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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인 5 - 백제국 천도와 멸망 전후에 나타난 해구 등 반역자들!
1. 문주왕을 시해하고 반란한 해구 (解仇)
해 (解) 씨는 온조왕대 해 루(解婁) 가 우보 (右輔) 에 임명된 이래 전지왕대에 왕척 (王戚) 으로 관직을 독점하던
정치세력이니 웅진 천도라는 위기 상황에서 문주왕대에 해씨가 병관좌평 (兵官佐平) 이 되어 군국정사를
마음대로 해 다른 귀족들이 반항하자 해구는 연씨 (燕氏) 세력과 손을 잡고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한성의 중심 세력인 해씨는 웅진 천도후 연고가 없는 상황이라 웅진에 기반을 갖춘 연씨 세력과 제휴한 것으로
보이니 연씨 세력의 거점을 탕정성으로 보고 근방의 대두성을 해씨 세력의 재지기반으로 비정하는 견해입니다.
대두성을 수리하고 한강 북쪽의 백성들을 대두성으로 옮겼다는 기사의 주체를 웅진 천도
이후 대두산성으로 재지기반을 옮긴 해씨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해구의 반란 실패 후 대두성을 두곡(斗谷) 으로 옮긴 것을 해씨 세력의 사민으로 추정합니다.
백제 대신 중에 해구는 3명이 있으니, 첫 번째 해구 ( 解仇) 는 백제 비류왕 대의 귀족
으로 대성 팔족중 하나인 해씨 가문 출신이니..... 312년 병관좌평에 올랐는데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던 진(眞) 씨에 대한 비류왕의 견제로 보입니다.
두 번째 해구 (解丘) 는 백제 18대 전지왕대의 대신으로 전지왕의 외척이니 407년
2월에 병관좌평에 임명되면서 백제의 병권을 장악했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할 목적으로 417년 7월에 사구성 (沙口城) 건설을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해구 (解仇) 가 바로 반역자로... 백제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대의 권신,
반역자로 관등은 병관좌평 (兵官佐平) 이며 사망지는 반란을 일으킨
대두성 (大豆城) 에서 진(眞) 씨 들이 주축인 관군에게 패해 478년에 죽었습니다.
해구는 문주왕의 웅진 천도로 부여씨 왕권 약화와 백제 정국의 불안을 보고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었던듯 한데..... 477년 백제 왕실에서 문주왕
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왜국에서 귀국 했던 내신좌평 곤지 (昆支) 를 죽입니다.
477년 8월에 해구는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러 정권을 장악하고 법도를 문란하게 만드는
한편 심지어 왕을 없애려는 마음까지 품게 되었으니, 477년 9월, 해구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 궁궐 밖에 묵고있던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처형하고 국가 전권에 대한 장악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해구의 독단적인 행동 보다도 그를 받쳐주는 해씨 (解氏) 가문이 주도한 것으로도 추정되기도 하는데
이후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여전히 나라의 권력은 해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으며 478년 봄에 해구는 은솔 연신 등의 무리와 더불어 대두성에 웅거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이는 해씨와 마찬가지로 한성을 기반으로 했던 귀족인 진씨(眞氏) 가문이 삼근왕을 도와 해씨 가문을 축출 했기
때문이니, 해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대립 속에 밀려난 해구는 지역 토착세력인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 (大豆城) 에서 항거했는데, 이때 해구는 삼근왕이 보낸 좌평 진남(眞男)의 군사 2,000명도 격파합니다.
하지만 해구는 덕솔 진로 (眞老) 가 이끄는 500명의 정예병과 교전하다 처형당했으며 그와 함께 싸우던 연신은
고구려로 도망갔고 이후 연신의 부인과 아이들은 사로잡혀 웅진의 저자에서 목이 베어져 죽었으며, 목만치가
밀려난 시기를 구이신왕 대가 아닌 문주왕 대로 보는 설의 경우 해구의 전횡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입니다.
2. 삼근왕을 시해한 진씨들과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
고구려 침공에 시달리던 461년 백제 개로왕은 동생 곤지 왕자에게 임신한 후궁을 내주며 일본으로
도피시키는데, 바다를 건너는 중에 태기를 느껴 북규슈 가카라시마 동굴에서 왕자를
출산하니...... 섬에서 태어났다고 섬왕 즉 시마 (사마 斯麻) 로 부르니 훗날 백제 무령왕 입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 을 침범해 개로왕을 죽이자 신라에서 구원병 1만을
빌려 돌아온 문주왕이 공주에서 왕위에 오르나 2년만에 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고 왕위을 이은 13세의 삼근왕은 해구를 토벌한 "진씨" 세력에 의해 시해됩니다.
곤지 왕자는 귀국할때 장남 무령왕을 대동했으나, 진씨들은 궂이 번거롭게도 멀리 일본에 살고
있는 곤지의 차남인 어린 동성을 왕으로 세우는데, 왜국에서 곤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14살 동성은 유랴쿠왕 (천황) 이 궁궐로 불러 머리를 쓰담으며...... 왕도를
가르친후 쓰쿠시(후쿠오카) 에서 왜병 500명 호위를 붙여 한반도로 보내 백제 왕위를 잇게 합니다.
유랴쿠왕 (왜 5왕중에 다섯번째 무 武) 이 격려하며 왜병을 붙여 내보낸 동성왕은 14살 어린
나이로 백제 말도 서툴고 한반도에 연고도 없으니...... 처음에는 진씨들의 허수아비
였지만 왜병 500명이 주야로 지켜 진씨들로 부터 왕의 목숨을 보호하니 무사히 성년이 됩니다.
동성왕은 백제 조정을 장악해 북위(실제로는 고구려) 와 전쟁을 벌려 승리하는등 백제를 반석 위에 올려 놓으니
이제 왜국에서도 더 이상 백제의 멸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501년에 사냥 중에 도성에서
밀려난 가림성 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되니 역시 왜국 땅에서 태어났던 형인 무령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삼국사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차남이라고 했지만 일본 서기에는 동생으로 나오니....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서기는 조작된 사실이 많으니 삼국사기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으니 공주 송산리 고분 벽돌 무덤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대 무령왕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 중국 양나라 임금 무제에게 조공하고
책봉 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지석에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합니다!
부장품은 108종 2,906점인데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에 달할 정도니 참으로 대단한 발굴
이었으니 무령왕릉은 백제식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중국
양나라 식이었으며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담은 관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금송" 이라!!!
중국의 남조인 송 (劉宋) 서 이만전 (夷蠻傳) 과 남제서 및 양서에 왜국의 다섯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기로 왕으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나오니.... 그 계보는
산(讚 찬) - 친(珍 진)- 사이(濟 제)- 고오(興 흥)- 부(武 무) 인데 소위 왜 5왕 이라고 합니다.
왜국왕 찬 (讚) 은 413년과 421년, 425년과 430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438년에 친(珍 진) 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使持節都督 (사지절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六國諸軍事 (육국제군사) 安東大將軍 (안동대장군) 倭國王 (왜국왕) 으로 자칭합니다.
송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안동장군 왜국왕의 직위만 수여했는데, 그후 3번째 왕 제(濟) 는 443년 송에
사신을 보내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지위를 받았으며 이후 451년에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諸軍事) 에 임명 됩니다.
4번째 흥(興)은 462년 사신을 보내 직위를 승계받았으며 왜왕 무(武) 가 왕위를 이었는데 무 (武 유랴쿠)는 478년
조공하며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 倭國王) 이라고 자칭하자, 백제왕만 빼고 승인 합니다.
송나라는 왜국왕의 요청에 대해 백제는 뺐으니.... 백제는 중국과 이미 수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신라는 중국과 수교가 없었기 때문인데 478년 무(武) 는 진동대장군을 거쳐 정동대장군
을 제수받는데,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공물을 보냈고.... 아들 장수왕은 정동장군,
백제 전지왕은 진동장군의 책봉을 받고 있던터라 왜국왕의 벼슬이 더 높았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국 왕들이 왜 이런 한반도 나라들의 칭호를 중국에 끈질기게 요청했느냐? 아마도 4세기 말에 김해
금관가야가 규슈에 진출해 가야- 왜 연합왕국을 세우고는 391년에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에 상륙해
가야군과 연합해 서라벌을 포위했으니... 원래가 한반도인들이라 후손들이 연고권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계가 장악한 일본 조정은 모국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 백제를 부흥
시키기 위해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고구려군과 싸워야 하는데... 이때 한반도에서 물자와 병사들을
징발해야 하니 그때를 대비해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왕이라는 저런 “권위” 가 필요했다고 보여집니다?
동성왕이 대왕으로 불릴만큼 백제가 안정을 되찾았으니 이제 고구려에 멸망할 염려가 없어진지라, 왜국왕(천황)
들은 이제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수십년간 줄기차게 요구해 받았던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使持節都督倭新羅 任那加羅 秦韓慕韓 六國諸軍事) 같은 작위는 더 요청하지 않게 됩니다.
훗날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하자 왜국은 백제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왜국에 인질로 와 있던 의자왕의 동생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붙여 한반도로 내 보내 백제 왕위를 잇게 히고, 왜국 사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다시 1천척 배에 3만 대군을 한반도로 보내지만 백강(금강) 에서 당나라 수군에 화공을 당해 패하니 철수합니다.
3. 의자왕을 잡아 당나라에 바친 예식진!
웅진방령(성주) 예식진은 형제인 좌평 예군과 함께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신해온 의자왕
을 사로잡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바침으로써 백제는 구심점을 잃고 멸망했으며...
또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당나라 편에 앞장 서서 백제의 복국 (復國) 운동을 와해시킵니다.
이후 당나라에서 이 공으로 좌평 예군은 우무위장군 (정 4품)을 그리고 웅진방령
예식진은 좌위위대장군(정 3품) 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습니다.
반역자 예식진은 당나라 고종으로 부터 궁궐의 경비와 호위를 담당하는 벼슬에
오른 것인데.... 또 그는 왜에 당나라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 정벌을 준비할때는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합의를 도출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는 전적으로 믿기는 힘드니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했는데 백제
부흥군이 계속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에서는 그가 신라를 정탐하러 온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2년간 감옥에 들어갔으니 정말 억울했을 것입니다.
가슴을 열어서 속마음을 보여 줄수도 없고..... 나당전쟁 이후 신라 문무왕이 당에
화해의 제스처로 포로 석방을 할 때 예군도 풀려나 당에 갈수가 있었습니다.
이문영 작가가가 동아일본에 쓴 글에 보면..... 예군은 백제에서 최고위 신분인
좌평이었다. 그런 자가 나라가 멸망의 백척간두에 섰을 때 나라를 구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왕을 잡아 적국에 바치는 결정적인 배신행위에 앞장섰다.
의자왕은 말년에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왕권 강화에 나섰다. 하지만 예씨 일족은 숙청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이 옛 수도였고 방어에 최적화된 웅진성을 지키는 의자왕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배신의 대가는 달콤했으니 예씨 일족은 투항 이후 당나라에서 고위 관리를 지내며 내내 편안하게 살 수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조상을 중국인으로 날조했으니 예군은 자기 집안이 300년대 초반에 백제로
이주했다고 말하고, 2세대 예소사는 400년대에, 3세대 예인수는 600년대 초반에 백제로 이주했다고 적었습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백제로 간 연대가 짧아지는데, 자신들이 중국에서 건너온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자기들은
백제 보다는 중국에 가까운 사람이라 주장하려는 것이었으니 나라를 배반하고 정체성마저 지워버린 셈입니다.
예씨 일족의 역사는 묘지명에 낱낱이 적혀 있는데, 묘지명은 무덤에 넣는 기록으로 돌에 새겨져 있어서
세월의 흐름을 견딜 수 있으니 예군은 678년 2월 1일 자신의 집에서 숨졌고, 당 황제의 애도를 받으며
무려 6개월간의 장례 기간을 거쳐 10월 2일에 장례를 치렀는데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을까?
예씨 일가는 생전 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의 기록에서 그 이름은 ‘출세한 가문’ 이 아니라 ‘나라를 끊어먹은
집안’ 으로 남았으니 단기적인 이익은 오래가지 않으며, 후대의 평가와 공동체의 기억은 매섭다.
백제 말기의 예씨 일가를 돌아보며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오늘의 선택이 후대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하지만 이문영 작각의 저런 평은 우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예씨들의 후손이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오늘날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후회하고 있을지..... 아니면
소국의 작은 성주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천자의 품으로 귀순했다고 자랑스러워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군(禰軍 613~678) 의 성은 예씨(禰氏)이고, 자는 온(溫)이니 웅진(熊津) 우이
(嵎夷 사비)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예복 (禰福), 할아버지는
예예(禰譽)이며, 아버지는 예선(禰善) 으로 모두 백제의 제1품 좌평(佐平) 을 지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다만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670년] 7월 조,
문무왕 11년 7월 조, 문무왕 12년 9월 조 등에 ‘웅진도독부 사마 (司馬) 예군 (禰軍)’ 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천지기(天智紀) 4년 9월 조에 ‘우융위낭장 (右戎衛郎將) 상주국
(上柱國) 백제(百濟) 예군(禰軍)’ 으로 이름이 실려 있으니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예군은 613년(무왕 14) 에 태어났는데,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킵니다.
예군은 웅진 방령(方領) 이던 아우 예식진(禰寔進) 과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장군 소정방 (蘇定方) 에게 바쳤으니
그 공으로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사마에 임명되었습니다.
예군의 묘지석에는 “660년에 천자의 군대가 본국을 토벌한 날에 기미를 보고 장차 닥칠 변화를
알아차리고 군사를 일으켜 귀순할 바를 알았으니 이는
유여(由余) 가 서융(西戎) 에서 탈출한 것과 비슷하고 금제(金磾) 가 한나라에 들어간 것과 같다.
성상께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영광스러운 반열에 발탁하여 우무위산천부
절충도위 (右武衛滻川府 折衝都尉) 에 임명하였다” 라는 구절이
있어, 백제가 멸망할 때 예군이 당나라에 매우 협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당서(舊唐書)』 권83 소정방전에는 “그 대장 예식(禰植)이 또한 의자(義慈)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
하였으며 태자 융과 나머지 여러 성주가 모두 함께 보내졌다” 라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권111 소정방전에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식은 예군의 아우 ‘예식진’ 을 가리키는데 정3품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 에 까지 올랐으며
예군은 670년 7월 당나라의 사신으로서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2년간 억류 되었으며 672년
9월 풀려난 뒤 672년 11월 21일 궁궐 경비를 담당하는 종3품 우위위장군 (右威衛將軍) 에 임명되었다.
예군은 66세이던 678년 2월 19일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 연수리(延壽里) 사저
에서 사망하였다. 678년 10월 2일 건봉현(乾封縣) 고양리(高陽里) 에
장사 지냈는데, 당 고종이 견포 (絹布) 300단 (段)과 조 300곡 (斛) 을 내려 주었다.
2006년 중국 서안시에서 예군의 두살 아래 동생 예식진의 무덤과
가족 묘역이 발견 되었고, 「예식진묘지명(禰植進墓誌銘)」
이 출토되었다. 2011년에는 도굴되었던 예군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예군묘지명(禰軍墓誌銘)」 은 개석(蓋石)과 지석(誌石)이 모두 잘 남아 있는데, 개석은 가로 63㎝,
세로 65㎝, 두께 12㎝ 크기이고, 지석은 가로, 세로 모두 59㎝, 두께 10㎝ 크기이며, 31행
30열 884자가 새겨져 있다. 예군이 죽은 678년에 만들었으며, 내용은 선조와 가계, 활동과
업적, 죽음과 장례, 명문 순으로 정리하였다. 2022년 현재 서안박물원(西安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좌위위대장군 (左威衛大將軍) 에 제수되어 활동하다가 58세에 죽었는데, 별다른
공이 없는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이민족으로 정3품 고위직
벼슬까 지 오른 이유는 ‘의자왕 체포’ 라는 엄청나게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4. 당나라에 귀순한 백제 왕자 부여 융
부여융은 의자왕등 1만 3천명 백제인들이 이 당나라로 압송될때 끌려 갔다가 당나라로 전향해
사가경 이라는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그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백강으로 가서 왜선 천척 중에 400척을 불태우는 대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운다.
*** 왜군 1천척이 금강에서 당군의 화공에 패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좌절되고 맙니다 ***
당나라는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임명해 남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고 신라와는 화친하게
했으니,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과 함께 665년 2월 신라 문무왕과 웅진성 에서
만나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맹세를 하고 맹세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의자왕)은 순종과 반역의 이치에 어두워 이웃과의 선린관계를 돈독하게 하지 않고
사돈과도 화목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도 상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만
일삼는 동시에 신라를 침략해 편안한 날이 거의 없었다. 이에 천자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곳을 잃으면 가엽게 여기고 백성들이 고생함을 불쌍히 여겨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일렀다.
그럼에도 백제는 험한 지형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천자의 가르침을 무시했기에 황제가 노하여 삼가 죄를 물은
것이다. 깃발이 향하는 곳은 한번의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으니 궁궐을 늪으로 만들어 후대에 경계로 삼고, 또
뿌리를 뽑아 후세에 교훈으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를 품에 안고 배반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은
선조왕들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지는 대를 이어주는 것은 옛 성현들의 통상적인 규범이라.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옛 책에 전해오기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땅을 지키게 하려하니, 신라와 서로 의논해 길이 우방이 됨과 동시에 지난날의
묵은 감정은 풀고 새로이 좋은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영원히 속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천자의 뜻을 알리노니, 부디 두 나라는 혼인을 언약하고 맹세의 뜻으로 희생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시종일관 함께 돈독해져 재앙과 환란도 같이 나누고 걱정하며
은혜로운 뜻을 형제와 같이 할지어다. 황제의 명을 잘 받들 것이며, 맹세한 뒤로는 서로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딴 마음을 품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한다면, 천지신명이 굽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을 기르지도 사직을 지키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제사가 끊어져 후손이
없어지도록 할 것이다. 철판에 글을 새겨 금가루를 입혀 종묘에 보관하니 자손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여, 이 말을 들으시고 차려진 음식을 드시고 복을 내려 주소서” 라는 내용의 글이다.
웅진성 백마의 맹세 직후 유인원이 당나라로 돌아가자 부여융은 백성들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668년 ‘웅진도독부 대방군왕’ 이
되어 백성들을 모으고 안정시키게 함과 동시에 신성으로 옮긴 안동보호부를 통솔했다.
당시 백제 땅을 차지한 신라가 강성하므로 그곳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에 머물다가 682년에 죽는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손자
부여경을 계승시키려 했으나 이미 백제 땅은 신라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부여융은 당나라에 빌붙어 조국의 복국 운동을 저지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강 전투
에서 당나라가 왜군에 대승을 거두는데 수훈을 세우고는.... 백제 복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흑치상지 를 회유시킴으로써 조국 백제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역적 입니다.
부여융의 묘지석이 1920년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되었다. 1995년 부여군은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 낙양시 맹진현 부근에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하는데
성공했으나 목관의 흔적과 지석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중국으로부터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정
되는 곳의 흙과 부여융의 묘지석 복제품을 한국으로 가져와 부여시에 의자왕릉과 부여융 묘를 조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