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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부여 왕조와 기자
심하구나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무식함이여.
우리나라 문헌이 결딴난 것이 비록 심하기는 하지만 단군의 적통으로 이어지는 종족은 부여왕조가 명백하다.
설혹 당시 우리나라에 열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심 종족은 부여이며,
백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중심 종족은 부여이며,
천 나라 억 나라가 있더라도 역시 중심 종족은 부여다.
부여는 당당하게 단군의 정통을 물려받는 것이거늘,
부여에 대해서는 한 자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고 기자만 칭찬하니, 아아 그 무식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곧 소위 민족주의는 논하지 않고 저들 옛 선비들의 춘추, 자치동감강목의 의리를 가지고 말한다 할지라도
부여 왕조는 동쪽으로 난을 피하여 옮긴 주(周) 나라나, 남쪽으로 도강한 진(晉) 나라가 되겠거늘,
옛 왕의 왕족이 되는 희(姬)씨, 사마씨의 자손을 버리고 위(魏)씨, 한(韓)씨, 척발(拓跋)씨,
모용(慕容)씨에게 정통을 부여함이 옳겠는가?
저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기자는 성인이므로 칠웅(七雄)과 오호(五胡)에 비교할 수 없다”
고 주장하나, 나는 또한 한 마디로 반대로 묻겠다.
“걸(桀)이 죽지 않으면 성탕(成湯)이 비록 성인이라 하나 하(夏) 나라의 정통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며
주(紂)가 망하지 않았으면 무왕(武王)이 비록 어질다고 하나 은(殷)나라의 정통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니,
걸(桀) 주(紂)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덕을 잃은 적이 없는 부여 왕조의 정통을 어찌 기자로
갑자기 대신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나의 학설이 또한 장황하다.
왕통이 정통이다 비정통이다 하여 다투는 일은 오활한 선비들의 미련한 꿈이며 조정이 진짜다 가짜다 하고 밝히는 것도 종놈들의 헛소리일 따름이다.
오늘날에는 학문이 크게 명백하여 국가라는 것은 일 개인의 사유물도 아니요
모든 인민의 공공재산임을 밝혀낸 까닭에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신라기 고려기와 같은 좁은 시각을 버리고 국가 발달의 정도를 살펴
상 중 근의 세 시기로 구별하며,
용삭원년 개요원년과 같은 복잡한 칭호를 없애고
국민의 사상을 지배했던 교주나 나라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이러한 어리석고 비루한 다툼이 없거늘
이제 내가 갑자기 붓을 잡고서 누가 정통이며 누가 정통이 아니다라고 하여
춘추의 의리(義理)다 강목의 의리다 하여 분변하고 논쟁하니 나 또한 호사가가 되겠구나.
그러나 주권상 주인 종족과 객인 종족의 한계는 역사가가 부득불 엄격하게 구별을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고문과 금문의 대의(大義)를 아울러 들어서 제일 먼저 환히 밝히기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잠시 멈춰두고 부여왕조의 성쇠와 기자가 동쪽으로 온 상황을 또한 얘기하겠다.
단군이 졸본부여에 도읍을 세우고 동쪽으로 옮긴 사실이 없었다는 것은
제1장에서 이미 논했거니와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단군의 아들 해부루가 기자를 피하여 부여에 나라를 세웠다”
고 하매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것을 맹신하여 말하기를
“단군이 과연 평양에 도읍을 세웠다”
고 하며
“ 그 후손이 과연 북쪽으로 옮겼다”
하니 이 설을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심의 구름을 쓸어 없앨 날이 없다.
대개 기자는 백마를 타고 망한 은나라의 나그네로 동쪽으로 올 때 가슴에 품은 바는
강태공이 매를 하늘에 날려보내는 것과 같은 병법이 아니라
하나라 임금 우(禹)가 전했던 홍범구주(洪範九疇)이다.
그에게 따르던 무리는 왕조의 군사가 아니라 점을 치는 무당들이다.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곧음 마음으로 주나라 하늘의 해와 달을 함께 받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간단한 행장으로 동방 군자의 나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 때 기자의 심정을 헤아려볼 때,
부귀도 원하는 바 아니요 가난하고 천함도 사양하지 않고 단지 주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처음의 뜻만 변하지 않고자 했을 뿐이다.
만약에 한 뙈기의 터를 주어 조선인의 농부가 되어라 해도 대단히 고마워할 것이며,
동굴에 집을 넣어 해동의 은사(隱士)가 되어라 해도 대단히 고마워할 것이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던 옛날의 자태로 돌려 문전걸식을 하라고 해도
대단히 고마워 할 것이니,
나라를 잃고 도망하는 신하로서 한번 죽음이 오히려 더디어 맥수(麥秀)의 슬픈 노래에
눈물이 그칠 날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한 나라의 임금이 될 꿈이 있었겠는가?
그러한 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능력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 이에 기자의 자손들이 천년 동안 평양을 근거지로 하여
후(侯)라 칭하고 왕(王)이라 칭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천년 후의 역사가들이 그 설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므로 억지로 한 구절을 꾸며
“단군의 후예들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옮겨가 살매 나라 사람들이 기자를 받들어 왕을 삼았다”
고 하니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단군이 과연 이 땅을 근거로 하여 그 자손이 천여 년을 서로 전해내려 왔을진대
비록 미약해지고 또 미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일개 도망 온 신하의 행차에 겁을 집어먹고 먼 곳으로 도망쳤을 리 없을 것이며,
또 혹시 임금의 덕이 어질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쫓아내었다고 할진대,
그가 신하와 인민이 이반(離叛)한 후에 홀로 북방으로 가서 나라를 세울 능력은 없었을 것이며,
또 혹은 기자의 어질고 성스러움을 감복하여 그 왕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할 것이나 이 또한 그렇지 않으니,
단군의 후손들이 현명할진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서로 전하던 천년 사직과 나라와 백성들을 들어
다른 종족에게 양도할 리 없으며,
불초하다 하더라도 역시 그 만승(萬乘)의 부귀를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또 혹시 나라 사람들의 칭송과 송사가 기자에게 돌아가므로
단군의 후예들이 할 수 없이 피해서 달아났다 할 수 있으나 이것 또한 그렇지 않으니,
저 순임금의 성스러움도 기자에 못하지 않으나 오히려 사문(四門)에 납(納)하며
그들의 백규(百揆)를 주인삼아 수년간 성의를 다한 후에야 그 인민들이 비로소 믿기 시작하였거늘,
하물며 조산사람이 기자를 갑자기 만나매 그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으며 풍속이 같지 않거늘,
어찌 한번 보고 감복하여 천여 년이나 받들어오던 우리 임금의 자손을 버리고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에게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단군 후예들이 기자를 피하여 북쪽으로 옮겼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또 혹 기자가 동쪽에 온 것이 아니라 주나라 무왕의 힘을 빌린 것인가 하나,
이것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릇 주나라의 영토와 토지가 한나라 무제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주나라의 국력이 한나라 무제 때를 미치지 못할 것이며,
기타 병기와 병력도 모두 한나라 무제 때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 무제는 큰 위엄이 사방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는 적국의 뛰어난 임금이요,
위만조선의 우거는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않은 객 종족(客 種族)의 끼친 자손이지만
민심이 따르지 않고 나라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가운데 한나라의 사신을 목 베고 거만한 말로 하고
수년 동안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
하물며 천년 왕조의 후예로 비록 그 쇠약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강하고 굳센 기력이 어찌 저 위만의 조그만 도적보다 못하겠는가?
그 임금이 혹 어질지 못하더라도 그 신하가 있으며, 신하가 모두 어질지 못하더라도 그 백성이 있을 것이니, 한 나라 안의 위 아래 신하와 인민들이 함께 모여 선왕의 종묘를 차마 허물며 선왕의 능묘를 차마 버리며
선왕이 천년이나 머물러 살던 나라의 서울을 차마 이별하고 망국의 행장으로 멀리 떠나는 때에
비록 지극히 수치를 모르는 국민이라도 한번 쯤은 분발할 것을 생각할 것이니,
만일 수없이 싸워서 힘을 다하여 온 나라가 북쪽으로 도망한다 할진대
오히려 옳거니와
어찌 악공(樂工)과 무당 5천명이 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찾았겠는가?
설사 단군 왕조 말엽에 쇠약함이 과연 이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 당시 북쪽에 있는 숙신족도 그 무예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선비족도 전투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기타 여러 곳에 있었던 옥저 예맥 등의 종족도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하면서
생존 경쟁을 하는 민족이었으니,
단군왕조가 이와 같이 쇠약함을 보고서도 가만히 앉아서 취하지 않을 이치가 어찌 있었으리요.
그런즉 기자가 동쪽으로 오기 전에 단군 후예는 멸망한 지 벌써 오래 되었을 것이고
조선의 한 구석은 다른 종족들이 이미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무왕의 힘을 빌려 단군 왕조를 대신하였다는 것은
시골 농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자가 단군의 후예를 대신하였던 것도 아니며,
기자를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세웠다는 것도 아니며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라 하면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문제는 장차 어떻게 단정을 내려야 하겠는가?
이에 대해 나는 기자가 동쪽으로 왔던 때는
부여왕조의 빛나는 영광이 아직 조선의 각 지역에 비추고 있었던 때이다.
기자가 와서 그 작위를 받고 조선(평양의 옛 이름)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푸니 부여왕은 임금이고
기자는 신하이며 부여 본부는 왕도이며 평양은 속읍이었다.
기자가 처음에 왔을 때 받은 봉토는 100리에 지나지 않으며 직위는 일개 군수나 도위에 지나지 않으니
기씨보(奇氏譜)에 실려 있는 태조문성왕 다섯 자는 후세 사람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며,
동사강목에 요동 당의 태반이 모두 기자의 영지다(遼地太半皆箕子提封)의 아홉 자는 억측으로 쓴 것이다.
부여의 역사는 부루 대소(帶素)의 양대만 잠깐 나타나 있고
기자의 실제 자취도 지극히 수개 조에 지나지 않거늘,
이제 어떠한 책에 근거하여 이런 단정을 내리는가?
위만이 투항하여 오니 기준이 그에게 서북쪽 100리의 땅에 봉하였고
진(秦) 나라 유민들이 처음 항복할 때 마한이 진한의 6부를 세웠으며,
온조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오니 한왕(韓王)이 땅을 떼어 주었다.
중국인 혹은 다른 부족들 가운데 재주와 덕망이 있는 자들이 귀화해 오면
땅과 벼슬을 주어 변경을 지키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상에 여러 번 나타나는 예들이니
또 어찌 홀로 기자가 땅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겠는가 한다. 증험하여 생각해 보라.
기자 당시에 은나라 유민 5천 명을 이끌고 눈물을 뿌리면서 동쪽으로 오니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고국의 땅이 아니며 풍속과 문물이 비록 좋기는 하나
고국의 경치가 아니며 좌우에 둘러 있는 것은 토착 추장들의 부락이며
눈앞에 접촉되는 것은 다른 나라의 민속들 뿐이니 고상한 홍범의 도로서 그 백성들을 교화하려고 한들
가능하겠으며 지리멸렬한 예악(禮樂)의 가르침으로써 그 백성들을 복속케 하려고 하나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어울리기가 아주 어려운 땅에 와서 뭇 인민을 관리하고 8조의 정치를 베풀었으니
천여 년 조선을 통치했던 단군 후손인 부여 왕조의 명령을 받들었음은 의심할 것 없다.
비록 그러나, 제후가 받은 땅이 100리를 넘지 않는 것은 고대 우리나라의 통례이다.
그런 까닭에 정전(井田)의 구획과 8조의 시설이 평양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기자가 죽으매 자손들이 이를 계승하여 평양 일부만 다스렸을 뿐이더니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부여 왕조는 형제들이 서로 다투어(동부여와 북부여가 나뉘어지는 것이 그 예이다)
명예의 빛이 쇠퇴하여 미약하고 선비 말갈족 등이 각기 일어나매 이에 기자 자손들이 이 때를 틈타서
주위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왕위에 올라서 전국을 호령하고 싸울 때마다 이기고 공격을 할 때마다 취해서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한수에 이르러
단군의 옛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때 부여왕조는 북방 한 구석에 치우쳐 세력이 크게 떨어졌으나
단지 집안 형제 사이의 정치적이 다툼이 결렬하여,
단군이 손수 정한 조선을 외국인 경쟁에 맡겨둘 뿐이요,
그 민족의 정신은 더욱더욱 팽창적인 방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본론 제1장 제2장을 읽어본즉
주권상의 주된 민족, 주변 민족에 관한 구별은 엄격히 다루었으나
오히려 미진한 남은 생각이 있는 까닭에 이 장의 부론(附論) 수십 줄을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