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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생애에 관해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제 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와 묘도부인(妙道夫人)의 딸로, 제 10대 풍월주 미생랑의 누나이다.
아버지 미진부는 법흥왕과 벽화부인(碧花夫人)의 딸 삼엽공주(三葉公主)의 아들이고, 어머니 묘도부인은 위화랑(魏花郞)과 오도부인(吾道夫人)의 장녀인 옥진궁주(玉珍宮主)의 딸이다.
오도부인(吾道夫人)는 소지마립간의 정비인 선혜부인(善兮夫人)의 딸로, 아버지는 묘심랑(妙心郞)으로서 보도부인(법흥왕의 비)과는 아버지가 다른 자매지간이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의 외모를 묘사하기를,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고 한다.
사다함(5대 풍월주)과 사랑하는 사이었으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에 의해 지소태후와 이사부(태종, 苔宗)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세종(世宗)(6대 풍월주)과 결혼하게 된다. 사다함은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청오가'(靑烏歌)를 부르며 슬퍼하다가 죽었다.
이후 세종은 사다함의 종제 이화랑의 추천으로 6대 풍월주가 되었으며, 훗날 미실의 애인이 되는 설화랑이 세종의 보좌를 맡는다. 이 날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말하더니 과연 미실은 얼마 뒤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이후 미실은 지소태후를 통해 진흥왕의 후궁이 된다. 이때 진흥왕의 왕후이자 미실의 이모인 사도왕후(思道王后)는 미실에게 "네가 태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라고 말하며, 진흥왕의 태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동륜과도 정을 통하게 하였다. 또한, 남편 세종이 출정을 한 틈을 타,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한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源花) 제도를 29년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이러한 관계는 한동안 들통나지 않고 유지되다가, 동륜이 진흥의 첩 보명궁주를 범하기 위해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마무리된다(572년). 이 일로 인해 미실과 동륜의 관계가 들통나고 미실과 세종은 궁 밖으로 쫓겨남은 물론, 미실과 세종은 각각 원화와 풍월주에서 물러난다.(풍월주는 설원랑이 계승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진흥왕은 미실의 처소를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그를 마복자로 삼는다.
진흥왕의 애첩이 된 미실은 이후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국정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진흥왕의 아들인 금륜(진지왕)과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하는 한편, 사도태후와 함께 손을 써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다. 그러나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知道夫人)에게 돌아간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미실은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된다.
이후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는 미실과 논의하여 진지왕을 폐하고, 자신의 오빠인 노리부공(弩里夫公)에게 국정을 맡겼다. 노리부공은 세종과 짜고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으나 다른 화랑들의 반대와 사도태후의 만류로 인해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우고 세종을 국선(國仙), 노리부공에 반대했던 화랑 문노(文弩, 8대 풍월주로 어머니가 가야 사람이다.)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이후 미실은 설원랑과 문노의 사이를 중재하여 문노 역시 미실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이후 문노가 아선의 자리로 풍월주가 되었으므로 이를 화선(花仙)이라 칭했다.
진평왕 7년인 585년 자신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가 되자 미실은 하종으로 하여금 부풍월주가 되게 하였다. 3년 뒤에는 하종이 미생의 뒤를 이어 11대 풍월주가 된다.
만년에는 중이 되었다고 하며, 수많은 남성들 중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다. 설원랑과의 사이에는 보종공(寶宗公)을 낳았다.
미실의 존재가 등장하는 유일한 서적인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미실은 남편인 세종전군을 시작으로,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지만 사다함의 아이는 없습니다.
미실의 첫아들은 세종전군의 아들인 하종공인데
죽은 사다함이 미실의 꿈에 나타나 "너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뒤
임신하여 하종이 태어났는데, 그 모습이 사다함과 많이 닮아있어
항간에 하종이 사다함의 아들일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김대문은 화랑세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실 + 세종전군 => 하종공, 옥종공
미실 + 진흥왕 => 수종군 , 난야공주, 반야공주
미실 + 동륜태자 => 애송공주
미실 + 진평왕 => 보화공주
미실 + 설화랑 => 보종공
미실 + ? => 애함공주
원훈공은 김흠순의 아들로
어머니는 12세 풍월주인 보리공의 딸 이단낭주입니다.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은 두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두사람 모두 보리공의 서녀인 보단, 이단입니다.
보단낭주가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반굴공을 비롯하여 원수, 원선등 7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단낭주는 원훈공 외에 2남 2녀를 낳았습니다.
미실의 생애에 관해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제 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와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妙道夫人)의 딸이자, 제 10대 풍월주 미생랑의 누나이다. 사다함(5대 풍월주)과 사랑하는 사이었으나, 진흥왕의 생모 지소태후에 의해 지소태후와 이사부(태종, 苔宗)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세종(世宗)(6대 풍월주)과 결혼하게 된다. 사다함은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청오가'(靑烏歌)를 부르며 슬퍼하다가 죽었다.
이후 세종은 사다함의 종제 이화랑의 추천으로 6대 풍월주가 되었으며, 훗날 미실의 애인이 되는 설화랑이 세종의 보좌를 맡는다. 이 날 미실의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말하더니 과연 미실은 얼마 뒤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이후 미실은 지소태후를 통해 진흥왕의 후궁이 된다. 이때 진흥왕의 왕후인 사도왕후(思道王后)는 미실에게 "네가 태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라고 말하며, 진흥왕의 태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동륜과도 정을 통하게 하였다. 또한, 남편 세종이 출정을 한 틈을 타,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한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 제도를 29년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이러한 관계는 한동안 들통나지 않고 유지되다가, 동륜이 진흥의 첩 보명궁주를 범하기 위해 담장을 넘다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마무리된다(572년). 이 일로 인해 미실과 동륜의 관계가 들통나고 미실과 세종은 궁 밖으로 쫓겨남은 물론, 미실과 세종은 각각 원화와 풍월주에서 물러난다.(풍월주는 설원랑이 계승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진흥왕은 미실의 처소를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그를 마복자로 삼는다.
진흥왕의 애첩이 된 미실은 이후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국정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진흥왕의 아들인 금륜(진지왕)과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하는 한편, 사도태후와 함께 손을 써 진지왕을 왕위에 올린다. 그러나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知道夫)에게 돌아간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미실은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된다.
이후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는 미실과 논의하여 진지왕을 폐하고, 자신의 오빠인 노리부공(弩里夫公)에게 국정을 맡겼다. 노리부공은 세종과 짜고 왕위에 오를 계획을 세웠으나 다른 화랑들의 반대와 사도태후의 만류로 인해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우고 세종을 국선(國仙), 노리부공에 반대했던 화랑 문노(文弩, 8대 풍월주로 어머니가 가야 사람이다.)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이후 미실은 설원랑과 문노의 사이를 중재하여 문노 역시 미실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이후 문노가 아선의 자리로 풍월주가 되었으므로 이를 화선(花仙)이라 칭했다.
진평왕 7년인 585년 자신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가 되자 미실은 하종으로 하여금 부풍월주가 되게 하였다. 3년 뒤에는 하종이 미생의 뒤를 이어 11대 풍월주가 된다.
만년에는 중이 되었다고 하며, 수많은 남성들 중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다. 설원랑과의 사이에는 보종공(寶宗公)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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