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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胡 十 六 國 時 代
西燕(서연)나라
AD, 370년에 前燕(전연)이 멸망한 후 前秦(전진)의 苻堅(부견)은 선비족 모용부를 대거 관
중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관중으로 이주된 모용홍, 모용충 형제는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
배하자 관중에서 선비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홍은 장안 동부에서 대장군 제북
왕을 지칭하였고, 모용충은 幷州 平陽(병주 평양)에서 거병하였다.
西 燕 王 朝 世 家
西燕(서연 AD. 384∽AD. 394 鮮卑族(선비족) 위치 장안지역 성: 慕容(모용)
|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제1대 | AD. 384 | 烈文帝(열문제) | 慕容泓(모용홍) | 모용준의 3남 | 長子 | 山西省,長子 |
| 제2대 | AD. 384∽AD. 386 | 威皇帝(위황제) | 慕容沖(모용충) | 모용홍의 동생 | 장자 | 산서성,장자 |
| 제3대 | AD. 386 | 燕王(연왕) | 段隨(단수) | |||
| 제4대 | AD. 386 | 燕王(연왕) | 慕容顗(모용의) | 모용황의 손자 | ||
| 제5대 | AD. 386 | 愍皇帝(민황제) | 慕容瑤(모용요) | 모용충의 아들 | ||
| 제6대 | AD. 386 | 燕王(연왕) | 慕容忠(모용충) | 모용홍의 아들 | ||
| 제7대 | AD. 386∽AD. 394 | 河東王(하동왕) | 慕容永(모용영) |
장안을 차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을 버려둔 채 수십만의
선비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으며, 이때부터 서연의 역사가 시작된다.
제1대 열문황제(AD. ?∽384) 전연의 2대 황제 모용준의 3남
모용준에 의해 齊北王(제북왕)에 책봉되었다. 370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한 뒤, 모용
홍은 부견에 의해 관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한 후
세력이 약해지자 384년에 세력을 모아서 서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은 서연을 건국한 후
부견이 파견한 토벌군에 의해 공격받았으나 격퇴에 성공하고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서쪽
으로 진격하였다. 같은 시기에 동생 모용충은 토벌군에게 패배하고 모용홍의 진영으로
도망쳐왔다. 모용홍은 그의 세력을 흡수하고 장안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384년 6월
그의 가혹한 명령에 불만을 품은 高蓋(고개)에게 살해당했으며 모용홍의 동생 모용충이
고개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를 이었다.
제2대 위황제(AD. 359∽AD. 386)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8남
359년, 형 모용홍이 제북왕에 봉해질 때, 모용충도 중산왕에 책봉되었다. 363년에는 영
동 장군에 임명되어 동진의 형양태수 劉遠(유원)을 공격해 형주 남부로 쫓아냈고, 368년
에 대사마로 승진했다. 370년, 전진의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키고 선비족 40,000여 호를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모용씨 황족들에게 관직을 배분했다. 이때 모용충은 부견의
총애를 받아 황궁에 수년간 머물다가 평양태수에 임명되어 평양으로 이동했다. 384년,
모용홍이 선비족들을 모아 華陰(화음)에서 제북왕을 지칭하자, 모용충도 평양에서 20,00
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켜 형에게 호흥하기 위해 전진의 蒲阪(포판)을 공격했다. 하지만 竇
衝(두충)의 토벌군을 만나 黃河(황하)에서 대패하고 선비족 기병 8,000명만 추스려 모용
홍과 합류했다. 384년 7월, 모용홍의 신하들인 高蓋(고개)와 宿勤崇(숙근숭) 등이 모용홍
을 살해하고 모용충을 황제로 추대했다. 모용충은 백관을 설치하고 고개를 상서령에 임
명한 뒤, 계속 장안을 향해 나아갔다. 당시 후진의 군주였던 요장은 부견과 싸우는 중이
었는데, 그는 서연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姚嵩(요숭)을 인질로 보냈다. 384년 7
월, 모용충의 서연군이 장안성에 이르기까지 200여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요장과 싸우다 말고 고양공 苻方(부방)을 여산에 주둔시킨 채 급히 철수했다. 이
후 부견은 조서를 내려 평원군 苻暉(부희)를 거기대장군으로 임명해 50,000명의 병력으
로 모용충을 막도록 명령하고, 하간공 苻琳(부림)를 중군대장에 임명해 후속부대로써 부
휘를 돕게 했다. 모용충은 비전투인원들까지 소와 말에 태워 마치 기병의 수가 많아 보
이도록 만들고, 병사들에게 명령해 흙먼지를 최대한 일으키면서 진격했다. 이러한 모용충
의 허전성세 계책은 부휘와 그의 군사들을 겁주기에 충분했고, 전진군의 사기는 크게 떨
어져 대치 상태에서 싸우기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연의 군사가 북을 치고 흙먼
지를 휘날리며 먼저 돌격하자 부휘는 크게 놀라 후퇴하다가 鄭西(정서)에서 모용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부휘의 패배를 전해들은 부견은 재빨리 상서 강우를 전장군에 임명해,
3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휘와 부림을 도와 阿房城(아방성)에서 모용충의 진격을 막
도록 했으나, 모용충은 다시 한번 전진군을 궤멸시켜 아방성마저 빼앗았다. 아방성이 함
락되면서 부림은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강우 또한 난전 중 전사했으며, 부
휘만이 홀로 살아남아 장안으로 도망쳤다. 마침내 모용충의 서연군이 장안성 앞까지 도
착하자, 부견은 성벽에 올라 모용충을 향해 “너희 노비들은 노비답게 소와 양이나 방목
하면서 지낼 것이지, 왜 죽으러 오느냐!”라며 꾸짖었다. 이에 모용충이 대답했다. “우리
노비들은 노비의 고통에 이제 싫증이 났다. 그러니 그대가 그 고통을 대신 느껴보거라!”
그러자 이번엔 부견이 사자를 보내 비단옷 한 벌을 선물하면서 휘유하려 하니, 모용충이
사자에게 말했다. “지금 마음은 천하에 있는데, 어찌 비단옷 한 벌의 작은 은혜로 만족할
수 있는가. 민약 너희 군신들이 천명을 벋들어 싸우기를 포기하고 당장 황제를 풀어준다
면, 내 당연히 부씨들을 사면하여 네가 우리에게 대우한대로 보답해주도록 하겠다.” 모용
충의 대답을 들은 부견은 격분하여 “내가 왕경락과 양평공(부융)의 말을 따르지 않아 白
虜(백로)가 감히 여기까자 이르게 했구나!”라며 울부짖었다. 384년 12월, 부견이 그의 뒷
통수를 치려다가 걸린 모용위를 잡아 그 일족과 함께 몰살시키고, 장안성 내에 있는 모
든 선비족들을 싸그리 잡아 죽였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려 구반거에서 서연의 군대를 상
대로 이기니, 모용충은 일단 아방성으로 철수했다. 385년 정월, 모용충은 아방성에서 황
제에 올라 연호를 경시로 개원했다. 서연의 황제에 즉위한 모용충은 이후 장안을 손에
넣기 위에 전진과 승패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모용충은 장안
성 서쪽에서 즉위하였다. 이후 장안에 정착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비족들은 고향인
관동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모용충의 정책에 불만으로 386년 2월 좌장군 韓延(한연)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서연의 장수 단수를 연왕으로 옹립했다.
제3대 단수(AD. ?∽AD. 386) 모용부 소속 장수
386년 2월, 장안을 차지한 모용충이 세력을 뻣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장안에 눌러앉
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줘 모용충을 따르던 선비족들이 크게 실망했다. 좌장군 한연이 부
족내 팽배해진 불만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모용충을 죽이고, 장수인 단수를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단수는 한연이 선비족과의 합의없이 어거지로 추대한 우두머리였고, 모
용씨도 아니었기에, 모용선비족들은 모두 단수의 명령을 따르길 거부했다. AD, 386년,
모용족 선비들 중 제일 권세가 높은 좌복야 慕容皝(모용황), 황문랑 慕容永(모용영)이 모
용부 선비족을 규합해 5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성 궁궐에 들이닥쳤다. 모용황과
모용영 무리들은 곧장 단수를 붙잡아 참살한 뒤, 모용의를 황제로 옹립했다.
제4대 국군(AD. ?∽AD. 386) 전연의 문명제 모용황의 손자이자 후연의 모용환의 아들
386년 3월, 장안을 점거하던 서연의 모용부 선비족들은 좌장군 한연이 옹립한 단수를
따르길 거부했다. 결국 서연의 모용부 내에서 발언권이 강했던 모용황과 모용영이 이들
을 규합해 5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단수를 처단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제위에 오르기
엔 눈치가 보였는지 모용의를 황제로 세웠다. 모용의는 서연의 제위에 올라 연호를 건
명으로 개원했다. 모용의는 동쪽으로 가기위해 선비족 남녀 300,000여명을 이끌고 장안
을 떠나려 했다. 이에 모용항의 동생 호군장군 慕容韜(모용도)가 빙익군 임진현으로 모
용의를 유인하여 죽여버렸다. (건명정변) 모용항은 위황제 모용충의 아들인 慕容瑤(모용
요)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모용의의 살해는 서로 세력이 비등했던 모용연에게는 모용항
을 실각시킬 좋은 빌미가 되었다. 며칠 후, 모용영은 모용항과 모용도, 모용요를 공격해
제거하고, 모용홍의 아들인 모용충을 황제로 추대했다.
제5대 국군(AD. ?∽AD. 386) 위 황제 모용충의 아들
모용항의 동생 모용도가 모용의를 살해해버리자, 모용항은 모용요를 황제로 옹립했다.
모용요는 연호를 건평으로 개원하고, 아버지 모용충을 위황제로 추존했다. 모용영과 무
의 장군 刁云(조운)이 모용의 살해사건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모용도를 공격해 그 세
력을 궤멸시키니, 모용도는 모용항의 군영으로 도망쳤다. 모용항은 모용영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려 했으나, 선비족들은 모용항을 따르지 않고 모용영에게 투항했다. 결국 모
용항 세력은 이내 제거당했고, 모용영은 모용요를 붙잡아 처형했다.
제6대 국군(AD. ?∽AD. 386) 모용홍의 아들
386년 3월, 모용영이 모용요를 죽이고 모용홍의 아들인 모용충을 황제로 옹립했다. 제
위에 오른 모용충은 연호를 건무로 개원하고, 모용영을 태위, 상서령, 하동공으로 삼았
다. 동년 6월, 무의장군 조운 등이 정변을 일으켜 모용충을 살해하고 모용영을 추대하
니, 모용영은 하동왕이 되어 후연에 칭번했다.
제7대 국군(AD, ?〜AD. 394) 조부는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의 숙부인 서평왕 모용운
370년, 전진의 부견이 전연을 멸망시켰을 때 다른 선비족들처럼 장안으로 강제이주되었
다. 부견이 쓸만하다 여긴 전연의 모용씨 황족이나 선비족에게 관직을 나누어 줄 때, 모
용영은 관직을 받지 못한 채 길바닥으로 쫓겨났다. 장안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던 모용영
은 가죽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처자식을 먹여살리는 궁핍한 생계를 이어나갔다. 384년,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의 동생 모용홍이 관중에서 거병하여 서연을 건국하자,
모용영은 처자식을 데리고 장안을 빠져나와 모용홍에게 귀순했다. 모용홍은 그를 상서에
임명했다. AD, 386년,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했지만 후연의 모용수와 후진의 요장이 두려
워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좌장군 한연이 모용충의 소극적인 모습에 실망한
선비족들을 선동해 모용충을 살해하고 단수를 옹립했다. 단수의 옹립은 한연의 독단으로
이루어졌기에 당연히 모용부 선비족들은 크게 반발했고, 이내 모용영과 좌복야 모용항에
의해 단수와 한연은 제거당했다. 모용영과 모용항은 서로 합의하여 후연에 있었던 모용
의를 불러와 제위에 앉혔다. 모용의는 모용영에게 장안을 맡긴 뒤 자신은 선비족 300,00
0명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후연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모용의는 도중에 모용항의 동
생인 호군장군 모용도에게 유인당해 임진에서 피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항은 분노
하여 모용도를 버리고 떠났다. 얼마 안가 모용영이 무의장군 조운과 함께 모용도를 치자,
모용도는 사마숙을 보내 근려에서 요격을 시도했다. 모용영은 사마숙을 격파하고 그를 잡
아 참수하니, 모용도는 두려워 형 모용항의 군영으로 도망쳤다. 모용항이 모용충의 아들
모용요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이미 선비족의 민심은 모용영에게 향했으므로, 모용항의
부하들은 모두 모용영에게 항복했다. 모용영은 힘이 빠진 모용항의 세력을 제거하고 모용
요도 살해한 뒤, 모용홍의 아들 모용충을 황제로 옹립했다. 제위에 오른 모용충은 모용영
을 태위, 수상서령에 임명하고 하동공에 봉했다. 386년 6월 무의장군 조운 등이 정변을
일으켜 모용충을 죽이고 모용영을 하동왕으로 옹립했다. 모용영은 대도독, 대장군, 대선
우, 옹진양양사주목, 하동왕을 자칭하면서 후연의 모용수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을 표명하
였다, 10월 모용영은 전진의 부비에게 동쪽으로 갈수있게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거절당하자 모용영은 襄陵(양릉)에서 부비를 격파하고 幷州(병주)일대를 장악하였다. 長子
(장자 山西省 長子 산서성 장자)에 수도를 두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394년 4월 20일 모
용수가 대벽을 포위하니, 모용영은 지관에 주둔시킨 군사들을 다시 불러 들여 친히 정예
병 50,000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모용수는 모용영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포위하던 군사
를 거두어 대벽 남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효기장군 모용국에게 1,000명의 기병을 주어
인근 골짜기 아래에 매복하도록 했다. 5월 16일 모용영의 서연군이 대벽에 도착해 후연
군과 맞붙었다. 모용수가 못이기는 척 후퇴하며 유인하니 모용영은 기세를 타고 뒤쫓았
다. 하지만 몇리 정도 추격했을 무렵, 매복해있었던 모용국이 튀어나와 모용영의 후위를
끊어버리자, 모용수는 후퇴를 멈추고 군대를 돌려 모용영을 공격했다. 모용영이 이끌던
서연군은 사면으로 포위당해 대패했으며, 8,000명이 참수되었다. 6월, 모용수가 진군해
장자를 포위했다. 모용영이 성을 빠져나와 후진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시중 난영이
말려 그만 두었다. 8월, 후연군의 포위가 날이 갈수록 조여오자, 모용영은 곤궁해져 동
진의 옹주자사 치회에게 자신의 아들인 상산공 모용홍을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청하고
추가로 옥새 한 몪음을 예물로 바쳤다. 치회는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며 후연의 모용수
가 서연의 모용영을 흡수하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구원하자고 권했다. 동진의 효
무제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겨 청연이주자사 왕공, 예주자사 유해에게 모용영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모용영은 동진에서 구원을 꺼릴까 염려해 태자 모용량을 인질로 보냈으나, 모
용량은 동진으로 가전 중 고도에서 평규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모용영은 또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는 즉시 진류공 탁발건과 장군 유악에게 50,000
명의 군사를 주어 서연을 구원케했다. 동진과 북위의 구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모용대일두귀의 부장 벌근 등이 성문을 열어 후연군을 맞이했다. 후연군은 모용영을 붙
잡아 죽이고, 서연의 공경과 문무관원인 조운, 모용대일두귀 등 30여명을 참살하면서
서연은 건국 11년만에 멸망했다. 모용영이 통치하던 8개의 군과 76,000여호의 백성, 그
리고 전진의 황실에서 쓰던 수레와 가마, 옷, 악사와 악기, 진귀한 보물 등을 모두 후연
이 독차지했다.
수도 천도
烈文帝(열문제) 慕容泓(모용홍) 華陰(화음) 陝西省 華陰(섬서성 화음)
威皇帝(위황제) 慕容沖(모용충) 長安(장안) 陝西省 西安(섬서성 서안)
河東王(하동왕) 慕容永(모용용) 長子(장자) 山西省 長子(산서성 장자)
사료 출처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三崎良章(삼기양장)의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과
인터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