌걸찬 몸매를 자랑하는 산길이 나타나는가 싶으면
듬직하고 믿음직한 바위들도 그들 곁에서 조화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윽고 국사봉(國思峰)정상,해발 540m.멧부리가 자리한 위치는
터가 비교적 옹색하다.여러사람이 머물기에는 비좁으나 사방 조망은
시원하기 그지없다.해가 뜨는 방면의 성남쪽이나,
해가 지는 의왕방면이나 툭터진 조망이 발길을 붙잡기에는 탁월한
기능을 보일 것이다.이곳 국사봉은 고려가 멸망하고 새롭게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고 있던 조윤(趙胤)이 멸망한 고려를
생각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이곳에서 우측의 내리막 산길은 한국정신문화원 쪽으로의 산길이며,
다음으로 오를 이수봉은 좌측의 내리막 산길을 따라야 한다.
끌밋한 노송들과 그럴싸하게 어울린 암봉들이 꾸며놓은 산길은
광기(狂氣)의 산객들뿐아니라 범(凡)산객들까지도
미혹에 빠뜨려놓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미혹의 순간도 잠시,
산길 우측변으로 녹슨 철조망이 궤를 같이 하기 시작한다.
군경계철조망이다.철조망 군데군데 경고문이 걸려있다.
"이 지역은 출입통제지역으로써 무단출입,접근,사진촬영 등을
절대금지 합니다.제 0000부대장"
어른거리지도 말며 얼씬대지도 마시라는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울타리너머는 녹음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록의 물결뿐이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산새들의 지저귐만이 바람결에
묻혔다 들려오다를 거듭하기만 한다.
청계사 삼거리 갈림길,이수봉은 우측능선길을 따라야한다.
거대한 화강암 빗돌이 우뚝하게 세워져있는 이수봉 멧부리,
해발 545m,이곳에서의 주위조망은 국사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멧부리 주변을 에워싼 크고작은 수목들이 주요 이유일테고
멧부리 자체의 생김새가 우뚝하지 못하고 밋밋함에 있지싶다.
이수봉은,조선 연산군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인
김종직과 벗인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여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숲 그늘아래에는 태극기도 펄럭인다.
평일이기 때문인가? 인적은 꽤 드문편이다.
결이 센 바람의 영향도 다분할 터.
결이 비켜난 곳은 상대적으로 아늑하고 한갓지기만 하다.
망경대와 청계산의 주봉인 매봉으로 향하려면
좌측의 산길을 따라야한다.금빛햇살이 산길위에 기기묘묘한
기하학무늬를 연출한다.바람은 억센 결기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부드러운 손길을 드러내기도하며
산객의 땀을 식혀준다.커다란 헬기장과 계수기를 빠져나오면
이내 청계사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 갈랫길,
이곳에서 직진을 하면 청계사 방면과 응봉을 거쳐
서울대공원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오늘 계획한 산행경로인 석기봉과 망경대능선 그리고
매봉으로의 진로는 우측방향이다.내리막 계단길이 발길을 부추긴다.
옛골삼거리 공터,공터치고는 꽤 널찍하다.우측방면으로는
옛골방향이고 망경대능선은 직진방향이다.
태양광패널을 머리에 인 어린사내를 본 뜬 인형이 이채롭다.
데크계단길을 따라 오르막 산길을 오르면 솔내가 진동하는
송림 산길이 기다린다.흠흠 역시 솔내는 숲향의 으뜸이자
지존의 위치라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송림사이를 오르면 대형 헬기장으로 연결이 되는데,
이곳이 대형 헬기장인 석기봉 정상노릇을 하는 멧부리가 된다.
그러나 석기봉헬기장은 산길과 가드레일로 구획을 지어놓았다.
이제 망경대 능선을 밟아 나가야한다.
헬기장 좌측으로 나있는 능선 숲길로 산길이 나 있다.
숲으로 들어서던 산길은 바위능선으로 이루어진 날등을
비켜서며 어렵사리 굴종적인 자세로 에돌기도하고 엉감생심
콧대높은 날등 접근을 경외하며 구불거린다.
잠시잠깐 날등으로 몸을 올려 붙칠 양이면 허공으로 몸을
날려버리겠다는 듯이 몰아치는 바람에 냉큼 몸을 잔뜩 웅크리게 된다.
귀로 들리는 소리라곤 쉭쉭 귓전을 울리는 바람소리 뿐,
그에 시달리는 온갖 수목들의 초록의 이파리들,
청계산 정상주변에 자리한 통신시설만이 독야청청(獨也靑靑)
흔들림없이 꽂꽂한 자세로 푸른창공을 찌르고 있다.
애면글면 다다른 사거리 갈림길,혈읍(血泣)재다.
이곳 혈읍재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오는데,그 사연은 이렇다.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유(巨儒)인 정여창(세종32~연산군10)선생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실현이 좌절되자,은거지인 금정수터를 가려고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울었는데 그 피울음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하여 후학인 정구(鄭逑)가 혈읍재라
명명하였다고.정여창 선생은
청계산 금정수(金井水;망경대아래 석기봉 옆)에서 은거하다
결국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과
함께 유배후 사사되었다.그후 갑자사화때 종성땅에서 부관참시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
어쨋든 청계산의 정상자리는 통신시설에게 빼앗겼으니,
대안으로 대접받고 있는 매봉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날등으로의 범접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는 거센바람,
그의 등쌀을 애써 외면하며 주마가편을 서두르는 산객의 등을
떼미는 바람의 세기가 점점 도를 더해간다.
바위너설들로 가득한 봉우리에 뿌리를 내리고도 꿎꿎하게
끌밋한 몸매의 건강미를 자랑하는 노송들,마치 연체동물들의
여러갈래 다리인양 구불구불 얼키설키 대지와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긴 인내와 끈기가 가상하기만 하다.
해발 583m의 매봉,과천시가지가 한 눈에 조망이 되는 일급전망대,
데크전망대에서의 조망에 눈이 부시다.눈물이 솟는다.
조망의 환희때문이 아니고 거센 바람의 짖궂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청계산의 유래가 적혀있는 글을 소개하면,
청계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고 한다.그전에는 청룡산이라 불렀다고.
청룡산의 유래는 과천 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볼 때
과천 관아의 왼편에 산이 있어 마치 풍수지리의 "좌청룡" 형국이라는데서
출발한다.그래서 수리산을 관악산의 오른편에 있다 하여
백호산이라고도 불렀다고.
매봉을 뒤로하면 곧바로 너럭바위들이 잇대어 한 멧부리를 이룬
암봉이 나오는데 "매바위"라고 쓰여있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동 서 북의 세 방향으로의 시가지가 파노라마의
시원스런 조망을 안겨준다.매바위를 내려서면 이내 돌문바위가
산객의 눈길을 끈다.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로 "ㅅ"받침 모양으로
어깨를 맞대고 삼각의 돌문(石門)을 만들어 놓았다.
옥녀봉으로 향하는 내리막 산길은 끊임없는 나무계단으로
비탈길을 대신한다.산꾼들로서는 무미건조함과 지루함이
부지불식간에 느껴지게 마련이다.
원할한 산행을 도와주는 목적외에 산길훼손이나 토양유출로
인한 사태예방목적임을 외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부자연스러움만은 떨쳐 버릴 수가 없으니.....
원지동 원터골로의 하산길이 나 있는 삼거리를 두엇지나면
산길은 짙게 드리운
소나무 그늘속에 묻히게 된다.소나무 숲길 사이로 나무계단이
비탈길을 안내하며,비교적 널찍한 공터에 여러 수목들이
울을 친 멧부리로 산객을 이끈다.해발 375m의 옥녀봉,
봉우리가 어여쁜 여성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음운(音韻)으로는 변강쇠의 상대역인 옹녀라,
어여쁜 여성의 이름인 옥녀(玉女)를 논다니나 다를 바 없는
유녀(遊女)로 인식하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그윽한 솔내와 함께 묻어나는 아카시아꽃 향이 코를 찌른다.
흠흠 바람 결이 비켜나있는 모양인지 바람도 숨을 죽인 듯
조용하고 한갓지기만 하다.
호젖한 숲길,샹큼한 솔내와 아카시아 꽃 향의 캭테일 향기가
날머리를 코앞에 둔 산객의 후각을 거침없이 휘젖는다.
온종일 짖궂게 몰아치던 바람도 이제 한결 기세가 수그러진 느낌이다.
그러나 그 느낌이 어림짐작에 불과했음을 자각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날머리를 뒤로하고 곧바로 양곡도매시장 앞 보도를 걷는 지친 산객을
뒤로 벌렁 자빠뜨리기라도 할 듯이 맞바람이
매섭게 몰아쳐왔기 때문이다(18시).
노래방에서 노래를 흥얼거려본지도 꽤 오래됐다.
모임이나 술자리가 끝나면 으례 가곤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음주가무(?)가 공연스레 부담스럽게만 느껴진다.
성격은 바뀌었을리가 없는데, 인격이란 게 살이를 거듭하다보니
어찌 그리 변한 모양이다.
세월 탓일까,나이 탓일까,사실 그게 그건데,딱히 집어 낸다면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느껴지는 외부환경에 대한 주관적인 경증의
자폐기운은 혹시 아닌지.....
어쨋든,노래방을 드나들곤 하던 호(好)시절(?), 나의 18번 노래들이
몇 곡 있었는데,그 중에서도 조용필이 불러 힛트를 쳤던
"바람이 전하는 말" 이라는 제목의 유행가도 기중의 한 곡이다.
갖은 인상을 기울여 외롭고 애달픈 표정을 지으며
꽤나 자주 불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이 노래는 아동문학가 고(故) 마해송의 아들인 시인이자 의사인
마종기의 시"바람의 말"을 ,작사가 양인자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작시에 그의 부군인 김희갑이 곡을 붙인 노래다.
산행내내 바람과 억지동행(?)하며 보낸 오늘 하루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열창하는
조용필의 구성진 노래소리를 흉내삼으며,
시인 마종기의 "바람의 말"의 싯귀와
시종여일(始終如一) 했음을 고백한다.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