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 받는 날까지
류근만
요즈음 아파트 경비나 학교에서 당직을 서는 동년배들을 종종 본다. 한편으론 보람된 삶인 것 같고, 또 한편으론 애틋한 생각도 든다. 그들이 받는 봉급은 한 달에 일백만 원 남짓 된다고 한다. 연금 수급자는 소일거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활비를 버는 수단이다. 형편에 따라 그 가치는 확연히 다르다.
나도 은퇴 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봉급생활자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지난날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내가 첫 봉급을 받은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오십육 년 전 시월이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부모님 내복을 사드렸는데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첫 월급은 속옷을 사야 한다는 속설도 한몫했다.
그 당시 내 봉급은 쌀(白米) 두 가마 정도였다. 장정(힘센 청년)의 일 년 치 새경이 쌀로 대여섯 가마였으니 적은 편은 아니었다. 공무원 봉급은 중소기업의 70%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공복이라는 자긍심으로 스스로 위안을 했다. 봉급을 타면 여직원들의 꼬임에 계(契)도 들었다. 시계, 와이셔츠계 때로는 목돈마련 저축인 경우도 있었다. 나는 막내 총각이니까 하자는 대로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봉급을 타면 곗돈과 최소한의 용돈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 두 분은 빳빳한 지폐를 세어보고 또 세어보면서 기뻐하셨다. 남의 밭일을 해주고 받는 품삯은 품앗이였다. 현찰을 만져보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아들의 봉급은 남달랐다.
가난에 찌들던 때라 어머니는 시장에 가면 국밥도 사 먹고, 옷도 사 입고, 생활비로 쓰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어머니는 당장 현실을 보았고, 아버지는 먼 앞날을 보시는 안 몫이었다. 때로는 생활비로 쓰자는 어머니에게 버럭 화도 내셨다. 그리고는 고스란히 장리(長利) 쌀로 환산해서 남에게 빌려주고 가을엔 이자를 쳐서 거둬들였다. 장리(長利)는 원곡의 50%였다. 아들의 봉급을 놓고 두 분이 다툼까지 하시니 참으로 난처했다. 고집이 세신 아버지 덕분에 내 앞으로 서말가옷지기(700평) 자갈 논도 샀다. 내 장가 밑천이라 하셨다.
나는 결혼 후 당분간은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육 개월이 채 안 되어 분가했다. 직장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드리던 봉급은 당연히 아내에게로 넘어갔다. 아내는 목돈마련적금을 들었고, 남은 돈으로 살림을 하다 보니 가계부는 언제나 붉은색이었다. 이듬해 아이가 태어나고, 직장도 면사무소에서 읍내 군청으로 발령이 났다. 월 2천 원 하던 사글세가 5만 원짜리 전세로 바뀌었다. 부모님 용돈도 줄였으니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도 빼앗기고 봉급수급권도 빼앗긴 꼴이 됐다. 우리는 주말마다 집에 가서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 갓 시집온 며느리를 사랑은 아니어도 예쁘게 봐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집에만 다녀오면 언제나 뿌루퉁했다. 화살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뻔한 일이다. 나는 언제나 화풀이 대상이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뒤 우박 신세였다. 부모님이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효자는 아니어도 말씀을 거역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에게 주는 용돈도 인색했다. 술값. 담뱃값, 찻값 등등 한 달 용돈은 외상이다. 봉급날이 그 외상값을 날이다. 봉급날만 되면 외상장부 들고 수금하러 오는 술집 마담들이 줄을 섰다. 개인 외상이 아닌 직장의 계(係)단 위 외상값을 받으러 오는 행렬이다. 혹시나 하면서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나는 봉급날이 되면 경리직원한테 이중 봉투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했다. 백지 봉투를 빌려서 만들어도 되지만, 아내가 내 필적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었다. 이중 봉투 만든 것을 아내가 모를 리 없겠지만 속아주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넘겼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결혼 후 아내는 봉급수급자 아닌 관리자가 되면서, 나에겐 그날이 얼마나 ‘무서운 날’ 인지를 깨달았다. 아내는 경제권을 갖고, 나는 돈 벌어오는 일벌이 된 신세다. 가계부를 밀어붙이면서 생활비를 관리하라고 압박을 할 때도 있었다. 마지못해 한두 달 경제권을 가져보니 감내할 수가 없었다. 핑퐁 치듯 공은 다시 넘어가고, 나는 더욱 위축되었다. 가정 살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 살 때 몇 십 원 깎으려고 입씨름하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봉급체계도 바뀌었다. 명세서를 타자기로 입력했다. 몇 년 지나더니 아예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다. 직접 받는 것이 아니다 보니 봉급이 얼마인지 관심도 없어졌다. 그래도 월급날 현금 봉투를 들고 가면 마음이 뿌듯했었다. 수고했다면서 저녁 밥상도 평소와 달랐고, 때로는 고기반찬 해놓고 술도 한 잔 권했다.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기에 알뜰하게 살림을 했다. 지독한 구두쇠처럼 살았다. 퇴직할 무렵에야 아파트 청약을 해서 분양받았다.
은퇴한 후에도 연금통장은 명의만 내 것이지 실세 주인은 따로 있다. 매월 인심 쓰듯 봉급 성격으로 내 통장에 일정액을 이체시킨다. 나머지는 사용처가 따로 있다. 면허받은 도둑들이 가져간다. 나이가 들면서 노후대책의 절실함이 피부에 와 닿는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생활비 벌려고 애쓰지 않고, 병원엘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제 병원 가는 횟수는 멈추고 마지막 ‘봉급 받는 날’ 까지 건강은 이대로 지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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