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최고 속도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한때는 뛰는 게 제일 큰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왜 이제는 시간을 정해놓고 한강변을 뛰나 했다. 어른이 되니 부자연스러워진 게 너무 많다.
- 자신의 블로그에서
걸어다니는 사람들
영화 [시]에서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쓰려면 ‘잘 봐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이고은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잘 봐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작가다. 그는 사물과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느리게 보고, 찬찬히 생각한다. 물론 대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은 절대적이다. 이고은은 한 프로필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퇴근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관찰하고, 버스에서 앞에 앉은 대머리 아저씨의 뒤통수를 그려보고, 여행할 때마다 각 나라 양념병과 과자를 구경하느라 슈퍼에서 반나절을 보냅니다.” ‘그리다’라는 동사보다 ‘보다’라는 지각 동사가 더 어울리는 작가. 그의 블로그에 실린 ‘런던관찰기’와 ‘서울잠복일지’는 빈 도화지에 펜을 갖다 대기 전, 관찰에 여념이 없는 한 사색가를 떠올리게 한다.
[Victoria Street] 2009 watercolor, A3
이고은의 그림은 일상의 단면을 기록한, 시와 소설 중간쯤에 위치한 서사적 소묘 같다. 마치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평범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펜과 연필 그리고 먹으로 생명을 얻은 인물들은 대부분 어디론가 향해 걷고 있다. 그들은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무언가에 골몰해있거나 우두커니 서 있다. “걷는 사람들은 제 작업에 자주 재현되는 화두이자 제 마음을 움직이는 사물입니다.” 혼자 마구 걸어 다닐 때 시야에 포착되는 풍광이야말로 이고은의 그림이 탄생되는 영감의 원천이란다. “그것은 훌륭한 작업 파트너이기도 해요. 느리게 걷기나 산책은 복잡한 마음과 오염된 눈을 비워지게 하죠.” 바로 그 때문에 관객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사색을 하듯, 휴식을 취하듯 느긋한 행복감과 마주하게 되는지도. ‘이젠 좀 쉬어가도 돼’라며 지친 발걸음을 잡아끄는 속삭임이 그의 그림에서 들리는 듯하다.
낯선 타지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남들 앞에서 또박또박 읊어 댈만한 ‘꿈’은 없었다. 그런 그가 입학 후에 전공을 선택하는 한동대에 입학한 것은 행운이었다. 1년 동안 “정말 이것저것 다 해본 후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을 결국 찾아냈단다. 그것은 시각 디자인이었다.
“학교에서 꿈을 찾은 셈이죠. 점수에 맞춰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지망했다면 이런 길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입시미술을 하지 않은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꼼꼼하고 세심하지 못한 성격이기 때문에 입시 미술을 했다면 아예 흥미를 갖지 못했거나 지레 겁먹고 포기했을 거예요.”
졸업 후 디자인 에이전시에 취직을 했지만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야근에 치이는 삶은 조직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유럽을 떠돌다 정착하게 된 영국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영국에서 4년을 머물게 되었어요. 학교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일도 했죠. 불확실성 때문에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많은 걸 배운 시간들이었죠.”
관찰의 중요성도 여기서 움텄다. 낯선 타지에서의 삶은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습관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림 그리는 방식도 함께 배웠다. 인신공격은 하지 않지만, 그림을 놓고 왜 좋은지 왜 나쁜지 토론하는 영국의 학풍은 ‘어떤’ 그림을 ‘왜’ 그릴 것인가에 대한 작가적 고민을 낳게 했다.
Crisps Drawing 2010 A4, mixed media
“한국적인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과연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들요. 한복이나 탈춤 같은 것 말고, 진짜 우리 것이요.” 이를 테면 그것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든가, 24시 찜질방, 개찰구를 경쟁적으로 빨리 빠져나가는 사람들처럼 긴장감 넘치는 삶에 관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해 안 되는 것들이요? 그건 현대인들이 사는 방법들이에요.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모습은 이상하지요.”
빛과 그림자
이고은의 그림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빛과 그림자’이다. 그에게 있어 색감보다는 선과 구도가 중요하고, 특히 콘트라스트는 즐겨하는 표현 기법이다. 사람들의 잔잔한 보폭에는 그림자가 함께 하고, 얼굴에 쏟아지는 빛의 음영도 과감하게 표출된다. 한 동료 작가는 이를 일컬어 “천재나 할 수 있는 과감한 데생 능력이다”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대비에 대한 재능은 회색, 검은색, 흰색이라는 색의 조화 속에서 그만의 색감을 만들어냈다. 또한 ‘먹’은 그에게 중요한 그림 도구다. “민화를 배웠는데, 그 때 먹의 매력을 알게 되었죠.” 모든 작업을 직접 손으로 그리는 이고은은 ‘하나’를 그리기 위해 많은 작업을 병행한다. 평소에 신문, 스티커, 상표, 전단지 등을 모아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주제가 있는 작업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후, 관련 자료를 인터넷, 도서관 등에서 구한다.
[Walking in the Dark] 2007 mixed media
이고은은 최근 머리카락에 관한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를 위해 버스에서 남 몰래 뒤통수를 관찰하고, 남대문에 캠코더를 들고 가 파마머리를 찍고, 초등학교 아이들의 밤톨머리도 적극 탐색 중이다. 이렇게 공들인 정보가 모아지면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최대한 생각의 틀을 없애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일부러 집중을 하지 않기 위해서죠. 어떤 요소를 그려야겠다, 생각하면 틀에 박힌 그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손을 풀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그림을 안 그린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이고은이 사물과 대상 앞에서 느림보 사색가가 되는 것은, [시]의 미자처럼 ‘진짜로’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보고 느낀다는 것’이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행위라는 것을.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것이 제겐 더 중요해요.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걸 느끼면 그림에 생기가 돌고, 진짜가 되거든요. 생명력이 깃든.”
이고은(1981 ~)
2004년 한동대 산업정보디자인학부를 졸업.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다 런던으로 갔다. 2007년까지 세인트 마틴스 미술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런던에서 친구들과 [Monday Morning Says]라는 독립잡지를 창간 전시회 등을 열었고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아트북 페어에 초대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파라다이스], [하얀얼굴] 등 소설책에 삽화를 그렸으며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일 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10년 월간디자인네트 1월호에 "36 Young Designers in Asia"에 선정되기도 했다. 홈페이지: www.gwensdesign.com
독립 칼럼니스트. 그 전엔 줄곧 패션지에서 피처 에디터로 밥을 먹었다. <보그>에서는 문화와 미술 관련 기사를 쓰고, <슈어>에서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인터뷰했다. 지은 책으로는 여자들의 트릴레마를 다룬 에세이집 [영애씨, 문제는 남자가 아니야]가 있다. 홈페이지: http://www.aboutabook.co.kr/
첫댓글 관찰의 중요성, 느리게 본다는 것 ...빛과 그림자,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가 공부 하고 있는 HAT에 적용 되네요
다솜 안에 있으면서 하나의 눈을 더 가지고 다른 관점들을 느끼고 공감하고 이해 할 수 있다는게 ...저는 참 행복합니다 ^^*
매순간 일상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눈으로 삶을 대한다는 면에서 다솜 선생님들과 같은 지향을 갖고 계신 아름다운 분이네요. 이런 아름다운 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