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학생들
장기용 신부 (요한, 성공회대학교 총무처장)
작년 이맘때 나는 아주 특별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팔순 잔치였다.
내가 무슨 민주투사도 아니고, 노동운동 근처도 안 가 본 사람인데 당당히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초대는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그 초대장을 감사히 여기는지, 아니면 큰 부담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바로 휴지통으로 구겨 넣든지 초대장 받는 사람의 마음이다.
천국의 초대장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무튼 나는 그 잔치의 초대장만큼은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광화문 세종홀에서 열린 팔순 잔치에는 그 분을 어머니라 부르고 모시는 수많은 아들딸들이 모였다.
그리고 노동 관계자들, 말로만 듣던 정치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로서는 매우 낯설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초대장을 준 학생들 때문이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남을 전설적인 인물들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사람들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전태일 평전에 등장하는 16살의 소녀.
풀빵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몸 하나 간신히 움직이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의 먼지구덩이 속에서 타이밍 먹으면서 밤새 일하던 그 인물. 신 아무개 씨이다.
다른 이는 70년대 말에 똥물을 뿌리는 구사대 측에 대항하여 알몸으로 맞섰던 동일방직 사건의 주인공.
또 다른 이는 원풍모방 사건... 등등 말만 들어도 엄혹하던 시대에 목숨 걸고 싸웠던 기라성 같은 투사들이고 영웅들 대 여섯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향해 ‘독한 *’이라고 놀려댄다.
동일방직은 청계피복을 향해 ‘무서운 인간들’이라하고, 청계피복은 동일방직을 향해 ‘독종들, 어찌 옷을 벗고 덤빌 수 있냐?’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 넉넉하고 펑퍼짐한 아줌마들이다.
이들은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학생들이고 당시 내가 주관하는 채플에 열심히 참여했던 모범생들(?)이다.
무슨 조화인지 학교에서 운동한다는 학생들은 죽어라 채플 폐지를 외쳐대는 상황에서 원조 투사들은 오히려 채플에서 모범생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강연대 앞에 나와서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들과 자신들이 바라는 대학생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도 전했다.
이제는 다들 50대 중후반의 장년들이지만 그들은 매우 열심히 공부한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어려운 책들을 읽고 요약하고 평을 쓰고... 시험 기간에는 시험공부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성적은 좋은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부에 대한 열의와 성의와 진지함은 최고다.
언젠가 이 분들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자연 ‘처음처럼’이 왔다 갔다 하고... 학교 다니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공부가 재밌다고...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세월의 흐름에 따른 육신의 노화를 이들이라고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가난한 농촌 출신 그래서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서 공장을 전전하던 어린 시절에 그들은 역사의 최전선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천성이 투사일리도 없고 노동운동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가난한 삶과 이 땅의 노동 환경과 사회경제적 구조는 그들을 필연적으로 투사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들에게 공부의 기회를 제공한 학교와 교수들이 자랑스럽고 그 한 구성원이 되어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지금 대학 수능 시험을 끝내고 배치표를 보면서 배팅을 준비하는 수험생과 그 학부모들의 틈바구니에 나도 끼어있다.
아! 삶에는 어찌 이리도 괴리가 많은지...
출처 : 김흥겸 벗들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