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을 달려 도착한 첫 목적지 상주에 있는 구수천 팔탄길이다.
여울길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옛길에는 세월의 향기가 난다.
호젓한 오솔길을 들어서니 과거의 사람들과 오늘의 내가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과 초록의 산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곳에 팔탄길이 내려다 보이는
백옥정에 올라 숨을고르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의 마음의 울림과 새소리, 바람 소리,물소리는
사는 자 만이 느끼며 듣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감미롭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 마음이 헛헛함과 그동안에 쌓였던 멍을 갖고 살아간다.
적어도 마음이 안정되고 극도로 평안한 상태라면 모를까. 희노애락의 오욕이 기본인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란
수도자의 득도같은 종류는 아닌 듯하고
자기 만족의 마음이라고 보는데 어떤 것에 대해 아직 바람을 남겨 놓고 있는 까닭은
그것에 대해 채워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들어 부쩍 ‘고독’이란 녀석과 자주 대면한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일까?
시간이 남아 돌아서 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낫살깨나 먹었는데 무슨 고독 타령인가.ㅡ
오늘 밤에 또 찾아올 녀석과 또 무엇을 하고 놀지?
그러고 보니 고독하다는 것은 내게 채울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인지, 마음이든 시간이든 빈 공간에 무엇을 채울지
오늘은 깊은 명상에 잠겨 보아야겠다.
고독을 즐기기 위해 떠나온 여행길,
생각해보니 외로움과는 조금은 다른 이 고독이라는 불청객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내 곁에 있어온 친구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밤은 깊어오고 고독은 어김없이 차 창문을 노크를 한다.
시간의 흐름 위에서 많은 잡념이 혀를 낼름 거리며 똬리를 튼다.
無心이라는 말은 억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사회적인 동물이면서도 늘 고독을 데리고 다니는 고독한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을 떠날 때는 한 줌 흙일 뿐 인 것을, 왜 이렇게 지지고 볶고 사는지 ㅡ
그럴 수밖에 없는 보통 인간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독하다. 나는 지금 혼자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삶이란 늘 버겁다.
번잡한 삶의 흐름을 벗어나
그냥 대충 챙겨온 베낭을 메고 떠나온 여행.
여행 이틀째,
논배미마다 모를 낸 어린 초록들의 찰랑거림이 흥겨운 들녁을 달려 도착한 곳은 금오산이다.
저녁 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중턱에 있는 해운사까지 케이블카를 타려했지만 케이블카의 점검일로 인해 타지 못하고 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도선굴과 대해폭포를 지나 굽어보이는 낙동강 줄기 따라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와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힘겹게 오른 약사암에서 부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 인간은 고독한 존재인가요?
대답은 하시지 않고 그저 잔잔한 미소만 던지신다.
고독과 함께 떠난 여행에는 돌 틈 사이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의 귀중함이 있었고
나만의 공간에 누워 은은한 달빛을 즐기는 지금 이 순간의 고독이 고맙다.
차박을 하다 보면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마주 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별들은 밤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빛을 발하고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화엄의 세계란 무엇 인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본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려고 자유로운 영혼을 외쳤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알아간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빛을 온전히 발하는 禪的(선적)의 삶,
즉 내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깨닫는다.
머리로만 받아들였던 지금까지 지식이나 정보는 쉽게 사라져 버리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야 말로
참 나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좋은 밤이다.
결코 새벽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지금, 스스로를 위한 행복한 고독의 시간이다.
하늘 위로 땅 밑으로 고독한 행복이 흐르는 구미의 밤이다.
새벽부터 컹컹 거리는 개소리가 요란하다,
매운탕 국물로 해장을 하며
낙동강 줄기 따라 이내 몸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