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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사(3)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3.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차 례
1. 서(序)
2. 부여(夫餘)
3. 고구려(高句麗)
4. 동옥저(東沃沮)
5. 읍루(挹婁)
6. 예(濊)
7. 한(韓)
8. 찬자평(撰者評)
1. 서(序)
1) 서경(書經)에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하였으니, 구복(九服)의 제도(制度)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황역(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한인(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虞)나라로부터 주(周)대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백환(白環)을 바쳤고 동이(東夷)에서는 숙신(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2) 한(漢)나라 때에 장견(張騫)을 서역(西域)에 사절로 파견하여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아내고,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하여 드디어 도호(都護)를 설치하고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뒤에는 서역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그 결과 사관(史官)도 [서역(西域)의 일을] 상세히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 위(魏)나라가 일어나서는, 서역의 모든 나라가 다 오지는 않았으나, 그 중의 대국(大國)인 구자(龜玆)· 우치(于寘)· 강거(康居)· 오손(烏孫)· 소륵(疎勒)· 월씨(月氏)· 선선(鄯善)· 거사(車師) 등의 무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대략 한(漢)나라 때의 고사(古事)와 같았다.
3) 공손연(公孫淵)의 부조삼대(父祖 三代)가 계속 요동(遼東)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절역(絶域)으로 여겨 [공손씨(公孫氏)에게] 해외(海外)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동이(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초(景初) 연간(A.D.237~239; 고구려 동천왕-高句麗 東川王 11~13)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수습하였다.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東夷)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高句麗)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오환(烏丸)과 골도(骨都)를 넘고 옥저(沃沮)를 거쳐 숙신(肅愼)의 왕정(王庭)을 짓밟고 동쪽으로 대해(大海)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장로(長老)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4)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그 나라들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조두(俎豆)[註024]를 쓰는 예절이 남아 있으니,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한다’[註025]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순서대로 찬술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전사(前史)의 미비한 점을 보완한다.
2.부여(夫餘)
○ 부여(夫餘)[註001]
1) 부여(夫餘)[註002]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菟)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註003]
남쪽은 고구려(高句驪)와, 동쪽은 읍루(挹婁)와,[註004]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註005] [국토의 면적은]사방 2천 리가 되며,[註006] 호수(戶數)는 8만이다.[註007]
그 나라 사람들은 토저(土著)생활을 하며, 궁실(宮室)과 창고 및 감옥을 가지고 있다. 산릉(山陵)과 넓은 들이 많아서 동이(東夷)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註009]
토질은 오곡(五穀)[註010]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五果)[註011]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고, 모두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註012]·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註013]가 있다. 부락에는 호민(豪民)이 있으며, 하호(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奴僕)이 되었다. [註014] 제가(諸加)들은 별도로 [註015]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가(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가(家)였다.
2) 음식을 먹고 마심에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합(會合)을 할 때에는 술잔을 주고(배작,拜爵) 술잔을 닦는(세작,洗爵) 예(禮)가 있으며, 출입(出入)시에는 [주객(主客) 사이에] 읍양(揖讓)하는 예(禮)가 있다. 은력 정월(殷曆 正月)에 지내는 제천행사(祭天行事)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註016] 이 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국내(國內)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外國)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수(繡)놓은 옷·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 삵괭이· 원숭이· 희거나 검은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註017]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3)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사람은 적몰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註018]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南山)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형(兄)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흉노(匈奴)의 풍습과 같다.[註019]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名馬)와 적옥(赤玉),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산조,酸棗) 만하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네들이 옛날에 [다른 곳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성책(城柵)은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註021] 적군[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4)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며, 사람을 죽여서 순장(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槨)은 사용하나 관(棺)은 쓰지 않는다.[註022]
위략(魏略)[註023]:
그 나라의 습속(習俗)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상주(喪主)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권(强勸)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서 예절로 삼는다. 상(喪)을 입는 동안에는 남녀 모두 순백색(純白色)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面衣)를 착용하며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제거하니, [상복을 입는 예(禮)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5) 부여(夫餘)는 본래 현도(玄菟)군[郡]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外夷)들을 위력(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때에 [고(高)]구려(句麗)와 선비(鮮卑)가 강성해지자, [공손(公孫)]도(度)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동맹(同盟)을 맺으려고] 일족(一族)의 딸을 [그 왕(王)에게] 시집보내었다.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王)이 되었다. [간위거(簡位居)에게는] 적자(適子)가 없고 서자(庶子)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簡)]위거(位居)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麻余)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註025]
우가(牛加)의 형(兄)[벼슬에 있는 사람]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位居)였는데, 대사(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국인(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위(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쳤다.
6) 정시(正始) 연간(A.D.240~248; 고구려 동천왕 14~중천왕1(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 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高)]구려(句麗)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부여(夫餘)에 파견하였다.[註026] 위거(位居)는 대가(大加)를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왕기(王頎)를]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位居)의] 계부(季父)인 우가(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位居)는 계부(季父) 부자(父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적몰,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부감,簿歛)을 만들어 관(官)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五穀)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王)에게 돌려 ‘왕(王)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註027] 마여(麻余)가 죽고,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依慮)를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7) 한(漢)나라 때에는 부여왕(夫餘王)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玉匣)을] 현도군(玄菟郡)에 미리 갖다 두었다가 왕(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현도군(玄菟郡)의 창고에는 옥갑 일구(玉匣 一具)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玉)으로 만든 벽(璧)· 규(珪)· 찬(瓚)등 여러 대(代)를 전해 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先代)[의 왕(王)]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략(魏略):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8)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註028]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위략(魏略):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註029] 그 왕(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王)은 천제(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자, 왕(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施掩水)[註030]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王)이 되었다. [註031]
3.고구려(高句麗)
○ 고구려(高句麗)[註001]
1) 고구려(高句麗)[註002]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註003]·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와, 북쪽은 부여(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註004]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 산(山)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전지(田地)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에 음식은 아껴 먹으나 궁실(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註005]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王)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相加)[註006]· 대로(對盧)[註007]· 패자(沛者)[註008]· 고추가(古雛加)[註009]· 주부(主簿)[註010]· 우태(優台)[註011]· 승(丞)· 사자(使者)[註012]· 조의(皁衣)·선인(先人)[註013]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2) 동이(東夷)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註014]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고구려에는] 본디 다섯 [부(部)]족(族)[註015])이 있으니, 연노부(涓奴部)[註016]·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註017]가 그것이다. 본래는 연노부(涓奴部)에서 왕(王)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고 있다. [註018]
3) 한(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으며,[註019] 항상 현도군(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玄菟)]군(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城)을 쌓고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註020]라 부른다. 구루(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城)을 부르는 말이다.
4) [고구려에서는] 관직을 설치할 적에 대로(對盧)가 있으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 패자(沛者)가 있으면 대로(對盧)를 두지 않는다. 왕(王)의 종족(宗族)으로서 대가(大加)인 자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로 불리워진다. 연노부(涓奴部)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王)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適統)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게 따로 제사지낸다. 절노부(絶奴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註021] [그 대인(大人)은] 고추(古雛)[가(加)]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王)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대가(大加)의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은] 마치 중국의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회합(會合)할 때의 좌석 차례에선 왕가(王家)의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과 같은 열(列)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좌식자,坐食者)가 만여명이나 되는데, 하호(下戶)[註022]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 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5)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부경(桴京)’[註023]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祭天行事)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이름하여 ‘동맹(東盟)’[註024]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公式)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注簿)는 머리에 책(幘)을 쓰는데, [중국(中國)의] 책(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註025]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註026]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江)]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隧神)을 신(神)의 좌석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妻子)는 몰수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6)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서옥(壻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궤배(跪拜,무릎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서옥,壻屋)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註027]은 [서옥(壻屋)]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長成)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註028] 그 풍속은 음란하며,[註029]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금(金)·은(銀)의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시켰다.
7) 또 소수맥(小水貊)[註030]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大水)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는데, 서안평현(西安平縣)[註031]의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별종(別種)이 이 소수(小水)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8) 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註032]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고(高)]구려후 추(句麗侯 騊)[註033]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고(高)]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는] 후국(侯國)이 되었는데,[註034] [후(後)]한(漢) 광무제(光武帝)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면서 비로소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9) 상제(殤帝)와 안제(安帝) 연간에 [고(高)]구려왕 궁(句麗王 宮)이 자주 요동(遼東)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玄菟)[군(郡)]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遼東太守 蔡風)과 현도태수 요광(玄菟太守 姚光)은 궁(宮)이 두 군(郡)의 해(害)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宮)이 거짓으로 강화(講和)하기를 청(請)하자, 두 군(郡)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궁(宮)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해 후성(候城)을 불사르고, 요대(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宮)이 다시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채풍(蔡風)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註035]
10) 궁(宮)이 죽고 그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註036]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다시 요동군(遼東郡)을 침공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의 건녕(建寧) 2년(A.D.169; 고구려 신대왕 5(高句麗 新大王 5)에 현도태수 경림(玄菟太守 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요동(遼東)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연간(A.D.172~177; 고구려 신대왕-高句麗 新大王 8~13)에 백고(伯固)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註037] 공손도(公孫度)[註038]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註039]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註040] 백고(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胡)[族]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다.
11) 건안(建安) 연간(A.D.196~219; 고구려 고국천왕18-高句麗 故國川王 18~산상왕-山上王 23)에 공손강(公孫康)[註041]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註042]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拔奇)는 드디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고,[註043] 그 아들은 [고(高)]구려(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玄菟)를 공격하므로 현도군(玄菟郡)과 요동군(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12) 이이모(伊夷模)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灌奴部)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위궁(位宮)[註044]이다. 이이모(伊夷模)가 죽자 즉위하여 왕(王)이 되니, 지금의 [고(高)]구려왕 궁(句麗王 宮)이 바로 그 사람이다. [위궁(位宮)의] 증조가 이름이 궁(宮)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궁(宮)이]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의 왕(王)[위궁(位宮)]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르는데, 그의 증조부(曾祖父)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位宮)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位宮)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13) 경초(景初) 2년(A.D.238; 고구려 동천왕-高句麗 東川王 12) 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註045]을 토벌하니, [위(位)]궁(宮)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사마선왕(司馬宣王)의]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3년(A.D.242; 고구려 동천왕-高句麗 東川王 16)에 [위(位)]궁(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 [정시(正始)] 5년에는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註046]에게 격파되었는데, 그 때의 사실은 [관구(毌丘)]검(儉)의 열전(列傳)에 실려 있다.
4. 동옥저(東沃沮)
1) 동옥저(東沃沮)[註001] 동옥저(東沃沮)[註002]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註003]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註004]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호수(戶數)는 5천호(戶)인데, 대군왕(大郡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장수-長帥)[註005]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2) 한(漢)나라 초에 연(燕)의 망명객(亡命客)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의 왕(王)이 되면서 옥저(沃沮)의 [읍락(邑落)들은] 모두 [조선(朝鮮)에] 복속케 되었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도군(玄菟郡)[註006]을 삼았다. 뒤에 이(夷)·맥(貊)[註007]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현도(玄菟)의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註008]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註009]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어 별도로 영동 7현(領東 7縣)[註010]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邑落)도] 모두 현이 되었다.
3) [후한(後漢)] 건무(建武) 6년(A.D.30; 고구려 대무신왕-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옥저(沃沮)의 동부(東部)]도위(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거수,渠帥)로 모두 현후(縣侯)를 삼으니, 불내(不耐)[註011]· 화려(華麗)[註012]· 옥저(沃沮)[註013]등의 제(諸) 현(縣)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국(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註014]· 주부(主簿)[註015] 등의 제조(諸曹)를 두었는데, 예인(濊人)이 모두 [그 직(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은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한(漢)나라] 현(縣)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4) [동옥저(東沃沮)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거속(巨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서 대인(大人)을 두고 사자(使者)[註016]로 삼아 [토착 거수(渠帥)와]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租稅)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貊)· 포(布)· 어(魚)· 염(鹽)· 해초류(海草類)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동옥저 사람)을 노복(奴僕)처럼 대우하였다.
5)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五穀)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전(步戰)을 잘한다.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
<위략(魏略)>:
그 나라의 혼인하는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성인(成人)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註017]
6) 그들은 장사를 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槨)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槨) 속에 안치한다.[註018] 온 집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써 모양을 새긴다. 또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의 문 곁에다 엮어 매단다.
7)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왕(王)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관구검(毌丘儉)은]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沃沮)의 읍락(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급(級)이 목 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궁(宮)은 북옥저(北沃沮)[註019]로 달아났다.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치구루(置溝婁)[註020]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註021]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읍루(挹婁)와 접해 있다. 읍루(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8) 왕기(王頎)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宮을 추격,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어느 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을 바람 부는 대로 표류,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 하였다. 그 섬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 달이면 동녀(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다.” 라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註022]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시체는 마치 중국(中國)사람 같고 입은 옷의 두 소매 길이는 3장(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에 밀려온 배 한척을 잡았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생포하여 함께 말을 해 보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이 말한]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5.읍루(挹婁)
1) 읍루(挹婁)[註001] 읍루(挹婁)[註002]는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高)]구려(句麗)와 같지 않다. 오곡(五穀)과 소· 말· 삼베(삼포,麻布)가 산출된다.[註003]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읍락(邑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2) [그들은] 항상 산림(山林)속에서 살며 혈거(穴居)[註004]생활을 한다. 대가(大家)는 그 깊이가 9계단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부여(夫餘)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불결(不絜)하여 [집]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註005]
3)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노-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호(楛:나무 이름. 모형(牡荊) 비슷한 나무. 화살대를 만드는 데 쓰임)를 쓰는데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註007] [이는 읍루(挹婁)가] 옛 숙신씨(肅愼氏)의 나라 [이기 때문]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註008]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挹婁)의 초(貂:담비)가 그것이다.
4)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夫餘)에 신속(臣屬)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黃初) 연간(A.D.220~226; 고구려 산상왕-高句麗 山上王 24~30)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 하므로 이웃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동이(東夷)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대부분 조두(俎豆:나무로 만든 그릇)를 사용했으나, 오직 읍루(挹婁)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도나 풍속이 [동이(東夷) 가운데에서] 가장 기강이 없었다.
6. 예(濊)
○ 예(濊)[註001]
1) 예(濊)[註002]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戶數)는 2만이다. 일찍이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에 가서 팔조(八條)의 교(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세(世)를 지나 조선 후 준(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왕(王)이라 일컬었다.[註003] [진(秦)나라 말년에] 진승(陳勝)[註004] 등이 기병(起兵)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燕)· 제(齊)· 조(趙)지역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왕(王)이 되었다. 한 무제(漢 武帝)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호족(胡族)과 한족(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註005]
2)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註006] 한대(漢代) 이래로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 [註007]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下戶)를 통치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高)]구려(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廉耻)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註008]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3)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서쪽은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며, 영(領)의 동쪽 일곱 현(縣)은 [동부(東部)]도위(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예인(濊人)이다. 그 뒤 도위(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거수-渠帥)를 봉(封)하여 후(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한말(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009]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동성(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010]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011]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012] 주옥(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4)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천무(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註013]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생구(生口-노예)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모,矛)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하며, 보전(步戰)에 능숙하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註014]이 그 지역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반어(班魚)의 껍질[註015]이 산출되며, 땅은 기름지고 무늬있는 표범이 많다. 또 [註016]과하마(果下馬-조랑말)가 나는데 [후]한의 환제(桓帝) 때 헌상(獻上) 하였다.
5) 정시(正始) 6년(A.D.245; 고구려 동천왕-高句麗 東川王 19) 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은 [단단대(單單大)]령(領) 동쪽의 예(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正始)] 8년(A.D.247; 고구려 동천왕-高句麗 東川王 21)에는 [위(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註017] 계절마다 군(郡)에 와서 조알(朝謁)하였다. 이군(二郡)에 전역(戰役)이 있어 조세(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예(濊)의 백성에게도] 공급(供給)케 하고 사역(使役)을 시켜 마치 [군(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