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 충격현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1980년 6월 미국 버클리大 루이스 알바레스 팀이 6500만 년 前의 외계 충격을 입증함으로써 연구가 본격 진행되기 시작했다.
알바레스 팀은 덴마크 등지의 해안단구의 중생대 백악기末(말)과 신생대 층 사이에서 「이리듐」이라는 광물질을 발견했다. 이리듐은 지구核(핵)에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는 물질인데, 해안단구의 암벽에서 발견된 것은 뜻밖이었다. 이들은 몇 가지 가정을 검토한 끝에 이 물질이 온 곳은 외계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리듐을 많이 함유한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을 때 그 충격파가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 깔아 놓은 층이란 해석을 내린 것이다.
알바레스 팀은 이리듐 층의 두께를 바탕으로 지구에 충돌한 소행성의 크기를 지름 10km 정도로 추산했다. 이만한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을 때 생기는 분화구의 크기는 지름 150~180km로 추산됐다.
大홍수→혹한→공룡 멸종
중국 대하촌 출토 태양 그림 토기(사진 위)와 1670년 5월28일 리스본 상공의 重日 현상(독일 뉘른베르크 민족박물관 소장의 전단자료). 전자에 대해 출토 당시 중국학계는 외계 충격說을 모른 상태에서 1년 12개월 표시로 추정했다. 후자는 또 다른 외계 충격期(1490~1760)의 증빙자료의 하나이다. |
이처럼 초대형 돌덩이가 충돌했을 때, 지구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첫째, 충돌 직후 대량의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뜨거운 열기는 수증기가 되어 대기권을 가득 채워 온실현상이 생겼다. 그 수증기는 곧 비가 되어 대홍수가 일어났다.
둘째, 열기가 비로 씻긴 뒤에도 대기권을 덮은 먼지는 태양의 열과 빛을 차단하여 대기권에는 무서운 추위가 닥쳤다.
셋째, 수목과 풀은 추위로 모두 얼어 죽게 되고, 이에 따라 당시 지구의 주인이던 대형 초식동물 공룡들이 멸종했다.
후일 「공룡소멸說」로 더 유명해진 이 학설의 결론은, 소행성의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지구의 중생대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1년 2월 컬럼비아大의 마이클 람피노 교수 팀이 고생대 말에도 지름 6~12km 크기의 초대형 돌덩이가 지구와 충돌한 사실을 밝혀냈다. 고생대에 번식했던 삼엽충의 화석이 있는 지층 위에서 운석에만 있는 다량의 「플러린」이란 물질을 검출한 것이 단서였다.
이 연구 결과로 고생대에서 중생대, 중생대에서 신생대로의 지질시대의 변화가 모두 「외계 충격」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외계 충격으로「神」이 등장
중국 대하촌 토기편의 태양 이상현상(사진 위)과, 1583년 4월9일의 뉘른베르크 상공의 幻日(햇무리) 현상(독일 뉘른베르크 민족박물관 소장). |
1975년 런던에서 「학문 간 연구회(Society for Interdisciplinary Studies, 이하 SIS)」가 발족했다. 지구 근접물체에 대한 각 분야 연구자들, 즉 天體(천체)물리학·天文學(천문학)·樹木學(수목학)·地質學(지질학)·考古學(고고학)·古생물학·神話學(신화학) 등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학회였다.
이 학회는 1997년 7월 영국 케임브리지大에서 「靑銅器(청동기) 문화시대의 자연 대재난」이라는 주제로 제2회 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는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전 500년까지의 약 3000년간, 지질학적 용어로는 沖積世(충적세) 後期(후기)에 해당하는 기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외계 충격說」과 인류 역사의 관계를 학회 차원에서 다룬 최초의 시도였다.
이 대회에서는 북부아프리카의 草木(초목)지대가 기원전 2200년경에 사막으로 바뀐 것이나, 中東지역의 많은 古代 도시국가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 모두 외계 충격현상의 결과라는 주장들이 발표됐다.
「神(신)」의 등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종교학에서는 이미 19세기 말에 기원전 3000 ~2000년경에 지구 곳곳에서 「至高의 神」이 동시적으로 등장한 사실을 밝혀 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알지 못했다.
학자들은 그동안 先進(선진)지역의 사례에 근거해 神은 청동기 문화와 함께 등장한 관념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에서 고고학적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면서 신석기 후기에 이미 神에 대한 신앙이 발생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 대회에서는 「외계 충격時에 발생한 각종 현상이 神이 등장하게 된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공중에서 폭발할 때 생기는 엄청난 굉음과 섬광, 그 후 하늘에 펼쳐지는 有色(유색)의 각종 형상, 기온강하로 대기권에 생긴 수많은 얼음방울들이 연출하는 겹겹의 햇무리와 달무리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 방향에 우리를 모두 죽이려는 어떤 무서운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한 神은 「魔(마)」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인류역사의 새로운 시대
외계 충격현상이 끝나는 기원전 500년경부터는 철학이 발생했다. 외계 충격현상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하늘(절대자)」을 향했던 인류의 시선은 이때부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아지면서 농사에 대한 전망이 밝아지자, 농기구를 철제로 개량하려는 의지가 생겨 철기문화가 출현했다. 인류 역사는 충적세 후기의 외계 충격이 끝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집트 테라코타 항아리와(사진 왼쪽) 이라크 나카다 토기(기원전 3500, 3000년경). |
신석기 시대 雷紋土器는 외계 충격 산물
함경북도 출토로 전하는 번개무늬 토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외계 충격說이 적용되는 기원전 3500년경 한반도에는 신석기人들이 살았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늦어도 기원전 6000년경에 시작했다. 청동기 문화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는데, 기원전 3000년說도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경 전후가 유력하다. 외계 충격이 시작된 기원전 3500년경부터 그것이 끝나는 기원전 500년경까지 한반도에는 신석기와 청동기의 두 단계 문화가 존재했다.
한국 신석기 문화는 土器 형태에 따라 前期·中期·後期로 나뉜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原始 민무늬(無紋·무문)·덧무늬(隆起紋·융기문)의 토기가 사용된 시기, 기원전 4000년경부터 빗살무늬(櫛紋·즐문) 토기를 사용한 시기, 기원전 2000년경부터 칠무늬(彩紋·채문)·回字(회자)무늬, 번개무늬(雷紋·뇌문) 등의 토기를 사용한 시기 등으로 구분한다. 시간적으로 中期·後期가 외계 충격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외계 충격이 있었다면 中·後期의 토기에 그 자취가 남아 있어야 한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3000년경의 大河村(대하촌) 신석기 유적에서 수습된 채색토기에서 외계 충격의 자취가 확인된다. 표면에 여러 개의 태양이 그려져 있거나 태양이 붉은빛이 된 상태에서 양측에 둥근 테가 생긴 광경이 그려진 토기片(편)들이 수습된 것이다.
외계 충격현상이 계속될 때 대기권은 추위로 수많은 얼음방울이 생긴 상태에서 빚의 굴절로 유사 태양이 나타나고, 우주 먼지에 가려진 태양은 붉은색을 띠게 된다. 「외계 충격期」에 생산된 이집트와 이라크의 토기에 그려진 그림은 훨씬 더 사실적이다. 엄청난 천둥번개의 위력에 사슴 등의 동물들이 전율하면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함경북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신석기 후기의 번개무늬 토기도 지나쳐 볼 수 없다. 한반도의 신석기人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충적세 후기의 외계 충격 속에서 엄청난 천둥번개 현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토기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토기들은 이집트·이라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려운 神(번개神)에 대한 제사 용구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유사한 토기는 러시아 연해주·만주 등지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충적세 후기에 등장한 세계 곳곳의 창조신은 대개가 천둥번개神이다. 우리 단군신화의 桓因(환인)도 이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桓因은 인도의 리그 베다經(경)에 나오는 천둥번개神 인드라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긴목 동물. |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의 것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긴목 동물 토기편 |
경상남도 울산시 대곡리(반구대)와 천전리의 岩刻畵(암각화)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先史시대 유적이다.
대곡리의 「고래」 그림은 높은 회화성으로 오래 전부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이 암각화들은 성스러운 제단으로 풍요와 재생을 빌던 주술적·종교적 성격을 갖는 것이란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 암각화들은 「신석기 시대의 것」이라는 주장과, 「청동기 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종래에는 청동기 시대說이 유력했지만, 수년 전 부산 동삼동 貝塚(패총)에서 천전리 암각화에서와 똑같은 모양의 목이 긴 짐승이 그려진 토기片이 수습되면서 신석기 시대說이 훨씬 유력해졌다. 동삼동 패총은 최소한 기원전 3000년 이상으로 시대가 올라가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대곡리·천전리의 암각화들은 平面(평면)그림과 線(선)그림으로 분류된다. 평면그림은 그린 대상물의 형체의 면을 돌로 두드린 것이고, 선그림은 선으로 그린 것이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더 가는 선 그림이 있지만 이것은 삼국시대의 것이 확실하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두 암각화의 그림 내용을 두 가지 기법으로 나누어 표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가)평면그림과 (나)선그림 사이의 先後 관계는 천전리의 경우, 평면그림의 일부를 지우고 그 위에 선그림인 기하무늬들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볼 때, 평면그림이 앞서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시기는 동삼동 패총 토기片에 근거해서 볼 때 기원전 3000년 이전, 곧 신석기 中期의 것이 된다. 이 암각화를 신석기 시대 것으로 보는 정동찬씨는, (가)는 신석기 前期~中期, (나)는 後期로 추정했다.
외계 충격으로 인한 생태계 변화 반영
두 암각화의 평면그림 대상에 공통점이 있다. 물짐승·뭍짐승의 종류가 같거나 비슷하다. 물짐승은 고래·물개·거북이 등, 뭍짐승은 태반이 사슴이면서 소수의 멧돼지가 보인다. 거의 같은 환경이라고 해도 좋다.
정동찬씨는 물짐승과 뭍짐승의 그림을 여름·겨울의 사냥 광경으로 해석했으나, 물과 뭍의 생태계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평면그림은 물짐승과 뭍짐승 수가 모두 많다. 사람의 수도 많다. 신석기人들의 어로·수렵생활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울산 앞바다가 신석기 시대에도 고래사냥 터였던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나)선그림은 평면그림을 피하거나 지우고 그 위에 덧그린 것으로, 고래를 비롯한 물짐승의 수가 크게 줄었다. 반면에 뭍짐승은 호랑이·표범·멧돼지 등 맹수가 많이 보여 (가)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이다. (가)에서 다수이던 사슴은 맹수들 때문에 살기 어렵게 된 수가 급격히 줄었다. 사람의 얼굴만 그려진 것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은 맹수에 희생된 사람의 데드 마스크 같다.
(가), (나) 사이의 이런 차이는 생태계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만약 (나)의 시기가 신석기 中期 또는 後期라면, 환경의 변화는 외계 충격에 따른 것이 될 수 있다.
천전리의 (나)선그림은 맹수 대신에 기하무늬 그림으로 채워졌다. 이 그림은 이전의 (가)평면그림을 지우고 그린 것이다. (가)의 고래·사슴 그림은 성공적인 어로와 수렵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사냥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울산 대곡리 암각화의 (가)평면그림(정동찬 제작). |
울산 대곡리 암각화의 (나)선그림(정동찬 제작). |
그렇다면 천전리 그림에서 (가)의 대부분을 지우고 (나)를 그린 것은 이 기원의식보다 더 중대한 어떤 조건이 발생한 것을 의미한다.
(나)의 기하무늬나 부호 같은 표시들은 지금까지 상징성 표현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즉 동심원은 태양 또는 비, 마름모꼴은 풍요와 생명력, 구부러지고 파동치는 형상은 풍요의 지모신 또는 자연의 힘과 에너지, 물결무늬는 물길, 또는 집단거주지 표시 등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앞 시대에 神聖性(신성성)을 띤 그림을 지우기까지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대곡리의 (나)가 신석기 後期라면, 천전리의 (나)도 (가)의 일부를 지우고 그린 것이므로 신석기 後期 이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대곡리 암각화의 뭍짐승의 (가)에서 (나)로의 변화가 생태계 변화를 담은 것이라면, 천전리 암각화의 (나)의 기하무늬 그림도 그 환경변화와 상관성이 있는 그림일 수 있다.
(나)의 맹수 중 호랑이는 동물학에서 추운지방 동물로 분류된다. 즉, 북극해·북중국 등지에서만 화석이 발견되어 북방에서 기원하여 언젠가 기온 강하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널리 분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곰이나 멧돼지도 추위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대곡리의 (나)는 호랑이의 南下(남하)와 관련되든지, 아니면 언젠가 이미 南下한 이후 기후가 추워진 조건 속에 맹수들이 사람 사는 곳에 접근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생태계의 변화는 신석기 후기 곧 충적세 후기의 외계 충격으로 기온이 내려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전리 (나)의 무늬그림도 외계 충격 현상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가)평면그림(박명수 제작). |
울산 천전리 암각화의 (나)선그림(박명수 제작). |
천전리 암각화는 유성 폭발 표현
미국 뉴멕시코 파사몬트 상공 유성출현時 사진 - 미국 파사몬트 상공에 꼬리가 달린 복숭아 크기의 유성이 출현 |
무늬그림들은 ▲둥근무늬 ▲마름모꼴 무늬 ▲물결무늬 ▲뱀그림 ▲나선무늬 등으로 나뉘어진다.
신석기 시대 「뱀」은 삶의 상징이라든가, 조상의 상징이란 견해가 있지만, 천전리 암각화의 경우, 이런 것을 표시하기 위해 앞 시기의 신성한 그림들을 지울 수는 없다. 뱀 모양은 외계 충격時에 흔히 발생하는 「우주 뱀」 형상 바로 그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음은 1931년 3월24일 새벽 5시 미국 뉴멕시코 파사몬트 상공에 펼쳐진 유성출현時에 발생한 광경을 촬영 및 그린 것이다. (1)꼬리가 달린 복숭아 크기의 유성이 출현하고, (2)그것이 폭발하여 흰색·검은색의 가루가 가로로 펼쳐진 뒤 그 가루가 하강하면서 일으킨 광경이다. (1), (2)는 유성 전문가가 촬영한 것이고, (3)은 아마추어 화가가 같은 시간대에 레스토랑에 앉아서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미국 뉴멕시코 파사몬트 상공 유성출현時 사진 - 유성이 폭발하여 흰색, 검은색의 가루가 가로로 펼쳐진 뒤 그 가루가 하강하면서 일으킨 광경 |
주목되는 것은 (3)의 첫 장면이다. 이것은 (2)의 공중 폭발 후에 운석의 터진 가루가 옆으로 펴졌다가 무게로 하강하는 첫 장면인데, 천전리 기하무늬 중의 뱀 모양과 아주 유사하다. 외계 충격說에서 「우주 뱀」이라 일컫는 이런 형상은 上古시대 암각화에 많이 남아 있다. 이 형상이 後代(후대)에 神話로 발전하면 중국 창조신화의 주인공 伏羲(복희) 女(여와)의 像과 같은 것이 된다.
동심원 등의 둥근 모양은 상공에 출현한 유성과 그것이 사라진 지점 또는 폭발한 지점을 그린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암각화는 全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영국 서북지역의 암각화는 유성이 날아가면서 생기는 꼬리 같은 것까지 그려져 있다. 원을 겹겹으로 표시한 것은 그 지점에서 유성이 폭발한 것을 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아일랜드 보인 계곡 뉴그랜지의 암각화는 동심원과 마름모꼴을 한꺼번에 그렸는데, 이것은 유성 폭발과 동시에 발생한 굉음(또는 번개빛)을 함께 표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천전리 (나)의 마름모 무늬는 이에 견주어지며 이런 것이 번개무늬 토기의 문양으로 정형화되었을 가능성이 짚어진다.
천전리의 기하무늬 그림은 기원전 3500년경부터 한반도 상공에도 장기간 대규모적인 외계 충격현상이 계속되었던 것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천전리 사람들은 그 광경이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기 때문에 고래·사슴 사냥 광경을 그린 이전의 그림을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이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미국 뉴멕시코 파사몬트 상공 유성출현時 그림 - 아마추어 화가가 같은 시간대에 레스토랑에 앉아서 보고 그린 그림. |
역사 시대의 외계 충격
천전리의 우주 뱀. |
외계 충격현상은 우주현상으로 충적세 후기 이후에도 일어났다. 우리 한국의 역사서(「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를 통해 현재 (1)680~880년 (2)1100~1200년 (3)1350~1410년 (4)1490~1760년 등의 기간이 또 다른 외계 충격기로 확인되고 있다.
1995년,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필자는 「조선왕조실록」의 천재지변 관련 기사 2만2500여 건을 뽑아 (4)의 기간에 유성 낙하가 원인이 된 장기 大재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국제학회에 보고했다(http://abob. libs.uga.edu/ bobk/korea).
그리고 같은 현상이 독일에서 생산된 자료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실록을 통해 파악된 유성 추락에 따른 연관현상을 「삼국사기」·「고려사」에 적용해 (1)~(3)의 시기도 파악해 내고 있다.
중국 창조신화의 주인공 복희와 여와. |
(1)의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이지만 그치지 않는 재난으로 신라의 王政은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佛國寺(불국사)와 석불사는 통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솔천의 帝釋(제석)에게 「그치지 않는 재난을 종식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담아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2)의 시기에는 李資謙(이자겸)의 亂(난), 妙淸(묘청)의 亂, 武臣의 亂 등 政變(정변)이 잇따르고 遷都說(천도설)이 계속 제기됐다.
(3)의 시기에는 外侵(외침)이 거듭하는 속에 易姓(역성)혁명이 일어나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4)의 시기에는 性理學(성리학)의 명분론이 지배하는 가운데 政爭(정쟁)이 심해졌고, 倭亂(왜란)과 胡亂(호란) 등 외침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양에서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魔女(마녀)사냥의 狂亂(광란)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明 世宗이 하늘에 재난 종식을 기원하기 위해 天壇(천단)을 신축했다.
외계 충격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심의 발동을 일으켜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하게 하였다.
영국 글래스고 인근의 코츠노 돌(1986). |
아일랜드 뉴그랜지의 무덤 입구의 길 장식돌(1989). |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울산 암각화는 그 역사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것의 하나다. 영국·아일랜드 등지의 암각화들은 충격 사실만을 전할 뿐이다. 하지만 울산 암각화는 외계 충격 후의 상황은 물론, 그 앞 시기의 역사를 함께 담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세계 유일의 자료이다. 이런 점에서 울산 암각화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암각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1591년 1월5일 독일 뉘른베르크 상공에 유성이 폭발하는 장면(독일 뉘른베르크 민족박물관 소장). |
한반도의 충적세 후기의 외계 충격 관련 유물로는 북방식의 고인돌이 있다. 외계 충격說에서 巨石(거석)문화는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세운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연대상으로 한국의 북방식 고인돌은 여기에 해당된다.
외계 충격을 보여 주는 유물·유적들 가운데 고인돌, 불국사와 석불사, 중국의 天壇 등은 모두 유네스코 인류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아직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한 것은 울산의 암각화 유적뿐이다. 울산 암각화가 갖는 의미를 생각할 때, 울산 암각화가 하루 속히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아주 아주 좋은, 그라고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자료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나 선그림, 무늬그림의 비교 설명은 본인의 얕기 그지 없는 지식을 확 일깨워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접하기 어려운 정보 감사합니다. 공부 많이하고 갑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헌신하시는 지기님! 건강하시고 늘 해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