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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고 진실한 예배(롬 12:1-2)
제가 한 주일 동안 공식적으로
집례하는 예배숫자를 세워봤더니 10-11번이 됩니다.
그 외에 가정과 사업장 심방으로 드리는 예배를 합치면
일주일에 15번 정도 예배를 드립니다.
모태신앙으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신 성도분들도
수 천번의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배 가운데 성령충만하고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렸다고 고백할 수 있는
예배의 기억은 얼만큼 됩니까?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에도 실패하고
모든 신앙생활에도 실패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얘기해서
‘예배에 승리하는 자가 인생에도 성공하고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하나만 잘 드려도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자가 됩니다.
창세기 4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열납하지 않았고,
아벨의 예배는 열납했습니다.
즉, 가인의 제단은 기뻐하지 않고
아벨의 제단은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라고
나올 정도로 가인은 그 사실에 화가 많이 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의 예배는 받으시고,
또 어떤 예배는 받지 않는 이유는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과 태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그 중심을 보십니다.
결국 가인은 예배에 실패한 그 분노로 인하여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번 죽은 예배를 드리지 말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살아있는 예배에 대해서 세 가지로 알아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떨 때 생명이 있는 것입니까?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나오는 아들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
그 안에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신 예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면
생명이 있는 예배가 될 것이고,
만약에 예수님이 예배가운데 임재하지 않는다면
이 예배는 죽은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생명이 있는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매월 발행되는 ‘목회와 신학’ 1월호에
‘천국의 계단’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제작자인
이장수 감독의 인터뷰가 나옵니다.
현재, 이 분은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
뒤늦게 회심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에게 기자는 드라마와 예배를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 감독 출신의 목사님이 말하길,
‘자신은 드라마를 하도 많이 만들어서
이제는 대본을 보면 그 드라마의 성공여부를 알 수 있고,
성공하는 드라마의 특징은
바로 주인공이 뚜렷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주인공이 70%이상 비중을 차지하고, 나머지 20~30%는 조연으로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뚜렷하지 않고 여럿이 나오면
그 드라마는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는 말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주인공이 없는 예배와 똑같다’ 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없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예배에 예수님이 없으면 죽은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2장 2절에 보면, 혼인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나옵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청되어 함께 기쁨을 나누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초대하여서 함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성령이 충만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고 충만하지 못하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올 당시의 배경을 보면 구약성경에 있어서
사람들이 예배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장소로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위 두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예수님께 ‘과연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그것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서는 어디든 예배드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예배는 가정이나 교회 또한 어디에서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곳이 바로 예배당이 되는 것입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과연 영과 진리로
진실되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시간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교학에 보면, 무당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 무당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눕니다.
무당 중에 제일 많은 첫 번째는 돌팔이 무당입니다.
돌팔이 무당은 무당 짓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무당 노릇 하는 이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학습 무당이 있는데 이것은 무당 짓을 어떻게 하는지 배워서 하는 무당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신 무당이 있는데 이것이 진짜 무당입니다.
진짜 무당은 작은 신이 그 무당에게 강림한 것입니다.
옛날에 제 머리를 깎던 이발사가
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습니다.
하도 오라고 해서 굿 하는 것을 구경하러 간적이 있는데,
그에게 정말 귀신이 강림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무당의 이런 모습은 교회의 신자들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돌팔이 신자가 있는데,
이런 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에 왔다갔다 합니다.
신앙 없이 교회 출석하는 신자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 학습 신자는 말 그대로 배워서 아는 신자입니다.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양육받고 가르침을 배워서 아는 신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짜 신자는 성령이 그 사람 삶속에 강림한 신자입니다.
즉,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류를 나누는 신자가 진짜 신자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예배드릴 때 은혜받는 신자가 진짜 신자인 것입니다.
또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라고 했는데
예배에는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가식이 없고 진실성만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 가운데 나오는
‘진리’는 곧 ‘진실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진실성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숨기려고 해도
하나님은 이미 예배드리러 오신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진실하게 보여드리고
고백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잠언서 15장 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는도다’ 라고 나옵니다.
악인은 많이 포장한 자들이고 진실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지만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받으십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끊임없이 해야할 일은
우리의 상황을 진실되게 아뢰고
한 주간의 일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20-21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처음 드린 일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예배를 드릴 때 모든 정결한 짐승을 잡아다 번제로 단에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나옵니다.
그 번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다시는 사람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번제를 태우는 것처럼
우리도 예배시간에 진실하게 우리들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배에 향기가 진동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예배를 드리러 와서 구경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예배는 객관적으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참여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예배를 연극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배우’는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들이고
관객은 예배보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여러 가지 비유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축구경기에 비유하면 심판은 하나님이시고,
예배드리는 우리들은 선수인 것입니다.
선수가 열심히 하는 것에 따라
경기승패가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가 선수처럼 얼마나 열심히
예배를 드리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무당이 굿하는 것에다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 문제가 있어서 살풀이 하려고
집주인이 무당을 불렀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는데, 많은 구경꾼들이 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고통스럽게
무당이 시키는데로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굿을 하는 모습 가운데 예배보는 사람은 바로
무당을 부른 주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무릎 꿇으라면 꿇어야 하고,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해야하고
그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 예배를 교회와 극장의 차이를 통해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극장이 차이는 집단자체가 틀리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집단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극장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서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아는체 안하고 가면 끝입니다.
교회는 극장처럼 와서 영화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 헌금, 회개, 봉사도 해야하고
여러 참여를 하며, 예배끝날 때 서로 교제도 하는
희생과 마음의 정성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어떤 심리학적인 만족이나
스트레스 해소만 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고등학교 학창시절 때 제가 잘 아는 어떤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집사님은 교회에 헌금을 드릴 때
돈을 다리미로 다려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항상 첫 번째 나오는
새로운 돈을 찾아서 드렸습니다.
마치, 마가복음 12장 42절에서
예수님이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한 것은 양을 본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그 과부의 마음을 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으로 진정한 정성이 있어야
하나님께서는 받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예배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반드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나옵니다.
여기서 분별하라는 뜻은 우리에게 있어서 변해야 될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잘 구별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변해야 될 것이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자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내용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규칙적으로 예배드리는 태도도 변하면 안되고
일관성 있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스승 중에는
20살이상 차이가 나는 조만식 장로님이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커서 스승이 계신 평양의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시무를 할 때, 조만식 장로님은 항상
예배시간 10분전에 나올만큼 예배시간을 엄수하였습니다.
어느 주일 날, 장로님 댁에 손님이 와서 얘기가 길어져서 그만 예배시간에 10분 늦었습니다.
10분 늦게 들어온 장로님을 보며 주기철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장로님, 거기 그냥 서십시오. 장로님은 오늘 예배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장로님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일관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이 많은 장로님이 예배에 늦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나아갈 줄 아는 진실함과
일관성 있는 예배에 대한 사모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일관성 있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관성의 반대는 ‘혼돈하다, 방황하다, 변덕스럽다, 무질서하다’입니다.
예배를 드리다보면 혼돈가운데 드리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예배드리는 태도가 이와 같으면 정성이 없는 예배가 됩니다.
가끔 중고청 수련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보면 학생들이
예배 중간에 왔다갔다하며 일관성 없이 예배를 드리곤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일관성이 없는 예배를 드려서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예배에 대해 두 가지를 하나님한테 잘못 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사무엘상 13장 8-14절에 보면,
사울은 제사를 드리려고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마음이 급하여서
사무엘이 오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화목제물을 가져와서 번제를 드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제사장이 할 역할을 자기가 함부로 대신 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무엘상 15장 10-31절에 보면,
아말렉과의 전쟁 가운데 하나님께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쟁에 이긴 전리품을 다 죽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전리품은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전리품은 내 것이기에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표현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안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것인 전리품을 안 죽이고 오히려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이런 두 가지의 잘못된 예배의 모습 때문에
사울은 결국 나중에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의 예배 태도는 이와 같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약속한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과거에 목회 할 때,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 중에 어느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님께서 새벽 기도에 한 번도 결석한 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나오는 시간이 똑같고,
심지어 새벽시간이 끝나고 가는 시간도 똑같았습니다.
다른 교회 출석하는 분인데도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는
그 할머니의 변함없는 태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축복을 해주실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문을 나설 때부터 일관성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진짜 예배는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설 때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배보는 우리의 모습과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의
내 모습이 똑같아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별하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된 예배의 향기가
교회에 진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
하나님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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