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에다 빨래에다 아이들 목욕에다 밥에다 반찬에다
설거지에다 힘들어 지침이 다가올 때 왜 이런 일이 많아지는가?
왜 설거지하고 지칠 정도로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휴식은 없는 가? 편안한 삶은 없는가? 어디 편안한 곳 없는가?
문득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편안함은 다른 곳에 있는가?
휴~ 깊이 자문해보았습니다.
순간, 깨달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디 좋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힘들어하는 이 오온을 바탕으로 이 인식의 틀에서 일어남을
알았습니다.
괴로움도.. 괴로움의 벗어남도 이 몸을 벗어나서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은 마치 어둠속에서 어둠 때문에 빛이란 것을 보았던 때이며
이 오온과 세상을 어떻게 조화롭게 작용하는가 인식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경험은 오랜시간 동안 어둠속에 있다가 너무나 어둠이 싫어서 혐오하는
시기에 찾아오는 빛처럼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여기를 떠나서 그 어디에도 없다.
깊은 산속 고요한 곳도 아니고 어디 극락 천상의 세계도 아니고
이 오온의 작용, 아는 작용이 바르게 될 때, 바르게 생각할 때
힘든 것이 편안해지는 것,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현재라고 알고 있는 순간에 있음을 짧디짦은
이 순간에 바르게 행동함에 있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여길 때
마음의 힘듦에서 벗어났음을 알았습니다.
비로소 다른 것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변해간다고 들었습니다.
순간순간 너무나 빠르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살아서 천도해야지"
스님! 이 순간이 천도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들이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들이 걱정근심에서 벗어나기를..
부처님의 법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사두 사두 사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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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답 변)_
수행을 한다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았을 때
행복한 것이지 알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알면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진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행복하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로바(탐심)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쉽게 말하곤 하는데..
행복한 것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행복한 것, 즐겨서 행복한 것,
선정(삼매)으로 인해서 행복한 것, 지혜로 인해서 행복한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그저 물질적인 행복, 내 몸의 느낌으로서 느끼게 되는 행복,
욕망으로서의 행복.. 그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그 소리를 듣기만 하면 바로 탐심이
일어나 버립니다.
둑카(dukkha)는 3가지가 있습니다.
낄레사(kilesa/번뇌)로 인해서 괴로운 것을
①둑카-둑카(dukkha-dukkha) 라고 합니다.
②위빠리나마 둑카(viparinama-dukkha)는 로바가 줄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을 때
먹는 것을 어떻게 둑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항상 먹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로바가 줄어들었을 때 먹는 것도 둑카라고 알 수 있습니다.
먹는 것도 매일 먹어줘야 합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합니다.
(청소에다 빨래에다 아이들 목욕에다 밥에다 반찬에다 설거지에다..)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둑카라고 말하고 그것을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먹으면서 언제 둑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까?
둑카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해를 말합니다.
③상카라 둑카(sankhara-dukkha)는 사마디, 삐띠,
빠사디를 경험할 때 그 느낌이 아주 좋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둑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힘이 좋은 사람은 일어나는 순간 바로 압니다.
바로 알기 때문에 도사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이해의 앎이 있기 때문에 도사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처음에 알아차림을 할 때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알아차림이 강해지면
알아차림을 놓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아는 만큼 아는 것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한 가지만 알아도 전부 아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수행을 점점 더 할수록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알게 됩니다.
본래 둑카는 있는 것입니다.
단지 자연의 이치일 뿐입니다..(사야도법문중)
~ ~
그래서
둑카라는 진리는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둑카를 이해하는 지혜가 나야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몸과 마음, 대상과 마음의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것을 진솔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둑카의 성질을
이해할 것 같으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
오온의 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차림(사띠)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괴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혜가 계발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성질이
'일어나면 항상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오히려 수행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띠의 메리트이자 가치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 말고.. 하다 말고
아예 놓아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붓다의 보증수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부처님의 유훈이신
“잊지 말거라 사띠를..”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이란 말은 아주 좋습니다.
그것이 사띠와 지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견해와
생각을 바꿔주는 변환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정견과 정사유의 확립을 사띠가 바르게 하는 일입니다.
즉
수행에 있어서 사띠가 커서 지혜로 성장하고 성숙했을 때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것이
바르게 볼 줄 알고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보는 법을 바르게 하는 일입니다.
身/口/意 3행을 바르게 하여
업을 짓고 바르지 못한 인식의 틀(윤회의 고리)을
벗어나게 하는 길입니다.
수행의 힘-보는 힘(인식/지각)이라는 것은,
앎의 지혜(바른 견해/正見), 이해의 앎으로서
聞/思/修가 성장하여 그렇게 되어갑니다.
以前의 존재의 방식,
인식/지각의 습관성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반드시 why-how, 원인/결과를 아는 지혜,
법의 조사에 의한 이해가 있어야만 됩니다.
바르게 볼 줄 알고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것에서
반드시 바른 대상(법/담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번뇌의 과보로부터.. 업의 과보로부터..
과보의 과보로부터 벗어나는 사띠의 가치,
위빠사나 지혜의 힘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
_(2016년 7월 구름 낀 오후나절.. 사사나 스님)_
첫댓글 스님~~!!
오랜만에 아주 힘이 있는 담마를 접하니 신심과 삐띠가 저절로 일어납니다. 읽을수록 맛이 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_() _
어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