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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청주]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6, 1 - 7
† 복음 : 요한 6, 16 - 21
★ 초대 교회의 공동체에 과부들이 홀대받아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식탁 봉사자들을 뽑는다. 교회 안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교계 제도가 발전되었던 것이다
(제1독서).
★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두려워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경에서는 물이 ‘죽음’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사무 14,14; 시편 124[123],4-5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은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심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을 때 제자들은 호수의 높은
물결, 곧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 곧 죽음과 고난을 이기시는 분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느새 그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평화’를 주제로 한 미술 대회가 열렸습니다. 최우수작은
뜻밖에도 폭풍우가 몰아치고 물줄기가 무섭게 떨어지는
폭포가 있는 가파른 절벽 그림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화와 무관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절벽 한가운데에는 둥지가 있었고 어미 새가
새끼를 품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평화’라고 하면 흔히 걱정이나 두려움, 고통을 주는 외적인
요소들이 없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평화는
그러한 외적인 요소에 둘러싸여도 그것을 이겨 내게 하는
힘이 있을 때 찾아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그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은 갖은 고문과 감옥살이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평화를 잃지 않았고, 처참하게 죽어 가는
가운데에서도 그 평화를 간직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평화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 6,16-21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 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 없이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2013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복음 : 요한 6,16-21
<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
‘강연 100도씨’에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건축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주호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오른 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고 찍었고 길을 걸을
때도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오른손을 보였을 때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더욱 큰 상처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해야 할
때는 더욱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창피했고, 그러다보니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당에 갔을 때 새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머뭇머뭇 거리며 오른 손을 내밀었더니
신부님이 자기에게 호통을 치며 혼을 내었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러워서 손을 자신 있게 내밀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부님에게 야단맞은 것이 자신에게는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의 불완전한 손에
대해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무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야단을 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았지만 신부님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나니
‘두려움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구인 손에 대해 자신만 부끄럽게 느낄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 열등감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 안의 괴물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풍랑 속으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하자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아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함께 오십니다.
그 두려움을 거부하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고기 잡고 있던 시절 처음으로 예수님이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해서 많은 물고기가 잡혔을 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려움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받아
들이려고 하니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두려움도 이길 수
없고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렵습니다.
여자를 만날 때는 헤어질 것 때문에 두려웠고, 학생일 때에는
선생님이, 군인일 때는 선임 병이, 신학생 때는 신부님이,
신부가 되니 선배들이 무섭습니다. 아마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닫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고,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에게 핑계를 대게 된 것은 이제 자신 안에
죄가 들어와서 상대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남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내가 잘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상대의 문제입니다.
상대 안에 미움으로 가득 찼다면 내가 아무리 잘 해 주려 해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의 변화로 상대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놓으니 상대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나쁘게 보지 않도록 나를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정화해서 사랑으로 가득 채워 모든 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항상 그 두려움 뒤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품지 않으면 평화는 뒤따라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회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두려움이란 것이 그저 나의 그림자나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체의 겉모습은 밀떡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겉모습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선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나를
속이지 맙시다. 먼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그래야
자유와 평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요한 6, 16-21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갈릴래아 호수는 마치 사람 심장 모양을 닮았는데, 호수
가운데를 열십자(+)로 그어보면 수직선 부분, 즉 남북으로는
대략 17~18킬로미터, 수평선 부분, 곧 동서로 대략 11
킬로미터입니다. 이곳을 갈릴래아 호수라고 부르는 것은
갈릴래아 지방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담긴 물은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 너머 헤르몬산 쪽에서 유입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채워진 물은 요르단 강을 거쳐 사해로
흘러가게 되지요. 호수가 꽤나 컸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 호수를 갈릴래아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호수에는 다른 이름이 두 개 더 있는데, 하나는 겐네사렛
호수입니다. 겐네사렛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프를
뜻하는데, 호수가 하프 모양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신약성경 시대에는 티베리아스 호수라고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에 로마를
다스리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존 킬갈렌 저,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 바오로 딸 참조)
둘레가 대략 51킬로미터나 되는 갈릴래아 호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형제 같은 어부 출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먹고 살아오던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곳 갈릴래아 호수에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저는 딱 한번 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제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선배 신부님께서 성지순례단
지도신부로 가시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중요한
일이 생겨 ‘땜방’으로 이스라엘을 갔었지요. 갈릴래아 호수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으로 독특한 매력을 지닌 호수였습니다. 신비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참으로 그 느낌이 묘했습니다. 고요한듯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얼마나 호수가 컸으면 잔잔한 파도가
일었습니다. 가끔씩 밀려오는 파도와 산들바람이 해변을
어루만지면서 동시에 제 영혼까지도 부드럽게 어루만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저녁 무렵에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해도
떨어졌겠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른 스타디온 정도 나아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에서
무슨 파도냐고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는데 갈릴래아 호수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헤르몬 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류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기류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상당히 높은 파도가 일곤 했습니다.
서른 스타디온 스타디온은 그리스 길이 단위입니다. 한 스타디온은
192.5미터입니다. 서른 스타디온이라면 약 5.7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육지로부터 꽤나 떨어진 거리였기에 깊이도 꽤나 깊었을 것입니다.
날도 이미 저물어 칠흑처럼 캄캄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그렇고 뒤로 돌아가기도 그런 애매한 곳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 쪽으로 가까이 왔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싶어 혼비백산했겠지요. 아마도 제정신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목숨도 여기도 끝이로구나, 생각하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의 끝에서 낙담하고 있는 우리들, 이제
끝이로구나, 하며 포기하는 우리들, 죽음의 두려움 앞에 떨고 있는
우리들 앞에 홀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그분과 함께
이 짧은 인생,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두려움의
내용은 큰 문제도 있고 작은 문제도 있다. 지나간 것도 있고 진행
중인 것도 있고 미래의 것도 있다. 어느 누가 ‘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느끼고 있지 않든가, 아니면
거짓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 삶에
없을 수 없는 마음의 세계다. 성장에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성장을 가로막는 원인일 수도 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두려운 무엇인가를 만나게 되고 힘들어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두려움을 만나게 될 때, “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두려움 위에 서 계신
그분께서 지켜주심을 믿어야 한다. 결국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부딪히는 자기 싸움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고, 그로
인해 그분을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는 한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 김대열 신부(일본 사이타마교구 오따천주교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 6하원칙에서벗어나야합니다.
- 이해욱신부
6하원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 - moowee가,
언제 - 2010년 7월 10일(토) 아침에,
어디서 - 서초동 남부터미널 건너편 한 호텔에서,
무엇을 -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카페의 글을,
어떻게 - 방에 마련된 컴퓨터를 이용하여,
왜 - 카페 식구들을 위한 영적 양식을 보충해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 "6하원칙"에 충실하도록 교육 내지는
강요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왔던 것입니다. 자연히 6하원칙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잘 살아 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은 인간의 잣대인
이 6하원칙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6하원칙이라는 도식은 어떻게
보면, 아주 중요한 "인간 생명의 끈"이기도 합니다.
지금, 생명줄인 이 끈을 당장 놓으라면 내맡겼다는 여러분조차도
더럭 놀라시면서 "감히 내가 어떻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거의
대부분이실 겁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또, 앞으로 점점 "놀라지 마시라"는 말에 깊이 "동감(同感)"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또 다시 놀라시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진실 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아주
완전히 100%를 다 내맡겨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6하원칙이라는
인간의 도식으로부터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왕창"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마 이 글을 쓰라고 오늘 저에게 난생 처음으로
강남의 한 호텔 방에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게 하신 모양입니다.
호텔 방에서 내복바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내맡김의 영성을
쓰고 있는 저의 꼬라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비밀이었는데~,
아이, 하느님도 참~ 정말 못 말리셔~ 별걸 다 시키시고~)
사실, 오늘 오전에 서초성당에서 제 조카 녀석의 혼인주례가
있어서 어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와~~ 얼마나 도로가
밀리던 지, 또 보기 싫은 렉카들은 군데군데 얼마나 많이 서
있던지~~.
무려 6시간 반(평소에 4시간)이나 걸려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과거 같으면 짜증에, 안달에, 유행가에, 망상(妄想)에 망상으로
감옥 같은 차 속에 갇혀 지겹게 지겹게 치를 떨며 억지로 올라왔을
터인데, 이제는 승용차가 "달리는 기도방"으로, "달리는 성가
감상실"로 변하여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하느님과 대화하며
너무나도 기쁘게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思考)를 크게 전환해야 함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데, 어디 꼭
성당의 답답한 골방만을 고집하여 기도하려 하십니까?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곧 기도방이요, 성지(聖地)입니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느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꼭 비싼 돈을 들이고서 정기적으로 성지순례(聖地巡禮)를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는 "최고급 호화판 종교놀이"입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 놀이를 못해서 환장했던 놈입니다. 고급 양주에,
와인에, 으으~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하우스 비어에...
거룩한 종교놀이에 누구만 재미보고...
그 옛날 순례자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갔던 거룩한 곳인데...
저는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갔지, 그런 종교놀이는 앞으로 절대
사양하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 자체가
"성지(聖地)", 곧 성령의 성전입니다.
성지에 가서 돌로 만든 돌조각을 손으로 비벼대고 껴안는다고
하느님이 내 것이 됩니까?
성인들의 유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까?
성지라고 꾸며(?) 놓은 곳에 목숨 걸고 수십 년 다니면 성인이
됩니까? 절대 아닙니다.
돈 안들이고 "굳은 결심" 딱 한 번 봉헌하면, 내 몸이 곧 살아
움직이는 성지(聖地)가 되고 내가 성인(聖人)이 됩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계시기
보다는 여기저기를 산책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맡긴 영혼은 화장실도 "기도방"으로, "성체조배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소유했으니 자기 자신이 곧 기도방이요,
성체조배실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여튼 서울에 도착해서 정해진 잠자리로 갔는데...
오호, 애재라!
이럴 때가 바로 내맡긴 영혼들이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님말구!"를 외쳐야 할 때입니다. 저보다 여러분께 가르쳐
드리라고 "아님말구!"를 허락하신 모양입니다. 어제의
"아님말구!"를 통하여 호텔방을 "기도방"으로 "글 공장"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 하느님은 참으로 크신 찬미 영광
받으소서! 희한하신 하느님은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당신 마음껏
찬미영광 받으소서!
그래서, 발길을 서초동 성당 근처로 돌려 과거에 제가 근무하던
평화빌딩 바로 건너편 먹자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서 괜찮을
것(?) 같은 한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주 점잖은 호텔을 잡아 주심에, 그리고 컴퓨터까지...
TV도 아주 점잖은 TV라서 부산교구 주교서품 중계까지 볼 수
있었고... 더구나 이렇게 내맡김의 영성을 우리 식구들에게 양식으로
제공해 드릴 수 있으니...
똑똑하다는 인간머리로 짜내고 짜내보았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일 뿐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6하원칙"은
하느님의 손바닥 위에 놓여진 새털입니다.
하느님이 입김을 불지 않으셔도 그 새털은 세상의 바람에 힘없이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새털은 정해진 장소가 없습니다.
날다날다 "세상바람"이 멎은 곳, 더 날 수 없게 된 곳!
그 곳은 "진창"입니다.
끈적한 진창은 새털을 적시어 끝내 진창 속으로...
내맡긴 영혼은 "자신의 의식"을 자꾸 알아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으려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깨어 있음 속에 계신 하느님을 찾으려 봉쇄수도원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화장실에 앉아 있어도 깨어 있으면 그곳이
곧 봉쇄수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자녀는 하느님을 닮아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도식, 6하원칙을
"하느님의 뜻"으로 재창조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6하원칙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여러분 영혼 안에 하느님의 계획이 "영감(靈感)"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생각을 알아채어 생각을 버립시다!
생각의 총사령관 "6하원칙"을 몰아냅시다!
하느님~ 나라! 짜작짜~짜짜!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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