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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개신교 신학자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를 한 명만 꼽으라면 아마도 독일과 스위스에서 활동했던 칼 바르트일 것이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적어도 그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바르트를 높게 보는 사람들은 그를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에 비길 만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신학자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20세기 신학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서 그의 신학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신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프리츠 바르트(Johann Friedrich Fritz Barth)와 그의 아내 안나(Anna BarthSartorius)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베른(Bern)에서 보냈고, 18살이 되던 1904년에 신학 공부를 시작해, 베른 대학과 베를린 대학 그리고 튀빙겐 대학에서 계속 수학했으며, 1908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석사학위로 공부를 마쳤다. 학창 시절에 그는 당대의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들인 아돌프 본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에게 배웠는데 특히 헤르만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공부를 마친 후 1909~1911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부목사로 활동했고, 1911~1921년 사이의 약 10년 동안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자펜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사로 일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본가들의 착취로 인한 노동자 계층의 비참함을 목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복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적인 나라로 이해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으로 그 지역의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려고 하였다. 이런 노력 가운데 그는 그 지역의 공장주나 자본가로부터 빨갱이 목사(red paster)라는 비판까지 듣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르트는 그가 배운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19세기 독일에서 꽃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이성적이고 역사 내재적인 신학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성과 경건 그리고 도덕적 능력과 문화 창조 능력을 중요하게 여긴 반면,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광 그리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말하지 못하였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인간의 종교 경험이 표현된 책이자 인간 사회에 필요한 윤리적 원칙을 제공해 주는 책 정도로만 간주하였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런 신학과 성경 이해로는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이 당시 그의 평생의 친구였고 역시 설교 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설교자로서의 고민과 한계를 피력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오늘 두 번째 설교를 하기 전에 나는 창문 너머로 자펜빌의 주민들이 교회로 오는 대신 홀가분하고 한가롭게 이곳저곳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았네. 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네. 비록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죄인 됨과 하늘의 기쁨에 대하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일세. 나는 아직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네. 심지어 내가 그것을 정말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그동안 사람들은 평상복을 입은 채 한가롭게 이곳저곳을 다닐 충분한 권리가 있는 것일세.
이처럼 목회자로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던 바르트에게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이 일로 인해 그는 결정적으로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하게 된다). 1914년 7월 28일 당시 독일의 황제인 빌헬름 카이저 2세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에서 암살된 것을 빌미로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것은 유럽의 민족주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서, 아무런 명분도 정당성도 찾을 수 없는 비도덕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지성인 93명은 이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는 지성인 선언(Manifesto of theIntellectuals)을 발표하였고, 그 속에는 놀랍게도 바르트의 학창 시절의 스승들을 포함한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대부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바르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1914년 8월의 어느 날을 깊은 어둠의 날로 기억한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빌헬름 2세와 그 추종자들의 전쟁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이 지성인들 속에 내가 크게 존경했던 모든 선생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젊은 목회자 바르트는 이 사건을 통하여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윤리를 따를 수 없다면 그들의 성경과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신학체계 역시 따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충격으로 인해 그는 그가 배운 것을 모두 뒤로 던져버리고 성경과 신학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학문적인 신학이란 이름 아래 오랫동안 무시하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면서 신학의 첫 출발점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데에 놓았다.
성경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 바르트의 시도는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1916)와 그 뒤를 이은 『로마서 강해』 초판(1919)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바르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들고, 또한 새로운 신학 운동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1921년에 출판된 『로마서 강해』 2판이었다. 이 책은 2년 전에 나온 『로마서 강해』 초판과는 완전히 다른 책으로서,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분이며 그가 나타날 때 인간은 근본적인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움켜쥔 주먹, 사방이 막힌 불벽처럼 임하며 이런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인간의 모든 경건과 종교성 그리고 윤리적 성취 등은 모두 죄악된 것으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며,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바르트의 이런 주장은 당시의 독일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니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칼 아담은 그것이 마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바르트 자신도 그 책이 가져온 파장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당시의 자신은 "어두운 밤 교회당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교회 종의 줄을 잡아당겨 마을 사람들 모두의 잠을 깨운 사람과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어쨌든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은 새로운 신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니, 자유주의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던 에밀 브룬너, 투르나이젠, 고가르텐,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등의 젊은 신학자들이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데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그 지향하는 신학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곧 각자 다른 길을 향하여 떠나갔다.
『로마서 강해』 초판과 2판으로 인해 일약 유명 인사가 된 바르트는 독일의 루터파 신학교인 괴팅겐 대학의 신학 교수로 초빙을 받아 목회자 아닌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교수직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논박하였으나,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신학은 아직 전혀 형성하지 못했던 그는, 매번 강의 때마다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으니, 이런 모습은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새벽 세 시에 다음 날 아침 언약에 대한 강의를 위해 써두었던 내용이 무의미하며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가르침임을 깨닫게 되었지. 그래서 아침 여덟 시에 강의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네.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던 바르트는 개혁 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신학의 내용을 찾았다. 그는 개혁 교회의 창시자인 칼빈과 츠빙글리 및 그 대표적 신조인 하이델베르크 신조를 연구하였고, 특히 17세기의 신학자 하인리히 헵페의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성서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체계의 가능성을 보았다. 1925년, 그는 본 대학의 교의학 및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고, 1930년까지 이 학교에 머물면서 논문집인 『신학과 교회』(1928) 『기독교 교의학 개요』(1927) 등을 포함한 네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특히 『기독교 교의학 개요』에서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어느 정도의 신 인식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과 인간의 종교성과 경건 및 윤리적 능력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자유주의 신학을 모두 반대하고, 신학은 철저히 교회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또한 거기서 출발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지난 200여 년 동안의 독일 신학 전통을 완전히 뒤집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새로운 신학에 대한 모색은 중세 신학자인 안셀무스의 신학 방법론에 대한 연구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Fides Quaerens Intellectum』(1931)에서 그 결실을 얻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신학이란 모름지기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하며, 계시를 있는 그대로 진술(description)하는 과제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학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교회의 학문이자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학문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에 의해 진행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라틴어가 무수히 등장할 뿐 아니라 내용도 아주 어려워서 많이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이야말로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로서, 이 책에서 정립한 신학 이해와 방법론 덕분에 바르트는 (시간상으로) 거의 36년 동안 계속되었고(1932~1968), (분량상으로) 무려 9,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대표작인 『교회 교의학』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생애에서 반드시 거론해야 하는 것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대한 그의 저항 운동이다. 제1차세계대전에 패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연합국 측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 독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부담과 죄책감 그리고 수치감을 떠안게 되었다. 전후의 독일은 수십 퍼센트에 이르는 실업률과 살인적인 인플레,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과 절망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파멸의 늪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히틀러가 나타나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사명을 말하면서 미래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자 독일인들은 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1930년의 제국 의회에서 히틀러의 나치스 당은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났고, 1932년 선거에서는 271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인 지배당이 되었다.
마침내 히틀러는 같은 해 1월 30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종결시키고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에 매료되어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재건할 메시아'로 받들어 추앙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 2월 27일 국가 의사당이 불에 탔다. 다음 날 아침 히틀러는 '국민과 국가의 보호를 위한 국가 원수의 포고'를 통하여 헌법에서 보장된 모든 언론과 집회 및 교통, 통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질서와 안전에 대한 욕구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 포고를 환영하였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히틀러를 제2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학이 소위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즉, 당시 상당수의 독일 교회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영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정치·경제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히틀러라는 또 하나의 구원자를 주셨다는 잘못된 신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30년 연말경 『기독교 세계 Christliche Welt』라는 잡지는 "거의 모든 신학생들이 나치스이고……프로테스탄트 신학생들의 약 90%가 강의실에서 나치스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1933년 4월 7일 히틀러는 저 유명한 아리안 입법(Aryan Legislation)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공적인 권한과 자격을 박탈하는 법으로서, 이 법이 발효됨과 함께 유대인들은 그들이 속한 직장과 일터에서 속속 쫓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모든 교회가 한 목소리로 히틀러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1933년 1월 11일 한스 아스무센을 지도자로 한 알토나(Altona) 목회자 신앙고백서가 나와서 히틀러와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을 비판하였고, 같은 해 3월 8일에는 오토 티벨리우스 감독의 "그의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9월 21일에는 마르부르크 대학 신학 교수단의 '아리안 조항'에 대한 반대 성명이 나왔다. 이 밖에도 10월 21일에는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지도 아래 '목사 긴급 동맹'이 형성되면서, 히틀러와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을 반대하는 소위 고백 교회 운동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르트는 자연스럽게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다. 히틀러 운동의 초기부터 예언자적인 눈으로 이 운동의 악마적이며 우상 숭배적인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그는 여러 대중 강의와 설교를 통하여 그 위험성을 고발하고, 유대인 축출의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또한 친구인 투르나이젠과 함께 『오늘날의 신학적 실존』이란 잡지를 창간하여 히틀러와 히틀러를 추종하는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바르트의 반 히틀러 운동 경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의 실질적인 작성자였다는 사실이다. 1934년 고백 교회는 히틀러와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반대 선언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선언문의 작성을 바르트와 다른 두 명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의뢰하였다. 하지만 이 선언문은 바르트가 홀로 작성하게 되어 그의 신학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서 중의 하나이며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학을 전개하고자 결단한 바르트 신학의 정화인 이 고백서는 이렇게 선포한다.
1.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사나 죽으나 신뢰하고 복종해야 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곧 성경에 의해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 밖에 또 다른 사건들, 능력들, 형태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의 자원으로 선포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 용서의 보증이신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가 삶 전체로 섬기고 따라가야 할 유일한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 전부를 요구하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된 힘들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맛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역이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거부한다.
당시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히틀러가 처음에는 교회의 친구로 다가왔기 때문이요, 또한 애국심 때문에 그들의 눈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뒷날 히틀러가 잔혹하게 유대인들을 죽이고, 또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당시 이미 때는 늦어 교회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로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바르트와 몇 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로 히틀러의 정체를 꿰뚫어 보면서 이 선언으로 교회의 방향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실상 평온할 때 교회는 신학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신학은 교회의 나침반으로서 제 목소리를 발하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헝겊을 뚫을 때는 나무 송곳으로 충분하지만 가죽을 뚫을 때는 쇠 송곳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점에서 보면, 칼 바르트와 (뒤에 다룰) 본회퍼 같은 신학자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 교회는 히틀러라는 얼룩진 역사 속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히틀러와 나치당은 바르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당시 대학교수들은 수업을 시작할 때 히틀러 만세(HeilHitler!) 라고 외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바르트는 이를 거부하였고 총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서약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바르트는 대학교수직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독일 밖으로 영구 추방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곧 스위스의 바젤 대학이 그를 불렀고, 이 때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바르트는 그곳에 거주하게 된다.
이 기간 중 그는 계속된 강의와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체코와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등의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치에 저항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스위스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54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젤의 국경선을 지키는 군대의 일원으로 봉사하였다. 후일 나치 독일이 패망한 다음에 그는 몇 차례 독일을 방문하였고, 1946년과 1947년에는 본 대학에서 전후 세대의 신학도들을 가르쳤다(이 강의는 『교의학 요약 Dogmatics in Outline』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1948년 바르트는 헝가리를 방문하여 공산주의 치하에 있는 그곳의 개혁 교회 지도자들과 대화하였고, 19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바르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 교의학』을 쓰면서 보냈다. 이미 1938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론과 삼위일체론을 다룬 『교회 교의학』 Ⅰ/1과 Ⅰ/2를 완성하였고, 1940년에는 신론(the doctrine ofGod)을 다룬 『교회 교의학』 Ⅱ/1을 완성하였다. 1942년에는 선택론(the doctrine of the election of God)을 다룬 『교회 교의학』 Ⅱ/2가 완성되었고, 이 때부터 그의 신학은 더욱 역동적이면서 또한 더욱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었다. 1945년에는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을 다룬 『교회 교의학』 Ⅲ/1이 나왔고 인간론(thedoctrine of man)을 다룬 Ⅲ/2가 1948년에 나왔다. 1950년에는 섭리론과 악의 문제(the doctrine ofprovidence and of evil)를 다룬 『교회 교의학』 Ⅲ/3이 출판되었다.
1951년에 그는 윤리의 문제를 다룬 『교회 교의학』 Ⅲ/4에서 창조론을 완성하였다. 이때 바르트는 벌써 65세가 되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바젤의 그 노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연구하고 글을 썼으며, 곧이어 서로 다른 세 가지 전망에서 화해론(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을 다룬 『교회 교의학』 Ⅳ/1(1953), Ⅳ/2(1955) 그리고 Ⅳ/3-1과 3-2(1959)를 출판하였다.
비록 이 당시의 바르트는 외부 강연이나 여행을 최대한 줄이고 오직 글쓰기와 바젤 감옥에서의 정기적인 설교에만 집중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학생들과 방문객들을 지혜와 관대함 그리고 날카로운 유머로 맞았다. 1956년, 70세가 된 바르트는 그 해 5월 바젤에서 열렸던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식의 강사로 요청을 받았다. 방에 칼빈과 모차르트의 사진을 함께 걸어 놓고, 평소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수시로 신학적 영감을 얻었으며, "천상의 음악은 아마도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슷할 것이다"는 말을 할 정도로 모차르트를 사랑하던 그였기에, 바르트는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였다.
이 강연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비록 복음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영역의 비유이다"라고 칭송하였다. 1961~1962년 사이 그는 그의 공식적인 은퇴를 앞두고 그가 일생 동안 배우고 추구하였던 신학을 정리하는 강의를 한 후, 그것을 '복음주의 신학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1962년 3월 1일, 그는 바젤 대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마지막 강의를 하였다. 은퇴 직후인 1962년 4월과 5월, 그는 미국 시카고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이 강의들을 반복하였고, 이때 그의 일생의 신학적 탐구를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대서양의 이쪽과 저쪽에서 추구해야 하는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주의나 루터주의, 칼빈주의, 정통주의, 종교주의, 실존주의 등이 아니며 하르낙이나 트뢸치로 다시 돌아가는 신학도 아닙니다(당연히 바르트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자유의 신학'입니다.
실상 바르트의 일생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복음 안의 자유를 찬양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모든 신학자들이 추구해야 할 신학은 바로 복음에 근거한 자유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늙음과 그로 인한 질병은 바르트에게도 찾아왔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962년 봄부터 1965년 가을까지 바르트는 수시로 찾아오는 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이로 인해 저술과 대외적인 활동을 현저히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66년도에 병세가 다소 호전되어 80회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고, 또한 가톨릭 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를 살펴보고 평가하기 위해 로마 여행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 교의학』이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게 되면서 그는 마지못해 부분적으로 써 두었던 기독교 윤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로서의 세례'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것이 그의 『교회 교의학』의 최후의 부분인 Ⅳ/4가 되었다. 결국 바르트가 의도했던 화해론과 연결된 기독교 윤리학 및 종말론 부분은 끝내 쓰이지 못하였고 9,400여 페이지의 『교회 교의학』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바르트는 1968년 12월 10일 이른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그 전날 밤 그는 평생의 친구였던 투르나이젠과 월남전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으로 차 있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네." 그리고 이것이 일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의 존중과 사랑을 바친 한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증언이 되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생애와 신학 (현대 신학 이야기, 2004. 2. 25., ㈜살림출판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