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예맥족과 흉노족
새로운 고대의 구성을 통해 본 역사
백제와 왜의 관계는 아마 영국의 york와 미국의 new york의 관계가 아닐까해. 일종의 멀티개념이지.
따라서 4,5,6,7세기의 백제는 그냥 백제가 아니고 백제왜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해.(사실 백제왜는 홍원탁의 견해기도 해.) 사실 백제의 경우 요서진출설이나 대륙백제설도 검토해야 하지만 이것은 내가 아직 결론을 못내렸어. 좀 더 공부하고 나서 결론을 낼게.
백제는 그러고보면 본진은 한반도에 두고 일본열도와 요서일부를 개척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거지.
무엇보다 왜의 천황계가 백제계라는 거야. 그리고 일본의 성씨를 보면 백제계가 압권이야. 80프로정도가 백제계고 20프로정도가 중국계라고 하더군. 이건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거야.
사실 광개토대왕때 신라는 내물마립간시절이었고 사실 고구려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데. 즉 고구려의 속국미스무리한 것이 신라였고 백제의 멀티가 왜였지. 그러니 고구려,신라 vs 백제왜, 가야의 전선이 형성된거야.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의 유명한 내용 그니까 백제와 왜가 가야와 더불어 신라를 치자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다는 기사는 사실 바로 이러한 전선하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거지.
물론 좀 더 들어가면 고구려와 백제왜간에는 주몽 구태 소서노간의 얽히고 섥힌 관계가 있어. 고구려 주몽한테는 원래 본처와의 사이에는 유리왕이 있잖아. 그 유리왕이 나중에 고구려왕이 되지. 그리고 주몽과 소서노간에도 온조가 생기지. 그런데 소서노한테는 주몽이 아버지가 아니고 구태가 아버지인 비류가 있거든. 소서노가 나중에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중국땅으로 가. 거기에 좀 있다가 다시 바다를 건더 한반도의 미추홀(인천)과 위례성으로 오거든. 그리고 오오진시대에 일단의 백제계왕족과 백제계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지.(사실 그들이 바로 오오진시대를 개척해). 고구려 vs 백제왜의 대립각이 초반에 생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일단 여기서 신라의 지배층은 흉노족이지만 일반백성은 예맥족도 많아. 고구려,백제왜는 지배층도 예맥족이고. 기야도 지배층이 흉노족이지만 일반백성은 예맥족이지. 그러니까 흉노족은 처음에 예맥족의 아래에 있었던 거야.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고구려와 백제왜가 주류였고 신라 가야는 하류였기 때문이지. 물론 예맥족이나 흉노족이나 모두 북방계야. 다만 예맥족은 반유목(농경+유목)을 했고 흉노족은 유목만 한게 다르지. 물론 지리적으로 조금 다른것 같아. 예맥족은 부여가 발상지인 반면 흉노족은 그보다 서쪽이야.
그런데 이게 중국이 수, 당으로 통일되면서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 그러니까 일단 신라와 가야가 하나로 합치게 되잖아. 신라 김춘추와 가야 김유신의 결합이 그것이지. 그런데 김알지나 김수로나 모두 흉노족이거든. 신라지배층은 흉노족이라 예맥족에 대해서 별로 호감이 없어. 그리고 한때는 거의 속국으로 살아야 했어. 그러니 그들 흉노족 입장에서는 당연히 당나라를 끌여들여 예맥족의 지배자를 멸해도 하등 상관이 없었던 거야. 물론 신라의 일반백성은 예맥족도 있으니까 나중에 당나라와 싸울때 고구려유민들과 협력도 하지. 물론 이것은 백제나 고구려의 예맥족 지배층이 모두 와해된 뒤야. 그리고 신라의 흉노족 지배층은 골품제도등을 통해 그들의 종족적 특징을 계속 유지해가려고 하지.
그러다가 고려가 통일을 하면서 다시 예맥족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돼. 물론 김부식같은 흉노족도 고려왕조의 귀족으로 편입되지. 그러니까 예맥족 중심의 통일을 했어도 내부적으로는 흉노족과 예맥족같은 보이지 않는 대립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거지. 그것이 바로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이야. 묘청이 고구려고토의 회복을 주장하고 여진과 대립적이었던 반면 김부식은 고구려고토회복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 그리고 여진(금)도 경주김씨계열이 가서 지배층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봐서 김부식입장에서는 그들과는 별로 대립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물론 관념적으로는 풍수지리설과 유학의 대립도 있지만 말야.
이렇게 한반도에서는 북방계가 주류가 되어가. 예맥족이나 흉노족이나 모두 북방계는 마찬가지니까 . 다만 흉노족이 초반에는 지배층이 되었다가 고려이후로 예맥족이 다시 잡는듯 싶더니만 묘청이 김부식에 밀리면서 다시 흉노족이 득세하게 되. 물론 무신정권이 1170년에 집권하면서 다시 예맥족이 가져오지만 말이야. 그 뒤로는 서로 섞이다 보니 이런 대립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고. 조선조에는 주로 붕당정치의 대립이 있지만 이것은 종족문제라기 보다는 학문적인 대립의 면이 강해. 다만 붕당정치도 영남학파 vs 기호학파간의 대립으로 흐르다보니 어느정도 흉노족 vs 예맥족간의 색깔도 없지는 않아. 하지만 종족간의 대립이 주류는 아니야.
그리고 지금의 일본의 경우도 DNA검사를 보면 60프이상이 북방계라고 하더군. 죠몬이나 이누아족등 일본의 초창기본토인은 거의 숫자가 없데. 백제계 예맥족이 천황부터 귀족 그리고 백성까지 상당수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거지. 물론 백제계 천황은 가마쿠라막부의 미나모토요리모토가 막부정치를 하게 되는 이후에는 권력에서 소외되지. 그당시 미나모토는 타아라(平)씨 집안하고 대립했는데 이 타아라가문이 주로 백제계라고 하더라고. 아무튼 신찬성씨록을 보면 일본의 1182계의 성씨의 80프로가 백제계로 보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그니까 고대의 정치적 대립은 초창기는 고구려,신라 vs 백제왜, 가야였어. 물론 주로는 예맥족 고구려와 백제왜간의 대립이었지. 그런데 신라와 가야가 흉노족이라는 종족적 아이덴티로 하나로 묶이고 당을 끌여들이면서 이게 바뀐거지. 결국 신라지배층 흉노족은 당을 끌여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지. 그런데 말이야 그 이후 재미난 일이 벌어져. 고구려가 망한 이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잖아. 그리고 백제왜의 경우는 왜가 일본이라는 나라로 거듭나게 된다는 거지.(텐무천황이후로) 그리고 발해와 일본간의 유대가 신라보다 더 끈끈했다는 거야. 이들은 서로를 예맥족으로 보았기 때문이야. 둘다 부여에서 갈라졌나온 고구려 백제의 후예이기 때문이지. 즉 예맥족이라는 유대감이 있어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