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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군 시절 후배들과 기념촬영한 박정희 전 대통령. 그는 자발적으로 만주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친일 의혹'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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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193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해 박 전 대통령은 만주행을 감행했고, 이듬해(1940년)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을 거쳐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결국 만주행은 그를 교사에서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문경보통학교에서 평범한 교사생활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이 왜 갑자기 만주로 떠났을까? 일각에서는 그가 어려서부터 군국주의의 권력집단인 군인을 동경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긴 칼 차고 싶어 만주에 갔다"는 것이다. 또 신경육군군관학교가 사실상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만주분교였다는 점에서 그의 만주행을 '자발적 친일'의 전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39년 항일연군 토벌 참가경력으로 군관학교 시험 치러"지난 2004년 <일송전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란 책을 통해 재만주 조선인의 친일행적을 고발했던 류연산씨(재중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는 <오마이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만주행은 친일과 직결되어 있다"며 "이러한 만주행적을 신사참배 했거나 일본군에 강제징병된 것과 동등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는 대구에서 선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며 "하지만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군관학교에 가서 일본군 군관이 되어 항일군 토벌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류씨는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을 제기해 '박정희 친일논쟁'에 불을 지폈다. 박 전 대통령이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설립된 간도특설부대에 근무한 것이 사실이라면 '친일논란'은 한껏 명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주재덕 선생 등의 증언을 토대로 "박정희는 1939년 항일연군 토벌에 참가한 경력으로 추천을 받아서 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며 "졸업을 앞두고 한동안 특설부대에 있으면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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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그는 만주 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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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그는 만주 신경육군군관학교의 입학자격(만주국 국민-미혼자-만 20세 이하)이 상당히 엄격했다는 점을 들어 "당시(1939년) 그가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류씨는 '박정희는 보병8단 단장부관으로 내근을 했기 때문에 독립군 토벌설은 다소 과장됐다'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 "박정희 생전에 발간된 책들을 보면 박정희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가 되어 열하에서 108차 팔로군 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고 있다"며 "무슨 근거로 '내근'을 했다고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45년 광복되기 전에 박정희는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한다"며 "(팔로군 토벌 등)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급할 수 있는가"라고 덧붙였다.
또한 류씨는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제기한 사자(死者)명예훼손 소송과 관련 "소송의 목적은 만주시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미화하려는 데 있다"며 "박정희의 친일문제는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후의 행적에 의해 규정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령 이사장은 일부 연변인사들에게 만주시기 박정희가 친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해 달라고 주문했다"며 "이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사실을 위조하고 날조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그는 "만주시기 박정희는 친일이라는 관점은 내 관점이라기보다 중국 조선족 역사학계의 공인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박정희 평가는 사적관계를 떠나 학술계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류연산씨와의 이메일 인터뷰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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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길림성 안도현성 시장건물. 광복 전 이곳에는 간도조선인특설부대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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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연산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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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만주행은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
-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의 '만주 행적'이 '친일'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행은 친일과 직결되어 있다. 자각적으로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고 또한 모범생이었으며 졸업 후에는 열하에서 중국 항일부대인 제팔로군 토벌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이러한 만주행적을 당시 한국인으로서 신사참배를 했거나 일본군 강제징병에 나간 것과 동등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부득이한 경위에 그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는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문제이다.
나는 친일을 네 가지 경우로 본다. 첫째, 이완용과 같은 나라의 대표자이다. 그는 이완용이기 전에 한국의 대표자이다. 이완용한테는 개인의 생존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한테는 친일을 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파의 길과 항일하는 길밖에 없다.
둘째, 어떤 단체장이나 조직의 대표이다. 그들의 친일행위는 전체 단체나 조직을 친일로 몰아간다. 그로 인하여 단체와 조직의 성원들이 본의 아니게 친일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름이 있는 문인 및 학자 등이다. 그들의 언론은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준다. 최남선, 이광수가 친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넷째, 자각적인 행위자들로서 그들의 행위가 타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 경우다. 박정희와 같은 경우다. 그는 대구에서 선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갔고 일본군 군관이 되어 항일군 토벌에 참가한 것이다."
- 박정희의 만주행적이 왜 중요한가?
"당시 만주는 일본의 식민지국가였다. 일본은 만주국에서 이른바 '5족협화 낙토만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그리고 박정희가 만주행을 한 그 해(1939년)는 만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세력과 공산당의 항일부대의 활동도 거의 사라져 가는 때였다. 그러나 이미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이고 개인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활동무대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와 일본군에 참가한 것은 항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당시 항일을 하는 길은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만주를 경유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관내로 들어가 한국임시정부 산하의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고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독립운동이 목적이 아니었다."
- 어떻게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쫓게 됐나?
"1995년 5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나는 <서울신문>에 '두만강 천리', '압록강 2천리', '송화강 5천리', '흑룡강 7천리' 등 제목의 르포를 연재했다. 박정희와 관련해서는 두만강과 압록강 답사 길에서 인터뷰한 사실이 있다. 1995년 봄에 두만강 답사 길에 현재의 용정시 백금에서 박정희의 친척 되는 분을 만났고, 그해 7월 말 압록강 답사 길에 요녕성 심양에서 박정희하고 함께 군에 있었던 주재덕 선생을 만났다.
당시 조선족역사학계에서는 박정희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지금도 여전하다)이었다. 안도현조선족발자취 총서 <겨레의 발자취>(1987년 출판)에 쓴 차상훈(역사학자. 안도현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편집위원회 주임) 선생의 '주구무장대의 시말'이라는 글에 박정희는 특설부대 중대장급 군관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다시 이 글은 조선족 학계의 공인을 받아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결전(4)>(1991년 출판)에도 수록되었다.
나는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고 답사 길에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기초로 벌써 1995년에 글을 썼고 <서울신문>에 보냈다. 그런데 그때 <서울신문>에 채납(採納)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9년에 <혈연의 강들>(연변인민출판사 출판)에 처음 발표했고, 7년 후인 2002년 12월 월간 <말>지에 발표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부언하지만 내가 쓴 글에 나타난 박정희에 대한 관점은 나 개인의 관점이라기보다 이미 학계의 관점이라는 사실이다."
"간도특설대 생존자들이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 증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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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소학교 교사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그는 1939년 만주행을 선택함으로써 '교사'에서 '군인'을 변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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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 간도특설대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은 어떤 것인가?
"1995년 7월에 만난 주재덕 선생의 증언을 개괄하면 이렇다. 그는 1943년에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했고 이듬해 부대를 따라 열하에 가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설부대에서는 박정희가 특설부대 출신이며 1939년에 항일연군토벌에 참가한 그 경력으로 추천을 받아서 신경육군군관학교로 시험을 쳐서 갔다고 했다.
그리고 열하에 있을 때 박정희는 졸업을 앞두고 한동안 특설부대에 있었고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여 팔로군 선전원과 부상을 입고 백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구장(區長)을 체포하여 정보반에 넘겼다고 했다. 그리고 특설부대가 팔로군에 기의를 하려고 모의했을 때 그도 동감했다고 했다.
조선족의 저명한 시인 조룡남의 형님 조룡학(趙龍學)은 연변의 훈춘에서 특설부대에 참군했고, 문화대혁명 때 투쟁을 맞고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동생인 조룡남의 집에 와서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도 열하에서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광복 후 집으로 오지 말고 한국으로 갔더라면 이런 투쟁은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있었다는 증언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가?
"박정희 특설부대설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은 결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2001년 나는 길림성 반석시에서 만난 방석도(方錫渡) 선생을 만났고 박정희가 특설부대 출신이라는 증언을 했다. 그는 길림성 연변의 안도현 사람이며 자기 마을에 특설부대 출신이 있었는데 광복 후 청산을 받아 총살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을 심판할 때 박정희도 특설부대 출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차상훈 선생 역시 1980년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면서 자료발굴을 하던 시절에 안도현의 어른들한테서 박정희가 특설부대였고 술집에서 일본군하고 특설부대원간에 쟁론이 붙었을 때 박정희가 어떻게 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하더라고 했다.
안도현 이룡득(민간전설 수집가. 안도현 문화관장) 선생은 1987년에 안도현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책임편집을 담당했었는데 그때 차상훈 선생이 쓴 박정희문제를 심중(深重)히 하여 특설부대 출신들하고 안도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조직하고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안도현에서 나서 자란 함형도, 함창도 형제는 그들의 부친이 광복 전에 안도현성에서 사진사였고 박정희하고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함형도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의 외삼촌이 경영하는 명월진 냉면옥에 박정희가 다녔고 돈도 주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 출신들의 단체인 명월회가 있다. 1997년 이 명월회장 송석하(육군소장 예편. 작고)는 "가끔 박정희가 명월구로 놀러와 술을 먹고 간 적이 있다"(<실록 군인 박정희>, 정운현)고 증언한 바 있다. 언제 어느 시절에 명월구로 자주 다녔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명월구에서 신경의 거리는 500km로, 지금도 기차로 9시간 여행길이다. 교통이 대단히 불편했던 당시 신경에서 명월구로 가끔 다니면서 술을 먹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술을 먹으러 두 곳 사이로 다니는 사람은 없다.
또한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후에는 열하에 가 있었다. 언제 명월구로 다녔을까? 아마 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 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특설부대를 통해 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갔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1980년대 역사자료발굴을 위하여 연변 각지를 다녔던 역사학자들도 박정희의 특설부대설을 심심찮게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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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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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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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만주군관학교 입학자격을 어떻게 얻었을까?"
- 간도특설대 근무가 친일의 '직접 근거'가 되는 것인가?
"간도특설부대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는 친일근거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부대 내에서의 역할 여하에 달렸다. 광복 후 연변에는 특설부대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은 친일파청산을 하던 당시에 심사를 받았다. 그리고 죄의 경중을 가려서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하고 지방 감시를 받기도 했다.
주재덕은 팔로군을 직접 죽인 것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후에 무기형으로 되었고 조룡학은 농촌에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당시에 경중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당했다."
- 다수의 학자들은 증명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근무는 '설'로만 취급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간도특설부대에 대한 일제의 자료가 전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제가 망하면서 소각했을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소부분이다. 특설부대는 정원이 800여명에 육박하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람 수는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 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박정희 특설부대설이 민간에 충만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또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미루어서 사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주재덕 선생은 박정희가 이미 1939년 간도특설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약한 것 같다. 그 해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만주를 잠깐 방문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신경육군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 경로와 관련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에서 발간된 박정희 관련 글을 보면 박정희는 1939년 3월에 교단을 떠났고 이듬해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법정에 제기한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의 고소자료에서도 1939년을 문경소학교에 있었다는 증거가 서지 않는다. 동시에 당시 박정희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몇몇 증인들도 이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만주를 잠깐 방문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생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첫째, 오직 만주국 국민이어야 한다. 둘째, 반드시 미혼자여야 한다. 셋째, 연령은 만 20세까지이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이 구비한 자로서 신체가 건강하고 시험에 합격된 자라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모두가 불합격이다.
그가 문경소학교 교사로 계속 근무했다고 하면 만주국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이나 그때나 국적을 '잠깐 방문' 하면서도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시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는 이미 22세이고 기혼 남성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어떻게 입학할 수 있었는가? 정상통로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교관이었던 일본군 아리카와 대령의 소개로 시험자격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아리카와는 신경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러시아와 만주국의 접경지대인 목단강 변방에 있었고 겨우 연대장에 불과했다. 그가 시험자격을 무시하고 박정희를 시험치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박정희가 <만선일보>에 천황폐하에 대한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맹세하는 혈서를 발표하였고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강재호라는 사람이 박정희를 시험을 치게 했다고 한다. 강재호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엄청난 불법을 합법화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을 해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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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제기한 류연산씨의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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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
강재호라는 인물을 파악하고 보면 박정희 만주행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강재호는 특설부대 중위이고 시험관이었다. 1939년 9월경에 목단강에서 만주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는데 강재호가 박정희를 데리고 시험장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1998년 2월 13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이재기(박정희와 함께 만주육군군관학교 동창임)의 회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박정희는 특설부대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시험에는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서 군관을 배양할 수요로부터 국적, 연령, 결혼여부를 가리지 않고 부대 내에서 16명을 특별 추천하여 시험자격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서 박정희는 시험 전에 특설부대에 참가했고 특설부대원의 자격으로 시험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바 있지만 주재덕 선생의 증언이 결코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단서로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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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3월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졸업식을 보도한 <만주일보>. 만주국 부의 황제로부터 은사품을 받은 박정희 생도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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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 군인 박정희>, 정운현 |
"팔로군 토벌은 박정희 생전에 나온 얘기"
- 주재덕 선생은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마치기 직전 3개월간 간도특설대에서 견습군관으로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운현씨의 저서(<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본 육사 졸업 직후 만주군 보병8단에서 견습사관(3개월간)으로 있었다고 한다. "주재덕 선생은 박정희하고 3달간 특설부대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특설부대의 출신들 역시 박정희하고 함께 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여기에 대해서 한마디로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 제 발로 신경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 것 자체가 '친일의 근거'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입학 자체가 친일은 아니다. 그러나 제 발로 들어간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박정희는 모범생으로 부의 황제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일제의 식민지 국가인 만주국의 황제로부터 그런 신임을 받았다고 하면 결코 박정희의 학생시절의 언행이 일제한테는 가상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 현재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후부터 해방될 때까지 근무한 곳이 간도특설대인가 보병8단인가? "광복 당시 박정희는 보병8단 소속이었다고 생각한다."
- 현재까지 1944년 7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만주국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보병8단의 주임무가 팔로군의 토벌이라고 봤을 때 이것도 친일의 근거가 될 수 있나? "분명한 친일이다. 팔로군은 중국의 항일부대로서 전칭은 중국 국민혁명군 제팔로군이다. 국민혁명군 총사령은 장개석이고 팔로군 군장은 주덕이다. 다시 말하면 팔로군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군이다.
박정희가 있었던 열하일대에서 활동한 팔로군 부대는 이운창(李雲昌)부대이며 그 속에는 조선의용군 100여명이 있었다. 현재 이운창부대의 조선의용군에서 항일을 했던 분이 생존해있다. 김응삼(金應三) 선생은 길림성 반석현에 있다.
박정희 생전에 나온 박정희 관련 책들을 보면 박정희는 팔로군을 토벌했으므로 친일이 아닌 반공용사라고 한다. 물론 팔로군은 공산당의 부대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여 공동항일전선을 결성했고 공산당의 부대를 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혁명군의 한 갈래 군으로 편성했다. 그러므로 팔로군을 토벌하는 것은 국민혁명군을 토벌하는 것이며 국민혁명군을 토벌하는 것은 친일행위인 것이다."
- 정운현씨는 저서 <군인 박정희>에서 박 전 대통령은 보병8단에서 '단장 부관'을 맡고 있어 작전을 수행하기보다 '내근'을 했기 때문에 '독립군토벌설'은 다소 과장됐다고 분석했는데. "박정희 생전에 발간된 박정희 관련 책들에서는 박정희가 만주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가 되어 열하에서 108차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정운현씨가 무슨 근거로 '내근'을 했다고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박정희 통치시기 한국사회에서는 언론자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팔로군 토벌설은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 나온 것이고 박정희도 아는 일이다. 만약 아니었다고 하면 박정희가 사람들이 그러한 책들을 읽도록 놔두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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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장춘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의 정문. 광복 전 만주국육군사관학교가 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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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연산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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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에서 내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역할이 항일은 아니다"- 박정희의 중국인 동기생인 고경인씨도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다"고 진술했는데. "정운현씨는 박정희가 내근을 했고 토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경인씨는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둘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직접 팔로군과의 교전은 없었다고 하자. 또한 정운현씨의 주장대로 내근을 했다고 하자. 그러므로 박정희의 역할은 항일인가? 승냥이가 양을 죽이는데 발로 덮치고 입으로 문다. 그러므로 발과 입만 문제가 되는 것인가? 몸뚱이며 눈이며 직접 양의 몸에 닿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부관은 부관으로서의 직책이 있다. 그 직책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그 부대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1944년부터 광복이 날 때까지 특설부대와 8단이 팔로군을 토벌하면서 팔로군과 항일군중, 그리고 무고한 백성 등을 포함하여 1만5000여 명을 사살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한 공로로 특설부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입공하였다.
연변의 권위적인 역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박정희는 훈7등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전에 박정희는 소위에서 중위로 승급한다. 아무런 공로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급할 수 있는가?"
- 주재덕 선생이 박정희가 항일대오였던 팔로군에 귀의하려고 결심한 적도 있다고 증언한 점이 흥미로운데. "특설부대는 열하에 가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면서 자신들이 일제의 개다리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그래서 군관들이 먼저 팔로군에 귀의하여 넘어갈 것을 결심했고 주재덕한테 연계 임무를 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병사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받을 것이나 군관들에 대해서는 심사를 해야 한다는 팔로군의 전제조건이 특설부대의 군관들로 하여금 선뜻 넘어가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담판을 약속했다. 그런데 팔로군하고 만날 것을 약속한 날에 공교롭게도 폭우가 쏟아져서 다리가 끊어져서 팔로군이 주둔해있는 강 건너 마을로 갈 수가 없었단다. 당시 특설부대 대원 중 3분의 2가 되는 사람들이 귀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탄로가 날 위험이 있었으므로 주재덕은 박씨하고 둘이서 강을 건너 팔로군에 갔고 특설부대는 그대로 팔로군의 적인 일본군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 월간 <말>에 연재한 글을 엮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2004년, 아이필드)는 책 때문에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출판사 사장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박 이사장측은 한마디로 "박정희의 친일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박근령 이사장은 내가 사실을 날조하여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소송을 했다. 그런데 내가 외국인이고 한국법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나의 책을 출판한 도서출판 아이필드 유연식 사장을 기소하였다. 한마디로 박정희는 친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바지가 판나서 엉덩이가 드러났는데도 그것이 엉덩이가 아니라 젖가슴이라고 하는 식이다. 하긴 판난 바지를 수리를 할 방도가 없으니 그런 억지라도 부려보려는 알량한 수작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다시 짚어서 말하면 소송의 목적은 만주시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정당화하려는 데 있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느냐, 1939년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간 경위만을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박정희는 공인된 인물이다. 공인된 인물에 대한 연구는 학술에서 다루어야 할 사항이다.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느냐, 신경육군군관학교를 어떻게 갔느냐 하는 것은 과정문제이다. 박정희의 친일문제는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후의 행적에 의해 규정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의 생전에 발간된 책들에 공공연히 108차 공산당 토벌에 참가했고 아주 용맹했다고 한 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생전에 스스로 팔로군 토벌을 승인한 것이 된다. 이로써 박정희는 특설부대가 아니라고 해도, 대구사범에 있다가 잠깐 시간을 내어 신경육군군관학교 시험을 보고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친일행적에는 전혀 손상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친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이 양자는 형식과 본질의 관계문제이다. 박근령 이사장은 형식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본질을 덮어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종이로 불을 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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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만주행을 통해 군인으로 변신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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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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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령 이사장, 연변 인사들 동원해 박정희 만주행적 정당화"- 육영재단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연변 학자 등을 동원해 박정희의 만주행적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안다. 당시 동원된 연변 학자 등은 신뢰할 만한 인물인가? "박근령 이사장은 연변에서 인물들을 물색하였다. 최용린, 이송덕, 황범송, 이동만 등 네 사람이다. 최용린은 연변대학에서 부교수로 있다가 퇴직했고, 이송덕은 연변박물관 자료수집원으로 있다가 퇴직했고, 황범송은 퇴직한 사진기자이고, 이동만은 퇴직한 의사이다. 이들 중에서 최용린이 60대 후반이고, 다른 분들은 70대이다.
최용린은 비록 연변대학 부교수였다고는 하지만 학자는 아니다. 그는 평생에 논문 한편 발표한 적 없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홍콩과 중국 대륙에서는 <중화명인사전> <세계명인사전> <중화걸출한 인재사전> 등을 만들어왔는데 책값만 내면 누구나 입력 가능했고 지금은 학위, 심지어 공로메달까지도 돈 주고 만들 수 있다.
나한테도 매달 두 세 곳에서 그런 편지가 오는데 나는 봉투를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진다. 내가 20세기 중국 100대 인물에 선정되었는데 인민폐 6000원만 보내면 증서와 함께 사적이 실린 책을 보낼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이송덕은 연변박물관에서 공산당의 항일투쟁관련자료를 수집해온 사람이다. 여러 글들도 발표했는데 대체로 다른 사람과 합작이다. 황범송은 사진가로는 유명하고, 이동만은 의사일 뿐이다.
그들은 2005년 초 박근령 이사장으로부터 만주시기 박정희가 친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달라는 주문을 받았고 그때로부터 그들은 '중국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들고 활동했다.
첫째, '중국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라고 하면 중앙정부 소속이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단체나 직장의 이름을 만들 때 그 단체나 직장이 소속되어 있는 지방이나 급별에 따라서 하도록 되어 있다. 연변에서는 오직 연변을 앞에 달 수가 있다. 이 단체의 원명은 '연변대학 로교수협회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이다.
둘째, 최용린은 연구소장이 아니라 부소장이다. 그런데 2005년 3월에 연변대학 노교수협회에서는 이 연구소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인정하고 폐지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2005년에 최용린 등이 육영재단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갈 때 비자수속을 할 수가 없어서 '연변동북아경제연구소'의 연구일군으로 가장하고 비자신청을 하였던 것이다.
셋째, 한국에 간 후 최용린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연변대학 노교수협회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를 마치 국가급의 연구소인 것처럼 '중국 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로 만들고 스스로 소장이 되고, 황범송과 이동만은 부소장이 되고, 이송덕은 사무총장으로 탈변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공인하는 역사학자의 신분으로 <대한뉴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넷째, 이들은 <대한뉴스>의 국제부 기자로 등용되었고 그때로부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동시에 한국과 중국에서 나를 매몰시키기 위해서 한국에서는 나를 빨갱이로 몰아 노무현 대통령부터 이해찬 국무총리, 각 당 당수들과 언론매체에 글을 보냈다. 또 중국에서는 반당, 반사회주의분자로 모함하는 고발서를 써서 후진타오 주석, 연변정부·당 및 그 유관 부문에 보냈다. 나의 글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문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다섯째, 최용린과 이송덕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섰고 위조하고 날조한 증언들을 했다. 제1차 재판은 2006년 10월에 피고의 무죄를 선고했다. 현재 제2차 재판을 앞둔 시점에 있다. 이송덕은 공공연하게 중국조선족 역사자료를 부정하는 식으로 엄청난 날조를 했다. 이로 하여 중국 조선족역사학계는 물론 유관부문과 인사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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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대권 경쟁에 뛰어든 박근혜 후보.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 평가했던 박 후보가 부친의 친일논란은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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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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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평가는 사적 관계 떠나 학술계·국민에 맡겨야"- 연변 학계에서는 박정희의 친일행적(만주행적)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돼 왔나?"연변이 아니라 중국 조선족 역사학계에서는 1980년 초부터 박정희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리고 한결같은 결론은 박정희가 분명히 친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박정희의 특설부대 소속 설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나의 글에 나타난, 만주시기 박정희는 친일이라는 관점은 나의 관점이라기보다 중국 조선족역사학계에서 공인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박정희의 친일행적에 대해 박근혜 후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나? "언젠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호하면서 그 당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식으로 반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이완용도 친일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박정희의 참군경위는 피동이 아닌 주동이다. 그리고 군관으로 항일군 토벌에 참가했다. 그것하고 본의 아니게 강제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가한 것을 어찌 동일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박정희는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이면서 공인된 역사인물이다. 그러므로 사적 관계를 떠나 박정희 평가는 학술계와 국민한테 맡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 한국사회에서 '박정희 향수' '박정희 불러내기'가 여전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현상의 본질은 결과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한강기적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과정은 묻고 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위험한 발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결론에 당도하도록 사람들의 사유를 오도한다."
- 대선후보 검증 이슈(박근혜 후보의 경우)에서 박정희의 친일행적 등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나? "이 문제는 내가 대답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자로서 학술을 이야기할 뿐이다. 친일에 대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일 것이다."
ⓒ구영식 기자
첫댓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하면.. 국가 경제의 초석을 다진 영웅으로 보는거 같아 마음이 아픔니다.. 교사라는 직업으로 충분히 먹고 살수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강제 징집두 아닌 자신이 직접 군인의길 특히 사관 으로 간것 차체가 군력를 위해 친일을 한것이건만... 독립후 군사 쿠테타도 국민을 억압하고 권력을 쥐고 흔들기 위한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고.. 그러기위해선 돈이 필요하니 특권까지 주며 돈있는 자들에게 돈받아가며 사업 을 하게 한것이고..
과거는 찾아보지도 않고 들어난 결과만을 보며... 국가경제의 영웅화를 하는 사람과 광신도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 참으로 한숨밖에 안나오네요
천박한 역사관은 그 아비에 그 자식들이라 거기에 맹하는 무리를 보노라면
경제발전의 요소는 투자와 교육과 저축이다. 박정희의 업적은 고속도로하나밖에 없다. 투자자는 사람보다 투자처의 인프라다. 그리고 나머진 우리부모님들의 교육열과 먹고 살려는 노력의 결과지 박정희가 나라를 살렸다는 주장은 친일파의 말장난이고 우상화다
소름이돋고 피가역류하네요...긴칼찬일제인간백정놈하고 사진을 찍은모습을보니 ...분명 이나라는 한번뒤집어져서 역사를정립하여야한다 ...저런민족반역놈을 어릴때는 위대하다고 배웠어요...저런쓰레기가 아직살아있다면 내손에 벌써 난도질당했을겁니다
그딸년도 저애비를 영웅으로 우상화시키네요..민족사적으로 역사를봐야한데 마치 개인사로 가정사로 쳐보네요
형편없는 년놈들 이었지요. 박근혜같은 친일파 딸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면 피가 꺼꾸로 치솟는 것 같습니다. 저러니 과거 면도날로 얼굴을 그어 버렸겠지 에이 퉤퉤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