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5:1~12)
우리 전통에도 문지방을 밟지 않는 금기가 있는데
블레셋에도 동일한 풍습이 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들 마음대로
다곤 신상 옆에 두었다가
그 다곤 신상이 문지방 위에서
처절히 사지가 흩어진 채로 버려진 것을 발견한 이후부터이다.
매우 거칠고,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를 내리실 때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한 없는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신 깊고도 넓은 하나님을
그렇게도 진노하게 하는 실체가 무얼까?
하나님과 대적이 될 수 없는 세상의 신들,
그들에 대한 경쟁심이나 질투심은 결코 그 동기가 될 수 없다.
언급했듯이 대적이 될 수 없는 하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체와 본질이 있지 않다.
사람에 대한 공의, 그리고 사랑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세상의 신에 대입하는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이 더할 수 없이 빗나가 있는 상태를 반증하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상태가 가장 적합한 모습이라면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기 위해 세상과 세상과 관련된 것에 덥혀 있는 것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진통, 고통의 과정 속에 있는 이들은 그 다음 적합한 모습이라 하자.
나머지 하나, 최악의 상태는 하나님이 조소와 무시의 대상으로 삼은 모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도 아무런 내적 도전을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추종하거나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따라하는 이들이 있다면
좀 다르게 여겨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비웃움과 조소, 무시를 하기까지
이미 마음의 도전을 받고 기회도 있었음에도 그 지경에 이르렀다면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단계가 된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사역 내내 참을성과 수용의 극한을 보여주셨던
예수님도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이에게 극노하셨다.
매우 다른 모습이다.
형편 없는 인생의 낙오자, 궁색하고 더러운 사람이
교회에 발을 내딛는 것을 예수님은 환영한다.
그리고 큰 잘못을 저질로 교회에 와서
처절하게 절망 속에서 소리 지르며 호소하는 이도
예수님은 환영하신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한 노력이 있고
그 자체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는
아마도 성전을 자신의 세상적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묘히 이용하는 자였을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은 예배하거나 생명,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소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가 조소의 대상, 비웃음의 대상, 무시의 대상이 된 것과 같다고 해도
전혀 과장되거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은 부족하여 넘어지고
아직 하나님을 부여잡지 못해 방황이나 절망하는 이에게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소하며 세속적 욕심과 교환하거나 이용하는
내밀한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가진 이를 가장 심각하게 보시는 것 같다.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곧바로 처절한 징계를 내리신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처절한 징계가 내리고 난 후에
그들은 허겁지겁 언약궤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원래 있던 언약궤가 다른 곳에 잠시 있다가 온 그 시/공간 사이 사건 중에
도대체 각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다른 간극 속에 있었으며,
어떤 본질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인가?
형상을 가진 물체라면 좀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