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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과 교만
유다서 1-7절
2024년5월19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유다서 저자는 유다입니다(1절).
'유다'는 감사하다, 찬미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유대인들 중에 흔합니다.
저자로 추정되는 유다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도 유다입니다(눅 6:16; 행 1:13).
가롯 유다가 아닙니다.
둘째, 주님의 형제 유다입니다(마 13:55; 막 6:3).
주님 형제 유다가 저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들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17절).
더욱이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합니다(1절).
유다가 살던 시대 대개 자신을 누구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고 누구의 형제라 말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명한 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958).
마태복음 13:55 KOERV에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저 사람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요, 그의 형제는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라 기록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주님의 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부활 전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하면서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유다서 기록 연대는 주후 65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주님 형제 유다가 살아 있을 때 기록했을 것입니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 1958).
유다서 수신자는 일반 신자들입니다(1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모두 수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와 베드로 후서는 이단이 만연할 때 쓰여졌을 것입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 1958).
유다는 구원에 관한 글을 독자들에게 쓰고 싶어했습니다.
그대신에 그는 하나님 은혜를 왜곡하는 자들 중에 성행하는 부도덕한 행위에 대하여 경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4절).
이 거짓 교사들은,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들을 꼬드겨서 더이상 죄가 그들을 붙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그들을 경계하라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야할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959).
영지주의는 신의 계시와 현몽에 의해 초자연적인 지식(그노시스)을 가지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입니다.
헬라철학, 동양 이교 사상, 애굽과 인도와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우주론에 유대교 사상이 더해진, 혼합주의 철학입니다.
기독교 사상도 영지주의에 포함시켜 새로운 종교 철학을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영혼은 선하고 순수하며 신비롭지만 물질 혹은 육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입니다.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쾌락주의 즉 도덕적 폐기론에 넘어지게 합니다(라이프 성경사전, naver지식백과 재인용).
유다서 1:1 KOERV(쉬운성경)에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형제인 나 유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사람들입니다.
저자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합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자기 주인의 소유이고 떠날 자유가 없습니다.
종은 "섬기는 자"라는 뜻으로, 자기 주인을 기쁘게 섬기는 자입니다(로마서 1:1; 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746).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로 인지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예수님께 헌신된 하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롬 1:1), 베드로 사도(베드로 후서 1:1)는 주님 종이 된 것을 영광스레 여겼습니다.
유다와 야고보(1:1)도, 예수님 동생들로서, 자신들이 주님의 종으로 불리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주님 부활 전, 그들 예수님 동생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깍아 내렸습니다(요 7:5; 막 3:21,31).
이제, 주님 부활후 유다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삶의 목적은 메시야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설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 매임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Michael Green, Jude, ivp, 1984,
155).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 형제라 부릅니다.
주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유다를 "주님의 형제"라 불렀습니다(고전 9:5).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Michael Green, 155).
유다가 보내는 편지 대상, 독자들은 다음 세 가지 기준에 근거합니다.
첫째,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는 자들'(rsv)입니다.
바울은 종종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혹은 '주님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neb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사는 자'라고 풀었습니다.
Michael Green은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한'자들을 유다서의 독자들이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는 자들'이 유다 편지 독자들입니다.
유다는 예수께서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지키심으로 지속적으로 보존하신다고 말합니다(요한1서 18; 베드로전서 1:5; 디모데전서 1:12).
21절에 '하나님 사랑 안에 너희 자신을 지키라'합니다.
인간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역할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는 것은 인간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견인의 상호성입니다(빌 2:12,13).
신자들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보존되는 것입니다(살전 5:23; Michael Green, 157).
세번째, 독자들은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부르심의 성격은 거룩입니다(로마서 1:7; 고전 1:2).
'거룩'은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고, 우리 내면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빌 2:12,13; 벧후 1:10).
하나님은 부르심 받은 자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부르십니다(Michael Green, 157).
유다서 1:2 KOERV
[2]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유다는 독자들 즉 신자들에게 긍휼, 평강, 사랑이 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왜 긍휼(mercy)이 필요합니까?
거짓 가르침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 긍휼이 필요합니다.
신자의 중생 즉 거듭남에 긍휼이 필요합니다(베드로전서 1:3).
심판에 긍휼이 필요합니다(딤후 1:16,18).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습관적으로 무감각하게 죄를 짓는 자는 긍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Michael Green, 157).
인간은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택하여 주심을 알때, 그의 삶 속에 깊은 평강을 얻습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성령에 의해 우리 가슴에 넘쳐흐릅니다.
로마서 5:5 KOERV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쏟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신자 내면의 평강,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길 유다는 기원합니다.
신자의 인사말 중 가장 포괄적 기도입니다(Michael Green, 158).
유다서 1:3 KOERV
[3] 사랑하는 여러분, 본래 나는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고 있는 구원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참에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느껴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그 부탁이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맡기신
믿음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리스도인 믿음에 대해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악하고 잘못된 자들이 파괴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다는 당장 이 편지, 유다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양떼의 파수꾼이라는 의무를 깊이 자각했습니다. 그 양떼의 믿음의 순수함이 위협받았습니다.
유다는 당장 그 양떼와 그 믿음을 변호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첫째, 그 믿음은 우리에게 건네진 어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 스스로 발견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세대를 거듭하여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아떤 것, 즉 전통입니다.
그 양떼,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연결됩니다.
믿음의 사실은 우리 스스로 발견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세대에서 세대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된 어떤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단번에 건네진 어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살았고, 죽으심으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결한 혹은 구별된 백성에게 맡겨진 어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어떤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의 것입니다.
그 믿음은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그 교회 안에서 보존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교회 안에서 이해되어집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변호되어야 할 어떤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의 변호자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변호는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변호하다'라는 헬라어는 '에파고니제스싸이'입니다.
영어의 '고뇌' 즉 agony의 어원입니다.
그 믿음의 변호는 교회 모든 세대에 지워진 의무입니다(William Barclay, Jud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6, 178-9).
유다서 1:4 KOERV 쉬운성경
[4]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몰래 들어갔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치 못한 자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놀아나도 좋다는 허락쯤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우리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 자들입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 닥친 위험을 경고하고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자들이 몰래 교회안에 들어왔습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가능하면 조용하게 몰래 야금야금 작업을 벌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경건하고 그들의 사고와 삶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유다는 그들의 두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 은혜를 방탕한 부도덕의 변명거리로 왜곡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죄를 숨기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 죄를 드러내어 범합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부끄러운 짓을 저지릅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의 품격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에 물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히 크고 넓어서, 사람은 자기 좋을대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가졌습니다(William Barclay, 180).
그들은 육체는 썩어질 것이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습니다.
죄를 지을수록 은혜가 더 커지니 죄를 왜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몸과 영혼은 별개가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몸이 죄를 범하면 영혼이 함께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과 육신을 별개로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우리 주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사람은 박해를 받으면 예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살 길이나 이득을 위해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과 행위로 예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거짓 아이디어로 그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 대해 두가지 잘못된 개념을 가졌습니다.
첫째, 몸은 물질이니, 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사람 모양의 일종의 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처럼 보인다는 말이 헬라어 '도케인'입니다.
이 자들을 '도케티스츠'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독특성 혹은 유일성을 부인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물질과 하나님이신 완전한 영 사이에 많은 단계들이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단계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유다는 놀랐습니다.
그들은 벌레처럼 야금야금 교회로 조용히 기어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은혜를 칭의로 비틀었습니다.
그들은 드러내어 방탕한 범죄를 저질러도, 하나님 은혜로 용서받으니 괜찮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인성과 유일성을 부인했습니다(William Barclay, 180-1).
약 이천년 전 유다 당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이천년 동안 이단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2024년에도 신천지, JMS, 통일교 등 이단과 사이비가 성행합니다.
이단 혹은 사이비는 도적적으로 음란합니다.
거짓과 협박으로 돈을 갈취합니다.
가정을 파괴합니다.
요즘 트바로티, 김호중이 음주운전을 했다 안했다 시끄럽습니다.
김호중, 임영웅 등은 중년 여성들을 목소리와 노래와 몸짓과 분위기로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세상 풍조의 한 유형입니다.
그들은 정상적 신앙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가정을 지키는 여인들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들 연예인들은 일종의 종교처럼 변형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음주운전 정황이 분명해 보이는데, 입에 댔지만 마시지는 않았다는 괘변과 뻔뻔한 거짓말을 합니다.
연예계는 도적적 타락과 음란과 거짓과 돈의 우상이 만연해있습니다.
정치계, 법조계, 재계, 의료계 등도 돈과 쾌락의 우상이 성행합니다.
학생들 조차도 돈과 쾌락의 우상에 흔들립니다.
교회 안에도 돈과 쾌락의 우상에 흔들리는 위험이 있습니다.
인터넷, 티비, 유튜브 등 보고 듣는 영상이나 뉴스나 이야깃거리가 부끄러운 모습이나 행위나 말을 드러내놓고 합니다.
5-7절은 세가지 과거의 사실을 들어 경고합니다.
유다서 1:5 KOERV
[5]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일깨워 드리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주 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믿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멸하셨습니다.
5-7절에서 세 가지 심판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과 도시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짓 교사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방땅, 세상나라,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일으키시고 그들을 광야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훈련과 연단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세대는 광야에서 죽고 광야 세대가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출애굽세대는 애굽에서 430년 동안 이어진 세상 나라에 젖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애굽의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세상 풍조에 익숙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출애굽 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것은 우상 숭배, 음행, 권위에 대한 도전 즉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0:7 koerv 쉬운성경]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들썩하게 뛰놀았다.”
[고전 10:8 koerv 쉬운성경] 우리는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성적으로 부도덕한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9] 또 여러분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분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불평하지 맙시다. 그들은 불평하다가 죽음의 천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2024년 현재 역시 우상숭배, 음행과 쾌락, 권위에 대한 도전이 예수믿는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돈이나 쾌락, 권세 혹은 명예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음란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드러내놓고 합니다.
마약이 중국 등에서 들어와 퍼지고 있습니다.
유다서 1:6 KOERV
[6]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권세의 영역 안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이 사는 곳을 떠난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이
천사들을 영원한 쇠사슬로 묶어,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그들은 큰 심판의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로 든 두번째 심판은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천사들 역시 '하나님 소유를 위한 한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을 것입니다.
천사들 역시 그들이 의지하는 여러가지 특권을 가졌습니다.
유다는 타락한 천사들이 거짓 교사들과 유사하다고 여겼습니다.
유다는 타락한 천사들의 죄와 운명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초림 전 수세기 동안 천사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습니다.
에녹서에 천사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타이탄을 멸합니다.
조로아스터 전설에는 아흐리만과 그 천사들이 타락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절에 대한 랍비 견해가 있습니다.
창 세 기 6:1-2 KOERV(쉬운 성경)
[1]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이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니 이 여자들이 아름다웠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는 아무나 골라 아내로 삼았다.
창세기 6장 1-2절 해석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아들들을 믿는 자의 자녀들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유대 랍비 중에 하나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다는 그가 살던 시대 이단들, 즉 거짓 교사들이 정욕과 교만이 가득하여 교회를 위험애 빠뜨린다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이 창세기 6장 1-2절 사건의 결과는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창 세 기 6:3-8 KOERV(쉬운성경)
[3]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역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에 지나지 않으니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영원히 그들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백이십 년 동안 살 것이다.”
[4] 그때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도 땅에는 네피림이라는 사람들이 살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찾아가 그 여자들에게서 자식을
얻었는데 그 자식들이 바로 이 거인들이다. 그들은 옛날부터 힘센 장사들로 이름을 떨쳤다.
[5] 주께서 세상 사람들이 매우 악한 것을 보셨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언제나 악한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도 보셨다.
[6] 주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슬퍼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 위에 만든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겠다. 땅 위에 사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길짐승이나, 공중의 새나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려야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땅 위에서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아였다.
이렇게 노아 홍수로 인류가 멸망했습니다.
노아 가족 8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천사들을 타락으로 이끈 것은 정욕과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지위를 지키는데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위는 헬라어 '아르켄'입니다.
위클리프는 그 지위를 '왕자됨'이라 합니다.
각 나라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천사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칠십인경, 신명기 32:8).
천사들의 교만이 하늘에서 시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악한 천사들은 쫓겨났습니다(이사야 14:12; 이사야 24:21).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한 저주에 가두었습니다.
정욕과 교만은 그들을 타락하게 했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천사들을 특권적 지위와 충만한 지식이 구원하지 못했습니다(Michael Green, Jude, 165-6).
유다서 1:7 KOERV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둘레에 있던 다른 도시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도 앞서 말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부도덕한 성적 죄에 빠지고
비정상적인 육체의 욕망을 좇았습니다. 그 도시들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주변 도시들이 멸망당한 것도 정욕과 교만이었습니다.
5-7절의 세 가지 심판의 원인은 공히 정욕과 교만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동성애에 빠졌습니다.
그들 죄는 동성애 뿐만 아니라, 롯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집밖으로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강도와 조폭처럼 악한 짓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심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불은 심판의 불이며 지옥불입니다.
더딘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심판은 받드시 이루어집니다.
2024년 현재를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거짓 교사들과 음란과 돈과 쾌락 등 우상 숭배 유혹과 위험이 있습니다.
이 악한 시대와 세상 풍조에서 어떻게 여러분과 자녀들과 자손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앞에 날마다 순간마다 서는 일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의 삶을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 자손들 되길 주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