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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총리가 들은 시진핑 주석의 “우리는 가까운 이웃(一衣帶水)” 이중적 속뜻
2023년 9월 25일
한덕수 총리가 9월 23일 제19회 항주 아시안게임 개회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고 시진핑 주석의 오찬에 참석하였고 오후에는 서호(西湖) 국빈관에서 30분 동안 양자 면담을 하였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한국은 이사 갈 수 없는 가까운 이웃이자 서로 뗄 수 없는 파트너(中國和韓國是搬不走的近鄰,也是分不開的合作夥伴)”라고 강조하였답니다. 시진핑 주석을 비롯하여 중국 지도자들이 한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 또는 “한중 양국이 이사 갈 수 없는 좋은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과거에 한국 지도자들을 만나면 반가워하면서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중국 지도자들이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고사성어 “일의대수(一衣帶水)”를 들지 않으나 과거에는 가끔 들어 말하였습니다. 물론 현재 중국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에서 일의대수(一衣帶水) 고사성어를 들어 말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이웃” 뜻의 일의대수(一衣帶水)에는 별다른 뜻도 담겨있기에 한국 사람이라면 조심하여야 하며 아예 쓰지 않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일의대수(一衣帶水)에는 수나라 문제(隋文帝)가 587년에 양자강 남쪽 진(陳)나라를 정벌하려고 도강 계획을 강행할 때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집 총간에 실린 자료를 보면 조선 시기 지식인들도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서로 강이나 산이 막혔으나 가깝다고 말하거나 심지어 조선과 일본이 가깝다는 뜻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대체로 가깝다는 뜻으로 사용하였고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수문제는 일찍부터 남쪽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많은 신하에게 정벌 방법을 물었고 또 많은 신하가 각가지 정벌 방법을 끊임없이 올렸습니다. 수문제가 남양(南梁) 황제 소종(蕭琮)을 장안으로 불러들였고 소종은 587년 8월에 장안에 들어와 수문제를 알현하였습니다. 소종의 숙부 소암(蕭岩)은 소종의 알현에 반대하여 진(陳)나라 후주(後主)에게 귀순하였고 진 후주가 소암을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하였습니다. 곧이어 수문제가 남양(南梁) 왕조를 없애 멸망시키자 소암이 회계군(會稽郡) 지역을 갖고 수문제에게 투항하였으나 곧바로 모반죄에 걸려 참살되었습니다
이 시기(587년)에 수문제가 고영(高熲, 541-607)에게 남쪽 진나라 정벌 계획을 공개하면서 세 마디 말을 하였습니다. 첫째 : “내가 황제로서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옷의 가죽 혁대처럼 좁은 양자강에 막혀서 남쪽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겠는가?(我爲民父母,豈可限一衣帶水,不拯之乎?)” 둘째 : “내가 진나라 정벌을 드러내놓고 할 텐데 비밀스럽게 할 일이 있겠는가!” 셋째 : “만약에 저들이 두려워서 스스로 양자강을 건너와 항복한다면 내가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당시 일반 전략가들은 양자강의 강폭이 넓다고 인식하고 수군을 강화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수문제는 이런 전략적 인식을 뒤엎으려고 오히려 양자강의 강폭이 하나의 혁대(衣帶)처럼 좁다(一衣帶水)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양자강은 중국 전체에 비교하면 마치 커다란 옷의 혁대처럼 좁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일의대수(一衣帶水) 말뜻에는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반드시 정벌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줍니다. 물론 나중에는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말이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아주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사에서 옛날 황제들은 큰 공을 세우려고(好大喜功) 항상 정벌 전쟁에 온 힘을 쏟았고 신하들은 각가지 정벌 계획을 올렸습니다. 설사 평화 시기라도 황제와 신하들은 정벌 전쟁 계획을 세우고 정벌 대상에 심리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심리전에서 수문제는 진나라 후주가 여색에 빠지고 신하들과 밤새워 술 마시거나 문장 짓는 것에 심취하여 국정이 혼란하였기에 국가가 멸망할 징조가 많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나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벌한다는 이유를 만들어냈습니다. 진 후주가 예쁜 비빈들과 놀면서 지은 악부(樂府) 1수가 전해오기에 번역하였습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이 서해를 사이에 두고 가깝게 있습니다. 따라서 양국이 평화롭게 지내더라도 만에 하나 전쟁도 방비하기 위하여 평소에 서해에 전략적 시설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서해가 아주 좋은 전략적 장애물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서해가 반드시 하늘이 내려주신 전략적 종심(Deep Battle Theory, Strategic Endurance)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대만과 중국대륙 사이에 있는 대만해협보다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만해협에는 해류 속도가 빠르기에 옛날에는 목선을 타고 건너는 것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서해는 대만해협보다 해류 속도가 느리고 파도도 잔잔하기 때문입니다.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말이 나오는 역사서는 2종이 있는데 唐、李延壽,『南史』,卷十,「陳本紀」(下)와 사마광,『자치통감』,권176,『진기(陳紀)』(10),「장성공 하(長城公下)」입니다. 아래 번역문은 『자치통감』 「장성공 하(長城公下)」의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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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진(陳) 왕조(557-589) :
진(陳) 왕조(557-589)는 남진(南陳) 또는 남조 진(南朝 陳)이라고 부르며 남북조 시기에 남조 최후의 왕조이다. 진(陳)나라 무제(武帝) 진패선(陳霸先, 503-559)이 건국하고 건강(建康, 현재 남경시)에 수도를 정하였으며 5명 황제가 32년간 유지하였다.
무제(武帝) 진패선(陳霸先, 503-559, 재위 557-559) : 557년 양(梁) 왕조의 선양을 받아 건국.
문제(文帝) 진천(陳蒨, 520/522-566, 재위 560-566) : 반란 진압과 인재 등용으로 정치 안정.
폐제(廢帝) 진백종(陳伯宗, 552-570, 재위 567-568) : 황태후 명령으로 폐위됨.
선제(宣帝) 진욱(陳頊, 530-582, 재위 569-582) : 문제의 정책을 계승하고 북벌을 시도함.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553-604, 재위 583-589) : 정치보다 주색과 문장 짓기에 빠지고 589년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의 아들 양광(楊廣)에게 멸망 당하여 낙양으로 끌려가서 살다가 죽음. 죽은 뒤에 장성현공(長城縣公)으로 추증됨.
陳나라 後主 진숙보(陳叔寶),「예쁜 비빈(三妃, 龔氏 孔氏 張氏)들은 뒤뜰 정원의 꽃처럼 아름답네(玉樹後庭花)」︰
화려한 광조전(光照殿)과 정원의 온갖 꽃나무들이 광조전 앞에 있는 높은 누각 셋(臨春閣、結綺閣、望仙閣)을 마주 바라보는데,
비빈들이 예쁜 자태에 아름답게 치장하였는데 본래부터 나라에서 가장 뛰어났더라.
비빈들의 모습이 문 앞에 비치면서 애굣덩어리가 처음에는 문 안으로 들어설까 망설이더니,
아름다운 미인 3명을 황비(皇妃)에 임명하는데 궁궐 대기실에서 나와 웃으면서 나 황제를 맞이하네.
황비 셋의 요염한 얼굴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자태에서 나오는 빛이 뒤뜰 정원을 비추고 있네.
陳後主陳叔寶,「玉樹後庭花」︰
麗宇芳林對高閣,新妝豔質本傾城。
映戶凝嬌乍不進,出帷含態笑相迎。
妖姬臉似花含露,玉樹流光照後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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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마광,『자치통감』,권176,『진기(陳紀)』(10),「장성공 하(長城公下)」︰
진(陳) 후주(後主) 정명(禎明) 원년(587) 11월 갑오일(23일)에 수(隋)나라 임금(隋文帝 楊堅, 541-604)은 자신이 태어난 풍익군(馮翊郡)에 가서 마을 사당에 직접 제사를 올렸다. 무술일(27일)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수문제가 풍익군에 행차하는데 진(陳)나라 정벌 계획을 자주 올렸던 내사령(內史令) 이덕림(李德林, 532-592)이 병을 핑계로 수행하지 않았다. 앞서 수문제가 587년 10월에 동주(同州)에 갔을 때 칙서를 내려 이덕림을 장안으로 불러들여 양자강 남쪽 진(陳)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 좋은 계획을 상의하려고 하였다. 고조(高祖, 楊堅)가 장안에 돌아온 11월 27일 말 안장 위에서 채찍으로 남쪽을 가리키며 “진(陳)나라를 평정하는 날에는 온갖 보물(七寶)로 당신을 장엄하게 만들고 효산(崤山) 동쪽 지역에서는 당신을 가장 높게 만들겠다.”고 말하였다.
처음에는, 수문제 양견(楊堅)이 581년 2월에 북주(北周) 정제(靜帝)의 선양을 받은 뒤 남쪽 진(陳)나라와는 이웃 국가로서 잘 돈독하게 잘 지냈다.(鄰好는 가까운 이웃으로 잘 지내다.) 진나라 간첩을 붙잡을 때마다 옷과 말을 주고 예의껏 대우하여 풀어주었으나 진(陳)나라 고종(高宗, 陳頊)은 수나라를 자주 침략하였다. 진나라 고종 태건(太建) 말년에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를 침략하였는데 마침 고종이 죽었기에 수문제 양견은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며 조문하는 글에는 “양견이 머리를 조아립니다.”고 썼다. 진나라에서 수문제 양견에게 보낸 답신에서는 더욱 교만하였는데 “양견 당신(彼)의 북쪽 지역이 바르게 통치된다면 여기(此) 남쪽 진나라 세상은 평화롭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수문제는 기쁘지 않아 조정 고위 신하들에게 보였다. 상주국(上柱國) 양소(楊素, ?-606)는 임금이 굴욕을 당하였으니까 신하가 죽을죄를 지었으니 절하며 처벌을 청구하였다.
수문제가 587년 11월에 남쪽 진나라를 빼앗는 방법을 고영(高熲, 541-607)에게 물었고 고영은 “양자강 북쪽 지역은 날씨가 추워 가을 밭작물 추수가 조금 늦출 수 있으나 남쪽 지역 논농사는 일찍 벼가 익습니다. 저들이 추수하는 시기를 계산하여 우리가 군사와 병마를 조금만 징발하고 몰래 침투하겠다고 소문을 내면 저들은 반드시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할 것이기에 추수 시기를 놓칠 것입니다. 저들이 군대를 징집할 즈음에 우리는 징집한 군대를 해산합니다. 이렇게 몇 번 하면 저들이 습관화된 뒤에 우리가 다시 병력을 징집하더라도 저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방어를 머뭇거릴 때 우리 병력이 양자강을 건너 상륙하여 양자강을 등지고(背水) 싸운다면 우리 병력의 사기는 몇 배 커질 것입니다. 또 양자강 남쪽 지역은 토질이 나빠 목재가 없어 풀과 대나무로 집을 짓고 곡식 저장도 땅을 파서 커다란 구덩이(地窖)에 보관하지 않습니다. 몰래 사람들을 파견하여 바람 불 때 불을 놓고 저들이 집과 창고를 재건할 때마다 불태웁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저절로 재물과 노동력이 고갈될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수문제가 이 방법을 채택하여 실행하자 진나라가 곤궁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상주국 양소(楊素), 오주총관(吳州總管) 하약필(賀若弼, 544-607), 광주자사(光州刺史) 고매(高勱), 괵주자사(虢州刺史) 최중방(崔仲方, 539-614) 등이 양자강 남쪽 진나라를 평정할 방법을 올렸다. 최중방이 올린 글에는 “〔양자강 중류와 한수(漢水) 둘이 만나는 무창(武昌)을 경계로 양자강 중류, 한수, 양자강 하류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전략을 세웠는데〕 무창(武昌) 아래부터 바다까지 하류 지역에서는 중요한 거점 기(蘄)、화(和)、저(滁)、방(方)、오(吳)、해(海) 6개 주(州)에 정예병력을 증강하고 도강 계획을 세웁니다. 무창부터 위쪽 양자강 중류 지역에서는 익(益)、신(信)、양(襄)、형(荊)、기(基)、영(郢) 6개 주(州)에서 군함을 신속하게 건조하여 수군 군사력을 강화하여 수전(水戰)에 대비합니다. 양자강 상류에 해당하는 촉강(蜀江)과 한수(漢水, 漢江) 2개 강은 무창 중류에 있는 요충지이기에 반드시 빼앗아야 할 곳입니다. 적국 진나라가 양자강의 유두(流頭)、형문(荊門)、연주(延州)、공안(公安)、파릉(巴陵)、은기(隱磯)、하수(夏首)、기구(蘄口)、분성(湓城) 9곳에 수군을 배치하였으나 결국에는 한수(漢水) 유역에서 양자강으로 나오는 무창(武昌)의 한구(漢口)와 촉(蜀) 지역에서 양자강 중류로 나오는 의창(宜昌)의 서릉협구(西陵峽口) 2곳에 집결하여 결전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국 진나라가 양자강 중류의 수군 가운데 정예병력을 빼서 하류 지역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우리는 즉각 양자강 하류에 있는 정벌군의 장군들이 도강하기 좋은 곳을 골라 도강하고, 또 저들 수군이 2개 강(蜀江과 漢江)에서 기지를 방어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중류에 있는 우리 수군이 먼저 저들의 2개 강의 수군을 공격하여야 합니다. 저들이 양자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구강(九江, 현재 九江市)과 넓은 오호(五湖 : 洞庭湖、鄱陽湖、太湖、洪澤湖、巢湖)라는 군사적 요지를 장악하여 방어가 쉽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국운(최중방이 말한 五德說에서 보면 隋나라는 火德이고 陳나라는 顓頊을 계승한 水德인데 歲星이 鶉火位에 있으면 진나라가 멸망한다고 믿음)이 맞지 않아 지킬 수 없고, 양자강 하류 지역의 삼오(三吳 : 吳郡,吳興,會稽) 지역과 백월(百越) 지역에서 많은 병력을 가졌더라도 백성들의 인심(국가가 백성들에게 준 은혜)을 얻지 못하였기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수문제는 최중방을 기주자사(基州刺史)에 임명하였다.
〔남양(南梁) 황제 소종(蕭琮)이 587년 8월 수나라 장안에 가서 수문제를 알현하자 소종의 숙부 소암(蕭岩)은 진(陳)나라 후주에게 귀순하였고 진 후주가 소암을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하였다. 곧이어 수문제가 남양(南梁)을 없애 멸망시키자 소암이 회계군(會稽郡) 지역을 갖고 수문제에게 투항하였으나 곧바로 모반죄에 걸려 참살되었다.〕
소암(蕭岩) 등이 투항하여 진나라 황실의 잘못과 멸망 징조를 아뢰자 수문제는 진나라 후주를 더욱 미워하고 화를 내며 고영(高熲)에게 “내가 황제로서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옷의 가죽 혁대처럼 좁은 양자강에 막혀서 남쪽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전투 선박의 대량 건조를 명령하였다. 어떤 신하가 수문제에게 선박 건조를 비밀스럽게 하자고 건의하자 수문제는 “내가 진나라 정벌을 드러내놓고 할 텐데 비밀스럽게 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건의문을 쓴 얇은 종이(柹, 얇은 대패 밥)를 강물에 던져버리게 하고 “만약에 저들이 두려워서 스스로 건너와 항복한다면 내가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상주국 양소(楊素)가 파동군(巴東郡)의 영안(永安)에서 가장 큰 함선을 건조하고 “오아(五牙)”라고 이름 지었다. 배 위에는 5층을 지었는데 높이가 백여 척이고 전후좌우에는 적선의 접근을 막으려고 6개씩 박간(拍竿)을 달았는데 길이가 오십 척이며 전사 오백 명을 실었다. 둘째로 큰 함선은 “황룡(黃龍)”이라고 불렀고 병력 백 명을 실었다. 이밖에도 여러 등급의 평승방(平乘舫)과 쾌속선 책맹(舴艋)을 지었다.
진주자사(晉州刺史) 황보속(皇甫續)이 임지로 떠나기 전에 수문제에게 인사하면서 남쪽 진나라를 멸망시켜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아뢰었다. 수문제가 내용을 물었더니 “첫째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병합하여야 하고, 둘째는 정치적 도의를 실행하는 나라가 도의를 실행하지 못하는 나라를 정벌하여야 하고, 셋째는 진나라가 양나라를 배반한 신하 소암(蕭岩)을 받아주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트집 잡아야 합니다. 수문제가 그를 칭찬하고 진주(晉州) 임지로 보냈다.
이때 양자강 남쪽 지역에서는 괴이한 재이(災異)가 아주 많이 일어났는데 임평호(臨平湖, 현재 항주 西湖 앞에 있음) 호수에 갈대 풀이 많아 입구가 오랫동안 막혔다가 갑자기 열렸다. 〔임평호 입구가 막히면 세상이 혼란하고 열리면 세상이 평화롭다는 소문이 있음〕 그래서 진나라 후주가 이런 소문을 싫어하여 불교 사원에 자신을 팔아 노복이 되어 액(厄)을 풀었다. 또 진나라 수도 건강(建康)에 있는 대황사(大皇寺) 안에 7층 부도탑을 세우는데 완공하기 전에 대황사에 불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진(陳)나라 오흥(吳興, 현재 절강성 湖州市) 출신 장화(章華, 『陳書』, 卷三十, 列傳第二十四)는 농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진나라 중앙정부의 신하들은 장화가 공적도 없고 경력도 없다고 서로 나서서 배척하고 욕하였기에 진나라 후주가 장화를 태시령(太市令, 『唐六典』, 권20, 太府寺 소속 4품관이며 市職 담당)으로 전임하였다. 장화는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였기에 글을 올려 강력하게 간언하길 “옛날 고조(高祖, 武皇帝 陳覇先)께서는 남쪽 백월(百越)을 평정하시고 북쪽의 역적 후경(侯景, 502-552, 551년 梁나라 장군 陳覇先과 王僧辯에게 패배하여 도망가다가 살해됨)을 토벌하셨습니다. 세조(世祖, 文皇帝 陳蒨)께서는 동쪽 오흥(吳興)과 회계(會稽) 지역을 평정하시고 서쪽으로는 왕림(王琳, 陳覇先이 선양 받아 陳나라 건국에 반대하고 대항함)을 격파하셨습니다. 고종(高宗, 陳頊)께서는 회남(淮南) 지역을 수복하셔서 국토 1천 리를 확장하셨습니다. 세 분의 공로는 정말로 큽니다. 그런데 폐하(後主)께서 즉위하신지 5년이 지난 현재 조상들의 어려운 건국과정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천명(天命)이 무섭다는 것도 모르시는지, 비빈(妃嬪)들에 빠지고, 주색에 놀아나며, 조상을 모시는 칠묘(七廟) 제사에도 참례하지 않으시고, 3명 비(三妃, 龔氏 孔氏 張氏)를 임명하시면서 직접 나타나시고, 오래 근무한 문신(文臣)들과 장군들을 쓰레기처럼 버리시고,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들을 조정에 들이셨습니다. 현재 국방 재정은 날로 모자라고 수나라 군대가 국경까지 쳐들어왔습니다. 폐하께서 당장 모든 것을 개혁하지 않으시면 제가 보기에 진나라는 멸망합니다.”고 말하였다. 진나라 후주는 크게 화를 내며 글을 올린 날 곧바로 참수하여 죽였다.
宋、司馬光,『資治通鑒』,卷一百七十六,『陳紀』(十),「長城公下」︰
(禎明元年,丁未,587年,十一月)甲午,隋主如馮翊,親祠故社(胡三省註︰隋主生於馮翊,猶漢祀豐枌榆社之意,然親祠,則禮重於漢矣。)。戊戌,還長安。是行也,內史令李德林以疾不從。隋主自同州敕書追之(追召也),與議伐陳之計。及還,帝馬上舉鞭南指曰︰“待平陳之日,以七寶裝嚴公,使自山以東無及公者!”(言又將顯貴之,使出於等夷,李德林山東人。)
初,隋主受禪以來,與陳鄰好甚篤,每獲陳諜,皆給衣馬禮遣之,而高宗(陳頊)猶不禁侵掠。故太建之末,隋師入寇;會高宗殂,隋主即命班師(事見上卷,太建十四年殂),遣使赴吊,書稱姓名頓首。帝答之益驕,書末云︰“想彼統內如宜,此宇宙淸泰。”隋主不悅,以示朝臣。上柱國楊素以爲主辱臣死,再拜請罪。
隋主問取陳之策於高熲,對曰︰“江北地寒,田收差晚;江南水田早熟,量彼收穫之際,微徵士馬,聲言掩襲,彼必屯兵守禦,足得廢其農時。彼既聚兵,我便解甲。再三若此,彼以爲常,後更集兵,彼必不信。猶豫之頃,我乃濟師(此濟師謂舉兵濟江),登陸而戰,兵氣益倍(謂兵既登岸後,限大江,士無反顧之心,有必死之志,其氣益倍。)。又,江南土薄,舍多茅竹,所有儲積皆非地窖。若密遣行人因風縱火,待彼修立,復更燒之。不出數年,自可財力俱盡。”隋主用其策,陳人始困。
於是楊素、賀若弼及光州刺史高勱、虢州刺史崔仲方等爭獻平江南之策。仲方上書曰︰“今唯須武昌以下,蘄、和、滁、方、吳、海等州,更帖精兵,密營度計;益、信、襄、荊、基、郢等州,速造舟楫,多張形勢,爲水戰之具。蜀、漢二江是其上流(蜀江,出三峽,過南郡;漢江,過襄陽、竟陵、沔陽,而二江合流,國於東南者,二江其上流也。),水路衝要,必爭之所。賊雖流頭、荊門、延州、公安、巴陵、隱磯、夏首、蘄口、湓城置船,然終聚漢口、峽口,以水戰大決。若賊必以上流有軍,令精兵赴援者,下流諸將即須擇便橫度;如擁眾自衛,上江諸軍鼓行以前。彼雖恃九江、五湖之險,非德無以爲固;徒有三吳、百越之兵,非恩不能自立矣。”隋主以仲方爲基州刺史。
及受蕭岩等降,隋主益忿,謂高熲曰︰“我爲民父母,豈可限一衣帶水,不拯之乎?”命大作戰船。人請密之,隋主曰︰“吾將顯行天誅,何密之有?”使投其柹於江(柹,斫木札也),曰︰“若彼懼而能改,吾復何求?”
楊素在永安(蜀先主敗於秭,歸退還白帝,起永安宮居之故,巴東有永安之名),造大艦,名曰“五牙”。上起樓五層,高百餘尺;左右前後,置六拍竿(拍竿發之以拍敵船),並高五十尺,容戰士八百人。次曰“黃龍”,置兵百人。自餘平乘、舴艋各有等差。
晉州刺史皇甫續將之官,稽首言陳有三可滅。帝問其狀,曰︰“大吞小一也,以有道伐無道二也,納叛臣蕭岩,於我有詞三也。陛下若命將出師,臣願展絲發之效!”隋主勞而遣之。
時,江南妖異特眾,臨平湖草久塞,忽然自開(臨平湖,在餘杭郡錢塘縣。『三國志、吳書、三嗣主傳』︰天璽元年(276),“吳郡言︰臨平湖,自漢末草穢雍塞,今更開通。長老相傳:︰此湖塞,天下亂;此湖開,天下平”。)。帝(陳、後主)惡之,乃自賣於佛寺爲奴以厭(禳)之。又於建康造大皇寺,起七級浮圖,未畢,火從中起而焚之。〔唐、『南史』,卷十,陳本紀下、第十︰後主愈驕,不虞外難,荒於酒色,不恤政事,……有狐入其床下,捕之不見。以爲祅,乃自賣於佛寺爲奴以禳之。於郭內大皇佛寺起七層塔,未畢,火從中起,飛至石頭,燒死者甚眾。〕
吳興章華,好學,善屬文。朝臣以華素無伐閱(顏師古曰︰伐積功也,閱經歷也)。競排詆之,除太市令。華鬱鬱不得志,上書極諌,略曰︰“昔高祖南平百越(謂平盧子略、李賁、元景仲、蘭裕、蕭勃之亂),北誅逆虜(謂平侯景),世祖東定吳會(謂破斬杜龕、張彪),西破王琳(見一百六十八卷,世祖天嘉元年),高宗克復淮南,闢地千里(見一百七十一卷,太建五年),三祖之功勤亦至矣。陛下即位,於今五年,不思先帝之艱難,不知天命之可畏;溺於嬖寵,惑於酒色;祠七廟而不出(『記』︰天子七廟,三昭三穆與太祖之廟而七),拜三妃而臨軒(三妃,龔孔張也);老臣、宿將棄之草莽,諂佞讒邪升之朝廷。今疆場日蹙,隋軍壓境,陛下如不改弦易張(董仲舒曰︰譬之琴瑟不調,必改而更張之,乃可鼓也),臣見麋鹿復遊於姑蘇矣!(伍子胥諫吳王而不聽,曰︰臣見麋鹿遊於姑蘇矣。吳卒以亡)”帝大怒,即日斬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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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李延壽,『南史』,卷十,「陳本紀」(下)︰
(陳後主,禎明二年十一月)初,隋文帝受周禪,甚敦鄰好,(陳)宣帝尙不禁侵掠。太建末,隋兵大舉,聞宣帝崩,乃命班師,遣使赴吊,修敵國之禮,書稱姓名頓首。而後主益驕,書末云︰“想彼統內如宜,此宇宙淸泰。”隋文帝不悅,以示朝臣。淸河公楊素以爲主辱,再拜請罪,及襄邑公賀若弼,並奮求致討。後副使袁彥聘隋,竊圖隋文帝狀以歸,後主見之,大駭曰︰“吾不欲見此人。”每遣間諜,隋文帝皆給衣馬,禮遣以歸。
後主愈驕,不虞外難,荒於酒色,不恤政事。左右嬖佞珥貂者五十人,婦人美猊麗服巧態以從者千餘人。常使張貴妃、孔貴人等八人夾坐。江總、孔范等十人預宴,號曰︰“狎客”。先令八婦人襞采箋,制五言詩,十客一時繼和,遲則罰酒。君臣酣飲,從夕達旦,以此爲常。而盛修宮室,無時休止。稅江稅市,徵取百端。刑罰酷濫,牢獄常滿。
覆舟山及蔣山柏林,冬月常多采醴,後主以爲甘露之瑞。前後災異甚多︰有神自稱老子,遊於都下,與人對語而不見形,言吉凶多驗,得酒輒釂之,經三四年乃去。船下有聲,云︰“明年亂!”視之,得嬰兒,長三尺而無頭。蔣山眾鳥鼓兩翼以拊膺,曰︰“奈何帝?奈何帝?”又建鄴城,無故自壞。青龍出建陽門,井湧霧,赤地生黑白毛,大風拔朱雀門。臨平湖,草舊塞,忽然自通。後主又夢黃衣圍城,乃盡去繞城橘樹;又見大蛇中分,首尾各走。夜中索飲,忽變爲血,有血沾階,至於坐床頭而火起。有狐入其床下,捕之不見,以爲祅,乃自賣於佛寺爲奴以禳之。於郭內大皇佛寺,起七層塔,未畢,火從中起,飛至石頭,燒死者甚眾。又採木湘州,擬造正寢,筏至牛渚磯,盡沒水中,既而漁人見筏浮於海上。起齊雲觀,國人歌曰︰“齊雲觀,寇來無際畔。”始北齊末,諸省官人多稱省主,未幾而滅。至是,舉朝亦有此稱,識者以爲省主,主將見省之兆。
隋文帝謂僕射高熲曰︰“我爲百姓父母,豈可限一衣帶水,不拯之乎?”命大作戰船。人請密之,隋文帝曰︰“吾將顯行天誅,何密之有?”使投柹於江,“若彼能改,吾又何求?”及納梁蕭瓛、蕭岩,隋文愈忿,以晉王廣爲元帥,督八十總管致討。乃送璽書,暴後主二十惡,又散寫詔書,書三十萬紙,遍喻江外。
諸軍既下,江濱鎮戌,相繼奏聞,新除湘州刺史施文慶、中書舍人沈客卿,掌機密,並抑而不言。
初,蕭岩、蕭瓛之至也,德教學士沈君道,夢殿前長人,朱衣武冠,頭出欄上,攘臂怒曰︰“那忽受叛蕭誤人事?”後主聞之,忌二蕭,故遠散其眾,以岩爲東揚州刺史,瓛爲吳州刺史。使領軍任忠出守吳興郡,以襟帶二州。使南平王嶷鎮江州,永嘉王彥鎮南徐州。尋詔二王赴期明年元會,命緣江諸防船艦,悉從二王還都爲威勢,以示梁人之來者,由是江中無一斗船。上流諸州兵,皆阻楊素軍不得至。都下甲士尙十餘萬人,及聞隋軍臨江,後主曰︰“王氣在此,齊兵三度來,周兵再度至,無不摧沒。虜今來者必自敗。”孔范亦言無渡江理,但奏伎縱酒,作詩不輟。
(太建)三年春正月乙丑朔,朝會,大霧四塞,入人鼻皆辛酸。后主昏睡,至晡時乃罷。是日,隋將賀若弼,自北道廣陵濟,韓擒趨橫江濟,分兵晨襲採石,取之。進拔姑孰,次於新林。時弼攻下京口,緣江諸戍望風盡走,弼分兵斷曲阿之沖而入。丙寅,採石戍主徐子建至告變。戊辰,乃下詔曰:“犬羊陵縱,侵竊郊畿,蜂蠆有毒,宜時掃定,朕當親御六師,廓清八表,內外並可戒嚴。”於是,以蕭摩訶爲皇畿大都督,樊猛爲上流大都督,樊毅爲下流大都督,司馬消難、施文慶並爲大監軍,重立賞格,分兵鎮守要害,僧尼道士盡皆執役。
庚午,賀若弼攻陷南徐州。辛未,韓擒又陷南豫州。隋軍南北道並進。辛巳,賀若弼進軍鍾山,頓白土岡之東南,眾軍敗績。弼乘勝進軍宮城,燒北掖門。是時,韓擒率眾自新林至石子岡,鎮東大將軍任忠出降擒,仍引擒經朱雀航趣宮城,自南掖門入。城內文武百司皆遁出,唯尙書僕射袁憲、後合舍人夏侯公韻侍側。憲勸端坐殿上,正色以待之。後主曰:“鋒刃之下,未可及當,吾自有計。”乃逃於井。二人苦諫不從,以身蔽井,後主與爭久之,方得入。沈後,居處如常。太子深年十五,閉合而坐,舍人孔伯魚侍焉。戍士叩合而入,深安坐勞之曰:“戎旅在涂,不至勞也。”既而軍人窺井而呼之,後主不應。欲下石,乃聞叫聲。以繩引之,驚其太重,及出,乃與張貴妃、孔貴人三人同乘而上。隋文帝聞之大驚。開府鮑宏曰:“東井上於天文爲秦,今王都所在,投井其天意邪。”先是,江東謠多唱王獻之桃葉辭,云:“桃葉復桃葉,度江不用烜,但度無所苦,我自接迎汝。”及晉王廣軍於六合鎮,其山名桃葉,果乘陳船而度。丙戌,晉王廣入據台城,送後主於東宮。
三月己巳,後主與王公百司,同發自建鄴,之長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