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는 도루의 가치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 시즌 도루 수 2527개는 이전 시즌보다 10개가 줄어든 기록이다. 20년 전하고 비교해보면 약 31.0%나 감소됐다(1997년 3308개).
여러 이유가 있다. 통계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서 도루는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다. <베이스볼프로스펙터스>가 제공하는 지난해 무사 1루에서 기대득점은 0.8945점이다. 도루를 성공했을 때 1.1095점으로 높아지지만, 실패하면 0.2858점이 된다. 2루를 훔쳐서 얻게 되는 기대득점(0.2150)보다 2루를 훔치지 못할 시 잃는 기대득점(0.6087)이 더 크다. 이는 모든 상황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큰 도박을 굳이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난해 리그 평균 도루 성공률은 73.0%였다. 양키스가 가장 높았고(80.4%) 콜로라도가 가장 낮았다(63.4%). 13팀은 리그 평균 성공률보다 높았지만 17팀은 손해를 감수하고 도루를 감행했다. 회의적인 사실은 팀 도루가 많다고 해서 팀 득점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지난 5년 간 메이저리그 최다 도루 팀이 최소 도루 팀보다 경기당 평균 득점이 높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다 도루 / 최소 도루 팀 평균득점
2013 [KCR] 4.00 [DET] 4.91
2014 [KCR] 4.02 [DET] 4.35
2015 [CIN] 3.95 [BAL] 4.40
2016 [MIL] 4.14 [BAL] 4.59
2017 [LAA] 4.38 [BAL] 4.59
선수들의 몸값이 뛰어오른 현상도 도루를 주저하게 한다. 손가락, 손목, 발목 심지어 헤드퍼스트슬라이딩에 의한 뇌진탕 부상까지 일으킬 수 있는 도루는 항상 위험이 따른다. 작년만 해도 마이크 트라웃(에인절스)이 2루 도루 중 엄지 손가락 인대가 파열되면서 6주 간 결장했다. 자칫하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선수 보호 차원에서 도루는 지양되고 있다. 이밖에 투수들의 구속이 빨라진 점, 주자를 묶는 기술(픽오프 슬라이드 스텝)의 연구가 도루를 막는 요인이다.
이처럼 도루의 열풍은 분명 저물어가고 있다. 그런데 도루왕을 향한 두 선수의 자존심 대결은 또 한 번 불꽃이 튀었다. 시즌 막판까지 경쟁을 벌인 디 고든(29)과 빌리 해밀턴(27)이었다.
고든은 정규시즌 최종전을 하루 앞두고 도루 2개를 추가, 통산 두 번째 60도루 시즌을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안타를 때려냈지만 도루는 없었다. 대신 덕아웃에서 먼저 끝난 신시내티와 컵스의 경기 결과를 듣고 활짝 웃었다. 그 경기에서 해밀턴이 도루를 해내지 못한 것이다. 해밀턴은 마지막 타석 볼넷을 골랐는데, 2루주자 제시 윈커의 3루 도루 실패로 더블 스틸이 인정되지 않았다. 이로써 고든은 해밀턴(59개)을 하나 차이로 따돌리고 세 번째 도루왕을 차지했다.
2017년 ML 최다도루
60 - 디 고든
59 - 빌리 해밀턴
46 - 트레이 터너
34 - 위트 메리필트
33 - 카메론 메이빈
32 - 호세 알투베
두 선수의 본격적인 대결은 2014년부터 시작됐다. 그 해 다저스에서 처음으로 주전 자리를 확보한 고든은 60도루에 성공한 팀 역대 7번째 선수가 됐다(64도루). 해밀턴도 만만치 않았다. 해밀턴이 뺏어낸 58도루는 신시내티 신인 역사상 최다 기록이었다. 다만 고든을 넘지 못하면서 도루왕이 무산됐고, 이듬해에도 고든에게 밀렸다. 2016년에는 해밀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고든이 금지약물 적발로 80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 것이다. 79경기 30도루에 그치면서 해밀턴이 드디어 도루왕에 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해밀턴도 부상으로 43경기를 놓쳤다. 119경기 58도루를 올리는 동안 조너선 비야(밀워키)가 둘만의 경쟁을 가로막았다(62도루).
두 선수 도루 수 비교
14 [고든] 64 [해밀턴] 56
15 [고든] 58 [해밀턴] 57
16 [고든] 30 [해밀턴] 58
17 [고든] 60 [해밀턴] 59
2014년 이후 ML 최다도루
230 - 빌리 해밀턴
212 - 디 고든
156 - 호세 알투베
128 - 스탈링 마르테
126 - 라제이 데이비스
120 - 제로드 다이슨
115 - 벤 르비어
전체 도루 수는 해밀턴이 앞선다. 해밀턴은 타이 콥(1909-12) 루 브록(1971-76) 조 모건(1972-76) 리키 헨더슨(1980-86) 팀 레인스(1981-86) 빈스 콜먼(1985-90) 호세 레이에스(2005-08)에 이어 4년 연속 55도루 이상 이어간 8번째 선수가 됐다. 통산 200도루까지 필요했던 424경기는 1901년 이후 네 번째로 적었다(콜먼 280경기, 레인스 361경기, 헨더슨 366경기). 2014년 이후 도루 성공률 81.6%도 디 고든(77.4%)보다 높았다(같은 기간 1위 다이슨 83.3%).
문제는 해밀턴이 정작 도루 타이틀은 한 번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든은 해밀턴보다 도루 수는 적었지만, 2014-15년, 2017년 모두 해밀턴을 2위에 두고 도루왕에 올랐다. 셋 중 두 번이 겨우 한 개 차이. 1901년 이후 하나 때문에 도루왕 희비가 엇갈린 경우는 9번에 불과했다(고든 해밀턴 제외). 여기에 같은 두 선수가 두 번이나 부딪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공의 반발력이 떨어진 데드볼 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뛰었다. 멀리 치는 것보다 많이 뛰는 것이 득점에 가까워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타이 콥, 호너스 와그너, 에디 콜린스가 빼어난 주자들로, 모두 열심히 달리다보니 특별한 라이벌 구도는 형성되지 않았다. 1920년 라이브볼 시대에 접어들면서 시들어진 도루의 인기는 1950년대 바닥을 찍었다. 당시 밀워키 브레이브스에서 뛴 빌 브루튼은 1953년 26도루, 1955년 25도루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에 올랐다.
떨어진 인기가 반등하려면 차원이 다른 선수가 나오거나, 혹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선수가 나와줘야 한다. 1959년 루이스 아파리시오가 15년만에 50도루를 넘어서더니(56도루) 다음해 아파리시오(51도루)와 더불어 또 한 명의 50도루 선수가 나타났다. 1962년 100도루 신기원을 연 모리 윌스였다. 1962년 윌스는 104도루로 1915년 타이 콥의 96도루를 갈아치웠다. 덕분에 3할 타율(.299) 두 자릿수 홈런(6개) 세 자릿수 타점(48)을 모두 실패하고도 리그 MVP를 수상했다. 윌스와 아파리시오를 기점으로 도루의 입지는 달라졌다. 루 브록과 버트 캄파네리스가 있었고, 1980년에는 도루와 이음동의어 리키 헨더슨(사진)이 등장했다. 절대자 헨더슨이 지배한 시대에 팀 레인스, 빈스 콜먼 같은 경쟁자가 나와주면서 도루의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 역대 100도루 시즌
104 - 모리 윌스 (1962)
118 - 루 브록 (1974)
100 - 리키 헨더슨 (1980)
130 - 리키 헨더슨 (1982)
108 - 리키 헨더슨 (1983)
110 - 빈스 콜먼 (1985)
107 - 빈스 콜먼 (1986)
109 - 빈스 콜먼 (1987)
고든과 해밀턴의 싸움이 흥미로운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두 선수의 치열한 다툼으로 인해 도루의 인기가 회복될 수 있을지 여부다. 중책을 맡은 두 선수는 올해 나란히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우선 고든은 리그를 이동했다. 팀 이름 빼고 다 바꿀 기세인 마이애미는 고든을 시애틀로 트레이드 시켰다. 하루 아침에 팀이 바뀐 고든은 새로운 도전도 앞두고 있다. 이미 로빈슨 카노가 2루수를 맡고 있는 시애틀은 고든을 중견수로 기용한다. 고든의 스피드가 외야에서 더 빛을 발휘할 것이라는 생각. 실제로 고든은 지난해 최대 스피드가 초당 29.7피트(9.05m)로 내야수 중 가장 빨랐다. 이 부문 고든보다 빨랐던 세 선수는 바이론 벅스턴(30.2피트) 해밀턴(30.1피트) 브래들리 짐머(29.9피트)로 모두 중견수였다.
홈에서 1루까지 4초 이내로 도달한 것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았던 고든(199회)은 스피드는 중견수를 봐도 손색이 없다(2위 해밀턴 65회). 그러나 중견수 수비는 단순히 빠르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타구 판단, 펜스와의 거리 계산 등 중요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만약 중견수 전향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타석에서 일어날 변수도 배제할 수 없다. 도루 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 같은 지구 휴스턴, 텍사스, 오클랜드가 도루 저지에 탁월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휴스턴의 도루 저지율 12.1%는 전체 최하위였으며, 오클랜드는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은 111도루를 허용했다(텍사스 도루 저지율 24.3%).
해밀턴도 트레이드 소문이 나돌긴 했다. 샌프란시스코가 진지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는데 성사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SPN 제리 크래스닉에 따르면 신시내티 밥 카스텔리니 구단주가 해밀턴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트레이드 최종 결정권자인 카스텔리니는 "나는 빌리 해밀턴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길 바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의 타격은 좀처럼 발전이 없는 상태(2017년 .247 .299 .335). 2할대 출루율로 50도루를 세 차례나 달성한 선수는 역사상 해밀턴이 유일하다(캄파네리스, 오마 모레노 2회). 게다가 3년 연속 부상(어깨 사근 손가락)으로 상당 경기를 못나오면서 자리마저 뺏길 위기에 놓여있다.
벼랑 끝에 몰린 해밀턴은 조력자를 바꿔보기로 했다. 그동안 빌리 해처 3루 코치, 딜라이노 드실즈 트리플A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올 겨울은 토니 하라미요 타격코치 보좌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라미요는 조이 보토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리그에서 뛰게 된 고든과 해밀턴의 도루왕 쟁탈전은 한층 더 예측하기가 힘들어졌다. 고든이 이번에도 방어전에 성공할까 아니면 해밀턴이 마침내 반격에 나서게 될까. 두 선수가 양분하고 있는 시대에서 2인 체제를 무너뜨릴 또 다른 선수가 등장할지도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