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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5편 17절-18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다윗이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는 구원의 기도인데, 아침 저녁 점심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듯이 잊지 않고 성도의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하겠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성도다윗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에 관한 소원성이 하루 세 끼 밥을 찾아먹는 것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 근심과 탄식으로 기도를 한다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룰구원이 이처럼 중요한 거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보니 인간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든 거다. 이 땅에 사건과 환경과 전쟁과 지진과 흉년과 풍년 등을 왜 만들어 놨느냐?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이뤄가는 것. 사람 중에 참 사람이 되는 것. 예수님처럼 되는 게 구원이다.
인간이 예수님처럼 참 사람이 되면 온 만물이 이 사람을 위해 움직인다. 반대로 인간이 구원을 떠나면, 하나님의 온전의 참 사람이 되는 것에서 떠나면 모든 존재, 모든 사건, 모든 만물이 자기를 대적한다. 이것만은 알아둬라. ‘돈이 많이 있다, 없다. 많이 배웠다, 못 배웠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됨됨이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만물이 다 자기를 대적하게 된다.
세상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사람이 좋더냐?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사람이 나쁘더냐? 그건 아니다. 자기를 인격 면에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성경밖에 없다. 자기가 참 사람을 깨달아 알고 자기가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면 모든 만물이 다 자기를 좋아한다. 원리가 그렇다. 그런데 현재의 자기를 쳐다보면 성격이 좋으냐? 성질이 좋으냐? 마음이 넓으냐? 돈이 있느냐? 학식이 박식이냐? 제대로 바로 된 게 뭐가 있느냐? 그럼에도 세상은 다 자기 잘난 맛으로 ‘나 잘났소’ 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게 바로 자기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자기의 성질이 못 됐고, 자기의 속이 좁아터지고 한 것을 깨닫고 자기의 구원에 때문에, 참 사람이 되는 면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탄식을 해 봤느냐? 이 면에 대해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신경을 쓰고 마음을 기울여 봤느냐?
18절: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다윗을 대적하고 치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본문을 볼 때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동료들이고, 식구들이고, 아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기를, 참 바로 살려고 하는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이 누구냐?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집 식구일 수 있다. 자기 집 식구 중에 한 사람은 예수 믿고, 한 사람은 절에 다닌다면 한 집안 식구인데도 철천지원수가 돼버린다. 왜 그럴까? 행동을 잘못하는 것은 아닌데 한 사람은 교회에 가고, 한 사람은 절간에 가면 왜 원수처럼 될까?
부처 앞에 가서 돌을 향해 절을 하는 게 좋겠느냐, 인간과 세상을 만드신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에게 가서 왜 인간을 만들었으며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건지를 배우는 게 좋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성경을 들고 하나님을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하겠지만, 일단 자기가 예수를 안 믿는 것으로 하고 생각을 해 볼 때 어느 것이 좋겠는지 판단을 해 봐라. 돌부처 앞에 가서 100일 동안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비비면서 ‘나에게 사람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돌부처가 입을 벙긋 열어서 알려주겠느냐, 아니면 성경이 세상만사의 이치를 가르쳐 주고, 사람 대 사람, 사건 대 사람, 물질 대 사람과의 이치를 가르쳐 주겠느냐? 어느 앞에 가서 배우는 사람이 영특자가 되고 지혜자가 되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맨날 눈을 감고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면 사람이 어찌 되겠느냐? 부모가 돈을 주면 오락실에 가서 다 써버리고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자식이 부모님에게 자꾸 돈을 달라고 한다면 이 아이의 장래가 어찌 되겠느냐? 예수를 믿는 것도, 교회를 다니는 것도 맨날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달라고만 하면 이 사람의 장래가 어찌 되겠느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속이 좁아터지고, 안 고쳐졌고, 욕심은 되게 많고, 입만 열면 맨 먹는 것만 찾는다면 이게 사람이겠느냐?
성경은 우리의 온전을 위해 주셨다. 하나님처럼 닮아지게 하려고 주셨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드는 말씀이고, 뿐만 아니라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이런 저런 사건,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도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도록 깨달아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채워 넣으라는 거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말씀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건 환경을 만나면 자꾸 물러가라고 하고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그러니 언제 깨달아지고, 언제 믿음이 들어가겠느냐? 이렇게 가르치는 신학교, 이렇게 가르치는 목사는 돼지라고 한다. 돼지는 잔칫날에 죽는다.
자기의 대적이 누구냐?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자기의 가족이냐, 자기의 동족이냐? 자기에게 왜 대적이 있는 거냐? 자기의 성격 성질이 더러워서 나를 싫어하는 건지? 욕심을 많이 부려서 나를 싫어하는 건지? 말만 했다면 남의 말만 해서인지? 아니면 세상이 하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서 내가 입을 꾹 닫고 아예 말을 안 해서인지?
자기에게 대적이 있을 때 그 대적을 원수로 삼지 말고 ‘내가 하나님에게 맞느냐, 안 맞느냐?’ 하면서 자기를 살펴라.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상대가 자꾸 나를 치고 들어오면 ‘그래, 쳐라. 나는 더 올라가련다. 나는 더 단단해지련다’ 하면 되는 거고, 내가 잘못해서 침을 받는다면 ‘그래, 내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두 번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며 자꾸 옳은 것으로 올라가라. 이게 대적을 이기는 방법이다.
자기에게 대적이 있는 것은 나를 옳은 사람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자기 주위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혜가 없어서 얻어맞는 건지, 아니면 지혜가 없어서 왕따를 당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헛똑똑이라서 왕따를 당하는 건지를 알아야 한다.
다윗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윗의 원수들이 이것 때문에 다윗을 치고 있다. 원수가 다윗을 치는 것을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다윗 너는 어리석다. 진리를 놔라. 왜 붙들고 있느냐?’ 라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의 대적자들은 비진리를 가진 자다. 진리와 비진리는 대적이 된다. 정신적 사상적 소원 목적적으로 대적이 돼 있다.
비진리는 하늘나라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거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하늘의 것은 위로부터 온 것이고, 땅의 것은 아래로부터 온 거다. 질적으로 다른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으냐, 금은보석이 좋으냐? 어느 게 좋으냐? 질적으로 볼 때 어느 게 좋으냐? 금은보석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물질이라서 못 들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간다. 그러니까 질적으로 다른 거다. 그리고 자기가 성경처럼 만들어졌으면 만들어진 그것은 신령천국에 들어가는 거고, 신령천국은 모든 문짝이 신령한 금은보석으로 되어있다. 이것에 비하면 땅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윗은 진리를 자기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기고 있다. 그런데 악인들이 이 진리를 공격을 하니 진리를 사수하려고 하는 다윗이 고난을 받는 거다. 그러니까 다윗의 고난과 진리의 고난이 같이 들어가는 거다. 진리가 고난을 받고 환난을 받는 속에는 다윗도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다윗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서 움직인다. 따라서 다윗을 치는 자는 진리를 치는 겪이 된다. 진리와 다윗을 함께 치는 전쟁이 돼버린다.
진리는 목숨보다 더 귀한 건데 성도가 이 진리를 버리고 자기 목숨을 사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목숨을 쳐버린다. 반대로 진리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알고 성도가 진리를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보호하려다 보니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도 보호가 된다. 그런데도 성도가 진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느냐?
우리가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냐, 비진리냐? 옳은 정신이냐, 나쁜 정신이냐? 임시성적인 것이냐, 영원히 가는 것이냐?’ 하는 면을 두고 칠지언정 그 사람 자체를 치면 안 된다. 다르게 말을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지라도 이 사람이 옳은 말을 할 때는, 진리일진대 그걸 공격하면 안 된다. 진리 때문에 같이 걸어가고, 동참하고, 협조해야지 사람이 보기 싫어서 진리를 무시하는 겪이 되면 본인이 큰 손해다.
매사를 이런 면으로 보면 인간들의 모든 잘잘못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넘겨버리게 된다. 그런 것을 붙잡고 씨름할 새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붙잡고 씨름을 하게 되면 속 좁은 사람이 되고, 이런 사람은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놓고 염려 걱정을 하느라고 병이 든 사람을 봤느냐, 아니면 먹고 마시는 의식주에 대해 염려 걱정을 하다가 병이 든 사람을 봤느냐? 하나님의 일을 놓고 걱정을 하는 것은 생명이고 영생이다. 그러나 세상 의식주에 대해 염려 근심 걱정을 하면 사망이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이 진리를 쳐서 없애고자 눈에 보이지 않는 운동들을 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어느 누가 이것을 영적 전쟁으로 알고 이 싸움에 자기의 생명을 걸겠느냐? 어느 누가 ‘진리가 고난을 받는 것은 내 고난이다’ 라고 하면서 이 일에 동참하고 협조를 해서 이 길을 같이 가겠느냐?
떴다방 복덩방이 어디가 개발이 된다고 하면 이걸 누구의 일로 알고 달려가느냐? 자기의 일로 알고 달려간다. 우리 궁극교회 성도들은 신앙에 있어서 어떤 면에 ‘이건 내가 가는 길이다. 이건 나의 일이다’ 하면서 뛰어가겠느냐? 예수 믿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온전을 입기 위해 믿는 사람이 있고, 자기의 생활을 위해 믿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주격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궁극교회는 하나님의 온전을 놓고 모든 생활은 이것을 위한 소유격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할 때도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주일날 일을 시키는지, 안 시키는지를 따지는 거다. 그런데 보통 보면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일단은 들어가 놓고서 주일을 걱정한다. 이건 주격이 바뀐 거다.
모든 면에서 주님의 일을 놓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일이 더 부흥 발전이 되고 내가 주님처럼 닮아질 수 있을까?’ 하는 면으로 계산을 하고, 직장도 구하고, 장사도 해야 하는데 생활위주로 예수를 믿는 거냐, 진리위주로 예수를 믿는 거냐? 이게 남 보기에는 똑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신앙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을 하신다.
주님이 고난을 받는다면 이게 누구의 고난이냐? 나와 관계가 없는 주님의 고난이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고서도 예수님이 잡히자 멀리서 따라가고 도망가고 한 거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거고, 그 앞에 서서 구경을 하며 조롱을 한 거다. 오늘날 교회 안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태, 이런 현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으며,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겠느냐? 어림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왜 이런 자들을 먹고 마시며 살게 하는 거냐? ‘행여나 참 사람이 될까?’ 해서 일반적인 은총을 주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행여나 믿을까?’ 해서 일반은총을 주는 거고 참고 기다리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자기가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 큰 오산이다.
자기의 신앙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면 생각을 바꿔라. 그런데 바꾸면 죽을 것 같고 동냥하며 살 것 같으냐?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을 바로 섬기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고 했다. 머리가 된다고 하는 말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자꾸 세상을 잡으러 가려고 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하느냐? 그렇게 해서 예수가 바로 믿어지겠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바다에 있는 고기가 낚시의 미끼를 물면서 ‘내가 먹을 밥을 넣어주니 이 낚시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참 좋구나’ 라고 하며 잡혀주느냐? 우리의 신앙이 이런 식이냐?
주님은 인간 자기의 구원을 위해 오셨고 고난을 당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흠과 티가 없이 율법을 다 지키는 중에 고난을 당했다. 내가 당할 것을 대신 당해주신 거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우리는 진리 때문에 고난이 오면 도망을 가버린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제자들이 도망간 것을 보면 이 제자들이 미우냐, 사랑스러우냐? 참 사랑스러우냐?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실 때 도망을 가지 않으면 자기도 그렇게 당할 것이니 도망을 가버리는 게 머리가 영리한 거냐?
가룟유다는 구원을 돈으로 바꿔먹고, 사람을 돈으로 바꿔먹고, 주님을 돈으로 바꿔먹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엽적 부분적인 면에서 주님을 얼마나 세상과 바꿔먹었느냐? 바꿔먹으면서 살아봐라. 결국은 네 꼴이 그 모양 그 꼴이 된다. 그 모양밖에 안 되는 거다.
진리의 고난은 자기의 고난이다. 자기가 진리를 붙잡고 있으면 그 정신은 밝은 거다. 진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 정신이 흐려서 자꾸 자기 육신위주로 나가게 된다. 이러면 살아갈수록 깨닫는 면에 하락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쳐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다윗은 진리생명과 자연생명 중에 어느 생명을 자기의 참 생명으로 여기고 있느냐? 진리생명이다.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는 것은 진리생명을 말하는 거다. 이 생명을 자연생명으로 말을 하게 되면 이룰구원 면에서 이치가 없어져 버린다. 육 위주가 되고, 육 목적이 되고, 육 목적의 기도를 하며 이뤄달라고 하게 된다.
성도가 영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영의 생명을 위해 살 때 이 진리생명을 연장시키고 진리생명의 운동을 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이 성도의 자연생명을 죽여야 하느냐, 살려야 하느냐? 살려야 한다. 그러니까 진리생명 위주로 나간다면 자연생명은 말하나 마나 덤으로 따라오는 거다. 덤으로 따라오는 것을 주격적으로 말을 하게 되면 성경의 정신에서 빗나가 버린다.
만일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영적 생명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어느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어느 기도가 가치가 있고 값진 거냐?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이 누구의 것이 되느냐? 다 자기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은 안 들으면서 사탕을 자꾸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주겠느냐? 이런 식이다.
오늘날 세상위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 때문에 누구에게까지 피해가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식이 밖에 나가서 못된 짓을 하면 누구까지 욕을 먹느냐? 부모님까지 욕을 먹는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이게 당연한 거다. 요즘 버릇없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면 나이 많은 사람이 ‘네 에미 에비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라고 한다. 그러면 젊음이가 ‘왜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욕합니까?’ 라고 하겠지만 자기가 부모를 욕 먹일 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 교인이 이런 식이라면 누구의 얼굴에 더러운 칠을 하는 거냐? 하나님이다. 자기의 언행심사로 하나님의 얼굴을 깎아놓으면 네 얼굴도 깎인다.
‘내 생명을 구속하사.’ ‘구속’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생명이 잡아먹히지 않게 해 주신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이 가진 진리생명이 잡아먹히지 않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정복당하지 않게 해 주셨다는 거다. ‘평안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는 것은 안심하게 해 주었다는 거다. 안심이 되면 평안한 거다.
다윗은 자연생명은 소유격이고 영의 생명 위주로 살았다.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자라는 것이 영 주격으로 사는 거다. 그러니까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죄에 정복되지 않고 죄에 잡아먹히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말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육신생명 위주로 사느냐, 이룰구원의 영적 생명 위주로 사느냐? 어느 면을 걱정을 하느냐? 여기에 따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하고, 안 들어주시기도 하는 거다. 성경에 말씀해 놓은 것은 틀림이 없는 거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믿어지느냐? 자기가 말씀대로 하면 약속된 것이 이뤄진다는 사실이 믿어지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