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 성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시작되어 충청도 전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째 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 아들 태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문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솔뫼는 김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대건이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 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 24일 가경자,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 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 나라 최초로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김 신부 생가 복원과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 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솔뫼 피정이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 단체 피정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짜여져 있어 전국의 신자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베틀레헴이 그리스도의 이 세상 삶의 첫 출발지였다는 점에서
모든 순례자들의 가슴에 깊은 신심과 감명을 심고 있다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내포신앙의 중심지인 솔뫼 성지는
"신앙의 못자리"로써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박해시대 신앙공동체의 숨결과
이 시대의 순교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댓글 솔뫼성지를 다녀온지도 꽤 오래되었다 싶네요.
좋은 날 자유로운 날이 오면 다시 또 다녀오고픈 곳입니다.
기억도 가물가물 많이 달라졌다라는 느낌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성지마다 새 단장을 해서 오래 전 다녀온 곳이 많이 변했지요.
편의성은 좋아졌지만 박해 당시 모습이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