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유래와 세시풍속/ 이영성
설날은 한가위와 더불어 음력문화권의 최대 명절
오늘은 신축년(辛丑年) 설날이다. 설날은 음력(陰曆) 1월 1일로 새해의 첫날이다. 우리말로는 설날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원단(元旦), 원일(元日), 세수(歲首)라 하니 모두가 새해 첫날이라는 뜻이다. 설날은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으로 역법을 정한 음력문화권에서는 가장 큰 명절이며, 우리나라에서도 한가위와 더불어 2대 명절로 꼽는다. 나라에서 양력(陽曆)을 법령으로 시행한 것이 구한말 건양(建陽) 연대이므로 어느새 100년을 훌쩍 넘겼다. 우리나라는 1세기가 지나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게다가 요즘 IT(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우리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음력설을 쇠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전통이나 관습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신종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설 차례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주장이 구구하다. 우선 ‘새밝날’이 음운변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예로부터 서구에서는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단군이 개천했을 때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이름 역시 ‘고요한 아침’, 즉 새벽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徐羅伐)은 본래 우리말 ‘새밝’ 즉 새벽을 한자로 소리새김한 것이며 경주(慶州)는 밝을 경자에 고을 주자를 써서 한자의 의미대로 뜻새김한 것이니 이는 뒤에 ‘셔벌’과 ‘셔블’을 거쳐 도읍지라는 뜻의 ‘서울’로 굳어진다. 마찬가지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扶餘)는 ‘밝’의 소리새김이며 부여의 옛이름인 소부리(所夫里)나 사비(泗沘) 역시 ‘새밝’ 즉 새벽을 한자로 소리새김한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말은 있었으되 이를 표기할 문자가 없었기에 한자(漢字)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현상이다. 따라서 서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설’을 ‘새밝’의 뜻으로 생각한다면 설날의 어원을 ‘새밝날’로 볼 수 있다. 즉 설날은 새로 밝아오는 날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설날의 어원을 낯설다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찾기도 한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 익숙하지 않기에 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시작되는 해에 대한 낯섦의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한 간지가 끝나고 새로운 간지가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된다’는 뜻의 우리말인 ‘선다’라는 말이 음운변화를 거쳐 설날로 굳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 즉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는 데서 우리의 옛말인 ‘섧다’에서 비롯된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이라는 말은 ‘새해 첫날’이라는 본래의 의미 대로 해석한다면 처음 시작되기에 ‘낯설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간지가 시작되는 날이기에 ‘선다’라는 말에서 비롯됐다거나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날이라서 ‘섧다’라는 말에서 굳어졌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이 노래는 윤극영 선생님이 1927년에 작사, 작곡한 동요 <설날>의 1절이다.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설날의 전날인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윤극영 선생님이 설날이라는 노래를 만들기 이전에는 까치설이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설 전날을 ‘아치설’이라고 했으니 까치설은 아치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치’나 ‘아지’는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작다’ 또는 ‘어리다’는 우리의 옛말이다. 남쪽의 다도해 지방에서는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음력 24일을 큰조금, 가장 작은 22일을 아치조금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해에 연해 있는 경기도의 바닷가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을 까치조금이라고 하니 이는 아치라는 말이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음의 유사성으로 까치라는 말로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까치설날’은 작은 설날이라는 뜻이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의 최대 명절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설날이 곧 새해 첫날이라는 뜻이니 우리나라에서 역법(曆法)을 쓰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는 농경문화권에 속했으므로 농사를 짓는데 있어 역법은 매우 중요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의 30대 문무왕(재위 661년~681년) 때부터 새로운 역법을 도입하여 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도 ‘신라인들이 원일 아침이면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고 이날 일월신에게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새해 첫날을 맞아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왕이 잔치를 베푸는 명절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설날은 우리가 새로운 역법을 쓰기 시작한 6세기 이후에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설날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답게 세시풍속이 매우 다양하다. 우선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장사들이 조릿대로 만든 복조리를 한 짐 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조리 사세요!”하고 외쳐댄다. 조리는 쌀을 물에 이는 도구로 집안에 걸어두면 밥을 굶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기 위해 한 해 동안 쓸 조리를 한꺼번에 사서 방문 앞에 걸어두기도 했다. 복조리 장사는 해 뜨기 전까지 복조리를 파는데 만약 사람이 없을 경우 문 위에 걸어두고 갔다가 며칠 뒤에 값을 받아가기도 했다. 사실 복조리 값이 그다지 비싸지도 않았지만 누가 들어오는 복을 물리치려 하겠는가. 그래서 설날이면 집집마다 청실홍실로 치장한 복조리가 문설주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곤 했다.
또한 설날 아침에는 모든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를 세비음(歲庇陰)이라 했으니 곧 설빔이다. 깨끗하게 얼굴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은 헌 것을 뒤로 물리고 새해를 맞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의 뜻이리라. 따라서 사람들은 통상 대보름 때까지 설빔을 입고 지냈다. 그리고 설날 아침에는 가족 및 친척들이 모두 모여 조상에 대한 차례(茶禮)를 지낸다. 차례는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피붙이들이 모두 모여 돌아가신 조상을 회억하며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차례를 마친 뒤에는 온 가족이 조상의 묘소를 찾아 새해맞이 성묘를 행하는 일도 중요한 풍습이었다.
사람들은 설날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께 순서를 따져 세배(歲拜)를 올린다. 세배란 어른들에게 무릎 꿇고 엎드려 한 번 절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난 뒤에는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서 세배를 다니며 서로 덕담을 나눈다. 이때 어른들은 세배를 하는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지체가 높은 집안의 아낙네들은 외간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세배를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여종들 가운데 젊고 예쁜 사람을 뽑아 잘 차려 입힌 뒤 일가친척이나 그밖에 사이가 돈독한 집안에 보내 신년 문안 인사를 대신 하도록 했으니 이 여종을 가리켜 문안비(問安婢)라 했다.
또한 설날 밤에는 사람들이 신을 방안에 들여놓고 불을 끄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야광이라 불리는 귀신에 대한 벽사의식(辟邪儀式)이다. 야광귀(夜光鬼)는 설날 밤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자기 발에 맞는 신이 있으면 신고 간다고 한다. 그런데 장난기 심한 사람들은 남의 집에 돌아다니며 신을 몰래 감추기도 했으니 어린아이들은 이를 야광귀의 소행으로 믿기도 했다.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해 운수가 아주 사납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 체를 걸어두기도 했다. 이는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보다가 신을 훔쳐 신기도 전에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기겁을 하고 도망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양세시기>에서는 설날부터 사흘 동안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지낸다고 기록했으니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세시 민속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서 먹고 마시며 놀이를 즐기는 가운데 정신적인 유대감과 일체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가 급속히 도시화, 산업화에 접어들면서 설날 세시풍속 또한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본래 설날의 세시풍속은 효(孝)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핵가족화하면서 효친사상 역시 점차 무너져가고 있다. 미풍과 양속은 지켜야 하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우리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의 의미가 서서히 퇴색해 가는 듯 해 안타깝다.
일제강점기 때는 양력을 시행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 음력 1월 1일을 구정(舊正)이라 부르며 신정에 과세하도록 계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계도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있으니 오랫동안 뿌리 깊이 내려온 관습이다. 양력을 도입한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민족에게 설은 최대의 명절이다.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이 의무처럼 여겨졌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금도 설날이 되면 고향을 찾아 귀성하는 사람들로 온 나라가 붐빈다. 그러나 금년에는 신종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면서 귀성을 포기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설날은 혈연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 명절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우리 동문들 모두 신축년 새해를 맞아 건강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