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엘리와 사무엘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옛 성읍 실로는 이스라엘이 지파별로 제비를 뽑음으로써 가나안 땅의 분배가 이뤄진 곳입니다(여호 18장). 또한 판관제에서 왕정으로 바뀌던 과도기에 백성을 이끌며 이스라엘 임금의 길을 닦은 사무엘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성소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주님께 바쳐 성소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실로에서 사무엘을 키우고 교육한 이는 사제 엘리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탓에 실제로 사제직을 수행한 건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였습니다(1사무 1,3; 2,18-26).
엘리는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제였지만, 불행한 끝을 맞습니다. 이유는 두 아들의 비행에 있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두 아들에 대한 엘리의 처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들이 악행을 저질러 백성 사이에 나쁜 소문까지 퍼졌지만, 엘리는 그들을 호되게 꾸짖는 경고나 사제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징계를 하지 않아 부정부패가 지속되게 만든 것입니다(3,13). 그 죗값으로 이스라엘은 결국 ‘에벤 에제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필리스티아에 참패합니다. 군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주님의 계약 궤를 지고 나간 엘리의 두 아들도 이 전쟁에서 쓰러집니다. 사실, 계약 궤는 십계명을 보관한 상자이지만 주님의 왕좌를 상징하는 기물이었기에(4,4 참조) 이스라엘의 사기 진작을 위해 모시고 나갔던 것입니다. 에벤 에제르는 ‘도움의 반석’이라는 뜻인데(7,12) 이런 의미의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건 역설적이면서 의미심장합니다. 말하자면, 이 전쟁의 패배는 하느님께서 엘리의 두 아들을 치시기 위해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으니,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엘리는 다른 면에서 책임감 있는 사제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건 두 아들이 전장에서 쓰러졌다는 비보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계약 궤를 필리스티아에 빼앗겼다는 충격 때문이었습니다(4,18). 또한 그는 자신이 듣지 못한 주님의 음성을 어린 사무엘이 들었을 때(3,1) 사무엘을 질투하거나 그의 앞길을 막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3,8-9). 또한 어린 사무엘에게서 두 아들 탓에 주님의 재앙이 내릴 거라는 예고를 전해들은 뒤에도 그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3,17-18).
엘리의 이런 모습은 이후 사무엘에게서 반복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두 아들을 제치고 예언직과 사제직을 겸하는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사무엘의 두 아들 역시 악행을 범해 백성에게 배척을 받는 탓에(8,1-5), 이스라엘 지도자의 자리는 사울이라는 새 젊은이에게 넘어가게 됩니다(10,17-27). 하지만 사무엘 역시 그에 대해 질투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것이지요. 그 뒤 사무엘은 베들레헴의 다윗에게 가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으니, 훗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길을 한참 전에 미리 닦은 ‘구약의 세례자 요한’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가 있다.
[2024년 1월 14일(나해) 연중 제2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