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병서원 [玉屛書院]
○ 옥병서원 [玉屛書院]
옥병서원은 박순[朴淳 : 1523 ~ 1589]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한탄강으로 유입되는 영평천 변의 우거진 숲, 맑은 물, 기암괴석 으로 이루어진
명승지가 많아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아 즐기었는데 여덟 곳이 특출하여
영평팔경[화적연,금수정,창옥병,와룡암,낙귀정지,백로주,청학동,선유담] 이라 하였다.
영의정을 14년간이나 지낸 박순은 이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어 선조대왕이 조금만
더 있어 달라는 만유도 물리치고이곳을 찾아 창옥병 건너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며
속세에서 벗어나 시골 백성 노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즐겁게 지내면서 배우러
오는 자가 있으면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지내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649년[인조27] 이 지방 유림들이 공의 학문과 덕생을 기리기 위하여, 우선 사우만을
창건하고위패를 모시고제행을 받들어 오다가, 1680년[숙종6] 영의정 신완의 주청으로
도은 이은건, 문곡 김수향을 추가 배향 하고, 1713년[숙종39] 옥병서원[玉屛書院] 을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8) 서원훼철령에 따라 서원이 철폐되자, 이곳 유림들이 영당을 세우고
중단된 향사를 부활하였다.이때 김성대, 이화보,윤봉양을 추가 배향하였고,
6.25 사변으로 영당마저 소실되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조선국 영의정 사암 박순 선생]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것이다.
○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년[중종 18]∼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 박우[朴祐]의 아들이며,
목사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1553년[명종 8]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홍문관수찬.교리.의정부사인[舍人]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제정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직제학?
승정원동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뒤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더욱 능하여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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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병서원 [玉屛書院]
향토유적 제26호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 210
옥병서원은 인조27년(1649)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되어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과 동은
이의건,, 문곡 김수항, 촌로 김성대, 유심재, 이화보, 존성재, 윤봉양 등 여섯 분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서원 터는 사암 박순 선생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여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공이 죽은 뒤 1649년(인조 27년) 포천유림에 의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배견와 자리에 사우(祠宇)를 지었다.
1713년(숙종 39)에 ‘옥병’이란 사액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었다.
1978년에야 사당과 삼문을 복원하고 계속 복원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다. 박순 선생의 자는 화숙, 호는 사암, 본관은 충주이다.
1553년(명종 80)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사성,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선조가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條水月精神)>이라고 극찬한 청렴하고도 강직한 관리였다.
나주의 월정서원과 광주의 월봉서원에서 배향되며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다.
출처 : 포천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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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 신도비[朴淳 神道碑]
이 비는 1909년(순종 3년) 경기도 포천에 건립된 박순 신도비[朴淳 神道碑]로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고,
외11대손인 이최수[李?秀]가 글씨를 썼으며, 외10대손인 이승회[李承會]가 전액을 하였다.
박순[朴淳 : 1523~1589년]의 본관은 충주이고, 자는 화숙[和叔]이다.
1540년[중종 35년]에 진사가 되어 화담 서경덕에게 수학을 하였다.
1553년[명종 8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홍문관수찬을 역임하고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사헌부집의,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 사간원대사간으로 옮겨 요승 보우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6년[명종 21년] 부제학이 되어 글로서 문순공 이황에게 출사 하기를 청하였다.
1572년[선조 5년] 우의정이 되어 성절사로 중국에 가 명나라 신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후에 벼슬을 그만두고 산수를 즐기다가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186m, 폭 64m, 두께 33m이다.
○ 참고문헌 : [단행본]포천문화원, 1998,『抱川金石文大觀』, 포천시
서원과 신도비 6.25 당시 건물은 소실된것을 1981년 국비와 도비로 지금 모습으로 복원?으며 총맞은 흔적도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신도비에게 자리를 비워주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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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만들어 세워진 신도비 내용은 아래 사진을 대신한다.
[祖鮮國 領議政 文忠公 思庵 朴淳先生 神道碑]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순선생 신도비" 라고 비명이 붙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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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에는 사암 박순 선생의 일대기가 모두 적어 놓은 신도비
이것을 다 읽어 보면 박순 선생의 학문이 뛰어났으며 곧은 정치 인생을 그대로 그려 놓았음을 알수 있을것이다.
또한 이런 정신을 정치인 이라면 본받아야 할것이라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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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병서원 [玉屛書院] 대문 안으로 들어 갈수 없었게 열쇠로 걸어 놓았더군요.
울타리 따라 뱅글뱅글 돌아 다니며 내부를 담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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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 송월당[松月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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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에는 송월당[松月堂] 현판 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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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재 창옥재 [蒼玉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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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재에는 창옥재 [蒼玉齋] 현판 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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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현각[崇賢閣] 내부에는
영의정 사암 박순을 주벽[主壁]으로. 이의건. 문곡 김수향. 촌로 김성대. 유심재 이화보. 존성재 윤봉양 등이 위패가 봉안 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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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재 창옥재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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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병서원 [玉屛書院] 대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서원 앞으로 탁트인 조망과 유유히 흐르는 영평천이 모습이 스스로 시가 나올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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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 송월당에서 바라본 숭현각 [崇賢閣]
건물은 3문과 사당, 담장을갖추었는데 안채 숭현각[崇賢閣]은 맞배지붕에 방풍판를 달았다.
숭현각의 규모는 정면 7.9M, 측면 4.9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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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재 창옥재를 바라 본다.
서원으로서 귀모는 작아 보이나 6분의 위패를 모셔진 숭현각앞으로 좌,우로 서재등을 갖췄다.
또한 자손의 대가 끊어지면서 포천시 유림 단체와 문중에서 제와 관리하게 된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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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료위 재를 올린후 축문을 소지 하는곳. 최근에 만들어진것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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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 숭현각에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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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뜰에서 바라본 동재 창옥재와 마당
아직도 사암 박순선생의 모습이 있는듯 하여 조심스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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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병서원 [玉屛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중종 18년(1523)~선조 22년(1589)] 선생은
영평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 훈학으로 여생을 마쳤다.
포천 선비들은 선생의 높은 덕과 깊은 학문을 기리기 위해 인조 27년(1649)에 서원을 창건하고 제향하게 되었다.
선생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충주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선조 5년(1572)부터 영의정에 14년동안 재직했고,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시·문·서에 모두 뛰어났다.
숙종 24년(1698) 신완[申琓]의 건의로 동의 이의건[李義健]. 문곡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추가 배향하였고
숙종 39년(1713)에 옥병[玉屛]이라 사액되었다. 건립 당시에 옥병서원은 건평이 40여평 되었으나
고종 원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지에 설단을 한 다음 촌로 김성대, 유심재 이화보, 존성재 윤봉양 등 3분을 추가로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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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마을입구 도로에서 바리본 옥병서원 입니다.
문화적 가치를 느낄수 있는 어느곳 이든 정보를 보면 오보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저도 포스팅 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이 발생 하지만 포스팅 내용을 보면 일부 복합적으로 기재 되는것을 보실것입니다.
이점 또한 저도 설명을 할려니 같은 내용들이 많이 중첩?을것 입니다. 이점 양의 하시며 이해 하시길 바람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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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동행
좋은글과 음악에 잠시머물다 갑니다
고향을 소개하고 홍보하시는 좋은일을 하고 계시네요
이번 동문산악회 창립산행에도 함께해주셔 사진봉사 부탁드려도 되겟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