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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묵상글 들 ( 연중 5주 월요일-구원 3장(三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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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5주 월요일-구원 3장(三章)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 얘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병자들은 병을 치유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구원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발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요소들을 오늘 짧은 복음이
단순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 곧 초장初章은 어쨌거나 구원자와 우리가 만나야 하는데
구원자를 만나러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수 없기에 구원자가 오셔야 하고
그래서 로마서 10장은 그리스도를 모셔오기 위해 누가 저 높은 하늘로
올라야 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왜냐면 고맙게도 주님께서 스스로
오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 구원자가 오심을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주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배를 대신 것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이요 우리 사는 곳까지 찾아오심입니다.
구원의 다음 단계 곧 중장中章은 병자를 나르는 사람들의 선행입니다.
병자는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병자가 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애도 있습니다.
반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병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장애는 몸의 장애만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도 있습니다.
병을 치유코자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누군가 도와줘야만 합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지붕을 뚫고 들것에 실려 주님께 간 사람의 경우나
물이 움직일 때 그 물에 잠겨야 하는데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에 비해 몸의 장애는 없지만 마음의 장애나 신앙의 장애가 있어서
구원자에게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나을 수 없겠다고 비관하고 미리 치유를 포기한 사람도 있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것이 발전하여 주님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 경우는 몸의 장애보다 돕기가 더 어렵지만 아무튼 이들에게도
그들을 구원자 주님께 데려다 줄 이웃들과 그들의 선행이 필요합니다.
이제 구원의 종장終章입니다.
구원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자신이
주님의 구원의 손을 잡는 그 마지막 행위가 중요합니다.
병의 치유도 그렇지만 특히 구원은 본인이 바라지 않고 믿지 않으면
이웃이 그를 데려다 주고 주님이 아무리 손을 대어도 발생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들의 사람들의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을 상상해 봅니다.
특히 옷 자락 술이라도 만져보려던 사람의 감정과 느낌을.
매우 긴장되고,
매우 조심스럽고,
매우 설레고,
매우 두렵고.
이는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처음 잡을 때
'손을 잡아도 되나? 뿌리치지는 않을까?'하는 그 느낌과 같고,
그것보다 더한 또는 그것에다 경외심이 더하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손을 대면 그러니까 사랑과 경외심과 거기에 더하여
믿음으로 손을 대면 치유는 물론 하느님과 구원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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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라,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삼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는 흉내를 내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을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을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더불어 우리의 간절함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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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연중 5주 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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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가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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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첫 시작을 우리는 오늘 만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비교하자면 조금은 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의 저자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거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의 정점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만이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힘은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창조의 재료는 오로지 ‘말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장면부터 하느님 창조의 힘과 그분 말씀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평가하십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우리를 좋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화답송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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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새벽을 열며.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빠다킹 신부님.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의 정의를 타고난 ‘고정요인’과 ‘삶의 상황’, 그리고 ‘의지적 활동’의 종합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정요인’은 유전적으로 정해진 개인의 특성을 가리키고, ‘삶의 상황’은 나이, 성별, 교육 수준은, 수입 등 외부적 요건을 일컫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적 활동’이란 개인의 동기와 의지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행복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고정요인’은 자그마치 50%를 가리킵니다. 2등은 외부적인 요인인 ‘삶의 상황’ 같지만, 이는 10%의 영향만 미칠 뿐이라고 합니다. 40%의 영향을 미치는 2등은 개인의 ‘의지적 활동’이었습니다.
사실 행복에 있어서 60%의 조건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60%에 따라서 행복이 무조건 결정될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40%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10%의 외부적 요인인 ‘삶의 상황’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의 ‘의지적 활동’을 간과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를 깎아내려서 불행의 길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우는 의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언제 어디로 데려오라고 하셨을까요? 배를 타고서 언제 도착할 테니 배가 도착할 때 맞춰서 오라고 하셨을까요? 치유를 위해서 어떤 약을 준비하라고 하셨나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워낙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치유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 주십시오.’라는 청도 합니다. 그 결과는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고정요인’만을 찾고 있었다면, 또 ‘삶의 상황’만을 따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우리의 의지대로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지적 활동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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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할 일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아모스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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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 거면 이혼하자.”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뭐? 당신 말 다 했어? 그래 이혼해!!”
사실 말다툼하게 될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폭력적인 말이 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비폭력 대화로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관찰, 느낌 표현, 욕구 전달, 부탁의 4단계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관찰: 당신이 “내가 미쳤지. 저런 인간과 결혼하다니” 하면서 내 옷을 던졌을 때.
느낌: 나는 서운했어.
욕구: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는데.
부탁: 당신이 뭐가 힘든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4단계의 비폭력 대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요? 나의 대화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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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처음으로 찍었던 사진을 2장 기억합니다. 4살 때입니다. 형들과 함께 장화를 신고 집 뒤뜰에서 나란히 앉아 찍었던 사진입니다. 6살 때입니다. 여동생과 집 앞에서 기르던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그 두 장의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1990년 부제서품 때의 사진과 1991년 사제서품 때의 사진입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큰 형님이 앨범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앨범도 자주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는 가는 본당마다 사진을 찍으면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진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장의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고, 인생의 기억이 됩니다.
사진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젊은이가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였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진을 공부합니까?” 사진으로 돈을 벌수도 있습니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교수님의 말을 들었던 젊은이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6.25 참전국의 군인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참전국을 찾아다니면서 참전용사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참전용사들은 모두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싸웠던 젊은 날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인화해서 액자로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 사진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비용은 본인이 벌어서 부담했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꿈속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기차 안에서 부르심 속에 부르심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아니라 가난과 정결의 사랑탑을 쌓았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은 버려진 아이,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잘 곳을 마련해 주었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것도, 길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는 것도, 길을 먼저 건너도록 양보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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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마르 6,54)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겐넷사렛 땅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알아본다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분을 체험했다는 뜻이지요. 자신이 치유를 받은 당사지거나,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이들이겠지요. 지인이나 친척을 통해 전해 전해 듣기도 했을 거고요.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5)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의 행동이 놀랍지요!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자기가 아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 계신 곳에 데려옵니다. 누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구원에 협력하는 보람과 기쁨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들이야말로 기쁜 소식, 복음을 듣고 보고 체험하여 변화된 이들입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마르 6,56)
그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눕혀 놓은 장터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장면을 관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기라고 명하시자, 빛이 생겨나 어둠을 가르고 스며드는 오늘 제1독서의 장면이 떠오르지요.
"어둠을 심연이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2-3)
장터에 가득한 병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위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한줄기 빛이 관통합니다. 그 빛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위생이 중요한 환자를 장터까지 데려왔다는 묘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나를 짐작하고도 남지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이 그들을 휘감고 있던 어둠 사이로 희망의 빛이 새어든 것입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6,56)
그분을 직접 만지지 못해도, 그분 옷자락 술 끝에라도 닿고자 손을 뻗는 이들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겸손인지요! 얼마나 단순한 믿음인지요! 그분과 버젓이 독대하거나 잠시라도 그분을 차지할 유력자 신분이 못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힘껏 손을 뻗습니다. 그분께 닿음이 곧 치유이고 구원입니다.
빛을 향해 활짝 연 마음, 빛을 갈망하는 마음 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을 가르"신 것처럼 믿는 이와, 냉소하는 무심한 이의 구원이 갈립니다. 자기 존재에 빛이 스며들길 바라는 이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빛이 되어 주십니다.
창조의 넷째 날까지 보여 준 제1독서의 창세기 대목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립니다. 마치 오늘 복음 속 장터와도 같지요. 치유받고, 마귀가 떨어져 나가 온전해지고,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회복한 이들의 기쁨, 그들을 데려오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의 보람, 긴긴 돌봄으로 지친 가족의 경탄과 감사, 그들의 기쁨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행복, 제자들의 뿌듯함...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흡족하고 기쁘셨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새창조 앞에 섭니다. 주님은 묵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해 주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지고 있는 영육의 병고와 결핍, 상처와 고통은 창조의 말씀과 빛을 기다리는 어둠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덥썩 안을 수는 없어도, 손을 힘껏 뻗어 그분 옷자락의 술만이라고 건드릴 수 있다면, 그런 간절한 열망과 바람이 있다면 빛은 담박에 우리를 뚫고 들어와 가득 채워줄 것입니다. 치유하시고 구원하실 겁니다.
우리 삶의 장터를 가르며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계속 서 있을지, 빛 한가운데로 나아올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응답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빛이신 주님을 만지고, 큰 빛 안에 스며들어 함께 빛이 되어 보시지 않을래요?
"과연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르 6,56 참조)
새 창조의 말씀에 온 존재를 내어맡긴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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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겐네세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고,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 이 행위가 이런 '영적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손을 대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손을 대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손을 대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다.'는 영적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인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창조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독서는 전합니다.
'창조 이야기'는 'causa prima(제1원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는 '불가능 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손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원창조 질서를 잘 보존해 나가는 것!
무가 유가 되게 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창조'입니다.
또 하나의 창조를 만들어 가려면,
우리도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의 완전한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이며, '또 하나의 창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구원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또 하나의 창조를 위해서 우리도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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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영원한 본향本鄕이자 안식처安息處
-그리스도 예수님-
2014년 안식년 때 오랜 동안 정주해 오던 요셉 수도원을 떠나 생활할 때가 생각납니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중 들렸던 성전마다 꼭 고향집에 온 듯한 편안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11월에 써놓은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가고 싶으나/갈 곳이 없네
보고 싶으나/볼 분이 없네
가고 싶은 곳/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 성전
보고 싶은 분/오늘 지금 여기 계신 '주님'뿐이네”-
바로 오늘 여기 주님이 계신 성전이 영원한 본향집이란 고백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혼돈의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고향집 같은 세상으로 만드십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란 괴테의 말도 생각납니다. 경계가 없는 혼돈과 무질서의 자리가, 한계없는 탐욕의 자리 거기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을 경계를 지으며 각기 고유의 영역으로 나누시며 조화와 질서의 본향집 같은 안식처로 준비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명령따라 살기 좋은 고향집 같은 세상으로 변모되는 세상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오늘 창세기 마지막 절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을 나누어 경계 지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창세기 창조설화는 영원히 열려 있는 이야기이자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끕니다. 창세기 창조설화중 매번 후렴처럼 반복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는 하느님의 눈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지, 참 좋은 나의 삶인지 자주 판단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공존공생의 균형과 조화, 평화와 질서의 세상이요 삶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참 아름다운 지구가, 세상이, 인간의 탐욕으로 얼마나 많이 망가져가고 있는지요! 날로 늘어나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입니다. 참으로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삶이 잘 사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 장면은 흡사 하느님 중심으로 질서있게 조성되는 균형과 조화의 참 좋은 세상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창조와 구원은 하나입니다. 단 한 번에 끝난 창조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창조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은 그대로 무질서의 혼돈중의 사람들이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고 구원됨으로 새롭게 질서 잡혀가는 창조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길을 잃고 집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중에 미아처럼 병고중에 방황하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은 우리의 길이자 본향집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창조가 새롭게 이뤄지는 신바람 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나 치유 구원됨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질서와 조화의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떠날 때 온갖 병고에 어둠과 혼돈의 지옥이며, 주님과 함께 할 때 빛과 생명, 질서와 조화, 치유와 구원의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치유와 구원이,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는 영원한 본향집은, 안식처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창조와 구원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 구원하시어 당신 중심의 질서와 조화, 빛과 생명,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늑하고 편안한 본향집같은, 안식처같은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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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대로 생각하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는(마르 5,25-29)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려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루 뛰어다니며’ 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서로 전하면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병을 잘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두루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그들 자신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렇게 전파됩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병자들은 자기 발로 걸어서 예수님께 왔겠지만,
그럴 수 없는 병자들은 사람들이 들것에 눕혀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병자들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옷자락 술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중병에 걸린 사람들,
즉 손도 못 움직이는 병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옷자락 술을 만지는 행위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병이 나음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은 일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치유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희망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치유됨으로써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은 ‘구원의 시작’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이 일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말씀에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더 많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또 기적의 힘이 바오로 사도에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 성경은 ‘옛날이야기 책’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특히 ‘치유의 은총’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설 같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내리는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지금의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내가 행복과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옷자락 술’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는 통로,
또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가,
병이 나은 다음에는 자기를 치료해 준 의사에게만 고마워하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의사가 나를 고쳐 주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실 때 사용하는 통로,
또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주님이시지 의사가 아닙니다.>
3) 복음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들은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좋은 예입니다(마르 5,26).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의학과 의술이 어느 정도는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즉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병에 걸렸다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수술을 하든지 투약을 하든지 간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치병에 걸렸을 때에만 기도하고,
의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마태 7,11)”이라는 믿음을 버리면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생 전부와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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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과연 그분이 손을 대신 사람마다 나았다
- 성사 교리 ⓵ 성령께 대한 개방성, 사효성과 인효성
마르코 복음에는 창조의 메아리가 아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마다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뜻대로 실현되게
만드는 권위를 느끼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위 못지않게 손길마다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으로 몰려든 군중 속에서 아픈 사람들이 다가오면 손을 대어서
성령의 기운을 전해주고자 하셨고, 그렇게 손이 닿은 사람마다 아팠던 증상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열려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우러났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마르코는, “구원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생리적 질병의 치유를 넘어서서 정신적인 개방성과 영적인 진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런 치유 기적 기사의 표현은 하늘의 기운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에게 닿았음을 의미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인류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본격적인 천문관측으로 발달시켰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지식이 축적되기 전에도 관찰의 열의와 관측의 전문성은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가,
단군세기(檀君世記) 같은 문헌이나 첨성대(瞻星臺)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유물들 그리고 수많은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심지어 이집트나 마야 문명의 피라밋의 건축양식에서도 입증됩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한 동방박사들도 별을 관측하던 점성술 학자들이었지요.
분명히 우주와 천체의 작용은 지구의 땅에 영향을 미쳐왔고 그 대표적인 것이 해와 달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첫 절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해 놓은 것은,
천체의 움직임이 기후와 기상의 작용으로 지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인류나 개인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숭배할 대상은 아니라는 진리를,
아직 인격신 개념이 없이 태양신을 섬기던 고대 인류에게 처음으로 인격신을 천명하는 일종의 문명선언입니다.
하늘의 기운이 땅에 닿도록 끌어당기고, 땅에 닿은 하늘의 기운을 다시 사람에게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비추던 큰 빛은 태양이고, 작은 빛은 달이었지만,
우주 전체의 어마무시한 암흑에 비하면 이 크고 작은 빛은 촛불 한 자루가 비추는 희미함을 넘어설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의 기운으로 아픈 사람을 낫게 해 주시고,
치유를 넘어 구원으로까지 베푸신 행적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생성 소멸하는 우주의
그 어떠한 빛보다도 인간에게 밝은 빛을 던져주는 일로서 인격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더 귀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신통한 능력으로써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그리고 그 하느님의 영을 받으면 발휘할 수 있는
하늘의 기운이었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비출 수 있는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신 일을 재현하고 기념하는 일이 성사입니다.
모든 성사는 성령의 기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대한 개방성이 성사생활의 기초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사교리에서는 성사의 사효성(事效性)과 인효성(人效性)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사의 사효성이란 성사 그 자체의 힘으로 효력을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성사는 집전자와 수혜자의 인간적 조건 이전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즉 하늘의 기운을 전해주시고
이를 당신 제자들에게도 허락하셨기 때문에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성사의 인효성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성사는 요술이 아니라 성사의 집전자와 수혜자의 신앙와 인격
그리고 실천적 노력에 의해 그 열매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은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삶의 실천적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세상에 비추는 빛과 전하는 기운은 천차만별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기운을 나누어주신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로 성사를
받아야 하고 그 은총에 따라 자신의 삶에서 보이게끔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시편 95,6-7, 입당송).
이와 마찬가지로 묵주와 상본을 비롯한 성물과 예수상과 성모상을 비롯한
성상에 대해서도 부적(符籍)이나 실내 장식품처럼 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 성물들과 성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기도할 자극을 주고,
그리하여 이미 성사에서 받은 성령의 기운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하여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물과 성상 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행위를 준성사(準聖事)라고 하여 성령의 기운을
직접 받는 성사하고 다르다고 구분하지만 성령과 관련 없는 일상 행위와도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성사를 받을 때 예수님의 손이 성령의 기운으로 닿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구원된 여러분도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여러분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천문관측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은 결과로 이 나라의 건국이념으로 삼은 뜻,
즉 하늘의 기운으로 인간에게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과도 상통합니다.
신앙인들의 손길이 우리 사회 이웃들을 이롭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홍익인간의 뜻을 받들어
우리 대한민국의 문명이 지구촌의 이웃들까지도 널리 이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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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사랑으로
시작되는
오늘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구원과 은총은
우리에게
내려지는
매순간의
선물이다.
어르고 달래며
여기까지
우리를
업고 왔다.
눈물겨운
사랑이다.
은총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향하는
치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각자에게
맞는 은총을
주신다.
영혼을
살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구원의
계획안에
너와 내가
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과
은총이다.
그래서
사랑은
복음이다.
구원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다시 주님
사랑으로
시작한다.
사랑이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치유의 날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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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우리 자신도 공동체의 힘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께 데려오는 모든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이 장면은 다시 네 명의 친구가 한 명의 중풍 병자를 데려와 치유를 받고 죄의 용서를 받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았던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은 아직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할 때,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라고 주시는 빵이 있습니다. 빵은 에너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힘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들이 먹을 빵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단하는 것도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그 결단을 따를 에너지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만 주어집니다. 인간은 생존 본능과 그것과 반대되는 율법 간의 선택 사이에서 이미 지쳐있습니다.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1998년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똑같은 비디오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룹 ‘A’에게는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게 했고, 그룹 ‘B’에게는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의 악력을 측정했는데, 자기감정을 억눌렀던 그룹 ‘B’의 사람들이 악력이 더 약해진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룹 ‘B’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서를 억누르기 위해 이미 의지력이 소모되었다는 뜻입니다.
초콜릿을 이용한 또 다른 실험도 있습니다. 대학생 한 그룹에는 초콜릿을 다른 그룹에는 무를 주어 그 맛을 기록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초콜릿을 먹는 그룹을 보며 먹고 싶은 의지를 억눌러야 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내거나 어려운 퍼즐을 맞추라고 했을 때 초콜릿을 먹은 그룹이 훨씬 오래 인내심을 발휘해 문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그것을 먹는 동안 의지력을 많이 소진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소진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같은 옷과 신발만을 입고 신습니다. 판단을 위해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은 자유의지로 이것과 저것 중 하나를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지쳐있으면서도 지친 줄 모릅니다.
헤로데와 같이 아예 결정을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내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 공동체는 주저하는 누구에게나 결단의 힘을 줄 빵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은 이들의 공동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미 5장에서 예수님께 에너지가 나와 악령을 몰아내고 하혈병 걸린 여인을 치유하며 죽은 야이로의 딸까지 살리신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에너지가 솟구친다는 것을 믿었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에게 예수님은 에너지의 근원이고 그 힘이 주는 결과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에 모든 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지녔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할 때, 저의 어릴 적 두 친구가 신학교 먼저 들어가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저와 두 친구가 성당에 다녔는데, 그중 처음 한 친구가 들어갈 때는 아주 잠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마저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셋 중 둘만 한쪽으로 가도 그쪽으로 갈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을 전하는 이들이 의지력이 약해진 이들, 그래서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힘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 선택을 할 힘이 없어서 못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초콜릿을 먹고 싶어도 자신들의 선택을 넘어설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초콜릿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깨우기 위해 당신이 물 위를 걸어 배 위에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신 공동체로서 그 자체로 가진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든 들것에 들고 주님께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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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이자 야전 응급병원으로서의 교회!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분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즉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을 이장님께서는 마이크 크게 틀고목이 터져라 외쳤겠지요.
“아아! 이장입니다. 오늘 우리 마을에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국민적 대 스타로 떠오르신 분, 손만 대면 불치병을 낳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들 모시고 계시는 가정에서는 단 한분도 빠지지 말고, 지금 당장 환자를 모시고 마을 회관 앞으로 모시고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회는 다시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들은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대충 얼기설기 만든 들것에 환자를 눕혀 초스피드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수가에는 그야말로 진풍경 펼쳐졌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몰려온 환자들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몰려온 군중들,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덩달아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몰려온 환자와 가족들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며,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 한명 한명을 환한 얼굴로 기쁘게 환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격려해주셨을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하고 위로하며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있던 환자와 가족들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평생 소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광경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왔겠지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미하고 흠숭하는 탄성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순식간에 야전 응급병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마치도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그랬듯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 응급병원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배적인 논리는 세상을 치유시키고 생명을 주는 논리라고 볼수 없을 듯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비인간적인 경제지상주의에 기초한 부의 극단적 불균등은 이 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미처 노후준비에 여력이 없었던 수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저출산 풍조는 갓난아기들의 반가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새 생명이 주는 생기와 그로 인한 기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성공지상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 땅의 새싹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가 이 땅 위에 팽배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좌시하지 않는 파수꾼으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로서의 교회로 재탄생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야전병원’같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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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시는지요? 사람이 태어나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게 당연합니다. 네 가지의 인생의 과정 중에서 세 가지는 누구에게나 다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하나는 조금 예외가 간혹 발생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병은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있긴 하지만 거의 희박한 경우입니다.
병이 든 사람 중에서도 중병이 걸린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낫고자 하는 그 마음은 간절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후의 순간에는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현실성이 없는 경우라고 판단이 되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누구나 죽음이라는 것은 빈자나 부자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살다보면 어느덧 죽음의 그림자를 맞이해야 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날이 언젠가는 온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죽음의 시간이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기를 누구나 바랍니다. 그만큼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본능을 거부하려고 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육체에 병이 들게 되면 많은 걱정을 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낫는 방법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물론 육체의 병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병은 이렇게 신경을 써서 치유하려고 하지만 정작 정신의 병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물론 정신적인 고통은 힘든 건 사실이지만 육체적인 병만큼 피부로 크게 얼마나 중한지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실제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신적인 병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굳이 그건 복음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영원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땐 육적인 존재의 탈을 벗어난 영적인 존재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병자들의 심정은 참으로 절박한 심정이라는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청을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순히 청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의 표현을 보면 같은 표현이지만 약간 뉘앙스가 다릅니다. 단순한 청을 넘어서 우리말 표현에 애걸복걸 같은 그런 느낌의 청입니다. 문맥상 의미를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육적인 병이든 영적인 병이든 병든 사람의 마음은 힘겹습니다. 그나름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옷자락을 댄 사람은 다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번역된 구원의 의미를 실제 우리가 아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의 구원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경 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다른 성경에 나온 다른 표현을 봤을 때 그 성경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때 구원의 의미를 치유와 회복의 의미로 표현한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치유와 회복의 관점으로 묵상을 했습니다.
만약 지금 육신이 건강한 신앙인이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의 영혼까지 건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누구나 죄성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육체의 병을 떠나서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는 어쩌면 건강하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설령 육신의 병은 어느 정도 살면서 함께 가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병만큼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온전히 건강한 영혼의 상태로 다시 원상 회복시킨 후에 떠난다면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영혼의 세상을 맞이할 때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간이 침묵의 장기라고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이 간과 같을 것입니다. 평소에 틈틈이 영혼을 잘 관리해야지 관리를 잘 못하면 그때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을 땐 정말 치유하기 힘든 중병으로 발전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병은 중병이면 중병일수록 설사 치유가 된다고 해도 그만큼 병이 진행된 시간만큼이나 치유의 시간도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달리 표현하면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맛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영혼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현명한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인생을 최종 정산하는 시점에서는 우리의 하루하루 신앙생활을 하느님께서 채점한 우리의 삶의 신앙 점수가 그대로 누적되거나 가감되어 최종 결산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금은 별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날에 가서는 엄청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오늘 병자들의 마음처럼 그때도 그런 심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과 마주하는 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해본다면 아니 고민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답이 나오리라고 저는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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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8.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2월 8일 월요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6,53-56) 제1독서<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창세1,1-19) 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화답송 시편 104(103),1-2ㄱ.5-6.10과 12.24와 35ㄷ(◎ 31ㄴ) ◎ 주님은 당신이 이루신 일을 기뻐하시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 하느님,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시옵니다. 존엄과 영화를 입으시고, 광채를 겉옷처럼 두르셨나이다. ◎ ○ 땅을 기초 위에 든든히 세우시니, 영영 세세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바다로 땅을 옷처럼 덮으시니, 산 위까지 물이 가득 찼나이다. ◎ ○ 골짜기마다 샘물 터뜨리시니, 산과 산 굽이굽이 흘러내려, 하늘의 새들은 그 곁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나이다. ◎ ○ 주님, 당신 업적 얼마나 많사옵니까! 그 모든 것 당신 슬기로 이루시니, 온 세상은 당신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창세1,1~19)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1~2) '한 처음에'로 번역된 '뻬레쉬트'(bereshith)는 천지 창조의 시점, 곧 하느님께서 우주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無)에서 유(有)로 동시에 섬광처럼 생겨나게 하신 원천적 창조 사건이 일어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뻬레쉬트'(bereshith)는 '뻬'(be)와 '레쉬트'(reshith)의 합성어이다. 먼저 '뻬'(be)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reshith)는 '근원'(창세2,10), '머리'(창세3,15), '꼭대기'(1열왕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rosh)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창세10,10), '근본'(시편111,10), '으뜸', '우두머리'(욥기40,19)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뻬'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뻬레쉬트'는 직역하면 매우 단순하게 '시초에', '한 처음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뻬레쉬트'가 말하는 '시초'(처음)는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원점, 곧 시간(時間; the time)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결국 '뻬레쉬트'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바로 그때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즉 인간 역사(歷史)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처럼 천지 창조는 다름아닌 모든 우주 만물의 존재와 그들 사이에 발생할 모든 사건의 기원을 이루는 원초적 사건이다. 이런 천지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뻬레쉬트'는 천지 창조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시간 자체도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기원', 곧 '시간의 원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실로 천지 창조는 시간 자체도 이제 막 시작한 때에 바로 그와 동시에 섬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유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리고 만유를 뛰어넘어 계시는 유일한 절대 자존자(自存者)요, 초월자(超越者)이시다. 이러한 하느님께서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초월하여 계신다(시편90,4). 반면에, 우리 인생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오직 공간(空間; the space)안에서 시간(時間; the time)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은 시공에 얽매인 차원(dimension)에 존재하지만, 이 우주 만물 각각은 물론 이 모든 것들의 존재 양식인 시간과 공간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곳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얽매여 있는 인생을 포함한 피조물과의 관계만 아니라면 하느님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심지어 하느님 자신의 실존에만 국한해서 볼 때에는 천지 창조 이전과 이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시간으로부터 완전 초월하여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계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천지 만물은 오직 시간의 시작과 함께, 곧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역으로 말해도, 시간도 오직 그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만 그 존재 양상이 전개되어 가는 만물들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無)로부터 유(有)로의 천지 창조(creatio ex nihilo)는 시간의 시작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시간 또한 천지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함께 창조되었고, 또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우리는 '한 처음에'로 번역된 창세기 1장 1절의 '뻬레쉬트'를 새 성경에서 그 역시 '한 처음에'로 번역된 요한 복음 1장 1절의 '엔 아르케'(en arche)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뻬레쉬트'는 하느님의 천지 창조로 이제 막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던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키고, 반면에 '엔 아르케'는 시간이 아예 흐르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뻬레쉬트'가 무로부터 유가 시작되어 시간이 출발했던 영원과 시간의 접촉점만을 가리킨다면, '엔 아르케'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차원 전반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이 구절은 앞서 '한 처음에'란 창조 시점에 제시된 것에 이어서 이제 천지 창조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앞서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데 이어서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힌다. 여기 '하느님'에 해당하는 원어 '엘로힘'(ellohim)은 제1위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다 '하느님'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권세있다', '힘세다'라는 뜻을 가진 '울'(ul)에서 유래한 것 (2열왕24,13; 시편73,4)으로서 '권세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elloah)의 복수형이다(탈출12,12; 신명32,15). 하느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가리키는 대상이 분명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복수형으로 표기함으로써, 그 대상의 권위와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고대 근동 전반의 수사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천지 창조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의 존재 자체,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얽혀서 빚어내는 모든 역사의 유일한 원초적 기원이다. 따라서 결국 천지 창조의 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궁극적 기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기원이시다.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욥기1,21; 시편90,3; 코헬렛12,7; 로마11,36).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우리 인생의 궁극적 관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천지 창조 기사 전체가 오직 하느님만이 온 천지를 모두 다 직접 창조하셨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전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 우주의, 특히 전 우주의 대리 통치자인 우리 인간들(창세1,26)의 하느님께 대한 복종과 경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 주체가 어떤 사물을 만들거나 사거나 이를 소유함에 있어서 그 주체 자신이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게되는 완전하고도 정당한 법적 근거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천지 창조 기사는 거듭해서 전 우주가 스스로 생겨났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엘로힘 하느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임을 그토록 강조한다. 즉 이것은 전 우주와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소유권(탈출18,5; 신명10,14; 에제18,4)과 통치권 (탈출15,18; 시편72,8; 다니엘5,21) 사상은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본문은 창조의 시점, 곧 언제 천지 창조가 있었는지를 밝힌 '한 처음에'와 창조의 주체, 곧 누가 천지를 창조하였는지를 밝힌 '하느님께서'에 이어서 이제 창조의 대상(對象), 곧 무엇이 창조되었는지를 밝히는 구절이다. 원문은 '에트 핫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eth hashamaim weeth haarets; the heaven and the earth)이다. 우리말의 '~을'(를)에 해당하는 것으로 직접 목적어임을 표시하는 대격 전치사 '에트'(eth)와 '그 하늘을'이란 뜻의 '핫샤마임'(hashamaim), 또 '그리고'(과)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we)와 '에트'(eth)가 결합된 '웨에트'(weeth), 끝으로 '그 땅'이란 의미의 '하아레츠'(haarets)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현대 천문학이 말하는 지구의 대기권 및 그 너머에 무한히 팽창하는 공간으로서의 우주에 대해 과학적 개념이 없었다. 그 대신에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거대한 금속판인 소위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머물고 있는 셋째 하늘 등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 420여회 나오는 하늘은 모두 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 '땅'을 말하는 '아레츠'(arets)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를 가리킬 뿐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성경에는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시편113,3),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2사무17,11) 등과 같이 양극단을 함께 말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다 포함됨을 강조하는 용례가 많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그 하늘들과 그리고 그 땅을'이라는 원어의 표현은 비단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가없는 양자 사이의 공간 자체는 물론 그 안의 모든 물질들, 곧 하늘에서부터 땅 끝까지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창조의 대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셨다' '창조하셨다'의 원어는 '빠라'(bara)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이 단어는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끝으로 '먹다'(eat), '양육하다' (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빠라'(bara)가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느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느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 (신명4,32; 시편89,12; 이사43,1; 예레31,22). 한마디로 '빠라'(bara)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롭게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이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오직 만물을 초월(超越)하여 자존(自存)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오직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여, 즉 과거와의 연속 안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빠라'(bara)는 실제로 '만들다', '지어내다'의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때에는 오직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등장하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셨다', 곧 '빠라'(bara)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섬광처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내가 사랑하는 그가 하늘의 존재(생명)가 되었으면 (마르 6,53-56) 53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았다? 병자-죄인을 뜻하기에 구원이라 하십니다. 먼저 옷자락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롯기3, 9) 9 그래서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그 여자가 “저는 주인님의 종인 룻입니다. 어르신의 옷자락을 이 여종 위에 펼쳐 주십시오. 어르신은 구원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구원자의 옷자락입니다. (에제16,8)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 알몸 곧 부끄러움(죄)을 덮으시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구원의 계약의 옷입니다. (민수15,38-39) 38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말하여, 대대로 옷자락에 술을 만들고 그 옷자락 술에 자주색 끈을 달게 하여라. 39 그리하여 너희가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고, 너희 마음이나 눈이 쏠리는 것, 곧 너희를 배신으로 이끄는 것에 끌리지 않도록 하는 술이 되게 하여라. = 덮으심의 구원-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뜻하는 옷자락의 술입니다. 사람의 마음, 눈의 계명은 하느님의 뜻을 배신으로 이끌어 구원이 없습니다. (이사6,1)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성전(교회)에 하느님의 옷자락 그 계명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구원의 힘입니다. 그 옷자락의 술, 구원의 힘, 뿔입니다. (탈출27,1-2) 1 “아카시아 나무로 제단을 만들어라. 2 그 네 귀퉁이에는 뿔을 만드는데, 뿔과 제단을 한 덩어리가 되게 하여 청동을 입혀라. = 제단의 뿔- 옷자락의 술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탈출30,10) 10 아론은 그 제단의 뿔에 해마다 한 번씩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 너희는 대대로 해마다 한 번씩, 속죄하려고 바치는 속죄 제물의 피로 그 제단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 이 제단은 주님에게 바친 가장 거룩한 것이다.” = 제단의 뿔이 속죄 제물의 피로 거룩한 것이 되었기에, 그 뿔을 잡으면 죄인이 용서를 받습니다.(1열왕1,50참조)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덮으심의 사랑, 자비의 옷으로, 구원(용서)의 계약의 그 옷자락으로 만졌다면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의로움의 옷입니다. 그 의로움의 깨끗한 옷으로 깨끗해 졌습니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속죄 제물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로마3,25)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으로 먹었을 때 자신이 알몸인 것을 알고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에~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덮어) 주셨다. =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가죽옷- 어린양이 죽어 남긴 가죽, 그 죽음의 옷을- 내 죄의 대속의 옷으로 입으면 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속죄하신 십자가임을 깨달으면 용서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받아 드린다면 하늘의 생명,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의사, 좋은 약을 알게 되면 이웃에게 참 잘도 전하고, 듣는 이도 아주 기뻐합니다. 그렇듯 예수님을 참 의사로, 말씀을 좋은 약으로 전하고 들을 수 있도록, 오늘 본문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질 수 있도록~ 그 덮으심의 사랑, 그 대속의 용서를 알려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肉의 욕망이 아닌 靈의 구원, 곧 하늘의 새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아멘 -*^ㅇ^*-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복음(마르6,53~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시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56)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으로 번역된 '에이세포류에토'(eiweporeueto; he entered; he went)는 원형 '에이스포류오마이'(eisporeuomai)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로서,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를 계속적으로 이동하여 들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표현이다. 마르코 복음 6장 56절에서 직설법 동사가 다섯 개 쓰였는데, 그 중에서 네 개가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들을 계속해서 들어가고 계셨고, 사람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끊임없이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청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은 누구나 치유를 받았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계속적 동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한 이유는, 마르코 복음 6장 56절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모든 반복적인 치유 행위들을 요약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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