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73
(번외편)
ㅡ 충무공 이순신의 실제 용모ㅡ
오늘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다. 일제 강점기에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하 이순신)의 실제 영정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추정 되는 초상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실제 영정은 임진왜란 직후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그림이 전해져 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고 한다.
이순신의 용모는 세종대왕과 함께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주머니 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하면 근엄하고 멋진 용모단정한 선비의 모습이 우리에게 떠 오른다.
우리 주머니 속 화폐에 나온 모습이 이순신의 실제 모습일까?
전혀 아니다!
이순신의 많은 영정 중에서 1953년 장우성이 그린 현충사 소장 영정은 1973년 10월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4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 영정 및 동상 통일문제 연구를 지시’했고, 5월에 문화공보부는 장우성본을 공인했고 10월에 정식 공고를 냈다.
공인 이유를 담은 <이충무공, 세종대왕 영정 통일>에서 장우성본에 대해서 “현충사에 봉안되어 성역화 이후 많은 국민에게 알려져 있으며, 어느 영정보다도 기품이 있어 보이므로 이를 대체하기 어려움”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지금 공인된 이순신 영정은 현충사라는 성역화 공간, ‘기품’이라는 작품성이 근거였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실제 용모는 어떻했을까?
이순신장군과 당대에 같이 살았고 직접 이순신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순신의 용모를 무인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기 이후에 그려진 영정들은 지나칠 정도로 선비처럼 그려 졌다고 비판받는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고상안(高尙顔)이 1594년 3월에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는 남긴 평가가 그의 문집인 태촌집에 전한다
고상안, 《태촌집》
“통제사 이순신은 같은 해 과거에 합격했다. 며칠을 함께 지냈다. 그의 말솜씨와 말하는 방법은 지혜로웠다. 참으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살집이 없고, 덕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관상은 또한 입술이 뒤집어져 있었다. 나는 마음으로 ‘복이 있는 장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붙잡아 죄를 조사하라는 임금님의 명령이 있었고, 복직했으나 1년이 지나지 않아 철환에 맞아 제대로 운명을 마치지 못했다. 한탄할 일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공의 얼굴은 아담하여 수양 근신하는 선비와 같지만 마음 속에 담력이 있고 웃음이 적었다”고 묘사했다. 현 공인된 이순신 영정은 유성룡이 본 모습의 이순신을 가장 많이 닯게 표현해 놨다.
이순신의 사위의 배다른 동생인 윤휴는 이순신의 가솔들로부터 그의 용모를 전해듣고 <백호전서>에 기록했다.
윤휴,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
“나의 아버님(先人)께서 공의 딸을 외부(外婦·소실)로 취하셨기에 나는 오히려 공의 문지기와 노비 및 공을 모셨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공의 용모와 기호, 자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었다. 공은 키가 크고 용기가 뛰어났다. 수염이 붉었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본래 몹시 분노하고 탄식하고 있었기에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을 꺼냈다.”
보다 후대의 사람인 홍우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팔척 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턱과 용의 수염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때 이순신의 현재 영정 사진보다 실제 이순신의 외모는 인상이 강하며 잘 생기거나 덕망있는 얼굴도 아니고 다소 편고한 얼굴에 희노애락의 표현이 드물고 근엄한 무인의 얼굴이다.
이번에 발견된 키스의 초상화가 거의 위에서 표현한 이순신 용모 모습과 일치한다.
관상학적으로 얼굴 중 입술이 뒤집어진 듯하다고 한 것으로 봐서 이는 노년이 안 좋은 것이고 붉은 수염은 고생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 이순신 외모는 얼굴은 편협하고 다소 꾀죄죄한 형이었던 바 이런데도 그가 큰 인물이 된데에는 눈빛의 신기가 강하고 초라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얼이 커서 남들이 범접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철저한 준비 완벽한 계획, 불패의 신화 이러한 것들은 덕성의 기질이 아니다. 날카롭고 깐깐한 원칙주의자일 것이고 작은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지장의 모습이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섬세하고 다정다감할 것 같지만 평소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다. 주변의 참모나 부하 장수들에게는 피곤한 스타일이었을 수도 있다
이번에 발견된 키스의 수채화가 청전 이상범 화백의 초상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되었다.
이상범화백이 그린 이순신 그림은 현충사 봉안 초상화(지금은 소재 확인 불명), 해군사관학교 소장 초상화, 1930년대 <동아일보> 이광수 연재소설 <이순신>에 실린 초상화가 있다. 이 화백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해안 일대에 남아있던 이순신 초상화를 찾아다녔다.
“이 화백의 옛날 인터뷰를 보면 키스의 그림과 이 화백 그림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1936년 8월 1일 <삼천리>(제8권 제8호)와의 인터뷰에서 “이순신의 초상을 보았는데 일반 현대인이 생각하는 명장의 타입을 가진 장군의 얼굴로 보이지 않더군요”라면서 “그래서 얼굴에다 살도 붙이고 수염도 힘있게 붙여 놓고 여러 가지로 만들어 놓았지요”라고 답했다.
아래 인터뷰 내용대로라면 이화백의 초상화와 키스의 초상화는 거의 일치한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봐서 이번 키스 초상화가 이순신 실제 인물과 가장 흡사하다고 보여 진다.
키스의 이순신 초상화를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왔던 이순신 용모와는 많이 달라 한없이 낫설기도 하지만 또 자세히 보면 정말 우리가 알고있는 이순신 답기도 하다.
난중일기를 직접 쓴 이순신과도 많이 닯아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웅에게도 외모는 정말 중요한 것일까?
이순신의 외모가 우리가 알고있는 주머니 속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그의 업적이 훼손되는 것일까?^^
1. 키스가 그라 초상화
2. 이상범 화백이 그린 초상화
3. 장우성이 그린 우리 주머니 속 충무공 초상화
영국 화가 키스가 그린 초상화 인물은 이순신 장군 [발굴]
https://news.v.daum.net/v/20190707100428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