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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 철학사
동아대 철학과
차례
1장 꽁트
2장 베르그송
3장 소쉬르
4장 사르트르
5장 바슐라르
6장 메르로 퐁티
7장 알뛰쎄
8장 푸코
1장 꽁트의 실증철학
1. technocracy 운동
이성적 사회라는 근대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어 받으며, 18세기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 그리고 이것을 기초로한 19세기의 산업 혁명에 영향을 받았다. 이같은 운동은 후일 20세기 초 미국에서 다시 등장하여 제3당 운동으로 발전하였고,심지어 최근의 다니엘 벨 등의 정보사회 개념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기본 입장은
ㄱ. 사회의 제 문제는 이성적 과학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ㄴ. 과학에 의한 사회의 재조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이를 거부하는 유한 계급이 사회적 권력을 차지 하고 있기 때문
ㄷ. 앞으로의 사회는 과학자과 같은 전문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2. 실증 과학의 방법론.
영국의 경험론적 인식론의 전통을 이어 받으며,
후일 20세기초 논리적 실증주의로 발전.
그런데 여기서는 사회과학,내지 인간과학의 방법론과 연관하여 제시된 이론.
이는 과학의 연구에서 실재론적 입장과 대비되는 것.
우리가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계기나 공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인데.
실재론자들은 이런 반복적 경험의 배후에는 일정한 실재가 있어서 이런 실재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반면 실증주의는 이런 반복적 경험 자체만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 이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고,그것에 대한 어떤 주장도 경험적 근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경험의 반복을 우리는 하나의 법칙으로서 규정할 수 있지만,
이런 법칙은 절대적 성격을 지니지 못한다. 앞으로 새로운 경험이 출현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항상 진리에서 상대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실증적 방법을 인간의 행동이 대상이 되는 사회 현상들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각자의 주관적 의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의 의도는 다양한 수다을 사용하여 실현될 수가 있으므로,(합목적성)
단순히 행동에 대한 외면적 관찰을 통해서는 , 그 행동에 대한 의도를 알아 낼수도 없을뿐더러,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 사이에 일정한 법칙적 현상이 있다고 볼 수도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독일에서 발전한 역사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이끈 의도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른바 공감의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8세기초,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에서 인간의 경제적 행동이 합목적적 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경제적 영역에서 일정한 법칙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 뒤에 사회 현상에 대한 통계적 연구들은
집단적 현상에서 일정한 법칙이 발견됨을 주장하였다.
꽁트가 사회현상에 이같은 실증주의를 적용시키려 하는데에는, 이러한 사회과학적 발전을 전제해야 한다.
3. 역사의 발전에 관한 콩트의 생각
후기의 실증철학 : 인간 행위를 총체적으로 연구-즉 사회 유기체를 이루는 제 영역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 또한 정태적인 이론에서 동태적 이론으로
이런 연구에서 꽁트는
ㄱ. 역사 발전의 동력은 인간의 지성.
ㄴ. 즉 각각의 지성의 단계에 따라서 물질적으로나 사회조직적 단계가 변화한다.
지성의 단계 사회조직의 단계 사회의 기본 단위
신학적 단계 군사적 가족
형이상학적 단계 법률적 국가 (추상적 보편자로서)
실증과학적 단계 산업적(상호 애정) 인류.
2장 베르그송
1.배경, 생애
1859.10.18 파리 출신,그 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음악 교사 및 작곡가
1878 E'cloe Normal Supe'rieur에서 공부
-에밀 뒤르껭, 장 조레스와 함께 다님)
실증과학 및, 다윈 스펜서 등의 진화론, 윤리적 공리주의
유태 cabalism에 영향을 받음.
1880-1888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철학을 연구.
1896 물질과 기억
1897-1900 에콜 노르말에서 교수, 이후 파리대에서 교수.
1907 창조적 진화
일차대전 중 미국의 참전을 설득, 전후 국제 연맹에서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국제 평화를 위해 기여.
1927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32 도덕과 종교의 두 기원
1939 나치의 박해로 그의 책이 금지되고, 그의 공적 활동이 중단
41 사망.
2. 지성과 직관.
1) 지성
-외부에서 접근, 즉 일정한 관점에서 보며, 그러므로 그 결과는 상대적.
-기호의 이용.
기호는 사물에 관한 하나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물의 이미지에 적용되어 그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호는 대상과 본질적으로 차이있다.
-분석적.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의 공통적 요소를 파악, 한 대상을 이런 공통적 요소의 함수로 표현.
예를 들어 인간의 공통성->인간성
개개의 인간은 이런 공통성*특수적 조건의 결과.
이러한 분석은 순환적.
즉 공통성은 이미 주어진 것들로부터 추출.하지만 새로운 어떤 것이 나오게 되면, 여기에 두가지 가능성. 즉 이 새로운 것은 주어진 공통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런 개념에 속하지 않든가, 아니면 이제 이 새로운 것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공통성을 추출하면, 이것은 과거의 공통성과 다르므로, 이는 새로운 개념이 된다.
결국 베르그송은 실재의 본성은 이론 지성으로서는 인식할 수 없다고 본다. 근대과학은 인간과학 조차(의학, 심리학) 이런 지성에 의존하므로, 그 본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2) 직관
-의식에 관한 자기의식을 보자.
이는 직관적이면서 본질적이다. 또한 그 진리는 의심할 수가 없다.
다만 자기의 의식에 관해서는 특권적이지만, 타인의 의식은 접근 불가능.
-타인의 의식은 어떻게 아는가?
외부 행동에 대한 관찰, 그리고 자기의 경우에 비추어 유추? 즉 sympathy에 의해 가능?
이를 위해서는 자기와 타인의 근본적인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상에 대해서도 이런 공감이 가능할까?
즉 우리의 의식을 넘어선 대상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런 공감이 가능할까?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는 대상을 직관적으로 그 진리에 있어서 알게 될 것이고, 대상의 본질을 뚫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경험은 이런 공감의 능력은 없는 것같다. 단지 외부에서 접근하고, 상대적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경험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 그리고 그 진리에 있어서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본래 이런 예술가적 직관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아니 다른 이유 때문에 이런 직관을 억제하였으므로, 퇴화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우리는 귀를 움직이지 못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서 노력하면 귀를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3)지성이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용적 목적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에 있어서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부분을 스냅쇼트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생물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예술가들이 직관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은 사물에 대한 어떤 실용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 사물에 대해 순수한 접근을 한다.
미적 접근이란 그야말로 대상 자체를 위한 대상에 대한 접근, 순수 판단이다.
그 결과 그들은 실용적 관점을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직관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3. 순수 지속으로서의 시간.
시간을 우리는 지성의 방법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동질적인 단편들을 연결함으로써 연속적인 시간을 구성해 낸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 진정한 실재적인 시간인가 ?
제논의 역설:
만일 그렇다면, 나르는 화살은 나르지 않는다. 또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를 수 없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경험과 명백히 대립되므로,
이런 생각에 미리 전제된 단편적인 시간 개념은 잘못이다.
베르그송은 이런 단편적 시간을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말하거나, 의식의 그림자를 떠도는 공간의 환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진정한 실재적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의 단초? 음악적 멜로디의 체험을 보자.
우리는 이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악보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보는 하나의 음과 그 다음의 음의 연속적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총체적 효과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디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멜로디의 연속에 의한 화음 효과이며, 우리는 이를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시간은 그러므로 지속이다.
지속은 계기들의 병열이나 외적인 결합은 아니다. 계기들은 내적으로 연속되는데,
베르그송은 지속을 ‘눈덩이’에 비유했다.
이런 연속성은 동일한 것의 연장이 아니라, 끊임없는 창조이며, 따라서 지속은 불가역적이다.
4. 물질과 기억.
1)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체의 이원론을 극복하려 하는데,
이는 결국 지각과 기억, 의식과 두뇌, 심리학과 생리학의 관계에서 문제된다.
이원론, 유물론, 양면론, 평행론, 기회원인론, 부수적 현상론.
베르그송은 이를 기억의 문제에 연결시켜 해결하려 한다.
2) 암기
이는 자극-반응의 자동 기계적 과정. 예를 들어 앵무새의 기억.
3)순수 기억.
물질의 연속적 창조적 발전 과정 속에서, 그 이전의 물질 상태는 현재의 물질 상태의 심층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예를 들어 음악의 멜로디의 연속성에서, 이전의 음은 현재의 음의 심층에 놓여진다.
이런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물질 속에 물질적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 속에 이미지화되어 남는다.
4)과거의 물질이 이처럼 현재의 이미지로 변화한다는 사실에서 정신과 물질이 상호 변환가능한 것, 그러므로 동일한 것임이 드러난다.
두뇌란 기억의 물질적 저장 장소가 아니다. 두뇌는 교환소, 즉 물질이 이미지화하고, 이미지가 물질화하는 스위치 시스템이다.
5. 창조적 진화
순수지속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의 흐름.
즉 새로운 형태의 끊임없는 창조.
기존 진화론의 문제(라마르크/다윈)
-종의 지속성, #고래는 물 속에서도 포유류의 특징을 가짐.
-하나의 기능은 여러 조직의 공동 작용. #눈: 눈꺼풀, 눈동자 조리개, 망막...
그 각각이 진화되었다면, 이런 진화를 통해 하나의 기능을 설명하기 어렵다. 즉 눈 조리개는 완성되었지만, 눈꺼풀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
-결국 생명체의 기능이란 이와 같은 유기적 전체의 작용이므로, 어떤 생명체도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획득형질의 유전 불가? # 두더지가 장님이므로 땅 속으로 들어갔는 것인가 아니면 땅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장님이 되었는가?
3장 소쉬르의 언어학
1.형성과정
Fernand de Saussure
1857.10.26 제네바 출생. 개신교도, 자연과학자의 명문
1875-1880 라이프찌히에서 언어학 연구, 소장 문법학자들과 교제,
1879 ‘인구어 원시 모음 체계 연구’ 발표
1880 ‘산스크리트어 속격 용법에 대하여’(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언어학자 Whitney: 언어의 생애와 생장(1876, Leskien 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음.
-언어는 인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제도.
1881 파리대학 고등 연구원의 브레알 교수의 후임으로 취임
10년후 파리 생활을 끝내고, 제네바로 돌아가, 별정적 교수로서 산스크리트어와 비교 문법을 가르치며, 1896-1911까지 일반 언어학을 강의,
후일 바이와 세슈에가 그 노트를 바탕으로 일반 언어학 강의를 출판.
그러나 생전에 그의 이론은 무시당했음.
1913.2 후두암으로 사망.
2.구조 언어학의 연원
1)비교문법과 역사적 언어학
18. 말, 영국의 William Jones, 산스크리트어를 발견한 이후, 1816 F. Bopp 연구가 주요.
언어들 간의 비교,
그것들 사이의 일치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발생적 근거를 가진다.
공동의 모어를 발견하고,
母語로부터 진화의 법칙의 발견에 진력
#라틴어 genus, generis, genere, genera, generum
그리스어 ge'nos, ge'neos,ge'nei, ge'nea, ge'neon
산스크리트어 g'anas, g'anasas, g'nasi, g'naassu, g'nasam
그리스어의 경우 모음 사이의 s 는 탈락, 라틴어의 경우 모음 사이에 r을 대체
문제점:
비교의 우연(언어의 한 단편을 이용, 비교되는 단편들 끼리의 지리적 시간적 차이),
모어의 근원은?
2)구조의 개념
음소이론에서 프라그 학파( R. Jakobson, N. Trubetzkoy)
하나의 음이 다양하게 발성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음이 다른 음과 비교하여 드러내는 차이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pere- mere
p, m은 양순음이지만, 전자는 무성음이고 후자는 유성음이므로, 서로 대조되어,
동일 음에 대한 발성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음으로 뚜렷하게 지각된다.
(이처럼 다양하게 발성되는 음, 즉 음성과 구별되어, 다른 것과 대조되어 지각되는 동일한 음을 음소라고 하는데)
하나의 음을 이제 여러 다른 음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다양한 대조적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P 는 h 와 순음인가 후음인가에 으해 대조되며, p 와 m 은 무성음인가 유성음인가에 으해 대조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모든 음들의 상호 대조적 관계 전체를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조적 관계 전체가 음의 구조이다.
하나의 음은 각 음소들의 복합체, 즉 체계이며, 하나의 음의 음성학적 가치는 이런 구조에서의 그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
3. 구조주의의 개념 장치
1)능기와 소기
기호와 의미의 관계: 기호가 능기, 기호의 의미가 소기.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 기호가 다른 기호와 대조되기 때문이다. 즉 뚜렷하게 대조될 수 없는 것은 기호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의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하며, 이는 사회적 약속에 의거할 뿐이다. 이 약속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다. (자의성의 원리)
2)langue 와 parole
langue 란 언어의 구조를 말한다.
이는 인간 사이의 약정에 의거하며, 일종의 사회 제도이다. 스스로 자율성과 영속성을 지니며, 개인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
parole 언어의 구조에 기초하여, 특정한 실천이 이루어졌을 때를 말한다.
이는 개인의 자의에 의거하지만, 전적으로 자의적으로 실천되는 것만은 아니다.즉 여기에 일정한 사용 규칙이 있다.
langue 와 parole 은 전적으로 무관하지 않다. 상호 변증법적 관계를 지닌다.
3) 공시태와 통시태
모든 현상은 역사적 인과 계열에 복종한다. 이런 인과 계열의 분석이 통시태 연구이다. 반면 모든 현상은 그 현상을 구성하는 구조에 제약된다. 이런 구조에 대한 연구가 공시태적 분석이다.
역사적 방법론은 통시태가 공시태의 변화를 지배한다고 본다.
그러나 소쉬르의 언어학적 연구에 의하면 통시태는 공시태와 무관하고, 공시태는 전적으로 자율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통시태의 연구보다 공시태의 연구가 우선적이다.
#복수화
gast -gasti, hant- hanti
그런데 I 가 우물라우트 되어, gesti(gaeste), henti(haende)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우물라우트가 복수화의 방법으로 착각.
4)Syntagma 와 Paradigma
체계를 이루은 요소들의 구조적 관계?
상호 보완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전체를 이루는 관계가 Syntagma 즉 계열
상호 대체될 수 있는 것들 끼리의 관계가 paradigma 즉 범예
#나는 밥을 먹는다, 나는 사탕을 먹는다.
4. 구조주의 철학
객관적 대상, 본질의 거부, 구조의 변화에 의해 대상의 변화.
4장 싸르트르
1. 생애
1905. 6. 21 파리,
다음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와 더불어 외가에서
1924 파리 고등사범학교
1929 시몬느 드 보바르와의 계약 결혼
1931 르 아브르의 리세에서 철학 교육, 1935 이후 파리 콩도르세 리세
소설 구토 발표
1933-1935 독일 유학, 현상학과 하이덱거의 영향
1939 동원 후 40독일군 포로, 41 의병 석방.
그 후 파리에서 메를로 뽕티, 보바르, 까뮈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와 자유’ 그룹을 만들어, 지하 저항 운동을 전개.
저항 연극 파리떼
철학책 존재와 무를 저술.
1945 전후 현대지를 창간 -비평활동을 전개
48.2 좌파 연합을 시도 민주 혁명 연합을 건설, 당수로 활동 49 탈당
그후 공산당 동반작가
알제리 민족 해방운동을지지 #드골과의 관계
1950 모택동주의로 경도
68.5 학생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
2.저항
레지스탕스 당시 사르트르의 심정:
“독일 점령 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은 결코 없었다. 우리는 모든 권리를 잃었다. 맨 먼저 말할 권리를 잃었다. 그들은 매일 우리의 면상에서 우리를 모욕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벽에, 신문지상에, 화면에, 도처에서 우리는 압제자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제시하고자 했던 그 추악한 얼굴을 다시 만나곤 했다. 그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웠다. 나치스의 독기운이 우리의 사유 속까지 스며들어 왔기 때문에, 사유 하나 하나가 쟁취였다. 전지 전능한 경찰이 우리를 침묵하도록 강요하고자 했기 때문에, 말 한마디가 무슨 원칙의 선언처럼 소중해졌다. 우리는 쫒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몸짓은 참여의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
“먼저 전통적인 이미지를 떨쳐 버려야 했다. 아니다. 독일인들은 주먹에 무기를 쥐고서 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길을 양보하라거나 그들 앞에서 인도를 내려가라고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철 안에서는 노파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아이들에게는 부드러워졌고 그들의 뺨을 어루만져 주곤 했다. 그러나 점령이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4년 동안 우리는 살았고, 독일인들도 역시 대도시의 똑같은 생활에 휩쓸리고 우리들 한가운데서 살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이라기 보다는 건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적이었다. 그것도 가장 증오할만한 적이, 그러나 그 적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그러니까 도저히 증오하지 못하는 너무 친근한 적과 유령 같은 증오감이 영원히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된다. ”
3. 실존과 자유
1),싸르트르의 철학적 문제는 바로 자유의 문제이다.그것은 자유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도대체 우리가 자유롭게 무엇을 원할 수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그의 시대적 현실과 관련된다.1920-30년대는 19세기 자유경쟁적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독점자본주의체제로 이행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제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파시즘적인 전제주의 체제가 등장했던 시대이다.또한 당시는 자율적 인간상이 무너지고 의존적인 대중문화가 등장했던 시대이다.여기에서 지식인들은 자유가 어떻게 실현되는가하는 문제를 넘어서 도대체 인간이 자유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2),싸르트르는 칼이나 종이와 같이 인간이 만든 제작품들은 인간이 미리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에 적합하게 만든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본질이(그 목적)이 실존(현실적 대상)에 앞선다고 한다.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신이 있다면 미리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에 적합하게 인간을 만들었겠지만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미리 주어진 어떤 목적 없이 태어난다고 한다.따라서 인간은 구체적 실존만이 있을뿐 본질은 선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본질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것에 의거하여 자기의 선택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그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없다.싸르트르는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근본적인 고독에 처하여 있다고 한다.
3),일반적으로 강제에 의한 행위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이 전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어떤 행위에도 책임질 수없을 것이다.
하지만 싸르트르는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한다.(그 이유는 인간은 미리 주어진 목적이 없는 따라서 단순한 실존이기 대문이다)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렇다.심지어 외부적으로 아니면 내부적으로 어떤 강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유로운 결단을 행할 가능성을 가지며 따라서 모든 행위에 그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없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기의 행위가 강제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말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기만적임을 지적한다.
4),인간이 자유롭고,따라서 그의 결단에 그가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책임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장점은 있지만 문제는 그 경우 허무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책임만 진다면 강도가 되어도 좋고 ,심지어 독재자가 되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해해도 좋다는 말인가?실존주의는 언뜻 이러한 결론을 용납하는 것처럼 보인다.왜냐하면 싸르트르는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무주의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기를 선택하면서 만인을 선택하며,자기에게 책임을 지면서 또한 만인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5),싸르트르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가치개념(좋다,나쁘다,옳다,그르다)의 의미나 그것의 발생과정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우선 가치의 개념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서 우리가 단순히 발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그에 의하면 가치는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을 선택한다면 그로부터 발생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가치있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단순한 감탄과는 다르다.그렇다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고 권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하나의 행위를 결단한다면 그것은 다른 것보다 가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라고 본다.따라서 개인의 선택은 만인의 선택이며 개인의 책임은 만인의 책임이라고 한다.
6),그는 이점을 불안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어떤 결단을 내릴 경우 불안에 빠진다.그것은 그의 선택이 단순히 그 자신의 책임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런 불안 앞에서 두가지 태도를 취할 수있다.하나는 불성실이다.그것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다.인간은 자신이 강제에 의해서 행위했다든가 남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고 말하면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있다.
다른 하나는 성실한 태도인데 그는 만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인수하는 태도이다.
4.자기의식과 타자의식
싸르트르의 자기의식의 개념
1)즉자en soi 와 대자 pour soi .
즉자: 그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그 자신 의식하지 않으며, 의식의 대상이 된다.
대자: 스스로를 의식하는 자기의식
이러한 자기의식으로서만 존재한다.
2) 자기의식의 개념에 대해
의식은 항상 자기의식.
자기의식이 없는 의식이 있을까? #의식의 문턱 이론 對 微少 지각
전반성적 의식이 반성적 의식 보다 근원적.
의식은 자유.이는 부정판단에서 드러난다.
즉 무는 세계 속에 없다. 그런데 부정판단이 가능한 이유는?
의식이 세계로부터 자유롭고,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가능.
의식이 의식된다면, 자유도 의식된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자기를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는 아무 이유없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방랑자.
이러한 자유의식이 대상의식의 표면에 나타나게 될 때, 불안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앞에서 등장하는 불안을 감추기 위하여,
의식은 자기를 기만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하나의 사물, 대상에 묶어 둔다.
#도박꾼은 자기의 범죄를 끊임없이 고백한다.
#웨이터는 자기를 부끄러워하므로 , 더욱 웨이터답게 행동한다.
3)타인의 의식.
의식은 하나의 방향성을 지닌다. 이것이 視線이다.
이 시선에 의해 세계가 질서지워진다.
이 방향성이 세게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은 단순히 공허한 것에 불과.
우리는 타인을 지각하는 가운데, 그의 의식성을 직접 지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의식성으로부터 나오는 방향성을 지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가 의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시선의 투쟁
나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상화한다. 반면 타인 역시 자기 중심으로 나의 세계를 대상화한다. 따라서 나와 타인은 세계를 가운데 두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우려는 투쟁.
공포, 욕망, 신념, 희망은 실재 대상을 가진다.
그런데 수치심은 하나의 의식이지만, 항상 누구 앞에서 느끼는 의식이다.
따라서 수치감은 의식 사이의 관계.
수치심은 자신이 타인의 대상으로 될 때,
그러므로 사물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 구멍의 예
# 남편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 벌거숭이 임금님.
# 자기가 벌거 벗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먼저 눈을 가린다.
#종교적 수치심-신을 믿지 않으면 사라진다.
#자기 앞에서의 수치심-> 자기를 타인으로 간주.
#남부 백인 여성
5장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1.생애와 저서
1884, 바르-슐-오브, 가난한 담배가게 집안에서 출생
리세만 졸업이후, 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28세 독학으로, 수학 및 물리학 학사 35세, 1920 소르본느 철학 학사,
27년(43), 「근사적 인식에 관한 시론」으로 박사학위.
46세(1930) 디죵 대학 철학교수. 1940년, 소르본느 과학사 및 과학 철학 교수.
1938 과학 정신의 형성 1940 부정의 철학 1953 합리적 유물론
1938, 불의 정신 분석, 1942 물과 꿈, 1943 공기와 꿈, 1948 흙의 의지의몽상들, 1957 공간의 시학, 1960 몽상의 시학, 1961 촛불의 시학.
2. 과학 철학
과학은 혁명적인 것, 열려져 있는 것, 생생하고 활동적이며 창조적인 것.
실증주의가 과학을 잘못 이해, 과학 정신을 억압 구속.
통계학적 인식의 확산
사회나 생물 현상에 적용되었던 통계적 방법이 수학적 자연과학에 적용되면서, 과학은 근사치, 확율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함.
부정의 정신
#비유크리트적 기하학, 비뉴턴 역학 등
비데까르트적 인식론:
과학은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에 눈을 돌리며, 진리의 복잡성을 강조.
과학은 현상을 넘어서서 본체를 그대로 파악하는 것.
결정론적이라기 보다는 생생한 자유.
소립자 의 상관적 역동성
이는 유크리트적 위치 결정의 함수롸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현대과학은 더 이상 실체론적이 아니며, 다만 US상론적이다.
그러므로 논리학도 현상의 움직임 속에 물질을 통합해야 한다.
정지되고 부동적이고 고정적인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에서만 인정된다.
실증주의:
원자는 감각을 초월한 존재로서, 비실재적 존재
고대의 자연철학이 소박한 현실주의라면, 칸트주의는 교육적 현실주의, 고전적 합리주의이다.
본질 개념에 관한 변증법적 합리주의
-부정을 통한 의미의 확대, 일반화
본질의 일체성에서 다양성으로
전자가 요소에 대한 집중적 이해라면, 후자는 이해의 확대.
부정에 의한 일반화
그것은 단순한 합리주의를 개방시켜, 보충적 합리주의로,
#상대성 이론, 비유크리트 기하학, 양자 역학,
이는 전통 이론을 전체의 특수한 경우로 한정하면서, 이를 포함하는 보다 일반적인 새로운 이론을 전개.
물질주의
“과학자의 세계와 물질주의의 세계는 하나이다”
전통적 철학적 유물론은 물질이 없는 유물론, 여기서 물질이란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 즉 내용이 없는 물질에 불과.
물질은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복잡하며, 다양하다. 그에게서 물질이란 철학적 원자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화학적 물질이다.
#엠페도클레스의 4 원소로
#근대 원자론
전 우주를 한가지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합리화일 뿐.
이는 관찰을 착란시켜 더 이상의 발전을 거부하게 한다.
이에 대해 합리성이란 끊임없이 정정되고 정밀화되어가는 것. 무한히 다양한 것, 하나의 조작으로 끝내벌릴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물질은 정신의 대립물이 아니라, OD명의 대립물. 오히려 정신과는 상관적.
그러므로 물질주의의 빗물질화.
3. 정신 분석.
과학의 비굴함, 냉담함 “살균된 세계”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살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생물을 번식시켜, 모여들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을 추구하고 상상력의 학교를 열어야 한다. 그래서
창조적 주관성,유기성의 객관화는 주관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죽어 있는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다. 생명은 결코 객관화될 수 없다.
6장 메르로 퐁티
1. 신체의 지향성과 자기반성
사르트르가 위에서처럼 의식과 물질, 대자와 즉자의 대립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주의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면 동일한 현상학적 철학 위에 선 퐁티는 타자와의 만남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사르트르에 대해 대극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이와 같은 상반된 결론에 이른 출발점은 퐁티의 신체적 지각이라는 개념이다. 퐁티는 사르트르가 지향적 의식을 선험적인 것으로서 파악하여 비신체화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지향적 의식은 신체적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신체적이라 함은 단순히 신체가 의식을 담지하고 있어서 지향적 의식의 수단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식의 신체화라는 그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오히려 신체 자체가 의식적인 것 즉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반성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신체적 지각의 의미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우선 퐁티에서 신체에 내재하는 지향적 지각은 단순히 세계의 어떤 성질을 수용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신체의 행위능력 자체를 말한다. 이 능력은 개별적인 어떤 행위의 능력이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퐁티는 이런 의미에서 이 행위능력을 신체의 세계에 대한 자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신체적 지각은 자신의 자세에 따라서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런 자세나 행위능력 속에 이미 지향 대상의 의미가 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체와 세계는 친밀한 관계에 있다. 신체는 이미 세계의 도구적 네트워크 속에 잠겨있으며, 그러므로 신체는 그 자세에서 세계를 간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향적 호’라 말해지며, 또는 거꾸로 신체는 세계의 간청에 호응한다고도 말해진다. 이런 점을 강조하면서 그는 신체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거주하며, 신체가 세계를 소유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신체적 자세, 행위능력은 어떤 선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삶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삶의 변화와 더불어 신체적 자세도 변화하며, 세계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도 변화한다.
②신체에는 이런 지향성과 더불어 자기반성적 능력이 있으므로, 신체의 지향성 즉 외적 지각은 자기반성을 통해 의식된다. 이는 내감 즉 내성적 지각이라 규정된다. 그런데 신체의 지향적 자세는 곧 의미부여의 능력이므로, 내성적 지각과 외적 지각 사이에는 가역적 관계가 존재한다.
내감과 외적 지각 사이의 가역적 상호관계에 관해 퐁티는 지각현상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착각으로 알려진 예인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검지와 중지를 교차하여 그 사이에 조약돌을 넣으면 두개의 조약돌이 느껴진다고 한다. 퐁티는 이런 예를 설명하면서 이는 신체적 자세가 왜곡됨으로써 두개의 내감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거꾸로 신체적 자세가 통일되어 있으므로 내적 지각도 통일된다는 것이다.
퐁티에 의하면 양자의 가역성은 특히 성질의 지각이 운동의 형태를 담지한다는 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반 고흐의 밀밭이라는 그림에서 노란 색의 느낌은 비명을 지를 듯한 충동을 야기한다. 이처럼 어떤 느낌과 행위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감과 외적 지각, 지각과 행위능력 사이의 관계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신체적 인식의 공관성과 공감각성
퐁티는 신체적 지각이 공관적이고 공감적이며 공현존적이라는 점에서 종합적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공관적이란 두 눈이 각각 주시하면서도 종합적인 시각상이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공감적이란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 등 다양한 감각들 사이에서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이런 신체적 지각은 지각과 상상, 실제와 가상조차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공현존적이라 한다.
퐁티는 이런 종합적 지각의 가능성을 칸트가 주장하듯이 지각적으로 주어지는 다양성을 선험적 의식이 종합 통일함에 의해 성립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공감적 현상에서 소리와 색을 동시에 가지면서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보고 색을 듣는 것처럼 하나의 통일된 지각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성은 의식의 종합통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오히려 퐁티는 이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신체적 통일성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즉 신체는 개별적인 부분들이 통일되어 하나의 통일된 자세를 형성한다. 이런 신체의 부분들은 외적으로 연결된다기 보다는 퐁티가 표현하듯이 서로를 감싸고 서로에 침투에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내적인 관계를 이루는데, 이 자세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역사적 삶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통일된 자세는 지향성을 지니면서 세계를 구성한다. 다양한 개별적 감각들은 이런 통일적 자세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비로소 동일한 세계를 지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별적 감각에는 동일한 세계가 내재하며 이런 동일한 세계가 개별적 감각들을 횡단하고 있으므로 비로소 종합적 인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퐁티는 이와 같은 설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감각적 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유리의 표면의 시각적 구조와 그것의 깨어지는 소리의 청각적 구조는 시각 청각에서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어떤 동일성을 지닌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이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는 것은 시각과 청각이 신체적 자세의 통일성 속에서 함께 작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리의 표면을 들을 수 있고, 깨어지는 소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이런 종합적 지각은 개별 감각상의 종합이 아니라, 개별 감각상과는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통일적 신체에 의해 지각되는 인식을 말한다. 종합적 인식에 비추어 본다면 개별 감각상은 하나의 환영과 같다. 종합적 인식에 이르러 그 환영은 단숨에 사라지고 실재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퐁티는 이와 연관하여 더빙된 영화의 예를 들고 있다. 더빙된 영화에서 소리가 제거되면, 영상은 마치 얼어붙어 버린듯이 실재성을 상실하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제 영상이 소리와 결합하면, 영상은 구체적 실재성을 지닌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3 . 살과 깊이
퐁티는 후기의 저서에 이르면 신체적 지각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살의 개념에 이른다. 그의 살이라는 개념은 신체라는 개념에서 유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체는 그에게서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지향성과 자기반성 능력을 내재한 의식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살이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러 퐁티는 이런 신체적 살의 개념을 확장하여 세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지향적이며 자기반성적인 물질 즉 살이라 규정한다. 그가 이처럼 신체와 세계를 모두 살로 규정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현상학적 인식의 기초는 의식의 지향성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향성에는 세계가 그 의미로서 내재한다. 이런 점에서 퐁티에서 신체의 지향성 역시 어떤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인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체의 지향성은 세계를 향한 지향성이며, 세계는 그 의미로서 신체에 내재한다. 이 의미가 곧 신체의 자세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체는 마치 세계를 선이해하면서, 그 속에서 민첩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런 민첩한 움직임을 통해 신체는 개별적 대상을 너머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점에서 퐁티는 이를 촉각적 시선이라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신체와 세계의 관계를 마치 더듬이로 민첩하게 자기의 갈 방향을 짚어나가는 곤충의 행태에 비유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체와 세계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신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자발적인 과정이지만, 다른 한편에 본다면 신체가 선이해된 의미를 지각적으로 충족하는 운동은 결국 세계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헤겔이 그의 역사철학에서 개인의 맹목적 투쟁에 의해서 역사가 이성적으로 움직여 나갈 때 이를 일컬어 역사이성의 간지라 했던 것과 같다 보겠다. 이런 점에서 퐁티는 신체를 넘어서 세계 자체를 자기반성적 물질로서 살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다. 이제 신체와 세계는 상호침투하며 뒤얽히게 된다. 그래서 퐁티는 신체를 이 세계적 살이 자기를 접는 주름이라 말하며, 그것은 마치 서로 마주선 거울처럼, 각자는 타자를 상기시킨다고 한다.
살이라는 개념은 사물의 비전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이 점과 연관하여 퐁티는 앙드레 마르샹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숲 속에서 숲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번 느끼곤 했다. 어떤 날 나는 나무들이 나를 바라다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기서 있었고 듣고 있었다..나는 화가란 우주에 의해 침투되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으며, 우주로 침투해 들어가기를 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나는 내면적으로 잠기고 묻혀지기를 기대한다. 아마도 나는 탈출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1)
사물의 비전이란 위의 인용구에서 말하듯이 ‘내가 세계를 볼 때 사실은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의미인데, 이 역시 앞에서의 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선이해된 세계가 지향적 신체의 운동을 이끌고 있다는 점을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이처럼 후기의 저서에서 살 또는 사물의 비전이 강조되는 것과 더불어 이제 퐁티는 세계의 개념 가운데서 특히 깊이의 개념을 강조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이 깊이의 개념을 회화와 관련시켜 설명하는데, 근대회화는 사물의 본성을 연장성으로 파악하고, 따라서 사물의 공간적 형태에 대한 소묘가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고, 회화에서 소묘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근대회화에서는 사물의 깊이란 원근법적인 기호에 의해 암시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퐁티는 그것에 반해서 화가 세잔느가 평생을 바쳐 회화에서 추구했던 것을 바로 이 깊이로 간주하는데, 이 깊이란 지향적 시선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본다. 즉 그 자체로서 무차별적인 존재자들은 이런 지향적 시선에 의해 표면과 배후, 부분과 전체라는 깊이를 지닌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퐁티에게서 지향성이란 단순한 시각적 시선을 넘어서는 공감각적인 지향성이므로, 따라서 그런 공감각적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깊이란 시각적 차원에서 형성되는 공간적 깊이를 넘어선다. 사물의 깊이는 또한 색채적 깊이이며, 또는 촉각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촉각적 깊이이다. 이런 깊이는 곧 사물의 입체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입체성이란 무엇인가? 퐁티는 이를 “사물이 저기 있다고 할 부피”이며, “존재의 돌연한 폭발”2)이며, 또는 비유적으로 “갈대들 사이에 얼굴이 나타나듯이 그들 사이에 사물을 나타나게 하는 형식”이라 말하고 있다. 이런 그의 표현들을 설명하자면, 퐁티의 공감각적 지향성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감각적 지향성의 개념에서 다양한 감각들은 동일한 신체적 자세 속에서 일어나므로, 공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퐁티는 이를 ‘공동의 로고스’라고도 규정하는데, 바로 이 공동의 구조, 공동의 로고스야 말로 사물의 깊이 곧 입체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리듬이 음악적으로 또는 색채적으로 표현되어 분지되면서, 이 공동의 리듬에서 음악과 색채가 만나는 것과 같다 하겠다.
퐁티는 이런 깊이 또는 입체성의 개념을 다시 지속의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퐁티가 전개하는 시간적 지속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일직선상에 무차별적으로 진행하는 시간 개념과 구분된다. 그에 따르면, 지향적 시선은 깊이의 공간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때 배후에 있는 전체란 지향적 목표이며 따라서 도달해야할 미래이다. 이런 점에서 깊이의 공간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해 전망적(prospective)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사실 지향적 시선 자체에 이미 이런 목표가 의미로서 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과거이며 따라서 깊이의 공간은 과거에로 되돌아가는 흐름 즉 회고적(retrospective) 흐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향적 시선에 의해 성립하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메비우스 띠처럼 만나는 시간 즉 지속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굽어있다.
4.퐁티에서 타자의 개념
신체 자체가 의식을 내재하면서 지향적이며 동시에 자기반성적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퐁티는 이제 사르트르가 철저하게 부정했던 바 타자의 문제로 접근해 들어간다. 퐁티는 여기서 내가 타자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이런 타자와의 열린 만남의 근저에 있는 것은 바로 신체에 있어서 내성적 인식과 몸짓을 통한 표현 사이의 상호 가역성에 있다. 타자의 어떤 몸짓에 대해서 나는 이를 대상적으로 인식하여 그 의미를 추측하기 이전에 이 몸짓에 대해 신체적으로 상응하면서, 이 신체적 반응에 대한 자기인식 즉 내감을 통하여 타자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내감은 우선 나의 신체적 반응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지만, 이 신체적 반응은 타자의 몸짓에 대해 상응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 몸짓에 내재해 있는 타자의 의미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치 멀리서 달려오는 아이를 그 어머니는 먼저 팔을 벌려서 안는다. 어머니는 자기 팔을 벌리는 동작의 의미를 그 동작과 더불어 인식하며, 그 어머니의 동작은 아이가 달려오는 동작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어머니는 아이의 동작에 내재하는 그 의미까지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퐁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작의 의사소통이나 이해는 나의 의도와 타자의 동작의 상호성, 나의 동작과 타자의 행동에서 읽혀질 수 있는 의도의 상호성에 의해 얻어진다. 모든 것은 타자의 의도가 나의 신체에 거주하는 것처럼 또는 나의 의도가 타자의 신체에 거주하는 것처럼 일어난다”3)
그런데 여기서 주요한 것은 이런 신체의 동작을 통한 타자의 인식에 전제되는 것은 타자의 제스처에 대해 나의 몸짓이 이미 상응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상응이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삶의 공동적 양식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열린 이해의 가능성은 이런 역사적 삶의 공동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체를 통한 타자의 인식이란 개념은 공관적이며 공감적인 신체적 지각이란 개념의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다양한 감각들이 신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므로, 공관적이며 공감적 지각이 가능하듯이 나와 타자 사이의 상호주관적 이해 역시 역사적 삶 속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삶이 통일되어 있으므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퐁티는 이런 점을 나의 왼손과 오른손의 관계에 대한 유추를 통해 설명한다. 나의 왼손이 오른손을 만질때 양자 사이에는 만져지는 것과 만지는 것 사이의 상호 가역적 관계가 성립한다. 그에 의하면 마찬가지로 타자의 손과 내 손 사이에도 이런 가역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보아서 나와 타자 사이에 이런 가역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관적 지각에서 마치 단안적 지각은 개별적으로는 마치 실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양안적 지각에 비해본다면 그저 환영에 불과하고 양안적 지각 앞에서 소멸해 버리고 말 듯이, 그래서 양안지각은 개별적 단안지각의 종합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성립하는 지각이듯이, 나와 타자의 상호 주관적 이해에 비추어 본다면 나의 개인적 지각 세계란 환영에 불과하며, 오직 상호주관적 이해만이 유일하며 실재적으로 성립하는 이해라 하겠다.
이런 타자와 나와의 관계는 퐁티에 의해 세계가 살 또는 깊이의 개념으로 규정되면서 더욱 발전한다. 즉 나의 신체적 지각이란 사실 세계적 살의 자기 반성이라면 이런 세계적 살의 자기반성이라는 관계는 나의 신체적 지각과 타자의 신체적 지각을 가로질러 횡단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 살이 횡단하므로 나와 타자 사이의 상호주관성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신체를 통한 타자와의 관계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퐁티에서 의사소통이란 개념이 물질적 기호을 통해 전달됨에 의해 성립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언어의 의미가 이처럼 언사와 궁극적으로 몸짓에 있으므로, 그리고 언어적 의미의 이해는 언사나 몸짓에서 자기반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지각과 그 표현 사이의 가역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이해와 언사 및 동작 사이에 가역적 관계가 존재한다. 이런 가역성에 따라서 언어의 의미가 서로 의사소통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지각하는 타인의 언사나 몸짓은 나의 호응을 초래하며, 이에 호응하는 나의 언사나 몸짓을 통해 내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7장 알뛰쎄와 마르크스주의
1.알뛰세의 생애
알제리 출신,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
28세, 1946 공산당 집회에서 엘레느를 만남. 그후 결혼
70년대 프랑사 공산당 이론가로서 활약
80.11.26 아내 엘레느를 목졸라 죽임,정신병 진단을 받고,석방.
2.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해석
스탈린 시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인의 실망, 이는 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 이후 표면화, 특히 이데올로기적 과학보다 순수 과학을 열망
68.5월 혁명에서 지식인 노동자의 반관료적 투쟁에 당이 수수방관한 것에 대해 자기 비판, 그 이후 반 마르스주의적인 여성, 환경 운동 등이 등장하였고, 여기에 새로운 관점이 필요.
사상적으로 구조주의의 유행.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그 원인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있으며, 다라서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
마르크스에 대한 징후발견적 해독
-가시적 원전에서 말해지지지 않은 침묵과 연관하여 해독
의미
1)루카치, 마르쿠제등의 인간적 마르크스주의자와 구별
-이들은 주체의 소외라는 개념을 후기까지 연장
2)헤겔적 개념(소외,)은 후기에도 사용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새로운 개념을 서술하는데 필요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용하였고,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를 왜곡시키는데 기여, 따라서 이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3)사적 유물론-이론적으로 다듬어진 정도에 있어서 완숙하게 발전,레닌에 의해서 풍부화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사적유물론를 건설하는 가운데 건설되었으며,그 완전한 구성은 앞으로의 과제. 철학적 혁명이지만, 아직 이론화되지 않은 실천적 상태이고,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을 뿐이다.따라서 고유한 이론적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할 필요가 있다.
사.유가 마르크스 철학의 원리에 대한 철저하고 명료한 정식화의 결여 속에서 어느정도까지 발전했으나, 이제 그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하게되었다.
변.유가 확립되면 사적유물론의 취약점을 보완, 사적유물론의 과제를 충실히 실현,새로운 연구분야를 탐구할수 있다.이런점에서 철학은 사.유의 파숫꾼
"사적 유물론의 장래는 오늘날 변.유를 심화시키는데 달려 있다"
2.총체성의 개념
헤겔적 총체성
-사회적 실재는 본질의 현상이거나, 이데아의 자기발전적 외화
양자 사이에는 모순을 통한 발전이 존재
마르크스적 총체성
-특정한 제 수준의 복합적 결합체
각 수준은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며, 한 사회의 구체적 성질은 그 구조에 의해서 나타난다. 이런 구조적 총체성 가운데, 하나의 것이 지배적일수 있다.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경제결정론적 관계를 부정
* 중층적 결정의 법칙
ㄱ.최종심급에서 생산양식에 의한 결정
ㄴ.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과 그 고유한 효과
탈중심적,즉 하나의 원초적 본질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다.
ㄷ.지배적 교소는 교체
ㄹ.경제는 비경제적 요인들이 경제에 대해서, 그리고 비경제적 요소들 상호관계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자율성과 의존성을 가지는지를 결정해준다.
또는 경제는 어떠 순간에 그 자신이 지배적일지, 혹은 비지재적인지를 결정할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어느 요소가 지배적인지를 결정해준다.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1890)
"역사의 궁극적인 결정요소는 현실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마르크스와 나는 이 이상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어느 누가 이것을 경제적 요소가 유일한 결정요소인냥 곡해한다면, 그는 이 명제를 무의미하고 슬모없는 문구로 전락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경제상활은 궁극적인 기초이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무수한 구성요소도 역사적 투쟁 과정 속에서 그들 자체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부분의 경우 투쟁방식도 결정지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본축적의 역사와 자유노동자의 역사는 서로 이질적인 역사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두가지는 결합하여, 자본주으적 사회구성체를 이룬다.
*반인간주의
사회구성체의 결합은 인간의 행위에 의거하지 않는다.
인간의 주체적 경험이 아니라 무의식적 행위 속에서 그 구조가 반영된다.
3.인식론적 개념틀
1)경험주의적 지식개념
=vision으로서의 지식개념
순수하게 객관적인 소여가 있고,이는 직접적으로 가시적이며, 관찰가능한 것,
현실적 대상 자체,구체적인 것
추상-그 본질을 분리, 비본질적인 우연은 제거, 직접적으로 관찰되지는 않지만, 추상을 통해서 가시적인 것으로 된다.
결국 지식이란 "그 본질을 눈으로 보는 것"
비판
ㄱ.소여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며, 현실 자체가 아니다.
ㄴ.현실적 대상에 지식을 새겨넣는 결과, 현실에 대한 사유를 현실의 한부분으로 착각한다.
ㄷ.현시적인 것, 구체적인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이론보다 언제나 더 풍부하고 더 생생한 것, 이론은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이론은 원죄라고할 본래적 약점을 갖는다.
나)지식은 곧 생산
사유-추상, 현실-구체라느 구별에서부터 사유 자체 속의 추상과 구체에로
이경우 추상은 지식과정의 원초자료, 구체는 그 과정의 산물이다.
사유과정에서 일어나는 지식생산에서 실제대상은 순수대상이 아니며,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는다.
원초자료를 이루는 개념과 추상(일반성 1)
->그저 주어진것이 아니며, 따라서구체적 현실이 아니다. 이미 그전의 실천에 의해서 나온 생산물이며, 추상개념들로 이루어진 자료
부분적으로는 과학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산물이며, 부차적 실천(경험, 기수적 실천)의 생산물이다.
추상, 이데아, 직관으로 구성
이론적 생산수단(일반성2)->어떤 주어진 순간에서 과학의 기본개념들
이는 특정한 이론적 틀 속에서 다소 통일된다.과학에서 제기되고 해결되는 문제를 결정
일반성3:사유 속의 구체
실제 구체적인 것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추상적 개념들의 종합, 이론적 생산물로서 그 현실의 구체와는 다르다.
"지식의 생산은 사유 속에서 시작될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사유 속에서 끝난다"
사유와 현실의 구별은 넘어설수 없는 것이다.
ㄱ.현실이 사유보다 우위, 사유로부터 독립된 현실이 존재
ㄴ.사유와 사유과정은 현실과 다른 고유성을 가진다.
4).문제틀
1)기본개념틀의 연관관계
각 개념은 이 연관체계 속에서 그 위치와 기능에 의해서 특정의미를 갖게된다. 각 개념은 고립시킬수 없으며, 두개의 문제틀에서 각 개념은 외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
2)한 과학의 문제틀은 그것이 제시할수 있는 문제들과, 그 제시형식조차 지배하므로, 문제의 체계이다.
3)이러한 문제틀은 그것이 지배하는 이론 속에서 명료하고 읏힉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펴놓은 책처럼 읽혀질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묻혀있는 채로 작동, 따라서 이론의 무으식적 구조이다.
따라서 문제틀을 포함하기 위해서는 심층으로부터 끌어올려져야 한다.
문제틀은 무엇을 포함시킬것인가를 규정한다.
따라서 배제된는 개념(침묵, 공백),충분히 제시되지 안는개념(지체, 반침묵), 전혀제기되지 안흔 문제(침묵)도 그 문제틀의 일부
띠리서 문제틀의 발견을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해독해서는 안된다.
문제틀의 징후이며, 우언의 담화를 이루는 부재, 공백, 침묵과 더불어 해독하는 징후발견적 해독을 통해서 가능
이는 비전이 아니라, 이론적 노동이며 생산
본다는 것은 시각능력을 소유한 개별주체의 행위가 아니다. 이는 문제틀의 영역에 의해서 규정된다. 즉 문제틀의 여역 자체가 그 스스로를 규정한 대상들 혹은 문제틀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안보인다는 것은 주체의 함수가 아니다. 이는 문제틀이 그 문제틀의 대상이 아닌 것을 안보는 것이다.
"이론적 문제틀이 실명해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반성을 해도 어쩔수 없이 부딪히는 암흑이다"
5.인식론적 단절
이데올로기적 실천에서 과학적 실천으로
이데오롤기는 현실을 지시하지만, 과학은 현실을 안다.
양자사이에는 비슷한 요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단절-인식론적 단절
이런 단절이 구성적 주체의 역할은 아니다.
주체의 역할은 구조가 주체에 미치는 한정적 역할에 불과하다.
고전적 지식의 문제는 실재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동시에 실용주의적 입장도 거부
"마르크스 이론이 성공적으로 적용될수 있었던 것은 그 이론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그 이론이 성공적으로 적용디었기 때문에 진실한 것은 아니다"
이론적 실천은 그 자체의 기준을 가진다.
그 실천 결과의 타당성은 입증하는 프로토콜을 이미 그 실천 자체 내에서 갖는다.
8장 미셀 푸코
1 푸코의 문제의식의 전개
1). 과학사의 연속성
푸코의 주요 탐구 영역은 지성사, 특히 과학사
실제로 그는 60년대부터 이미 10년 동안이나 정신의학의 역사, 인문과학의 역사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시도해 왔었다.
*지성사, 과학사에서 제기되는 정체성의 문제
지성사, 또는 과학사 연구에서 우선적인 문제는 학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정신의학의 역사를 서술하려 한다면, 적어도 역사상 일정 기간 지속되는 정신의학의 정체성이 있어야 하겠다. 그런데 하나의 학문의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가?
학자들의 계보에 의해? 또는 저서나 작품의 연속성에 의해?
그렇다면 대상, 즉 어떤 학문이 다루는 대상이 동일하다면 여기에 연속성이 성립한다 할 수 있을까?
푸코는 과학사 지성사에서 정체성은 대상을 규정하는 구조의 체계에 의해 확립될 수있다고 보면서, 이런 구조 체계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과학사 지성사가 하나의 담론을 보고, 이 담론을 이루는 단위를 언표라 하면서, 이런 언표와 담론의 분석을 통해, 그 구조 체계를 발견하려고 시도 한다.
2). 담론 분석
그렇다면 담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담론이란 진술의 복합체. 그렇다고 진술이 담론을 구성하는 원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푸코에 의하면 진술이란 명제를 의미하지도, 문장을 의미하지도, 언어 행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명제가 문장의 의미라고 한다면, 진술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문장들이 서로 다른 진술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무도 듣지 않았다' 라는 문장과 '아무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는 문장은 사로 다른 진술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인 명제로서는 차이가 없다.
또 문장은 문법적인 구성 규칙에 따르지만 진술은 비문장적인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서 'ㅂ, ㅈ, ㄷ, ㄱ, ㅅ'이 타자 설명서에서 자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하나의 진술이지만 문장은 아니다. 동식물의 계통수 , 수학 방정식 등은 모두 그런 예들이다. 또 설혹 문장으로 된 진술이라 할지라도, 문장이 의미를 문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진술은 그 의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일한 문장을 다르게 사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자살했다.'라는 동일한 문장을 우리는 소설에서 사용하는 경우, 법정에서 사용하는 경우 서로 다른 진술이 된다.
또한 언어 행위가 언어를 말함으로써,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래서 '그는 죽었다'라 말한다면, 진리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고 '문을 닫아라'고 한다면 , 그것은 행위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술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살했다'는 동일한 언어 행위, 즉 동일한 어떤 주장을 소설 공간이나 법정 공간에서 사용한다면, 동일한 진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진술은 어떤 사용이다. 그 사용은 명제나 문장, 언어 행위가 이루어지는 어떤 공간, 영역, 대상에 연관된다.
ㄱ. 진술의 대상.
진술의 대상은 기호, 명제, 문장의 대상과 다르다. 이런 진술이 관계하는 대상은, 기호, 명제, 문장의 대상처럼 우술과 연관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객관적인 대상은 아니다. 진술의 대상은 진술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생명체라는 대상은 근대 인간 과학(생물학)의 진술에 의해서 성립했다.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인간의 육체를 해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육체에 대한 손상은 , 설혹 그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격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를 생명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의학적인 施術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한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생명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19세기 성적 담론의 출현 이전에는 자위, 동성애, 도착 등과 같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상들은 다른 성적 욕망들과 구별되지 않았고, 분화되지 않았다. 비로소 19세기 성적 담론의 출현 이후 이런 주변적인 성적 욕구가 분화되었고, 독립적인 대상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ㄴ. 진술의 주체
진술의 주체는 기호들을 말하거나 이를 쓴 현실적 개인, 즉 발화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수학 책에서 '제 3의 량과 동일한 두 량은 서로 동일하다'라는 진술이 있다고 하자. 물론 이 진술을 쓴 사람은 이 책의 저자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저자의 역할이란 단지 대사를 외우는 배우 정도에 지나지 않다. 이 진술의 경우 그 저자는 이 책을 쓴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다. 그러므로 이 진술의 진정한 주체는 바로 진술이 말해지는 수학적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주요한 것은 누가 진술의 주체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주요한 것은 그 진술이 어디에서, 즉 어떤 진술 대상과 관계하여 말해 졌는가 이다.
ㄷ. 진술은 연합적으로, 즉 담론 속에서 존재한다.
단어가 문장 또는 명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규칙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문장과 명제는 고립적이고, 즉 그것에 문맥의 역할을 해주는 다른 것 없이, 그에 연합된 어떤 문장이나 명제들의 접합이 없이 그 자체만으로 존재 가능하다.
그러나 진술은 그와 다르다. 진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상들의 장(場)과의 관계, 주체와의 관계, 인접하는 모든 장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진술은 항상 다른 진술들이 기식(寄食)하는 여백을 가진다. 예를 들어 ' 그는 책을 읽는다'라는 진술은 '지식인'이라는 대상과 관계해서만 , 그리고 이것을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적 비판가와 관계해서만, 또한 ' 노동자는 노동을 한다'는 다른 진술과 관계해서만 제대로 진술로서의 역할을 행할 수 있다.
ㄹ. 진술의 물질성
동일한 문장은 어떤 사람에 의해 발설되는가, 어디에 인쇄되어 있는가에 따라 다른 진술이 된다. 이를 진술의 물질성이라 한다. 진술의 물질성의 차이에 따라 진술은 서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지식인인 내가 '그는 책을 읽는다'고 진술한다면, 그것은 어떤 노동자가 '그는 책을 읽는다'라고 말하는 진술과 구별된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 내가 그렇게 말하는 진술과 어제 내가 그렇게 말한 진술도 달라지는가? 만일 진술의 물질성에 따라 구별된다면, 이 경우도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푸코는 진술의 물질성이란 말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진술의 물질성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진술의 물질성은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이나 발언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의 또는 대상의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
- 한 진술의 동일성은 그 안에서 진술이 모양 지워지는 다른 진술들의 집합에 의해서, 그 안에서 진술이 사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영역에 의해서, 진술이 행사해야 하고 할 수 잇는 기능과 역할에 의해서, 그것에 부과되는 조건들과 제한들에 의해 구분된다.
-진술을 이처럼 대상과 관계하고, 이 대상을 매개로 상호 연관되어 있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진술이 이루어지는 물질적인 연관이 곧 담론이다.
2.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
담론과 물질적 조직 사이의 이러한 연계가 드러남으로써, 당연히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즉 어떤 담론이 형성된다면, 어떤 사회에서든 진술의 복합체로서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하고,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 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과정들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권력에서 찾는데, 이를 통하여 이른바 권력-지식 복합체라는 개념이 확립되었다.
어떻든 여기서 푸코의 관심은 전환되었다. 그 이전에 그의 작업은 인간 과학의 대상을 성립시키는 담론의 구조 자체, 즉 인간 과학의 에피스테메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연구가 바로 「지식의 고고학」 이전 「말과 사물」,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시도했던 고고학적 연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런 담론을 역사적으로 성립시켰던 것이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즉 담론의 역사적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에서 그가 시도했던 계보학적 작업이다.
1) 푸코의 권력 개념
우선 푸코의 권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독특하다. 그의 권력 개념은 일반적인 권력 개념과는 구별되는데 그 주요 특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 소 권력
푸코는 전통적인 ‘법률적 ’ 권력 개념에 반대했다. 이 법률적 권력 개념에서 권력은 ㄱ. 대상에 외부적이고, 중앙 집중화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작용하며 ㄴ. 제한하고, 규칙을 부여하고, 금기를 세우며, 검열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흔히 국가 권력을 생각할 때 표상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법률적 권력 개념에 대해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밑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즉 권력이란 ㄱ. 그 각각의 출현 영역(가정, 학교, 교회, 공장 등)에 내재하고(소권력), ㄴ. 그래서 이런 소권력들이 서로를 뒷받침하거나 또는 대립하고, 그래서 하나의 세력관계를 이루고 있음으로써 전체적 권력이 형성된다 하였다.
나. 훈육-미세 권력인 동시 생산적인 권력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18세기 신체형이 소멸되고 감옥형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역사적으로 조사하면서, 이런 변화의 의미를 18세기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훈육의 개념을 통해서 포착하였다.
훈육이란 신체의 활동을 해부학적으로 미세하게 나누고, 이를 다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활동으로 만들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군사적 훈련이나 체육 훈련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훈육의 확산과 더불어 권력은 신체의 표면이 아니라, 그 세부적인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점에서 미세적이라 하였다. 여기서 각 행위의 구성 요소가 아니며, 그 행위의 구조, 즉 하나 하나의 행위가 결합하는 방식 자체가 통제의 대상으로 되었다.
신체에 대한 이러한 훈육은 단순히 억압하고 금지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훈육을 통해 신체의 효율이 증가하면서,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더 많이 생산하는 노동자, 더욱 탁월한 병사, 더 우수한 학생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훈육적 권력을 생산적 권력이라 하였다.
다. 감시의 권력
효과적인 훈육을 위해서는 이제 신체는 관찰되어야 하고, 분석되어야 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했다. 또한 이런 재구성은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바로 이러한 효과적인 훈육을 위한 수단이 곧 감시, 규범적 체제, 시험의 방법이다.
훈육의 수단으로 그 정점에서 나타났던 것이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이 일망감시의 방법은 혼돈 되고 뒤엉킨 공간 내에, 치밀하고 세분화된 규율을 투사했다. 이 원리는 다음과 같다.
- 죄수는 보여지기는 해도, 볼 수는 없어야 한다.
- 감시가 중단되어도 그 효과는 계속 되야 한다.
- 죄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판옵티콘의 방식을 통해서 이제 권력은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피감시자는 감시되고 있다는 것만으로 권력에 복종하며, 감시가 설혹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감시되고 있다고 믿는다. 마침내 피감시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감시하며, 그는 그 자신에 대한 권력의 일부가 된다.
왕의 권력이 폭력적이며 그 신민에 직접적으로 발휘하는 힘에 의존한다 한다면, ,일망감시의 권력은 감시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개인화된 신체 속에서 즉 개인 자신의 자기 감시에 의해서 작용하며 한순간이라도 결함이나 중단 없이 작동한다.
라. 쾌락의 권력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에 대한 이런 논의는 「성의 역사」에서 쾌락을 산출하는 권력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즉 그에 의하면 감시의 시선은 피감시자의 육체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 받으며, 그 전에 무감각하게 있었던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따라서 그것에 의해서 挑發된 육체는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푸코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추구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우선 육체적 쾌락의 추구는 결코 자연적인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감시에 의해 창출되었다 점이다. 또한 이런 육체적 쾌락의 추구는 죄의식과 비밀함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감시의 시선에 의해 육체를 도발시켰으며, 도발하는 동시에 그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바. 권력과 생산 양식
푸코에서 이런 권력의 훈육적 지배 방식은 근대적 생산 양식과 접합되어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농민을 농촌으로부터 유리시켰다. 원축과정을 통해 일어난 이런 유리의 결과 도시로 유입된 그들은 도시의 부랑민으로 떠돌았다. 근대 권력의 제일 과제는 이렇게 부랑화된 농민들을 노동자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데 봉건제의 과시적이며 금기적이며 중앙 집중된 권력은 무력했다. 이런 권력의 요구를 수행했던 것이 바로 훈육적 권력이었다. 훈육적 권력은 뒤엉켜 있고 그러기에 잠재적인 폭동의 무리였던 부랑화된 군중들을 분할하여 개인화 시켰다. 이런 개인들을 감시하고, 또 자기 감시적으로 만들어 스스로 권력에 복종시켰다. 마침내 권력은 이들에게 걸맞은 욕망과 죄의식조차 불어넣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노동력으로서의 개인이 창출된 것이다.
2)지식 권력 복합체
권력은 지식의 대상을 구성하고, 그에 대한 의지를 규정한다. 또한 권력은 지식의 절차를 지배하고, 마침내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를 형성한다.
가 .대상의 산출
푸코는 지식의 대상이란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해서, 마침내 지식에 의해 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권력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푸코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성적 지식의 대상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주변적인 성에 대한 것이었다. 18-19세기 이전 성적 담론은 주로 이성애에 바탕을 둔 혼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혼인에 위반되는 것과 자연으로부터의 일탈과 구분되지 않았다. 즉 외도, 간통, 미성년자 유괴, 근친상간 등은 남색 등과 구별됨이 없이 중죄로 다스려 졌다.
그러나 그 이후 이성애에 바탕을 둔 혼인에 대해 더욱 적게 아주 간결하게만 말해졌으며, 그 대신 어린아이의 성, 동성애, 몽정, 고정관념, 광기 등에 대해 더 길에 그리고 많이 말해지게 되었다. 여기서 반혼인법적 성과 구별하여 반자연적 성이 대상화되었으며 또한 주변적 성적 욕망이 지식의 대상으로서 출현하게 되었다. 교활한 소년, 조숙한 요녀, 요상한 중학생, 행실이 미심쩍은 하녀나 가정교사, 잔인하거나 편집광적인 남편, 고독한 수집가, 기괴한 충동을 지닌 산책가 등등이 말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대상의 출현은 푸코에 의하면 곧 권력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권력은 부랑하는 농민들로부터 노동자를 만들어 내고, 생산적인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필요에서 과거 부유하던 대상에 대해 조명하게 되고, 여기서 새로운 지식의 대상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앎에의 의지
진실이란 푸코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담론 내적인 것이다. 하나의 담론이 지식의 대상을 구성하므로,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어디까지나 담론 내에서 규정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진실에의 추구는 담론 자체를 넘어서는 객관적 과정이 아니며, 오히려 담론의 형성을 촉진하는 과정일 뿐이다.
예를 들어 18-19세기 어린이의 성-자위-가 지식의 대상으로서 성립되었다. 권력은 모든 어린이를 의혹의 대상으로 삼았다. 권력은 어린이의 성을 수수께끼 같은 비밀로 설정하고, 그 원인과 결과를 포착하도록 선동하였고, 모든 곳에 감시 장치를 마련했다. 어린이에 대한 고백이 강요되었으며, 그것을 교정하기 위한 수단이 강구되었다. 부모와 교사들에게 끊임없이 그 위험이 경고되었고, 만일 그들이 어린이를 충분히 감시하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에게 죄를 물었다. 부모나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모든 권력의 작용이 어린이의 성에 대한 진실 의지를 산출했다.
다. 과학의 방법
과학의 방법, 특히 인간 과학의 방법을 규정하는 것 역시 권력이다. 예를 들어서 미시적 훈육적 권력이 확립되어, 대상을 분할하고 감시하기 시작하자, 이런 권력이 인간 개개인에 대하여 기록, 분류, 평가하는 가운데 객관적 인간 과학이 형성되었다.
성의 과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성애의 기술(ars erotica)과 성의 과학을 비교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성애의 기술은 실천적이며, 비법전수적이며, 쾌락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의 과학은 오히려 고백의 기술로부터 발전되었다. 더 철저하고 강요적이며(숨겨져 있으려 하기 때문에 이를 끌어내기 위해서) 효과적이도록 말하기 기술이 체계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질문서이며, 최면술이며, 자유연상법이었다.
라. 지식 권력 복합체
푸코와 담론 분석이 궁극적 의도는 바로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에 관한 것이다. 이는 지식이 권력에 종속적이 작용을 한다거나, 다만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행한다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입장과 구분된다. 오히려 그는 이제 지식이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되었으며, 나아가서 지식이 권력의 매우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근대적 권력을 담론적 권력이라고도 하거니와, 권력에 의해서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거꾸로 담론 없이는 이제 권력이 행사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 감옥이 훈육적 권력으로 변모하면서, 감옥 주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정신분석 학자, 사회 과학자, 종교인과 윤리학자 등은 이제 단순히 권력의 도구로서, 훈육의 대상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어떻게 기록하는가, 어떻게 분석하는가,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그 자체 하나의 권력이었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 학자가 어떤 사람이 정신병자라 규정한다면, 법률적 판결은 이것을 법률적으로 그대로 재가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정신분석 학자가 재판관에 앞서서 재판한 셈이다. 그러니 이들이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권력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역할은 오늘날 재판관의 역할을 넘어서서 더욱 주요한 것이 되고 있다.
▶ 출처: 동아대학교
▶ 원문:http://dais.donga.ac.kr/files/DAIS/board/PORTALbclee/프랑스철학사.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