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6] 강정자 (姜禎資) - 말씀따라 모든 사연 뒤로하고
11. 김천 지역장으로 발령받아 - 2
11 이렇게 함께하는 식구들이 늘어나 전도활동은 활기를 띠었지만 교회의 살림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먹을 것이 없어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12 그러면 사람들이 곡식을 주기도 했지만 주로 고구마를 주었다. 몇 개월 동안 고구마만 먹다가 나중에는 알레르기가 생겨 오랫동안 고구마를 먹지 못하게 됐다. 3년 동안 자루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가 구걸하는 날이 많았던 초창기의 개척 시절이었다. 13 겨울에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다 불을 땠고, 차비가 없어 지역장 회의를 갈 때 김천에서 대구까지 걸어 다녔다. 가는 길에 신동재(新洞岾)라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그 고개는 6.25 때 사람들이 많이 죽은 곳이라 귀신이 나타나는 곳이었다.
14 그 주변에는 나병환자(癩病患者) 촌까지 있어서 사람들은 그 길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가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5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눈이 부실만큼 환한 불빛이 갈 길을 비춰주었고 딱딱한 길은 스펀지처럼 푹신거렸다.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으셨다. 이렇게 쉽지 않은 생활을 하며 개척 전도를 이어나갔다. 16 나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참아버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가난과 배고픔, 헐벗음을 통해서 민족의 탕감이 이루어지니 최고의 고생을 하라.”라는 말씀이었다.
17 그리고 “우리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통해 민족의 가난이 물러가게 기도하라” 라고 하셨다. 그 당시 개척 전도를 하던 모든 식구들은 나처럼 배고프고 헐벗은 자리에서 뜻길을 갔었다.
18 그런 식구들에게 참아버님께서는 “지치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라며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19 전도를 통해 청년 식구들이 많아지면서부터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산에서 칡을 캐다가 팔기도 하고, 수제 비누와 성냥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면서 궁핍하던 생활에 보탬이 됐다.
20 생활비를 하고 남은 돈은 한 푼 두 푼씩 모아 지역본부 강의실과 예배실을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성장한 김천교회는 얼마 후 지역본부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