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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Blessed are you among women,
(루가 1,39-56)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말씀의 초대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자, 큰 표징이 나타났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다른 곳에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인 용이 나타났다. 여인은 성모님이고, 용은 사탄을 상징한다. 이윽고 여인은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아들을 낳는다. 예수님의 출현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그분의 부활로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아담으로 인해 죽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게 된 것이다. 이제 죽음은 힘을 잃었다(제2독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신다. 그녀 역시 천사의 인도로 아기를 가지게 된 몸이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바치신다. 마리아의 찬미가다(복음).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믿음’이 적은 탓입니다. 그러기에 가족의 평화를 청하면서도 ‘그렇게 된다는’ 확신에는 약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께서도 우리의 행복을 원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어야 행복해집니다. 생각이 마음을 바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이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요.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삶에도 변화가 왔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핵심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것’의 원인이 주님이심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묵묵히 예수님을 추종하며 사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마땅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곧바로 천국에 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만한 삶을 사신 분이시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평탄한 생애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과 아기 예수님께서 함께 사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가장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셨으니 고통도 고뇌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이나 말썽도 없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 승천은 당신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은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거룩하게 되셨고, 그 목표인 구원에 이르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모 승천은 마리아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근원적 구원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요, 그 충만함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 승천은 우리가 사도 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신앙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성가정을 단순하게 아무런 문제도 없고 다툼도 없는 가정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강한 개성과 고집을 지닌 분들이 사셨기에 어쩌면 남모르는 아픔이 더 많으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며 사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가정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에게 내려지는 축복의 예표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면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계신 초대 교회에는 하느님의 힘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성모님을 닮아 또 다른 마리아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곧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어렸을 때, 명절 때만 되면 저희 집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 때로는 선물도 들고 오셨는데, 그 선물 중에서 최고의 선물은 바로 ‘종합선물과자세트’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만 해도 과자가 귀한 시절이었고, 그래서 먹고 싶은 과자도 얼마나 많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에는 과자뿐만 아니라, 사탕, 영양갱, 젤리, 껌 등……. 그리고 운이 좋을 때에는 조그마한 장난감까지 이 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었으니, 이 선물세트가 들어오길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따라서 종합선물과자세트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이 너무나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었지요.
하지만 이 종합선물과자세트의 포장을 뜯은 뒤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큰 종합선물박스인데,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은 생각보다 너무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과자는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절대로 돈 주고 사먹지 않는 과자가 그 종합선물세트 안에 들어있으니 실망도 컸지요.
어쩌면 우리들은 이런 종합선물과자세트만을 추구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겉은 크고 화려해 보이지만 풀어 놓으면 별 것도 아닌데, 그렇게 겉으로만 그럴싸한 삶이 최고라는 어리석은 생각만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에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는 것처럼, 비록 겉으로는 초라하고 작아 보이지만 그것이 나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합선물과자세트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단번에 겉만 크고 화려한 인생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번에 주어진 인생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까요? 오히려 더 큰 실망감으로 인해서 힘들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에게서 받으신 영광을 찬미하는 날입니다. 이런 성모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승천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영광이 단 한 번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고통과 시련 끝에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모님의 삶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서, 성모님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 봅니다. 그리고도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순간에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과 기쁨의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종합선물세트를 받을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군것질을 하지 맙시다. 이빨 썩어요. ㅋㅋ
빠다킹신부
광복절의 어머니
-김광태 신부-
1945년 8월 15일. 아버지와 삼촌들은 징용에 끌려갔고, 어머니 혼자 눈먼 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일본 사람들이 탈탈 털어가고, 대신 건네주는 콩 몇 되 받아서 겨우 연명하던 처지였습니다.
헛농사 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왕성하게 자라는 피를 놓아둘 수가 없어서,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논에 나가 허기를 참으며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한낮의 열기에 지쳐갈 무렵, 동네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며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중 잘 알던 사람 하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소화(昭和, 당시 일본 천황)가 항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얼떨결에 한 말씀. “워메, 그럼 이 쌀은 다 누가 가져간디야.” “가져가긴 누가 가져가. 다 당신네 거지.”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적에 너무 자주 들어 그 전말을 아예 외우게 된 나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권세에 짓눌리고, 굶주리면서 비참하게 살던 성경 속 이스라엘의 모습이 일제 하의 처지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처지가 그랬기에 성모님의 노래 역시 현실을 도외시한 채 서정적인 분위기로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 억압당하는 백성과 함께 해원(解寃)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생각하면 꼭 광복절의 우리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김흥주 신부-
◆오늘은 우리 신앙과 구원의 모델이시며 희망이신 마리아께서 하늘로 들어높임을 받으신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마리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도 드러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의 승천을 경축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이렇게 칭송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을 때부터 마리아는 하느님의 엄청난 계획과 약속이 미천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이렇게 마리아는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 인류에 대한 당신 구원 계획을 실현하실 수 있도록 철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셨기에 하늘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부른 ‘마리아의 노래’에서 스스로를 “주님의 비천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선택된 삶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지금 자기 영혼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우리를 그 기쁨에 초대하고 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섭리에 온 삶을 의탁하는 믿음을 지니며,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마리아의 행복,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인 것이다.
따라서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는 날이다. 하느님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 할지라도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큰 능력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시어 영광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모 승천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모 승천 대축일
- 김정호 신부-
우리는 흔히 남의 삶을 두고 평가할 때, 끊임없이 고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삶이 언제나 밝은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며 축하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삶을 평가하자면 아마도 두 번째의 경우처럼 아주 행복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우리가 갖지 못한 특권을 많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셨습니다. 또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경축하는 바와 같이 하늘로 올림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모님은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혼자만 다 누린 분이고, 그래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신 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성모님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그분이 받으신 특권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봅시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의 생애를 다른 눈으로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아퀴나스의 토마스 성인께서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의 말마디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는 ‘나옴’(exitus)라는 말마디이고 또 하나는 ‘되돌아감’(redditus)라는 말마디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창조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장차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한 개인의 역사를 끝냅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다,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바로 이러한 인생 여정 중의 하나입니다. 즉 성모님의 삶은 모든 인간이 걸어가게 되어 있는 길이고, 그 길을 미리 앞서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베푸신 것들은 장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즉 인류 전체에게 주실 은총을 미리 맛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류의 삶이 장차 완성될 모습을 성모님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은 특권을 통해서 혼자만 배타적으로 누린 삶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삶인 것입니다. 굳이 특권이라고 하자면 성모님께서 그것을 제일 먼저 받았다는 것이지, 우리는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을 혼자만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것도 오로지 성모님에게만 허용된 은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도 장차 주어질 은총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축제를 지내면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비극적인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 받으신 영광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전제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자세,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진정으로 믿고 주님께 의탁하고 그대로 따르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루카 1, 45 참조).
성모승천대축일은 바로 우리 인류 전체가 완전하게 되는 마지막 날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겨주는 축제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알아듣든 그릇되게 알아듣든 간에, 우리 인류에게는 하느님에 의해 들어 올려지는 새로운 역사가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에 따라 지어내신 최대의 걸작품인 우리 인간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인류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서, 괜히 우리 자신이 인간적인 기준만 갖고 지나치게 냉혹하게 평가하고 심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냉혹한 심판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약한 모든 사람들에게, 걱정에 가득 싸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약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로운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자렛 산골에서 자라난 한 순박한 처녀. 그 안에 기뻐 춤출 수 있는 창조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춤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것이 성모님에게 전해진 것이고, 장차 영원한 천상 잔치에서 우리가 추게 될 춤입니다. (*)
성모 승천 대 축일.
- 서공석 신부 -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은 우주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던 시대에 사용되던 낱말입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 우리가 사는 땅, 죽은 이들이 가는 지하 어둠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 승천 축일을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성모님도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를 보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그대의 어머니이오.”(19,26-27). 요한복음서는 이 말씀으로 초기 제자들이 마리아를 소중히 생각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된 일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어머니가 지닌 삶의 자세를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 있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앙인인 우리의 운명과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들은 성모님은 즉시 길을 떠나 역시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와 이웃 안에 숨 쉬고 있는 하느님의 생명이 태어나 자기의 삶 안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기다림은 기쁨이고 서로에게 하는 축복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본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예배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구약성서 구절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그 노래를 채집하여 마리아가 한 노래로 오늘 복음에 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자기의 구원을 보는 사람은 자기 운명을 전혀 달리 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신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자, 마리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써 새 생명을 영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 영접하고,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될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요한복음서 2장에는 가나 촌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예수님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좋은 술을 공급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이 따분한 유대교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희망을 두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복음서들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의 운명을 새롭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 성모님에 대해 말합니다. 19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를 강타한 합리주의는 하느님이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하느님의 계시도, 섭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장에 맞서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승천 교리도 성모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영광을 누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된 축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이루어진 유럽 사회는 인간의 미움과 잔혹함이 만든 폐허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던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인명 살상(殺傷)과 문명 파괴의 위력을 높였습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쳐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졌고 인류는 쓰레기와 같이 비하되었습니다.
이런 파멸의 폐허 위에서, 유럽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천명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축일은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도 인간 생명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살상을 시도하는 현장들은 있습니다. 각종 테러, 지속되는 전쟁들, 그리고 핵무기와 미사일의 개발 등이 있습니다.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오염도 인류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안에 살려서 살자는 노래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 안에서 그 생애의 종말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완성되는 삶을 살겠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애를 완성시키신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그분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스며들면, 그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우리 희망의 표지인 성모 승천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이다.”라고 선포함으로써 성모승천이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다. 성모님의 승천은 초 세기부터 신도들이 믿어왔던 믿음을 믿을 도리로 선포한 것이다. 4세기 말에 기록된 신약성서 외경에 이미 ‘성모의 죽음’ 또는 ‘성모의 장례식’이라는 제목으로 성모님께서 무덤으로 옮겨지던 중 육신이 살아나 승천하였다거나 돌아가신 3일 후에 부활했다는 기록이 있다. 교회는 3-4세기부터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에 성모승천을 기념했으며, 5세기 초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8월 15일에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며 성모승천을 기념했다. 6세기경에 이르러 이 축일의 명칭을 ‘성모 안식 축일’로 변경하여, 성모님께서 하느님나라에 올림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기념했고, 8세기부터 그 명칭을 ‘마리아의 승천 축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도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교회 헌장 59항)고 성모승천 교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로 재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성모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까지 성모님께 각별한 영예와 공경을 바치는 까닭은 먼저 성모님께서 구세사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힘으로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께서 강생하시는데 협력하셨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시어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것이다. “구원사업에 있어서 성모와 성자의 결합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 드러난다.”(교리서 964항) 성모님은 주님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는 성부의 뜻에 적극 동참하신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신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성모님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사시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철저히 따르고 순명하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또한 성모님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따르고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셨다. 이로써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가 되며 교회의 전형이 된다.”(교리서 967항) 성모님은 언제나 마음속에 주님을 담고 사신 분이셨다. 주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하늘의 천사들이 노래하고 목동들이 경배한 모든 것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셨다(루가 2,6-19).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율법학자와 토론하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으로 부르신 것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다(루가 2,42-51). 성모님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사셨고, 그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교회의 모범이요 전형이다.
나아가 성모 승천은 우리에게는 희망의 표지가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발표한 ‘마리아 공경’에서 성모승천 대축일은 마리아의 완전하심과 복되심, 동정의 몸과 흠 없는 영혼이 누리시는 영광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심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날은 교회와 전 인류에게 바라던 종국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일이라고 설명했다.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승천하셨음을 선포함으로써 부활이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현세에 살고 있는 ‘나’라는 온전한 인간의 부활임을 선포한 것이다. 즉 성모 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따라서 성모승천은 현세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능동적인 삶과 복음화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먼저 성모님을 삶의 모범으로 삼고 살아야 하겠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함으로써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육신과 영혼이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도록 해야 하겠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성모님처럼 승천의 영광에 동참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 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야 하겠다.
†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신부-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회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聖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 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 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 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 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마리에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 보다 앞서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최대의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 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유 광수신부 -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에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 안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오늘 복음을 보면 기쁨이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나 인사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쁨의 소리를 전하고 기쁜 말로 응답한다.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져서 마리아는 마침내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서로가 칭찬하는 말이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이요, 하느님이 이루신 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이 들을 때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들이지만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고 또 그 말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니까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나중에는 노래까지 부르게 된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영적인 이야기로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며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서 이루신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루가 복음은 이렇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기쁨이 점점 더 커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복음이 다 기쁨을 전해 주는 복음서이지만 특별히 루까 복음은 복음을 통해서 기쁘게 사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쁨의 원천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그로 인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를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환호하는 천사들과 목자들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즉 기쁨의 메아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특별히 처음 두 장에서 잘 나타난다. 즈카리야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 베틀레헴 동굴에서 울려퍼진 천사의 노래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등장하심으로써 구원이 도래한 사건을 노래하는 환희와 찬미와 감사의 표현들이다.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이 성전으로 돌아와 자기 눈으로 보아 온 바를 두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따라서 루가 복음의 특성은 교회내에서 복음선포의 직무와 봉사와 직책을 수행하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이런 질문에 해답을 주는 복음서이다. 즉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교육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음 선포의 대표적인 모델이 마리아에게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고 노래불렀다. 복음 선포자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이어야 한다.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영혼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고 아름다운 영혼이다. 그리고 건강한 영혼이요, 구원된 영혼이다. 지금 나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가?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는가?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런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나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내 마음이"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주체이다.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는 늘 주님을 찬양하고 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리아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마리아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뀐다. 즉 이제부터 마리아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마리아 자신에게 이토록 큰 일들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신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열거한 것이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려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즉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찬양할 수밖에 없고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놀라운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오래 전에 모 수녀원에서 년피정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날 마리아의 노래에 대해서 강의를 한 후 수녀님들에게 각자 자기의 마니피깟을 써서 찬미가를 불러 보자고 하였다. 수녀님들은 자기 안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이들을 적어 한 사람씩 자신의 마니피깟을 불렀다.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수녀님들의 영혼은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였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놀라운 일이 없는데 찬양하겠는가?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왜 나의 구원자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리고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기쁨과 찬양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놀라운 것을 체험하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큰 일을 하셨다면 나에게도 분명 큰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이 없기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나의 마니피깟을 만들어서 주님께 불러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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