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鳴聲山)을 다녀와서!
만삭인 출산전에도 지극한 모성으로 아기를 위해 행동과 언어를
각별히 조심하면서 생후에도 성장하는 아이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는 태교에도 전심(全心)을 기울이게되고 출산 후에도 지니고
있는 재능이나 역량 등을 떨쳐 드러내는 보호본능이 발휘(發揮)
되니 영아(嬰兒) 때의 아이에게는 엄마에게서 생명줄이 이어지듯
엄마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아기에게는 밥이고 약입니다. 아기
또한 태어나서 제일 먼저 인지(認知)하는 것이 엄마의 사랑이고
숨결과 말들을 교감(交感)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아기를 수태
(受胎)를 하고 출산을 하는 과정의 엄마의 사랑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신(神)만이 아는 가장 성스럽고 고귀(高貴)한
사랑이라고 합니다...이와같이 출산은 누구이던 의무적인
성업(聖業)인데 옛날엔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쉽게 날 수 있는
결혼적령기(結婚適齡期)인 20대 중반쯤에 결혼을 했었는데
요즘은 30대말이나 40대초에 결혼을 하고선 교육비 부담
때문에 아이 낳기를 포기한다하고 그 시기의 미혼 남녀들은
결혼은 하고 싶은데 아이는 낳기 싫다고 한다니 대한민국의
전도(前道)가 심히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2016년11월27일 일요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산행동호회에서
일요산행지로 정한 명성산을 가기 위해 밤사이에 비가 왔는지 지표면이
젖어있고 창밖으로 보이는 불곡산이 눈쌓인 모습으로 보이곤해서 겨울산행
채비(差備)를 하고 07:30에 집을 나서서 장암역전으로 가서 정해진
시간에 도착한 대진관광버스에 승차하였는데 일행의 아침식사용으로 김밥을
사야 한다기에 우리동네 아는 김밥나라집으로 전화주문을 해두고 오다가
양주농협앞에 차를 세워두고 들르니 반도 못만들어서 한 참을 기다렸다가
42인분의 김밥을 받아들고 승차하여 가면서 나누며 반주로 쇠주를 대작
하면서 가노라니 즐거운 하루가 펼쳐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열시가 조금
지나서 산정호수 주차장에 도착 명성산 들머리에 들어서니 시계(示界)가
흐린데다 가랑비가 내리니 길이 미끄러워서 가다가 되돌아 선 일행이
많아서 일부만 오르다가 목적지를 3백여 미터에 이르는 지점에서 정성
스럽게 마련해온 음식으로 풍성한 간식잔치를 벌이니 마냥 즐겁고
행복에 겨운 느낌이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일부 일행분들도 하산을
하니 10명도 안되는 분들만 억새밭이 있는 팔각정까지 올랐다가
눈쌓인 하산길을 오는데 위험천만한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40여분 늦게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하여 귀가하는
길에 뒷풀이 식당에 가서 능이백숙으로 즐거운 뒷풀이를 하고
집에 돌아오니 18:10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2016-11-27 작성자 청해명파
포천과 철원의 명성산(鳴聲山)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높이 923m.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광주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동쪽에 광덕산(廣德山, 1,046m)과 동남쪽에 백운산(白雲山,
904m), 남쪽에는 사향산(麝香山, 736m) 등이 솟아 있다.
명칭 유래
명성산은 일명 울음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설에 의하면 궁예
(弓裔)가 건국 11년 만에 왕건(王建)에게 쫓기어 이곳에 피신
하다 1년 후 피살된 곳으로 알려져 있고, 궁예의 말로를 이곳의
산새들이 슬퍼해서 명성산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자연환경
서북쪽에는 철원용암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한탄강이 흐르면서
유년곡(幼年谷)을 이루고 있다.동쪽의 광덕산과의 사이에 있는
자등현(自等峴)을 통하여 철원군 서면 자등리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가 연결되고, 남쪽의 사향산과의 사이에 있는 여우
고개를 통하여 장암리와 산정리가 연결되고 있다. 북쪽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지포리를 지나 한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에서 발원
한 영평천(永平川)은 도평리ㆍ장암리ㆍ연곡리 등을 지나 서쪽으로
흐른다.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 발달한 용암대지의 형성을 밝히려는
최근의 연구들이 있다. 철원용암대지의 하부에 나타나는 점토와
미립질의 퇴적물의 연대를 측정한 연구에서는 퇴적물의 연대가
31,900±800, 37,800±2,000 BP인데, 기존의 추가령현무암의
절대연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시간적 차이가 난다. 이는 현무암
분출이 기존의 연대보다 후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
하기도 한다.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 유역에 발달한 용암대지의
형성과정과 연대측정에 관한 연구에서는 용암분출이 플라이스토세
중기에 몇 회에 걸쳐 분출했고, 또한 용암이 여러 차례 분출했다고
해도 분출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있었던 것은 아님을 밝히기도 했다.
현황
서남쪽 기슭에는 자인사(慈仁寺)가 있고, 그 옆에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는 산정호수(山井湖水)가 있으며, 북쪽 기슭에는 용화
저수지(龍華貯水池)가 있다. 포천시 영북면에 있는 산정호수와
이어진 관광ㆍ등산 길이 개발되어 주말이면 찾는 사람이 많다.
1997년부터는 ‘산정호수ㆍ명성산 억새꽃 축제’가 개최되고
있는데, 전국 5대 억새군락지로 손꼽힐 정도로 5만평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참고문헌
『얼쑤! 신명나는 경기도(京畿道) 축제(祝祭) 나들이 : 2005
경기방문의 해』(경기도?경기관광공사, 2005)
『한국지명요람』(건설부 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67)
「임진강 유역 용암대지의 형성에 대한 신자료」
(이선복, 『한국지형학회지』12-3, 2005)
「추가령구조곡의 철원 율리리 퇴적층 분석」(이민부
명성산에 얽힌 궁예 전설
억새꽃 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포천 여느 지역에
비해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매우 풍부한 곳이다.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하였다고 하여
패주동(敗走洞)[가는골]이라 하던 것이 그 음이
변하여 지금은 파주골[坡州洞]이 되었다. 다시
궁예는 명성산에 은거하여 성을 쌓고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군사들 대부분이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 이르렀다.
이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이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여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북면과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는 명성산에는
망봉(望峰)[혹은 망무봉(望武峰)], 궁예왕굴,
항서받골(降書받골) 등의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망봉은 궁예가 지금의 산정 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곳이다.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은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이다. 항서받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항복을 하였다는 곳인데, 원래는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의 서한을 받았던 곳으로서,
이후 와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화현면 현등산의 홍폭(虹瀑)에도 왕건에게 쫓겨 온
궁예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성을 쌓아 저항하였
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명성산을 빠져 나온
궁예는 이후 철원 경계로 들어가 부양 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철원 북방으로 패주할 때 한밤중에
왕건 군사의 급습을 받아 싸웠다는 곳이 ‘야전골
(野戰골)’이다. 또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 고개는
왕건 군사들이 명성산에 주둔한 궁예 군사를 여우
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
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면서 갔
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궁예의 미륵 신앙이 포천 지역에 남긴 영향
포천 지역에는 미륵 신앙과 관련한 전설도 상당수
전하는데, 이는 궁예의 미륵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정치적 갈등으로 도태된 궁예는
반신라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륵 불국토
의 새 세상을 염원하여 미륵불을 자칭하며 미륵보살처럼
금관을 쓰고 가사를 입었다.
반월 산성에 인접한 군내면 구읍리에는 두 구의 미륵
불상이 있다. 하나는 구읍리 석불 입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5호]으로 현재 포천 향교 뒤쪽 언덕에 있다.
2m 크기의 이 석불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반월 산성을 쌓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이 거의
마모되었지만 마을에서는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구읍리 미륵 불상[포천시 향토 유적
제6호]으로 현재 용화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이 미륵 불상에는 ‘신라 시대 어느 날 밤 갑자기
미륵불 남녀 한 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여자 미륵불
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자 미륵과 남자 미륵 두
구를 제작한 사례는 경기도 안성의 기솔리에도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 미륵을 궁예 미륵이라
하여 궁예가 세웠다고 한다. 궁예 미륵은 궁예가
양길과 대결한 안성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구읍리 미륵 불상은 군내면 하성북리 백석동(白石洞)
지명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 뒤에 있는 백석을 깎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 불상 머리에 씌웠는데, 백석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 흰 돌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 돌을 제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흰 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흰돌, 곧 백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밖에 이동면 연곡 4리 뒷둔지[後屯地]에는 벌판
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숲 땅속에 미륵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한때 젊은 사람들이 이 미륵을 파서 세우
려고 하자 마을 노인들이 이것을 파서 세우면 마을 아낙
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만류하여 발굴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전한다. 미륵 불상이 땅속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은 곧
세상에 미륵불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 불상을 만들어 땅속에 묻어 두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포천 지역에 미륵불과 관련한 전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은,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인접해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포천 지역에서 전해 오는 궁예 이야기의 의미
포천 지역은 궁예가 양길과 대립하던 초기 궁예에게 복속
되었고, 후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궁예의 중요한 세력 기반
이 되었던 지역이지만, 포천 지역에서 전하는 궁예 전설은
그의 몰락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궁예의 최후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 전에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918년 왕건 일파가 일으킨 정변
으로 쫓겨나 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 얼마 되지 않아 부양 주민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역, 특히 명성산 일대에 얽힌 궁예 관련 전설은 궁예가
도망하였다는 숲이 명성산이 아닌가 추측하게 할 정도이다.
궁예 세력의 최후 항전지는 이곳 명성산 일대가 아니었을까.
이곳의 지명에 얽힌 전설은 왕건을 적대시하고 오히려 궁예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궁예에 비판적인 전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관인면의 지명 유래가 그 것에 해당한다.
궁예의 학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관리들이 관직을 버리고 성
밖인 이 지역에 모여 살았다고 하여 ‘관인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설과 민담을 살펴볼 때
포천 지역은 궁예와의 친연성이 깊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사실 관계를 떠나 궁예와 이 지역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지역
정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동리 산성은 태봉 산성(胎峰山城)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 순조가 세자의 태(胎)를 안치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보이지만, 포천 지역민들은
‘태봉성(泰封城)’이라고 불렀다. 또한 ‘한여울’, ‘큰 여울’이
라는 뜻의 한탄강(漢灘江)을 전쟁에 패한 궁예가 나라 잃은 설
움과 부하의 배신을 한탄하며 건넜다고 한탄강(恨嘆江)이라고도
하였다. 이렇듯 포천은 왕건과 궁예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
하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고려의 건국과 역사적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궁예의 몰락 이후 포천 지역은 호족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포천 지역 호족으로 이름난 이는 923년(태조 6) 태조
왕건에게 귀부한 명지성 장군 성달(城達)이다. 명지는 포천의
별칭이었다. 성달은 그 아우 이달(伊達), 단림(端林) 등과 함께
포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성달이 고려에 귀순하기 한 해
전인 922년(태조 5) 명주[강원도 강릉] 호족 김순식(金順式)이
고려에 귀순하였다. 친 궁예 세력이던 김순식은 명주를 중심
으로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건이 오랫동안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김순식의 귀순
후 바로 성달이 귀순한 것으로 볼 때,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포천 지역에서 궁예와 관련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노
라면,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궁예보다는 슬픈 궁예를 강조하며
그를 측은해 하는 측면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궁예의 최후
항쟁지로서 포천 지역이 부각되는 것은 고려 건국 후 이 지역
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응과도 맞닿아 있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지역민의 반고려적 성향으로 인해 포천 지역은 고려 정부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고려 정부의 무관심은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미륵 신앙이 성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조선 숙종 때 여환(呂還)의 혁명에 포천 지역민이
참여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