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 일찍 순창 쌍치에 살고 계시는 지인의 친절한 안내로 어러 곳을 자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패악한 정치에 분노해 처향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훈몽재가 있다.
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던 전봉준이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해 재기를 위해 숨어 활동 하던 중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믿었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던 " 전봉준 장군 피체지' 가 있다.
그리고 쌍치에는 1910년 국권이 일제에 강탈당하자 8명의 애국 의인들이 의병을 모집하고 물자를 모집하는 활동을 했던 집회장소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영광정이 있다.
훈몽재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인종대왕이 등극한 지 8개월째에 붕어하자 패악한 정치에 분노해 세상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온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自然歌)’라는 시조다.
지금의 전북 순창군 쌍치에 있는 추령천 천변에 세워진 훈몽재는 조선 명종 3년(1548) 하서 김인후가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 ( 위치 : 전라북도 순창군 둔전2길 83 )
서울에는 종묘(宗廟)와 문묘(文廟)가 있다. 이씨 왕조의 종통(宗統)을 이은 제왕들의 신주를 모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 종묘이고, 유교(儒敎)의 창시자인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을 모시고 우리나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설총, 최치원, 인향, 정몽주, 퇴계와 율곡 등 18명의 어진이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 문묘다. 하서가 타계한 뒤 237년이 되는 정조 10년(1786)에야 하서가 문묘에 배향된다.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분이 바로 하서 김인후다.
전봉준 장군 피체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길 65-29)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2차 봉기에 나섰다가 패한 전봉준 장군(1855~1895)은 전북 순창군 상치면 피노리에 이르렀다.
동지인 김개남 장군이 은신해 있다는 태인으로 가는 도중에 옛 친구인 김경천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김경천은 원래 전봉준의 부하였다가 농민군이 대패한 이후 피노리에 피신중이었다. 당시 조정은 전봉준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하면 군수 자리까지 준다는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천금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은 이웃인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김영철·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쉬고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젊은이들(혹은 관군)이 내리친 몽둥이에 맞아 체포됐으며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 후 사형되었다.
영광정( 迎狂亭)
영광정은 독립운동가 김원중 선생을 비롯 이항노, 김정중, 설문호, 이봉운, 안종수, 송극빈, 김요명 선생 등 8인의 애훈몽재국동지들이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 반대한다는 뜻을 알리고자 모임을 갖고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물자를 준비하여 광인(狂人) 행세를 하며 은밀히 항일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6월 27일 항일 운동의 집회 장소였던 자리에 8명의 애국 동지의 뜻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우고, 처마 끝에 태극 팔괘(太極八卦)를 새겨 망국의 설움을 되새기며 정자의 이름을 영광정(迎狂亭)이라 하였다.
세 곳의 공통점은 부패한 지도자와 권력에 의해 고통받아온 힘 없는 백성들의 눈물, 그리고 나라잃은 백성들의 서러움과 가슴아픈 사연들이 베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순창 쌍치에서 그 눈믈을 보았다.
20210701 ilj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