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적 배경 ◈ 불교의 전래 ◈ 귀족불교의 발전 ◈ 수,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 현대 중국의 불교 인도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에 간다라지역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의 서부지역에 유입되었다. 중국 땅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 고유의 사상과 결합하여 고도의 불교문화를 형성, 발전함으로써 동양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보리 달마가 전수하여 중국에서 꽃 피운 선종은 인류 문화사에서도 유래가 없을 만큼 위대한 결실을 맺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대승불교불상 역사적 배경 한(漢)나라가 오늘날 ‘중국 본토’라 불리는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면서, 동시에 실크로드 주변의 오아시스 왕국들에 대해 일종의 군사적 섭정을 실시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인도 스키타이 종족인 월지족(月支族)이 소그디아나(Sogdiana)로부터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서부의 광활한 지역에 대하여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이와 같이 양쪽의 지배와 문화적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고,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을 따라 번성한 소왕국들, 예를 들어 북로의 카쉬가르, 쿠차, 투르판과 남로의 코탄은 중국과 인도의 문화가 뒤섞인 혼성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불교는 쿠샤나(Kusa-na) 제국과 더 서쪽으로 나아가서는 파르티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수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무역로의 대상(隊商)들과 합류한 승려들과 불교경전에 정통한 재가 신도들이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는 커다란 장애에 봉착함이 없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불교가 널리 퍼져 나갔는데, 이는 국가들이 작았고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가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한나라의 문명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 형성해 온 매우 명확히 규정된 정치적ㆍ사회적이념과 규범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문화적 동질감과 우월감을 강하게 구축한 교육받은 지식층이 통치하고 있던 한나라는 정치와 사회에 있어서 총체적 질서라는 이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 해탈이라는 교의가 스며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 교의가 ‘이방인’에게서 비롯된 경우라면, 더욱더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사회와 정치가 사상적으로 결합된 중국의 지배적 전통과 불교 사이의 긴장은 중국의 불교사 전체에 있어서 지속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220년에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소한 150년 동안은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하던 불교가, 중국 땅의 대부분이 와해되고 이방의 왕조들에 의해 통치되던 분열의 시대(311~589년)에 이르자 강력한 종교운동으로서 발전하고 성장을 이루었던 것은 분명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중국 땅에서의 공식적인 이념은 바로 그 성격 자체가 제국적 통일과 우주적 권력이라는 이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상 실현에 실패하게 되자, 정치적 혼돈과 다(多)중심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불교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589년에 제국이 재통일되자, 중국불교는 정신적,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불교교단은 수(隋) 왕조와 당(唐) 왕조시대(589~906년)의 통치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당시에도 전통적인 정치이념을 이루는 기본적 이상과 규범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유래하는 도덕원리들이 교육받은 지식층의 대다수에 의해서 생생히 고수되고 있었다. 유교의 이상세계는 매우 뿌리가 깊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즉 인간 세상은 천상과 지상이 공존하는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는데, ‘하늘의 명령’에 의해 그 직을 수여받은 통치자는 자신의 제의적(祭儀的), 윤리적, 행정적 의무를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우주의 평형상태를 유지할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정부의 권위는 원리상 무한하다. 또 그것은 사회 전체와, 필요하다면 그의 시민 전체의 개인생활도 포용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회는 두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생산을 담당하는 다수의 인민과, 이들을 온정으로 대하면서도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다스리는 ‘학자 관료’인 지식층이다. 이 지식층에게는 그들의 윤리적 자질과 학문적 성취 때문에 일체의 권력과 특권과 보다 높은 문화를 독점할 자격이 주어져 있다. 기본이 되는 가치는 안정, 계층적 질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조화, 그리고 행위의 의례를 근면하게 준수하는 것인데, 이러한 가치들을 도덕교육에 의해서, 또는 필요하다면 강압에 의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불교는 그 자체의 성격상 이러한 지배적 이념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유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실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상은 이 세상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며, 교의는 그 형이상학적인 질에 대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질적인 적용력과 사회ㆍ정치적인 효력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중국의 종교적, 철학적 사고에 있어서 유교가 아닌 고유한 전통인 도교를 앞세운다. 예를 들어, 육신의 불멸성을 획득한다거나 자연의 구체적인 힘과 조화를 이룬다는 실질적인 목표를 보다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지향했던 도교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중적 종교는 이러한 일반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신성시 되는 조상의 땅에 대해 그 지역의 지신(地神)을 받들어 모신 제사가 그러했듯이,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가족과 씨족을 통합했다. 모든 존재에 대한 불교의 거부, 특히 모든 현상이 완전히 비실재임을 주장하는 대승의 교의는 일종의 병적인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쉽게 간주되었으며, 어둠과 죽음의 원리인 음(陰)과 동일시 되었다. 업, 윤회, 개인 해탈과 같은 관념들이 인도에서는 종교문화의 일부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이것들이 잘 정돈된 중국인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좀처럼 양립할 수 없는 기묘하고 색다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교는 깨달음, 열반, 성불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를 목표로 삼아 추구해 들어갔지만, 추상적이고 비실질적인 성격 때문에 유교권에서는 쉽사리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그 긴장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불교는 그 시초부터 확고하게 사원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사원생활은 일체의 사회적 굴레와 의무, 특히 가정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거부하므로, 불교는 중국인들이 고수하는 사회윤리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사회윤리에 의하면, 인간으로서의 첫째 의무는 자식으로서의 효도에 있었고,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생산적인 노동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따라서 거지나 부랑자를 사회적 기생충이라 보았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체계는 성직자의 사회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농사짓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성직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 삶의 일부를 방랑으로 보내야 했으므로 음식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교단은 출세간적인 조직으로서 세속의 권력이 부가한 의무, 즉 부역과 세금의 의무 등에 구애받지 않았다. 군역을 면제받고 정부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정부의 권위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내포한다고 믿고 있던 중국인의 사고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인의 고유 이념과 불교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결국 불안정한 공존의 상황을 이끌었다. 여기서 불교는 정해진 한계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허락되었다. 불교는 중국문화의 보조물로서 당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자국의 문화에 유익하고, 어쩌면 자국의 문화를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유교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가르침을 형이상학적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이었다. 결국 불교는 왕조와 국가와 사회를 주술적으로 보호하는 가치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러한 긴장은 과격한 박해의 양상으로 표면화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초기에 불교가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에도, 결국 불교국이 되었던 타이나 미얀마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은 결코 ‘불교국’이 되지 않았다. 불교는 언제나 중국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전통의 그늘 속에서 발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완전히 적대적인 환경이었다면, 불교가 중국에 있는 주요 종교들 중의 하나로서도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긴장과 투쟁의 영역과는 달리, 중국문명은 불교의 영향에 그 자신을 보다 쉽게 내맡기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중국불교는 오히려 수렴과 혼합이라는 극히 복잡한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불교적 요소들이 중국적인 관념과 실천과 제도와 접목되고 융합되었다. 그리고 중국불교가 독특한 창조성을 지니게 된 주요한 원천도 그러한 복합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자면, 사원생활의 이상과 중국인의 은둔주의, 불교의 명상과 도교에서 말하는 자연과의 합일, 회향(廻向)에 대한 대승의 믿음과 중국인의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 불교에 있어서 재가 신도의 집회와 중국에 있어서 전통적인 농민의 조합, 밀교적 의식과 도교의 주술 등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끊이지 않고 다양하게 결합함으로써 중국불교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성격을 결정짓는 또 다른 요인은 지리적 상황이었다. 3세기 이후 불교는 남쪽의 해상 통로를 거쳐서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의 탐랄립티(Ta-mralipti)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차이나를 지나 중국의 광동(廣東)에 이르는 해상로는 다시 육로로 장사(長沙)에 이르거나, 해안을 따라 양자강의 하류에 이른다. 그러나 이 통로를 통한 불교와 중국문화의 접촉은 경전과 불상을 지니고서 실크로드를 거쳐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 전법사의 유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북부를 오늘날의 신강성의 밖에 있는 카쉬카르, 쿠차, 투르판, 코탄 등과 같은 불교의 중심지와 연결해 주었고, 보다 멀리 인도의 북서지방과 소그디아나지역을 이어 주었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은 중국불교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한족(漢族) 출신이 아닌 왕조가 중국 북부의 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이 특히 심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국불교의 전형적인 지역화를 초래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북중국을 장악한 비(非)한족 출신의 통치자들은 쉽게 개종하였고, 그러한 왕조들의 지배 아래서는 왕실과 승려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또한 불교경전에 대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진 곳도 북방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남반부는 한족의 왕조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간접적으로만 미쳐 훨씬 더 중국화된 불교가 발전하였고, 고유한 종교적 철학적 전통에 근거하여 불교를 해석하는 데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인도불교의 다양한 부파와 대승운동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2세기에는 공(空)의 교의를 담은 『대지도론(大智度論)』, 400년 무렵에는 중관학(中觀學), 600년 무렵에는 유식학(唯識學), 8세기에는 밀교 등이 파도처럼 아시아 대륙으로 밀려 들어와 결국에는 중국불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흡수의 과정이 마침내 중국의 불교인들 자신에게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들은 가장 다양하면서도 간혹은 투쟁적이기도 한 관념과 실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불교는 한 지역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마르칸드와 인도의 날란다처럼 전파의 중심지가 매우 많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불교 내의 다양성은 심화되었다. 이렇게 계속 성장한 교의적 다양성이 중국불교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교판(敎判)’으로 조화하고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는데, 교판이란 붓다가 설한 가르침을 ‘시기와 수준’으로 구별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학구적인 연구 방식과 함께, 모든 불전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禪宗)은 중국불교의 가장 큰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전래 묘법연화경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한나라의 명제(明帝, 58~75년 재위)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명제가 꿈 속에서 금인(金人)의 모습을 한 성인을 만났다. 명제는 그 사람이 붓다라고 불리는 외국의 신(神)임이 틀림없다는 말을 듣고서 인도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그 특사는 한 사람(일설에서는 두 사람)의 인도인 승려를 대동하고서 한 필의 백마와 『사십이장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는 이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수도인 낙양 근처에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불교가 이 설화에서처럼 인도로부터 직접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쿠샤나 제국과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등지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실크로드의 동쪽을 계속 거쳐 오면서 점차 여과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전설에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확신할 만한 약간의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불교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서 신뢰할 만한 최초의 것은 서기 65년에 황태자가 취한 불교신앙에 대한 법령이다. 이 기록은 1세기 중엽의 중국에는 불교식의 어떤 의식(儀式)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더욱이 명제 치하에서 황실의 일부에서는 불교를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사십이장경』이 알려진 것은 오로지 후대의 개정판 덕분이지만, 그 내용의 일부를 통해서 원래의 판본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그 연대도 아마 명제의 시대와 같은 시기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백마사 건물은 훨씬 후대에 건립된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불교의 요람으로서 방문객들에게 안내되고 있으며, 적어도 3세기의 문헌에서는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서기 65년 황태자의 불교활동을 다루는 부분 이외에도 후한(後漢)시대의 사서(史書)에서는 한나라 황실과 관련된 불교에 대해서는 종종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들은 모두 성스러운 존재로서의 붓다에 대한 의식이 종교적인 도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육신을 불멸하게 한다는 도술(道術)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그러한 불멸성을 획득하여 이제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천국과 같은 장소에서 신자들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신적 존재들에 대해서 의식을 행하는데, 이러한 점들이 불교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도교는 영감을 너무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의존하는 다양한 의식은 도교의 외래적 변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그러한 결론을 확신하게 한다. 한나라의 부조물에는 불상이 엄니를 가진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이 있다. 코끼리는 붓다의 전기에 등장하는 동물로서 불교예술에서는 매우 대중화된 소재이다. 그런데 이들 속에는 중국의 신화에서 유래하는 다른 초자연적 생물들도 있다. 불교의 몇몇 관념들이 중국에 맨 처음 출현하게 된 데에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이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관념과 실천에 있어서 불교와 도교 사이에는 표면상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결합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일찍이 성립된 불교문헌들은 불교의 관념을 표현하는 경우에 흔히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오해를 깊게 할 뿐이었다. 때로는 두 종교의 창시자가 동일인이라고 볼 정도로 혼동되기도 하였다. 한나라 때의 문헌에서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라는 이론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노자가 서역으로 떠나서 인도 노예들의 낮은 지적 수준을 채택하여 그 자신이 만든 원래의 교의로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스스로 붓다의 모습으로 그들 사이에 화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두 종교 사이에 닮아 보이는 것을 설명하려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론은 불교적 요소를 도교에 편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또 ‘외국에 있는 도교의 지파’로서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서 불교와 도교가 서로 경쟁 상대가 되자, 이 이론은 불교의 전파를 반대하는 근본 쟁점들 중의 하나가 되는 가운데, 노자가 서역에서 화현했다는 설화는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대립은 천년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13세기에 불교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불교의 확대는 대규모의 번역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번역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불교의 무수한 전문어에 상당하는 중국어를 새로 조성해 내야 했고, 또는 중국의 전통적 종교, 주로 도교의 용어로부터 차용해야 했다. 외국의 전법사들은 중국어에 거의 익숙하지 못했고, 산스크리트어나 인도의 방언인 프라크리트어를 아는 중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번역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역경원’을 구성하여 해결했다. 원어에 정통한 외국의 승려가 문헌을 암송하거나 저술하면, 대개 2개 국어를 사용하는 해석가의 도움으로 1차 번역이 완성되는데, 이것을 나중에 중국인 보조원이 다듬고 교정하여 한자로 기록하여 나갔다. 4세기 말엽까지는 외국의 전법사와 그 제자들에 의해 집단작업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전법사의 작업을 돕는 제자들은 승려와 속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황실과 고급 관료의 후원을 받게 된 5세기 초엽부터는 간혹 12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번역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수세대에 걸쳐 대를 이어 번역활동에 노력하는 사람들이 등장함으로써 불교 번역가라는 특수한 부류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중국인들로 구성된 단순 문필가였다. 이들의 번역에는 최초의 판본을 특징짓는 도교의 어휘들을 그대로 차용하는 등, 통속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초기 판본의 그러한 어휘들은 점차 보다 정확하고 새롭게 바뀌어 갔다. 수천에 이르는 불교경전과 논서들이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고 종종 재번역되기도 했다. 이미 730년에는 그 수가 2,000종 이상의 문헌들로 증가하였으며, 이들 중의 일부는 네 차례 또는 다섯 차례나 연이어 번역되었다. 후한시대에 ‘낙양(洛陽)의 교단’에서 번역을 위해 선택한 문헌의 범위는 보다 한정되어 있었다. 많은 주의를 쏟았던 것은 선정(禪定)을 다루는 짤막한 문헌들이었다. 정신수행에 대한 고대의 불교적 체계는 명상과 호흡 조절에 있어서 도교의 정신적 육체적 기술과 외형상 뭔가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대승경전에 대한 최초의 한역본도 있었다. 즉 여러 부처들과 보살들의 장엄함과 구제력을 다루는 신앙적 문헌들, 공(空)의 교의나 모든 현상의 보편적 비실재성을 설하는 경전들이었다. 이 중 후자는 후대에 꽃피울 중국불교의 철학에 무한한 영향을 끼치게 될 교의를 담고 있었다. 중국 땅에 형성된 초기불교교단의 실제 조직과 사회적 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낙양 교단’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유물이 봉헌 비명(碑銘)으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중국어가 아닌 중부 인도의 방언으로 새겨져 있다. 3세기 중엽 이전에는 율장(律藏)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가장 근본적인 계율들은 구전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국면은 중국불교의 특징을 유지하게 될 교의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재가 신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동방화된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는데, 그 교의상 다소 외래적이고 이질적인 종류의 문화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몰아닥친 소요와 군벌주의로 인해 말세적 감정과 불확실성이 뒤섞여 있던 후한시대에 와서는 불교가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불교가 강조한 것이 모든 사물이 무상하고, 모든 존재가 헛것이며, 온갖 위험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덧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써 정신적 수행과 정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제례의 의무를 중시하는 유교와 기괴한 술법을 중시하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과 비교할 때,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했고,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강력하고 자애로운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자신이 보호된다고 믿었다. 아울러 승려들은 독신생활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정신활동을 조절하고 점차 모든 형태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요가와 같이 명상이나 정신집중의 기술을 실수(實修)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수 세기 동안 중국의 불교적 종교생활의 기본 내용을 이루어 왔다. 교단 전반의 조직이 안정되고 포교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말엽으로, 이 때가 되어서야 불교는 중국사회의 교양 있는 상위계급 속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치적 상황은 극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몇십 년 동안 지속된 혼돈과 내란으로 서기 220년 한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이어서 약 50년 동안 세 지역을 각각 거점으로 하여 경쟁하고 있던 정치권력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 한다. 서진(西晋, 265~316년)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되었지만, 이 기간은 짧았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다행이었다. 정치적 다중심주의가 불교의 전파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중국의 북부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제 불교는 다른 지역으로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늘날 남경(南京),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잇는 양자강 하류의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삼각지까지 퍼져 나갔다. 북부에서의 불교 전파와 사원 건립은 주로 다르마라크샤(Dharmaraks?, 竺法蘭)의 활약 덕분이었다. 위대한 번역가요, 전법사인 그는 돈황에서 온 중국화된 인도 스키타이인이었는데, 제자들의 도움으로 3세기 후반에 대규모로 대중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이제까지 언급해 온 지리적 특수화의 전형적인 양상이 등장함을 엿볼 수 있다. 즉 북부와 남부의 대조적인 양상이다. 황하를 젖줄로 하여 고대로부터 중국문명의 중심지가 된 북부는 평원과 황토에 자리잡고 나름대로의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남부 역시 양자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발전하여 독자적인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특히 남부는 3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처음으로 개발의 국면에 들어선 광대한 지역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부한 유산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부에서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의 지역으로부터 밀려온 신선한 충격에 의해 계속 양분과 자극을 받고 있었다. 대륙을 곧게 뚫은 통로를 따라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불교의 주요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서쪽으로 돈황(敦煌)으로부터 동쪽의 낙양과 산동(山東)을 잇는 것이 그 주요 통로였다. 온갖 정치적 소요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교통은 지속되었고, 북부의 대도시들이 외국 상인들의 중요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260년경, 불교의 경전을 구하고자 서역으로 가는 중국인 순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러한 여행의 선구자는 코탄으로 갔던 주자행(朱子行)이었다. 그는 후대에 5세기의 법현(法顯)이나 7세기의 현장(玄斡)과 같은 뛰어난 순례자들이 훨씬 더 광대한 탐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번역활동이 대규모로 추진되었던 곳도 역시 북부였다. 다르마라크샤는 혼자서 약 150여 종의 한역경전을 완성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의 일부는 대승의 가장 중요한 고전이다.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실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최초로 완역된 일이다. 법화경은 모든 신자에게 성불의 길을 개방한 ‘일불승(一佛乘)’의 교의를 담고서 붓다의 영원성과 전지성을 강조하며 상징과 비유를 매우 풍부하게 싣고 있는데, 이는 곧 중국불교에서 단연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공경받는 경전이 되었다. 다른 모든 대승의 교의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특별한 계시로서 그것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6세기에 성립된 천태종(天台宗)에서 최종적으로 표명되었다.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법(法)의 궁극적인 성취라고 간주하여, 그들의 오시(五時) 교판 중 진리의 가장 완성된 위치인 다섯 번째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북부에서 승려들의 공동체가 성장하였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는 3세기 중엽에 계율의 논서에 대한 한역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그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원생활을 위해 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세세한 규율의 규범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자강 하류지역에서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거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접촉한 징후가 전혀 없고, 사원 중심의 불교에 대한 강조가 훨씬 약하다. 실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번역가로서 지겸(支謙)은 중국에 귀화한 인도 스키타이 출신의 재가 신도였다. 그가 완성한 많은 문헌들은 정확성보다는 문학적 우아함과 가독성(可讀性)을 추구한 세련된 번역이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중국불교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두 경전을 고르자면, 바로 아미타경과 유마경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미타바(Amita-bha)라고 하는 아미타는 서방의 극락에 있다고 하는 자비의 부처이다. 후대 중국에서는 이 서방의 극락을 정토(淨土)라고 하며, 성심 성의를 다하여 아미타를 염원하고 그 성스러운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모든 신자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재가 신도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지닌 또 다른 근본 경전은 유마경이었다. 이는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서, 너무나 대중화되어 일곱 차례나 한역되었다. 이 경전에서의 중심 인물은 신심이 돈독하고 부유한 재가 신도이다. 그는 초월의 경지요, 공(空)인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 때문에 일련의 형이상학적 논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들까지도 이길 수 있었다. 4세기부터 이 경전은 교양 있는 속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매력을 끌었던 점은 이 경전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과 신분이었고 철학적 논쟁의 깊이와 높은 문학적 기품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불교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는 남부의 불교가 제국의 최남단과 접촉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최남단은 오늘날의 베트남에 속하는 하노이이다. 베트남의 북방지역은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0년 동안 이 지역은 중국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베트남인으로 혼성된 귀족지식층이 등장하였고, 철저히 중국화되어 갔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이론적으로는 그 최남단에 위치한 제후국이었지만, 중세 초기에 이르러 중국인 통치자는 멀리 떨어진 수도로부터 실질상의 독립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 이주자들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중국화의 과정은 촉진되었는데, 이들은 중국 본토에 소요가 계속되던 시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 조용하고 반식민지인 이 지역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이 거주한 중국 영토는 오늘날의 다낭 너머로까지는 확장되지 않았다. 현재의 베트남의 남반부에서는 인도화된 두 개의 국가가 흥기하였다. 하나는 푸난 왕국이었는데, 이는 메콩 강의 삼각주와 오늘날 캄푸치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다른 하나는 참파 왕국으로 인도차이나의 남동지역을 지배했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메콩 강의 분지는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의 중심지가 접하는 중간 지역이었다. 중국불교 초기의 것으로서 가장 흥미 있는 문서들 중의 하나가 발견된 것도 이 지역에서였다. 달리 자세한 인적 사항은 전해지지 않고 단지 어떤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쓴 논서인데, 여기서 그는 전통을 고수하는 반대자의 공격에 대해 불교를 방어한다. 이 책은 유교권에 있었던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그렇게 상투적인 반불교적 주장들이 완강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교권의 완강한 태도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쏟아진 많은 양의 반박서와 변론서를 통해서 계속 반복된다. 반불교적 논쟁은 주로 승려직에 대한 반대로, 사원제도를 고수하는 불교의 성격과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교의 종교적 믿음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불교는 극락과 지옥을 보답으로 약속함으로써 순박한 대중을 미신으로 이끌고 호도하는 ‘이단’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러한 교의적 배려는 드문 경우에만 주요한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와 유교 사이의 쟁론을 담은 논서는 앞에서 설명한 근본적인 긴장을 반영한다. 불교의 성직에 대한 견해와 관심, 그리고 속세의 권위에 대한 견해와 관심의 양자 사이에 빚어진 이념적 대립이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승려에 대해 반대하는 논쟁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윤리적ㆍ공리적ㆍ정치, 경제적 측면이다. 윤리적 주장은 사원생활이 가정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라는 신성한 규범을 부자연스럽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리적 견지에서는 승려의 생활이 비생산적이며 공동체에 무익하다고 비난하며, 평민들이 저마다 밭을 일구지 않고 천을 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 것이라고 한다. 끝으로 자치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교단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며, 또 사원은 범죄를 저지른 반사회적 분자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편 승려들의 재정적 특권과 재산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침식했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존립권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그들의 이러한 비난은 근본적이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불교 측에서는 승려든지 속인이든지 이에 대해 대응책을 강구하고 반박을 제기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 경우 윤리적 문제가 가장 곤란한 점이었을 것이다. 승려는 교단에 합류함으로써 자기 가족과 완전히 끈을 끊을 수밖에 없어, 중국인의 전통적 윤리 중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위배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옹호자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불교나 유교나 모두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며, 교단에 집적된 무한한 공덕은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될 것이고, 따라서 도덕과 질서의 유지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공리적 입장의 공격에 대해서도 사원생활은 정신적 해탈이 속세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무익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 자신도 ‘사람은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반박했다. 끝으로 정치ㆍ경제적 책임에 대해서 승려들은 속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더라도 법에 어긋남이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며, 기본적으로 교단은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는 통치자를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때때로 구성원 중 일부에 의해 권력과 부가 남용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전체 교단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귀족불교의 발전 서기 300년 무렵에는 전쟁과 혼란이 국가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국의 북부는 비(非)한족의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 북부의 지식층이 남쪽으로 대거 탈출을 시작하자 많은 승려들도 이에 뒤따랐다.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승려들과 지배계급 사이에 이미 확고한 유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전개될 중국불교의 역사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불교가 교양 있는 지식층에 파고듦으로써 전형적인 혼성의 고급불교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4세기 초기에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이식되었고, 이내 귀족들의 지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 중세의 지배계급은 소수의 ‘대가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재산과 권력을 세습받는 씨족이었다. 이 대가족의 우두머리들은 관료조직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왕실을 지배하며, 하위 직책은 친척들과 가신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들 집단에서는 유교가 그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다. 실제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현학적인 여가를 즐기려는 것이 이 계층의 분위기였으며,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열렬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의 철학적 입장과 종교적 입장이 모두 지식층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였으며, 난해한 논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승불교, 특히 공의 심오한 교의를 언제라도 들어줄 수 있는 청중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특히 지둔(支遁, 314~366년)과 같은 학승은 전통적인 중국사상의 용어를 통해 대승의 심오한 뜻을 설명했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중국불교철학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학식이 깊고 존경받는 승려들이 등장함으로써 교단 자체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중국화된 외국인이 주로 불교를 전파해 왔지만 이때부터 중국인 승려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신적인 이유로 교단에 참여하였으며, 그들에게는 불교가 아직 우월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철학적 전통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사원이 ‘은둔 생활’의 새로운 형태로 비쳤을지 모른다. 결국 계급의 장벽이 엄격한 중세의 중국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던 불교의 교단이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매력을 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서 4세기 이후에는 몇몇 대사찰들이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4세기를 거치면서 이런 유형의 불교가 양자강의 하류지역에서 번창하였고 동진(東晋)이 장악한 영토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불전의 번역은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였을 뿐이고, 장안(長安)에 거주하였던 구라마집(Kuma-rajI-va, 鳩摩羅什)과 그의 학파와 같은 북부의 몇몇 대가들이 이룩한 방대한 저술활동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다. 남부의 번역가들 중에서는 순례승인 법현(法顯, 317~420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도에 6년 동안 체류하면서 경전을 수집하였고, 매우 가치 있는 여행기를 남겼다. 황실의 호의와 귀족의 지지로 불교는 계속 번창했는데, 380년경 진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통치자로서는 최초로 수계를 받고 공식적인 재가 신도가 되었다. 400년경 진나라의 영토에서는 1,700곳 이상의 사찰과 비구니를 포함하여 80,000여 명 이상의 승려가 집계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단에서는 반발도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 내에서는 유명한 모든 쟁점을 이용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교단을 차단하거나 국가의 관리 아래 두려는 모종의 시도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부의 왕조에서는 결코 강력한 억압책을 유도하지는 못했다. 즉 남부에서 불교교단은 계속 성장하였고, 550년에 승려의 숫자는 82,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황실의 후원은 갈수록 두터워졌는데, 열광적인 불교 신자였던 양(梁)나라의 무제(武帝, 502~549년 재위) 치하에서 불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무제는 의식적으로 인도의 유명한 아쇼카 왕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도교를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을 채근하여 사찰을 건립할 막대한 기금을 조성하고, 공적인 기부금을 내어 사찰에 봉사하였으며, 방대한 종교적 집회를 조직하여 거기서 개인적으로 ‘보살의 서원’을 취하고 경전을 강설하였다. 유교 측에서 편찬한 사서에서는 황제의 이러한 열정에 대해 무책임한 바보라고 비난했을 정도였지만, 반면에 불교의 문헌에서는 극구 칭송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북부의 왕조에서 불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개 한족 출신이 아닌 통치자의 후원을 받았다. 이 후원자들은 불교 승려들을 새로운 유형의 왕실 주법사로서 환영하였다. 승려들이 기도와 주문으로써 그들의 번영과 군사적 승리를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승려들을 고문으로 고용하여, 유교의 영향을 적절히 규제할 수단으로서 불교의 교의를 이용하였다. 중국의 역사를 보건대, 이방의 정복자들은 항상 자신의 문화적ㆍ민족적 동질성을 보존하는 일과 완전한 동화라는 상반된 목표 사이에서 시달렸다. 그런데 유교의 사회ㆍ정치적 교의는 가장 강력한 중국화의 힘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국가와 교단 사이의 유착을 이끌었다. 정부는 불교를 방대한 규모로 후원하였지만, 동시에 승려를 관료화시킴으로써 교단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도교는 통치자의 후원으로 불교의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기도 했으며, 도사(道師)들의 책략은 불교의 박해를 야기하였다. 교의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구마라집의 등장이었다. 쿠차 출신의 위대한 전법사였던 그는 402년에 당시 수도였던 장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국에 중관철학을 소개하였으며, 대규모의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역경원의 도움으로 방대한 양의 한역경전을 완성하였다. 황실의 후원과 국가의 감독은 북위(北魏)의 통치 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들은 중국 북부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를 장악하였는데, 처음에는 산서(山西)의 북쪽 변경에 수도를 정했다가 494년에는 고대의 수도인 낙양으로 옮겼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518년에는 낙양 외곽에 1,300개 이상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이 사찰들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중국인의 전통에 따라 목조건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지거나 파괴되고 말았다. 그 거대한 사찰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중세의 큰 성당도 왜소해 보일 정도의 탑과 전당을 갖추고 있으며 무궁한 부와 사치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은 인도의 초기 양식과 중국적 양식에 바탕을 둔 혼성 형태의 탑으로 조성되었는데, 낙양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탑은 그 높이가 거의 20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놀랄 만한 다른 기념물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바로 거대한 석굴사원들이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위의 두 수도 근처에 위치해 있는 대동(大同) 근처의 운강(雲崗) 석굴과 낙양 근처의 용문(龍門) 사원이다. 석굴사원들은 400년경 북서쪽 끝에 위치한 돈황에서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석굴사원들은 위나라와 그 이후의 왕조 치하에서 중국 북부의 10여 군데에 보다 장대한 규모로 계속 조성되었다. 이러한 석굴사원이야말로 중국과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각 요소들이 종합된 종교예술의 진정한 보고(寶庫)이다. 교단에 있어서는 후원과 국가통제의 복합이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이득일 수 있었다. 교단의 경제적 기반은 사원의 지주가 되는 일종의 소작제도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 소작인들은 ‘교단 가족’ 또는 ‘붓다 가족’이라 불렸는데, 수많은 농민과 농노로 구성되었으며 대규모의 사찰에 배치되어 사찰의 농지에서 일하거나 잡일을 맡아 하였다. 이 제도가 사찰에 고정수입을 제공하였으며, 토지는 면세되었으므로 사원의 경제는 날로 증진되었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아 대규모의 사찰들은 사원의 요긴한 부동산으로 발전하였으며, 토지 개간이나 금융활동 등 다양한 유형의 상업에도 참여하였다. 점차로 불교교단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477년에 위나라에는 약 6,500여 곳의 사찰과 77,00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40년 후에 그 숫자는 각각 30,000여 곳의 사찰과 2,000,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세의 확장은 지나친 현세주의와 물질적 이득의 추구,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불교교단은 규범을 내세우는 유교적 전통주의자들과 도교의 경쟁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각각 446년과 574년에 있었던 제1, 2차 법난으로 인해 가혹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불교에 대한 공식적인 후원은 특권이 부여된 소수에 국한되었고, 교양 있는 승려와 교단의 관리자들로 구성된 지식층이 대규모의 사찰들을 이끌었다. 교단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상급기관을 이루는 상위층으로서 황실이나 통치를 담당하는 지식층과의 밀접한 유대를 맺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소규모의 사찰이나 포교당이라는 방대한 조직에 소수의 승려들이 배치되어 서민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러는 가운데 불교는 비불교적인 지역적 의례와 종교적 활동이 융합되었고, 경전연구나 지적 논쟁의 세계에서는 그 활동이 점차 감소하였다. 결국 불교의 의식 속에 전통적인 조상숭배의 의례와 대중적인 구세적 운동이 혼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후자는 이 고통의 세계가 결국은 번영과 정의의 이상세계를 세워 줄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출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한 운동은 쉽게 정치화될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에 점철된 숱한 반란운동들에 승려들이 참여하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항상 예언자이거나 미륵의 화신임을 자처했다. 불교에 영감을 입은 그러한 모반이 5세기와 6세기 초에 아홉 차례나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철저히 탄압되었다. 불교교단에 대한 정부의 관리와 통제 또한 더욱 거세어져 갔다. 정부는 큰 사찰의 지식층에 대해서는 후원을 하되, 여기에는 제도적인 통제와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적 성격을 지닌 가혹한 억제 수단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교단의 대중에 대해서는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현대까지 견지되었다. 수 세기에 걸친 정치적 분열 끝에 589년 중국은 재통일되는데, 이 시점이 중국불교가 정착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북부에서나 남부에서나 불교는 온갖 분야에서 중국사회에 고루 전파되었으며, 불교교단은 놀랄 만한 정신적, 물질적 영향력으로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였다. 교의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경전들과 논서 및 율장(律藏)이 번역되었으며, 중국인 대가들은 이를 근거로 독자적인 교의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토대로 하여 중국불교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수나라와 당나라시대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수, 당시대의 불교 부흥기 수 왕조(589~618년)와 당 왕조(618~906년)의 치하에서 중국의 중세 문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강력한 중앙정부가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하였으며, 한국이나 베트남, 티베트 같은 주변 국가들에 대하여 자국의 종주권을 강요하였다.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은 재건되어 세계 제패의 상징이 되었다. 1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수도에는 거대한 궁전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중앙 행정기구가 들어섰다. 수와 당시대에는 사람의 수에 따라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를 통해 농업경제가 통제되었으며, 이러한 농업경제가 대장원을 소유한 귀족 지식층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는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불교는 이전보다 더 큰 번영을 누렸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불교교단을 후원하였는데,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고려되기도 했다. 수나라의 개창자는 의식적으로 불교의 전통에서 성왕(聖王)이라고 추앙되는 전륜왕(轉輪王)인 양 행세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3~705년)는 능력은 있었으나 무자비한 전제 군주로서 15년 동안(690~705년) 중국을 통치하였는데, 무후는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다. 그 뒤를 이은 통치자들은 국가와 왕조의 안녕을 위해 의식을 집전하도록 설립된 국가사찰이라는 제도를 운용하였고, 일부 통치자들은 많은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명한 승려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그러나 북위(北魏)의 치하에서처럼 후원은 항상 교단을 관료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당나라시대에는 속인 관리들까지도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사원의 규모를 억제하고 승려직의 시험제도를 두어 그 순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중국인의 통제 아래 들어간 중앙아시아는, 7세기 후반까지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그 매개 지역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시대의 초기에는 인도 순례자가 급증하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현장(玄斡, 596~664년경)이다. 그가 중국불교의 독보적인 인물이 된 것은 그의 엄청난 여행 경력(629~645년)과 뛰어난 관찰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번역가였으며, 일찍이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한 예가 없었던 중국에서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했던 극히 드문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번역팀이 이룩한 작품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중국인의 활동으로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고를 기록한다. 7세기 후반에 아랍의 정복자들이 인도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자 순례자들은 점점 중국의 남부 해안에서 현재의 캘커타 근처에 있는 탐랄립티(Ta-mralipti)와 스리랑카로 통하는 해상 통로를 택하였다. 불교는 그 시대의 종교적이고 지적인 생활에 있어서 보다 창조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 6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일부 학파와 종파들은 인도의 입김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현장은 인도의 유식학을 받아들여 중국에 학파를 설립하였고, 이보다 약간 후대에는 인도의 승려들에 의해 비교(秘敎)적인 밀교의 다양한 유형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은 근본적으로 중국적이었다. 중국으로 이식되었든지, 아니면 중국에서 발전하였든지, 이들 모두는 무수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그 중 일부는 번역된 경전에 의거하였고, 또 일부는 위대한 독창성을 지닌 독립된 이론들로 이루어졌다. 정토종(淨土宗)과 같은 일부 종파들은 해탈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아미타의 자비에 의탁하는 헌신적이고 전파력이 강한 신앙형태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다른 종파들은 ‘교의의 분류’인 판석(判釋)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판석이란 하나의 특별한 경전이 최상의 진리를 담고 있고, 다른 경전들은 모두 계시의 연속적인 준비단계에 속하며, 그 각각은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하여 각기 다른 청중에게 설해지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에 따라서 천태종은 교설의 구조가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법화경의 일승(一乘)이라는 교의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천태종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화엄종에서는 그 귀착점을 화엄경(華嚴經)으로 삼았다. 대승적인 관념과 실천이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선종은 7세기경 중국에서 형성되었다. 본래 선(禪)의 발생지는 인도이다. 선은 불교수행의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이지만 불교 발생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다. 인도는 환경적인 요인때문에 고대부터 명상법이 발달하였다. 한낮의 지독한 더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숲 속의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자 이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까지도 사색하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도 당시 다양한 수행법을 다 경험해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마침내 정각을 깨친 것이다. 중국에서 선의 기원은 남북조시대에 보리 달마(Bodhidharma, 6세기 초 생존)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와서 선을 전래한 것이다. 달마는 인도의 남천축국 향지왕의 왕자로,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이어 27대조가 되었는데 ‘중국에 가서 크게 법을 펴도록 하라’는 스승의 지시로 중국으로 왔다. 당시 인도의 고승이 중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나라 무제는 궁으로 달마를 초빙하여 문답을 나누었다. 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 수많은 절을 짓고 스님이 되고자 원하는 이들을 도왔으며, 경전을 간행하거나 복사하는 일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였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 아무 공덕이 없습니까?” “그러한 일들은 모두가 다만 중생세계에서의 조금 나은 결과를 얻어서,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마치 모양을 따르는 그림자가 비록 있기는 하나 실체가 아닌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하고 원만하게 밝은 지혜를 얻는 공덕이 참된 것이나, 이것은 세속의 공덕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제가 다시 물었다. “불법의 가장 거룩한 근본 의의는 무엇입니까?” “근본 자체가 공적(空寂)하여 거룩한 것까지도 없습니다.” “그러면 나를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양 무제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 달마는 선의 오묘한 뜻을 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판단하고 북쪽 낙양의 숭산 소림굴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 수도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 무렵 선종 2조가 되는 혜가가 소림굴을 찾아 문답하던 중 깨치고 법을 이어 받았다. 이어서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진 부처님의 교외별전 법은 당나라시대 6조 조계 혜능(曹溪慧能, 638~713년) 대에 이르러 선종이라는 독자적인 종파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5조 홍인에게는 신수와 혜능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는 장안, 낙양을 비롯한 북방을 중심으로, 혜능은 호남, 강서 등 남방을 중심으로 법을 펼쳐 각각 북종ㆍ남종으로 불리며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남종선은 후대에 북종선을 흡수하여 중국 조사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북종의 점오(漸悟)가 선의 본질을 훼손시켰다는 점과 정치적 후원 세력이었던 측천무후의 몰락 등이 그 배경이었다. 보덕사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 실상사 석등 용암리 석등 이에 반하여 남종은 돈오(頓悟)사상을 제창하여 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고, 사회ㆍ정치적으로도 측천무후 이후 현종대의 개혁파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6조 조계 혜능의 문하에는 남악 회향과 청원 행사, 하택 신회, 영가 현각, 남양 혜충 등 걸출한 선지식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남악은 문하에 마조 도일이라는 대선지식이 나와 강서를 중심으로 법을 폈고, 또한 청원 문하에 석두 희천은 호남지방에 선풍을 드날리었는데, 강서의 마조와 호남의 석두가 조사선 또는 중국 남종선의 융성기를 열었다. 여기에서 ‘강호(江湖)’라는 말이 유래되어 천하의 선지식들이 법을 각축하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달마가 전파한 선은 6조 조계 혜능대에 이르러 한 종파로 위상을 확립하였고, 마조대에 이르러 선종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마조는 성품이 인자하며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다고 하는데, 마조 문하에는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88명이 천하에 흩어져 조계 혜능의 조사선을 천하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조는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 공로자’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에 남종선을 최초로 전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된 도의선사도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의 법을 이었다. 또한 고려 중엽에 태고 보우는 중국 선종의 여러 법맥 중에서 조계 혜능 - 마조 도일 - 임제 의현으로 이어진 임제 법맥을 이어 임제 선풍이 한국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마조 문하에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백장 회해가 선종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당시까지도 선종은 가람을 따로 정하지 않고 대개 율종 사찰에서 더부살이로 지냈으며 특별한 규율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백장은 백장산에 살면서 대중들이 많아지자 질서를 잡기 위해 경ㆍ율을 참조하여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고 총림(叢林)이라 하게 되니, 이것이 선종 최초의 법규와 도량이 되었다. 백장은 선종의 청규를 만들고 몸소 모범을 세웠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유명한 교훈을 남겼다. 이와 같이 중국 선종은 당나라시대에 황금기를 구가하였는데 육조 혜능을 정점으로 선승들이 선사상과 법맥, 지리적 요인을 계기로 위앙종ㆍ임제종ㆍ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으로 이름 지은 선종 5가를 이루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인도와 달리 선이 꽃 피우게 된 데에는 달마 이후 역대 조사에 의하여 수도와 전법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에 맞는 토양과 풍토에서 새로운 법규를 세워 나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꽃피운 선을 특별히 ‘달마선’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 선과 다른 것이 아니며, 단지 북방 선종에 대한 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는 부처님이 깨친 법, 즉 중도연기(中道緣起)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 누구나 스스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마음으로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부처님과 가섭 사이에 전해지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바로 부처님이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전한 선의 시원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이론과 말로 하는 것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팔만대장경조차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자기 마음에서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부처님 교법과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심, 발심이 된 사람이라면 경전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깨칠 수가 있고, 오히려 마음을 깨치는 수행에는 문자로 된 어떤 것도 알음알이를 조장함으로 걸림이 된다는 것이다. 당ㆍ송시대에는 선종이 융성하면서 교종은 위축되었는데, 이 무렵 선종은 최고의 융성기가 되어 중국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선종의 선지식들은 부처님과 같이 제자와의 문답을 통해 가르침을 폈는데 이것이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수행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와 선지식이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문답하는 중 선지식이 깨치라고 한 말을 수행자가 깨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어 이것이 ‘화두(話頭)’로 발전한 것이다. 원오 극근, 대혜 종고가 간화선을 정립하였다. 당ㆍ송시대에 융성한 선종은 이후 한국, 일본에도 전파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전형적으로 가계(家系)의 내력을 분명히 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이에 따라 몇몇 종파들에서는 나중에 그들의 초기 역사를 조사(祖師)들의 계보로서 재정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선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래서 중국에 있어서의 정신적 혈통을 전설이 가미된 달마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적하고, 나아가서는 고타마 붓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선종 자체 내에 수많은 종파들과 그에 부수되는 종파들이 생성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당나라시대에는 승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몇몇 공식적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729년에 모든 승려들을 각 현(縣)의 단위로 등록케 하였다. 이에 의하면 승려는 126,100여 명, 사원은 5,385여 곳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큰 박해가 있을 당시(842~845년)의 공식 문서에서는 4,600여 곳의 사원과 40,000여 곳 이상의 작은 사찰 및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강압에 의해 환속한 비구와 비구니가 260,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들만을 언급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종종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교단에 입문한 수많은 ‘대중 속의 승려’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당시에는 간혹 수계증을 사서 교단에 입문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시대에 교단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혼연일체가 된 교단은 헌신과 선행, 현실적인 협동으로 번창하였다. 대승의 관념인 자비는 구체적이고, 현세적인 행위를 선호하는 중국인의 전통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사원과 세속사회가 주창한 공공복지 활동의 전 분야를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병원과 진료소를 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기근이 닥칠 때는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려들이 도로, 다리, 우물, 목욕탕 등의 공공시설을 건립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의 경축일이나 행사는 대중적인 민속의 일부가 되었고, 사찰을 위한 장이 개설되었다. 본래 이 장은 향(香)이나 불상(佛像)과 같은 종교적인 물품만을 거래하도록 한정되어 있었는데 정기적인 시장으로 발전하여, 엄격하게 규제되고 정부가 관리하였던 당나라 초기의 시장체계를 와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문화의 분야에서 불교가 중국문화, 그리고 실제로 세계의 문화에 끼친 물질적 공헌은 보다 지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그것은 불교권에서 불화나 부적 같은 것을 값싸고 효과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으로 개발하여 급기야는 완전한 경전을 재생하게 되었다. 이 기술은 8세기 혹은 그 이전에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현존하는 인쇄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868년의 『금강경(金剛經)』은 인쇄술의 완성된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발된 결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972년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불교의 문헌 전체가 인쇄되었다. 그 무렵 이 인쇄술은 일상적인 목적으로도 이용되기 시작했다. 사회에 대해 이처럼 위대하고 긍정적인 불교교단의 역할은 사실상 쉽게 경제활동과 분리될 수는 없었다. 대사원의 부는 항상 증진되고 있었다. 그 부는 기본적으로 토지라는 부동산과 사찰의 경작지에 딸린 소작인의 인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정부가 할당하거나 기부한 것으로서 합법적으로 확보되었다. 그러나 사원의 부는 다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부유한 지주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복전(福田)을 기부함으로써 수익이 생겼고, 당나라 초기의 법규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거래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매입하여 사원의 장원으로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부를 증대했다. 대사원은 소위 ‘무진장(無盡藏)’이라는 형태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무진장이란 일종의 집합적으로 소유된 자본인데, 이는 대부나 전당포업과 같은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되었고, 뿐만 아니라 물레방앗간이나 기름 압착업을 개발하는 등의 다양한 종류의 상업체를 운영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특히 전당포업과 관련하여, 사원은 중국의 금융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동과 귀금속을 종교적인 조상(彫像)이나 의식의 집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매점(買占)한 것이었다. 결국 715년, 정부는 모든 동상과 청동상을 몰수하고 현금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8세기 중엽, 당나라는 민란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국가는 곤궁에 시달렸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국고를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9세기경 정부와 불교교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후기로 접어든 당나라는 지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중국 전통의 근본을 회복하자는 경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는 관직에 등용하는 가장 신빙성 있는 방법으로써 유교적 시험제도가 강화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근원이 이방국이라는 낡은 논쟁이 재연되었다. 무종(武宗, 841~847년 재위)의 치하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 취한 조치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 주요 동기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 조치는 불교사원의 힘을 분쇄하고 그 부를 몰수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였다. 박해는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지속적으로 취해졌는데, 842년에 시작되어 이후 3년 동안 극에 달했다. 이것이 불교의 문헌에서는 ‘제3 법난’이라고 알려져 있다. 845년에는 불교의 모든 설비를 파괴하고, 모든 승려를 환속시키며, 약 150,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사찰에 딸린 모든 노비들을 해방하고, 사찰의 모든 토지와 교단의 다른 유형재산도 몰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적어도 중부지방에서는 이 칙령이 엄격히 집행되었다. 842년에서 845년까지의 억압은 조직화된 승단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재가 신도로부터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어느 시대에도 불교가 그처럼 금지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종의 계승자는 반불교의 칙령을 폐지하였고, 교단은 다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박해로 교단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물질적 파괴의 결과와는 별도로 9세기 후반 이후 불교의 일반적 쇠퇴는 보다 근본적인 다른 원인도 지니고 있었다. 그 원인들은 그 당시 힘을 얻기 시작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한 흐름들이 중세 중국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점진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러한 변화 이전에 극도로 번창했던 당시 불교교단은 중국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다. 수와 당의 치하에서 발전했던 불교는 너무 강대했으므로, 황제의 법령에 의해 일격으로 분쇄될 수는 없었고 점진적인 쇠퇴가 진행되었다. 힘이 다하여 서서히 그 지적 활력과 창조력, 그리고 그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여 갔다. 교육을 받은 지식층은 점점 불교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우수한 인재들은 사원보다는 과거시험을 통한 세속적 출세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불교사상의 융합 쇠퇴기 10세기경 중국에서는 귀족이 지배하던 준(準)봉건 제도는 쇠퇴하고 점차 관료제도가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관료제도에서 정부의 관직은 경쟁이 극심한 시험제도를 통해 모집된 보다 큰 집단의 구성원인 문관들로 채워졌다. 이 새로운 상류계급은 생활방식이나 문화적 표현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경제의 중심은 건조하고 전쟁으로 신음하는 북부로부터 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중부와 남동부지역으로 점차 옮겨 갔다. 거대한 도시들은 문관과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지식층이 공유하는 독특한 도시문화의 발전을 맞이하였다. 그 도시문화는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표현이었으며, 상류계급이 관심을 쏟아 추구한 것은 평화를 표현하는 문학과 예술이었다. 말의 등에 올라탄 당나라 초기의 호전적인 귀족과 후기 중국의 우아하지만 다소 냉혹한 문관학자는 매우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교적인 문관은 문헌연구와 관료적 야망과 도덕적 격률의 자기 세계에 빠져, 책에 둘러싸인 채 꼬치꼬치 캐내길 좋아하고 있었다. 유교의 가치와 태도는 전보다 훨씬 더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던 것이다. 11세기와 12세기는 강력한 신(新)유교의 부흥기였다. 여기서는 도덕적, 정치적 사상에 대한 과거의 제도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학문적 교의로서 최고의 이론이 되었으며, 14세기에는 공식적으로 정통이 되었다. 가족제도와 씨족제도는 유교의 행동규범과 더불어 대중 속에 널리 퍼졌으며, 중국사회는 철저히 유교화되었다. 이 시기의 중국의 전반적인 모습은 특히 정치적 제도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지속과 안정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절정에 이르렀던 독재와 절대주의의 경향과는 달리 정부의 기본 구조는 전 시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몽고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때(1267~1368년)는 약간 틀에서 벗어난 시기가 있었지만, 법개념과 정당한 절차는 동일하게 유지되었고, 과거제도는 전보다 더욱 강화된 형태로 1905년까지 존속되었다. 중국이 영토를 확장한 시기는 이국 출신의 왕조가 중국을 지배한 시기와 일치한다. 송(宋) 왕조(960~1279년)는 나약하고 방어적이었으므로, 결국은 중국의 북부를 정복자들에게 내 주어야 했다. 그 이후의 송은 남송(南宋, 1126~1279년)이라 불린다. 몽고족 치하에서 위대한 칸이라 불리는 몽고족의 통치자는 북경(北京)을 거처로 정했다. 그는 명목상으로 몽고세계제국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최고 주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쿠빌라이도 더 멀리 정복하려는 야심적인 정책을 착수하였다. 명(明) 왕조(1368~1644년) 치하에서는 다시 중국 본토로 거의 축소되었다. 반면에 북동으로부터 내려온 만주족 정복자들이 세운 마지막 왕조 청(淸, 1644~1912년)은 다시 그 위력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로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초원지대는 오래 전부터 이슬람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의 치하에서는 중국이 티베트와 몽고 부족의 대부분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함으로써, 라마교가 지배하던 곳까지 결국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경제적 침체와 인구의 극적 팽창 등의 이유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중국은, 19세기에 들어서자 만연된 타락과 반란이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정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서구의 확장에 의한 충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러한 내적인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그와 결부된 압박 아래서 과거의 질서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 불교는 끊임없이 기울어져 가고, 보편적 교의로서 유교가 부활되고 체계화되면서 상류계급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신유교의 정통은 과거제도의 기반이 되었고, 문관의 표준적 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고조된 것이 불교가 쇠퇴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유교의 체계화는 불교의 영향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중국불교의 다양한 종파들 속에서 전개된 가장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일부는 그 형태가 사회화되고 정치화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유교 속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유교는 단순히 인계된 것이 아니라, 그 경쟁 상대인 불교가 취한 가장 강력한 입장의 일부를 소화함으로써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의 가장 큰 공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의 문화를 지배하게 될 신유교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불교의 전반적인 쇠퇴가 양적인 면에서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통속종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갈라져 나간 종파들은 때때로 매우 활동적이었다. 이들 중에는 간혹 질적인 면에서 선동적인 유형이 있었고, 이런 유형은 몽고족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 종교적 모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교단의 규모는 좀처럼 축소되지 않았고, 사찰과 사원은 계속 설립되었다. 대규모의 사찰이나 사원에 대한 황실의 후원이 끊기는 예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불교의 쇠락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인 계층에서 비롯 되었다. 지식인 계층과 승단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의 하락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인 포고문이나 이보다 약한 차원의 가훈과 씨족의 규율에서 불교를 폄하하고, 대중적인 책에서는 흔히 승려들을 탐욕스럽고 무지한 인물로, 사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세 가지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 지식인 계층이 승려가 된 예는 극히 드물었고, 교단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둘째, 교단은 더욱더 교양 없는 대중의 요구에 따라 변질되었다. 셋째, 진지한 경전연구와 학문활동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소멸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국에서의 외국 전법사의 활동도 종식을 고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번역활동은 10세기 말에 일어났는데, 인도의 승려와 중국의 보조원으로 구성된 공식적인 번역관이 이 작업을 맡았다. 당나라시대의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시도하였지만, 신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시도여서 번역작업의 위대한 전통은 종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교의적인 불모 상태는 수와 당의 시대에 발전했던 종파 중 선종과 정토신앙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멸한 데서 보다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종파도 절충되어 그 특색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3교 통합’이라는 과거의 관념이 크게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특히 명과 청의 치하에서는 그러한 절충주의적 이론을 재가 신도들이 발전시킨 경우가 많았다. 교단의 역할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재가 신도의 역할이 보다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무수한 종교적 집단이나 모임이 있었고, 승려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의식을 집전하고 기우제를 지내거나 악령을 내쫓는 일도 맡음으로써, 불교는 가정생활과 밀착하게 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축일 중의 하나로 음력 7월 보름날에 행하는 백중(百中)이 있다. 이 날은 승려와 재가 신도가 함께 행사를 통하여 얻은 공덕을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데로 돌리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건전한 행위는 다른 생물에게도 확대되었는데, 생물을 사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방생(放生)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많은 대사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못을 갖추기도 하였다. 중국에서의 종교정책이 언제나 변함없이 견지했던 특징은 임의적인 통제와 후원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몽고족의 치하에서는 예외가 있었지만, 대규모의 박해는 더 이상 자행되지 않았으며, 간혹 주술적으로 보호받겠다는 생각과 결부된 황제의 후원도 결코 과도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마교가 몽고에 전해졌는데, 원과 명, 청 등의 세 왕조는 정치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한결같이 라마교를 광범위하게 후원하였다. 이 시기의 전반에 걸쳐서 몇몇 종파들은 비밀스럽고 파괴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백련사(白蓮社)가 이에 해당한다. 구세적 성격을 지니고 12세기에 성립된 백련사는 원나라 말기의 반몽고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몇 세기에 걸쳐 온갖 분야의 비밀결사로 분파하였는데, 그 중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한다. 명과 청시대에는 그러한 운동의 종교적 성격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용감하고 영웅적인 승려들이 비밀결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투쟁하는 승려가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즐겨 다루어졌던 것은 전혀 근거 없는 허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하남(河南)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의 승려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권법(拳法)이라 불리는 독특한 유형의 무예를 수련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전수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예화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불교의 구세주의에 영향을 받은 폭동들이 명과 청 왕조를 괴롭혔다. 19세기의 전반에 있었던 대규모의 반란들은 실제로 백련교의 모반이라는 대중봉기로 출범하여 청 왕조를 거의 와해시킬 정도로 거셌다. 정부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이러한 현상들은 불교가 사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 속에서 실천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청나라시대의 말기에는 불교가 흡수, 변형된 마지막 단계를 보여 준다. 이는 성인(聖人)들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중국인들이 전형적으로 발전시킨 몇몇 표현 속에서 가장 여실히 나타난다. 무시무시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불교의 지옥은 통속적인 종교가 즐겨 찾는 주제가 되었고, 불교의 신화에서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염라대왕은 자연스럽게 청나라시대 전형적인 관리의 모자와 옷을 입은 중국인 치안판사의 모습을 취했다. 본래 아미타불의 보처보살인 관세음보살은 여성의 모습을 취하여 일종의 불교적 여신처럼 끝없이 대중화되어 갔다. 즉 온갖 종류의 재앙과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식을 갖게 하여 후손을 번창케 해 주리라고 믿었다. 또한 불교적 구세주인 미륵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대중들의 인상 속에서는 미륵이 ‘포대(布袋)’라 불리는 10세기의 괴짜 승려와 동일시되었다. 당시 몇몇 괴짜승들은 자신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초기의 많은 조각상에서 표현된 홀쭉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 포대를 옆에 차고 누구에게나 호감 있게 싱글거리면서 친숙하게 웃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경우에 성인들은 전형적으로 중국인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이국적 성격이 강조된 다른 형상도 있었다. 중국에 선을 전한 인도 출신의 달마는 검은 피부에 무서운 얼굴을 지닌 이방의 선사로, 커다란 눈을 굴리는 사나운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나한전(羅漢殿)에서 보듯이, 중국사람들은 종교의 수호자라고 믿은 부처님의 주요 제자들에 대해 이국풍의 모습을 더욱더 강조하였다. 나한들의 활약상과 관련하여 그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하여 나한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선종은 보다 현학적인 수준에서 나아갔지만, 이 역시 교의와 제도의 양면에서 많이 변하였다. 송나라시대 이후 선은 더욱더 형식화되었고 성문화되었다. 역설적으로, 무언(無言)의 교의가 거대하고 고도로 전문화된 문헌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시와 회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던 심미화된 구두선(口頭禪)이다. 선종사원은 수백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고 복잡한 승단 내의 계급을 갖춘 커다란 기구가 된 예도 종종 있다. 선방(禪房)을 중심에 배치한 그러한 사원들에는 정신집중을 위해 완전히 형식화된 기술로서 선이 실수(實修)되었다. 그리고 이 기술에는 온갖 세부사항이 정확히 규정되었다. 즉 선사와 수행자가 나누는 질의응답, 신체의 자세와 동작, 일상의 활동 계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는 식사도 완전히 의식화(儀式化)되어 있다. 또 북, 종, 목탁, 운판 등의 소리를 통한 신호법으로 이들을 규정하였다. 사회적 행위의 기준으로서 예(禮)는 극히 의례화된 행동규범 속에 외면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정기적인 수계는 장엄하고 집합적인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이는 보통 ‘계단(戒壇)’에서 사원의 원장과 전문화된 다른 행정승들에 의해 집전되었다. 전통적으로 전해 온 250계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정식 승려가 된 후, 당사자들은 흔히 대승의 이념에 따라 모든 중생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들의 결심을 상징하는 보살의 원(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의식에 참석한 경건한 재가 신도들도 이러한 서원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수계를 통해 정식 승려가 되면, 당사자는 인쇄된 수계증을 받았다. 이 절차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실시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본래 교단을 보다 잘 통제하기 위해, 관료제도에 의해 강요되어 온 것이었다. 승려들은 일종의 승려증으로 이 문서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 문서는 정식 승려가 되도록 자신을 이끌어 준 은사의 이름과 자신이 속하는 정신적 계위를 나타내는 다른 특기 사항을 기재함으로써,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현대 중국의 불교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중국에서는 두 가지의 억압적인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민족의 갱신을 위한 전반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쇠락한 불교교단을 부흥하려는 현대의 시도는 그러한 전반적인 운동의 일부였다. 두 가지 억압적 세력이란, 중국 봉건사회의 전반적 퇴조와 서양의 충격이었다. 불교교단을 부흥하려는 시도는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발생했다. 불교의 복고주의자들은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의 불교국, 심지어는 서양의 불교단체들과도 접촉을 가졌다. 그들 중의 일부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좌부(上座部)의 전승인 팔리어 경전을 연구했고, 산스크리트 문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불교 부흥의 시도는 서양의 지배가 낳은 한 가지 양상, 즉 기독교의 충격에 대한 반동으로서 제기되었다. 잘 조직된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회가 중국에 등장한 데서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양측의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그들과 유사한 제도와 전교 방법을 스스로 조직하고 개발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흥에 앞장서 나아간 이들은 교양 있는 재가 신도들이었다. 이들은 현대의 인쇄기술을 이용하여 불교의 경전과 논서들을 발행하는 운동을 착수하였고,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여 교단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불교계에 불리했다. 말기의 청나라 정부가 그랬듯이 초기의 공화국 정부도 승단을 다루기 쉬운 표적이라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불교의 시설들을 몰수하여 학교를 짓거나, 사원의 부동산을 전유하여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보충하였다. 정부의 정책과 기독교의 선교회가 결부된 압박에 보다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민족적 규모로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1929년에 전국적인 중국불교회의 설립을 이끌어 냈다. 이 단체를 설립한 부흥운동의 지도자는 태허(太虛, 1899~1947년)와 원영(圓瑛, 1878~1953년)이었다. 태허는 진보적인 진영을 대표했고, 원영은 보수적인 진영을 대표했다. 태허스님(太虛, 1899~1947년) 그 후 몇십 년 동안 이 불교회가 진행한 수많은 활동으로 불교학이 부흥했고, 불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다. 특히 불교학은 천태종이나 화엄종, 유식학 등과 같은 과거의 전통적인 중국학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대규모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족주의, 대대적인 현대화, 맑스 레닌주의와 같은 세속적 이념의 위력에 지배된 중국의 일반적인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는 종교적 행동주의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시도는 승려와 교양 있는 재가 신도가 주축을 이루는 소규모의 지식층에 국한된 상태였을 뿐, 교단의 압도적인 다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더욱이 새로운 불교조직들은 대개가 세련되지 못한 지도력과 개인적인 반목, 기금의 부족에 시달렸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불교기구들이 밀착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시도에 결정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가 정치적 침투와 일본의 신장을 위해 의식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그 갈등은 악화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초기에는 직접적인 억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거의 봉건제도가 남긴 다른 찌꺼기의 현상처럼 불교도 저절로 사멸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에는 승단에 대한 과격한 행위와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파괴가 정치적 대중운동으로 자행되었다. 그리고 1959년에 있었던 티베트의 폭동 때에도 라마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 조치가 있었다. 그 후로 불교교단에는 새로 입문하는 승려가 거의 없게 되었고, 기존의 승려마저 환속함으로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1950년대 초기 이래로 불교교단의 경제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사원의 토지는 몰수되어 재분배되었고, 역사적 기념물로서 최소한으로 보전되고 있는 소수의 고대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불교시설들은 전적으로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여 명맥을 잇고 있었다. 1949년 이후 정책적으로 설립된 중국불교협회는 종교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또 해외의 불교단체와 공식적인 접촉을 맺는 대표적인 인민조직으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다만, 1976년 이후부터 중국에 불고 있는 자유화의 기류에 따라 불교계에도 부흥의 바람이 불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교단으로서 정립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출처: 역마차 원문보기 글쓴이: 역마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