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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육체의 가시(고후12장5-10)
성경본문|고린도후서12: 5~10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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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지난 주일이 장애우 주일인데 지난 주일 부활절과 겹쳤기 때문에 오늘 장애우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 2년 전에 우리 한국 TV방송국에서 제작한 장애인특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이 무엇인가를 하나의 사회적 고발로 만든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사회 전반적 시설이 장애인들을 고려한 시설이 되어있는가? 그래서 정상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직접 장애인들과 같이 다니면서 녹화 방영한 프로그램을 기억합니다.
결론은 이 사회에서는 장애인들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 실체를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TV로 방영을 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대로 말씀을 드리면 장애인들을 위한 노력은 미국이 가장 훌륭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느 거리를 가도 장애인이 자기 혼자 장애인 차를 타고 불편 없이 갈 수 있도록 도시계획이 되어있습니다.
또, 어느 건물이나 교회도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화장실을 다녀 나올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습니다.
또, 장애인들만이 살기에 불편하지 아니한 아파트도 따로 건축을 합니다.
반드시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돌봐주는 국가적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관심이 가장 많이 갔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신지체 아니면 육체적 장애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면 이 장애인 주일이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애우들을 정상인들이 생각할 때 가장 주의할 것이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상적,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 그것이 장애인을 향한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장애우는 선천적인 경우보다 후천적 요인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장애인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성서적으로 본 장애인을 보면, 오늘 성경말씀에 사도 바울이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아니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에게 큰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라, 그리고 '사단의 사자'라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겪는 신체적 고통이 작은 것이 아니라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대략 몇 가지 추측을 신학적으로 살펴보는데 있습니다.
바울의 육체 가시는, 그는 시력 장애인이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내가 이렇게 큰 글자를 쓰노니" 글씨가 보이지 아니해서 볼 수 있을 만하게 크게 썼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는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볼 때 시력의 결정적 타격을 보았다 그런 해석을 많이 합니다.
잘 보지 못하니까 그것이 육체의 가시가 되어서 하나님께 많이 호소를 하죠?
그 다음에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는데 이 바울은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호소였다 이런 해석도 합니다.
외국에 가서 혼자 살면서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이 핍박을 계속 겪으면서 그 심적 고통이 항상 그를 찔렀다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심히 떨었노라"
그 다음에는 그에게는 아주 극심한 굶주림의 경제적 고난이 있었습니다.
외투 한 벌이 없어서 헌 옷 하나를 외국까지 가져다 달라는 부탁이 바울 서신 가운데 나오고 있습니다.
날마다 굶주렸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육체의 가시였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또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 가지가 다 해당되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바울은 육체적 가시의 호소를 한 것이다 그렇게 또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그런 인간의 육체적 가시는 바울에게만 있었는가?
여러분도 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애 부분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 장애우들입니다.
장애라는 그 말 자체가 고통의 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한쪽 부분을 지닌 채 살아갈 뿐입니다.
신체적 약점이 평생을 찌르는 아픔이 되신 교우님들도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면 신체적 아픔이 없는 사람은 아픔이 없는가?
'차라리 내가 병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 고통이 큰 사람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때는 가족조차도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관계인 남편과 아내도 피차 찌르는 가시가 될 때가 있고, 자식이라고 하는 존재가 평생 나를 찌르는 가시 역할을 하는 때도 있고,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나를 찌릅니다.
어떤 때는 평생을 살면서 물질이 나를 찌르고 혹은 애정이 나를 찌르고 이웃이 나를 찌릅니다.
저는 아주 큰 사업가가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외국에서 회담을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한테 그런 상담을 했습니다.
그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실패를 하고 이 비행기가 가다가 추락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저한테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자기 회사 직원들이나 우리 가족들에게 내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망하는 소식을 가지고 가는 한 기업인의 아픔을 목사한테 와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시가 안 빠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 빠지느냐? 바울 선생은 오늘 기도를 해도 안된다고 그렇게 바울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의 대답은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가만 두어라! 안빼주겠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바울이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의 신학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한번 그 다음날 한번 그리고 저녁 나절에 또 한번 그런 간단한 기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이 그렇게 경솔하게 기도한 것을 이렇게 심각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대 인들의 기도 문화가 있습니다. 한 제목을 놓고 40일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 기도하신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한번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바울 선생이 그러한 유대인의 기도 문화대로 기도하였기 때문에 "나는 한 제목을 놓고 40일을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아침에 한번 중얼거리고 점심에 한번 중얼거리고 저녁에 한번 중얼거린 그 기도를 이렇게 심각하게 기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고 하나님의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성자스러운 그 사람의 그러한 심각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큽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기도해서 뭐하느냐 말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날마다 죄짓고 바울의 기도도 안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는 들은 척도 안실텐데 어떻게 우리가 기도생활 할 것인가?
이런 갈등을 갖게 됩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 가시가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큰 응답이 왔다고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울이라고 하는 네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가시가 계속해서 너를 찔러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것을 뽑아버리면 너는 그렇게 큰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그냥 두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우리들은 내가 생각한 마음의 방향대로 되어진 것을 응답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심각한 세 번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응답을 주셨는데 그 응답이란 "너를 찌르는 그 가시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너를 찌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의 기도의 응답이다."
왜 계속 찌르게 하시는가? 오늘 여기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 쉽게 번역하면 "네가 지니고 있는 그 약점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너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내 은혜라고 말한다!" 그렇게 응답을 받고 바울은 그때부터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이 찌르는 가시, 나에게 주어진 이 약점, 이런 것들이 나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우리가 한번 영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습니다.
육체는 찌르는 게 아프지만 영적으로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몇 가지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약점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보다 죄 지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9장 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장애우들도 죄의 문제는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훨씬 적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흉악범들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죄의 질이 매우 고약한 중범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장애인들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씩 교도소로 갑니다.
지난번에 저도 가서 설교하고 왔습니다. 한때 저는 성북 경찰소의 유치장 담당자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다 신체가 건강하고 나이가 젊고 외형적으로 보아서 아무 장애를 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 흉악범이 되었지, 휠체어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중범자 되는 것 보셨습니까? 우리 시각장애인이 범죄자가 되는 것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죄를 지을 가능성에 있어서 그것이 매우 적은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첫 번 목회지가 홍파 복지원! 옛날에는 한국 맹인 대린원이라고 그랬습니다.
장애우인들만 있는 교회에서 함께 제가 목회를 하였는데 거기서 제가 몇 년 목회를 하면서 정상인들보다 죄는 훨씬 적게 나타나는 것이 분명한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장애인들 같이만 착하게 살면 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약 10년 전에 미국 교육계에 큰 화젯거리가 미국 국민의 화젯거리로 등장을 했습니다. Harvard 대에 교수인 헬리누엔 박사께서 갑자기 그 교수직을 사임하셨기 때문에 이 헬리누엔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그가 만약 책을 출판했다 하면 무조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20권의 책이 모두 그랬습니다. 어려서부터는 천재 신동이라는 그런 이름으로 자라났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가장 인기 높은 그런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그 교수직을 갑자기 그가 초개같이 내버리고 무엇을 했느냐?
장애인 집단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데이브 브레이크 福祉院이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 가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하는 일이 뭐냐? 정신지체인들 뒷바라지하는데 그들이 똥싸면 치워주고 방 청소해주고 목욕시켜주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매스컴들이 온통 기사화 했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얼마나 많이 가서 그에게 인터뷰를 했겠습니까?
왜 이렇게 했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이들을 도와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이들과 같이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보려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해서 더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내가 와서 함께 살면서 좀 배우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우들은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 영적으로 유익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우리 장애우들을 보신대로 장애우들이 큰 소리를 치고 교만스럽게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은 약점이 생기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7절에 나타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바울은 이 찌르는 가시만 없었다면 사실 무한히 교만하여질 가능성이 많다고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가시로 인해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큰 인물들을 보시면 결정적 아픔의 가시 하나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 하는 약속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해서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절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이 뭐하던 집안인데, 아버지 데라가 우상 장사하던 사니다. 한 代만 올라가도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어야지 들추어낼수록 온갖 추한 것이 드러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던 날, 하나님이 야곱에게 결정적 가시 하나를 주죠?
환도뼈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절름발이가 되었어요. 고통스러운 가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을 때 아들 요셉을 앉혀놓고 자신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시 부분이었던 그 환도뼈에 아들의 손을 대게하고 맹세를 시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 가시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은 겸손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자신의 장애를 말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말더듬이 언어장애인입니다. 어떤 분이 방송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다로 가라고 하셨다구요.
그런데 모세가 말더듬이라서 가나다 소리를 발음 못해서 가나안으로 갔다고!
베드로는 성격 결함이 있습니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급하고 다혈질적 반응을 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사랑 많이 받은 사람인데, 그러나 출신이 어디예요?
창녀입니다.
삭개오는 신체장애인, 난쟁입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 이것만 좀 빼버렸으면 좋 겠는데 이것이 평생 나를 찌르는구나!' 다 가지고 살게 마련입니다.
가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는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빼려 하지 말고 품어야 합니다.
장애인들은 감사를 더 많이 하고 살아감이 분명합니다.
장애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눈물납니다.
장애인들은 몇 발작을 걷는 것만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동안 사고 없이 자기 주변이 지나간 것에 대해서만도 잠자리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자는지 모릅니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분명한 통계가 있는데 그 많은 나라들이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다 물러가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지구 한쪽의 유럽이 가장 풍요한 나라가 되었을 때 더 많은 감사를 드리고 살아야 할 터인데 교회도 안나옵니다.
지금 전세계 유럽 서부 국가들 교인 느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습니다. 미국은 오늘의 세대에 로마 제국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대한 나라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는데 미국 교인은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제가 소속하고 있던 장로교회만 해도 1년에 2만명 이상 교인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풍요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비율! 그래서 하나님은 잘못 가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가시를 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평생 빠지지 않는 가시, 원망스럽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은혜요 그것 때문에 나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릴 때 "나같이 할 일 많은 큰 인물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 나한테 좀 감사하시오!" 이런 태도가 되기 쉽습니다.
이 사회가 지금 서비스 경쟁입니다.
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서비스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다 왕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서비스가 얼마나 얼마나 다양해지는지 추할 만큼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교인들도 교회에 와서 대접받기 원합니다. 교회는 죽으러 오는 곳입니다.
희생할 것 찾으러 와야 합니다. 올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합니다.
장애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합니다. 세상에서는 더 좋아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큽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가족들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조심하지만 저는 장례식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시더니 이제는 주님 품으로 평안히 가셨구나!'
참 잘된 일이라 속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는 슬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 평안의 세계에 가셨으니 참 잘된 일이다!'
2001년 4월 5일 서울 잠실 야구 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의 시구자는 두 다리가 없어서 철제인공 다리를 만든 에덤 킹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진 한국 어린이였습니다.
신문에는 이렇게 났습니다.
"부모도 조국도 버린 장애아를 Robert King씨가 데려가 이렇게 훌륭히 길러주었다!‘
그 미국 Robert King씨 그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을 만들어서 국적을 주고 잘 길러다 데리고 나와서는 그 경기장에서 공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외국 어린이를 8명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그렇게 길러주고 있어요. 선천적 요인보다 후천적 요인이 훨씬 많은 것이 장애우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됩니다.
여기 지금 저와 같이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은 다 시각 장애인입니다.
이것 벗으면 저는 설교도 못합니다.
사람이 한 60세 넘어가면 누구든지 치매기가 다 나타나잖아요? 치매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뭐, 젊은 사람들도 건망증이 너무 심해요.
종로5가에서 종로5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정상적 아닙니다.
아니, 다리미질 하다가 전화벨 소리 듣고 다리미를 귀에 갖다 대는 사람 정상입니까? 다 치매 환자입니다.
제가 저 씨애틀 연합 집회를 한다고 강사로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연합 집회니까 목사님들도 많이 오셨잖아요?
그런데 집회 마치고 집회하는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교회 큰 행사가 있는 날 다 잘하고 맨 마지막 순서로 축도 하려고 보니까 아, 그 동네에서 은퇴하신 연세 많으신 노인 목사님이 오셨기에 보통 그럴 때 축도로 대우해 드리잖아요?
축도해 달라고! "아, 지금 여기 교회에 원로 목사님이 오셨으니까 마지막으로 축도해 주시겠습니다." 그러고 끝내려고 하는데 아, 이 목사님이 치매가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올라오시라니까 올라 오셔서는 축도를 하시는데 쭈욱 쳐다보더니 축도가 뭔지 아세요?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우리는 다 장애인인데, 목사도 다 장애인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는 믿음으로 아픔을 품고 승화시키는 믿음의 선물이 오늘 같은 날 모두에게 주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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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