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世音菩薩普門品(관세음보살보문품) 第二十五
1.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묻다
그 때에 무진의(無盡意)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어
진실을 보이고 합장하여 부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진의보살은 그야말로 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끝없는 마음!
우리 인간 개개인의 마음자리를 그대로 표현했다 이렇게 해도 좋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觀世音)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합니까?"
“관세음, 관세음” 참 많은 분들이 관세음보살을 찾는데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까?'
본래 인도말로는 '아바로키데스바라(Avalokiteśvara)라 하고
관세음, 또는 관자재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관자재는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이 자유 자재하다’ 이런 뜻이고
관세음 하면 ‘세상의 소리를 잘 관찰한다’ 이런 뜻 이예요.
그래서 관세음이란 무엇이냐? 이거죠.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 천 만 억 중생들이 온갖 괴로움을 받을 적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온갖 괴로움을 받을 적에'
우리 이 세상에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산다고 하는 것은
어릴 때는 철없이 고통의 세계인지 몰랐지만
차츰차츰 나이가 들고 세상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러면
‘아! 참 부처님의 말씀이 고해요, 화택이다’ 라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목적,
특히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지 않습니까?
고통이 마음의 고통이든 신체의 고통이든 무엇 때문에 고통이 되었든 간에
고통을 떠나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랬습니다.
'중생들이 온갖 괴로움을 받을 적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一心)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일컬으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찰하고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관기음성(觀其音聲)!
음성을 관찰하는 것이 관세음이라는 뜻입니다.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일심(一心)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잘 살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외면의 관세음보살을 얼른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보타 낙가산에 있는지 아니면 관음도량 어디에 계시는지
그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마는,
일단 외면의 관세음보살을 나 아닌 다른 곳에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떠올릴 수가 있도록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 내 내면의 관세음보살이기도 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해서
內, 外 그것을 둘로 나누면서도 또 둘이 아니기도 하지요.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이면서 또 바깥 세상이기도 하고
바깥세상이면서도 또 내 마음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관세음보살이 밖에 있는 관세음보살이기도 하고
내 안에 있는 관세음보살이기도 하고,
그래서 안에 있는 관세음보살과 밖에 있는 관세음보살이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결국 둘이 아닌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이해를 해도 불교의 이치를 좀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고,
또 깨달은 분들은 다 한결같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지요.
티베트 포탈라 궁전이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곳이라 해서
그것이 결국은 보타 낙가산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관음사 관음암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불명에도 관음이 들어가는 불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자신의 관세음보살이면서
또 외부의 관세음보살을 둘이면서 하나로 보는 그런 관점에서 이름도 그렇게 짓고,
그러면서 또 어떤 관음도량이 따로 있는 것처럼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꼭 잘라놓고 생각하면
이치에 안 맞는 수가 있어서 헷갈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불교이치는 세속적인 그런 흑백논리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흑백논리로서는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서 또 둘이다.
이런 표현이 있을 수 없어요.
불교에는 걸핏하면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이해하는 데 좀 폭 넓게 이해 해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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