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시가 대체 무엇이관대,
어린 소년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아 평생을 놓지 않는 것일까?
소년은 병약하지도 않았고, 꿈꾸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결핍 여건에 있지도 않았다.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에서 세칭 일류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뛰어난 두뇌와 수려한 외모를 타고난 소년은, 당시 유일한 매체라 할 수 있는
『학원』의 표지 모델과 사진 소설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귀공자 소년에게 뮤즈는 어떤 마술 피리를 불었던 것일까?
소년은 후일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상계 기자를 거쳐 편집부장,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실장 등 바쁘고 화려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두 번의 미국 유학생활 등 공부를 계속하여 언론학 박사가 되고,
퇴직 후에는 연세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해 오셨다.
신의 축복이 가득찬 일생이라고나 할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솔내 유경환(劉庚煥) 선생님께
평생 동안 그렇게도 꾸준히 문학의 길을 정진할 수 있도록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1955년의 삼인시집 『생명의 장』이 첫시집이라면,
2002년 『낙산사 가는 길』이 열 다섯 번째 시집이며,
1966년 첫 동시집 『꽃사슴』을 펴낸 이래,
2003년 펴낸 『농사리 사람들』은 25권째 동시집이고,
1971년 동화집 『오누이 가게』 이래
2003년 『닷새장 가는 길』로 30권의 동화집을 상재하고,
1974년 수필집 『길에서 주운 생각들』부터
2002년 『초록비』까지 19권의 수필집을 펴내셨다.
평론집을 제외하더라도 89권의 작품집을 발행한 셈이니.
아무리 50년 작업이라 하여도 기가 차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뵈오러 가기 전에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의문은 바로 그 문학의 마력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도서관에서 50여년 전 『학원』을 찾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동화 「오누이 가게」를 응모한 유경환 소년에게 5돈쭝의 금메달과 함께
제1회 <소년세계문학상>을 수여한 1953년도 『소년세계』나, 동시 「신기료 장수」를 뽑아 프란체스카 여사가 내린 자명종 시계와 함께 제1회 <새벗문학상>을 수여한 1954년도 『새벗』은 도서관에 없었으나, 전국의 문학소년이 열광하던 『학원』은 다행히 필름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월간지 『학원』이 창간된 것은 한창 전쟁중이던 1952년이다. TV는 물론 라디오도 없던 시기에 김말봉의 「파초의 꿈」, 정비석의 「홍길동전」, 최인욱의 「일곱별 소년」, 김내성의 「검은 별」, 조흔파의 「얄개전」, 박계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김용환의 「코주부삼국지」, 김성환의 「꺼꾸리군 장달이군」, 그리고 「보물섬」과 「쿼바디스」, 「엉클 톰스 캐빈」 등의 세계 명작들이 가득 담긴 학원은 학생들에게는 매우 환상적인 보물창고여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소년이 대구로 피난을 가서 천막교실의 연합중학교 학생일 때였다. 막다른 피난생활 중에서 소년은 학원을 밤새워 읽고 다음 호를 기다리며, 틈틈이 글을 써서 응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환도 후에도 계속되었다.
‘★ 내일 우리 문단의 꽃이며
별이 될 여러분이여!
평소에 간직해온 그대의 역작을 보여다오!’로 시작된
<학원문학상 작품 모집> 공고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뛴다. 1년에 한번 모집하는 학원문학상은 시와 산문으로 나누어 우수작 2명씩을 뽑고 입선작을 가렸는데, 시부분의 심사위원은 김광섭, 서정주, 장만영, 김용호, 조지훈, 박목월, 조병화 등이었다.
1954년 5천 통이 넘는 응모자들 중에 제1회 <학원문학상> 우수작으로 마산고등 1년 이제하의 「청솔 그늘에 앉아」가 뽑혔고, 입선작에 경복고등 1년 유경환의 「湖水가」가 뽑혀서 전문이 실리고, 입선가작에 오현고등 김종원 외 19명의 이름을 게재하고, 선외 가작에 제주일중 문충성 외 29명의 명단이 실렸다. 참고로
「湖水(호수)가」 전문은 아래와 같다.
고요한 호숫가는/ 옛얘기. //
번지는 미풍에/
물살이 퍼지고 또 잔다. //
몸부림치는 소금쟁이는/
시(詩)를 지운다. //
서러운 전설만이/
가라앉았다.
―유경환 「湖水가」 전문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마산고등학교의 이제하가
쓴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의
서울 친구가 바로 유경환 학생이라는 것이다.
또한 안동고등 3년 김동기의 「旗(기)」가 우수작 1석에 뽑혀서 훗날 명강의로 유명한 전 고려대학교 상대 교수 김동기 역시 문학소년이었음을 알게 된 일이다. 다른 한 가지는 서울중학 3년 황동규의 「눈빛」과 마종기의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하의 「개 잡는 풍경」이 산문 부문 입선작으로 삽화와 함께 실려 있고 , 선외 가작으로 목포고등 정규남과 경복고등 유경환의 이름이 들어 있어, 이들 문학소년들이 시, 산문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써서 투고한 것과 경복고등 유경환이라는 이름이 거의 다달이 빠짐없이 실려 있어서 그 꾸준함을 알 수 있다.
‘55년 제2회 <학원문학상>에도 경복고등 유경환의 「귀로」가 입선하였으며, 가작 30편에도 마산고등 2 이제하, 제주오현고등 1 문충성, 서울고등 마종기와 함께 경복고등 유경환이 들어 있고, 산문 입선에 이제하, 마종기 등의 이름과 함께, 가작 30편에 유경환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연합중학교 시절 은사인 시인 김소영 선생님과 경복 시절의 은사 김창현, 이종성, 이인모 선생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시상식이 끝난 얼마 후에 사진작가인 김대벽이 찾아와 학원 표지에 얼굴이 실리게 되었고, 그 후 역시 학원의 사진기사 정도전이 찾아와서 학교의 허락을 받은 후, 당시 학원의 인기 연재물인 사진 소설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최정희의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었는데, 함께 주인공을 맡았던 여학생을 비롯 다른 출연자와 일체 만나는 일 없이 각각 사진을 촬영하여 합성하여 연재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일은 학원을 통하여 인연이 된 제주고 김종원(金鍾元)과 목포고의 정규남(丁奎南)과 3인 시집 『생명의 장(章)』을 발간한 일이다.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기투합하여 시집을 함께 내게 되었는데, 정규남이 인쇄를 맡아 민성출판사에 의뢰하고, 학원 선자로서 문학수업을 지도하셨다고 할 수 있는 조지훈 선생님께 서문을 부탁드리기로 하여 서울에 사는 유경환 학생이 그 일을 맡았다고 한다. 당돌한 줄도 모르고 두어 번을 들렀으나 지훈 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으시고, 목포의 정규남은 인쇄소에서 독촉을 당하고 하여, 목포의 박정온(朴定溫) 선생에게 서문을 받아 시집을 인쇄한 후에야 지훈 선생님의 서문이 도착한다. ‘55년 5월 발행된 책은 예상과 달리 서점에 깔리자 매진되었지만, 한번 더 방문하여 지훈 선생님의 서문을 싣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다.
시인이 여러 번 이사하면서도 소중히 간직해온
원고지 10장에 담긴 지훈 선생님의 세로 글씨는 한자뿐만 아니라
한글도 너무 단정하고 유려하여, 그분의 단정한 성품이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등단하지도 않은 고등학생들의 시집 발간을
격려하는 지훈 선생님의 큰마음도 함께 읽혀졌다.
…이 詩集은 여느 시집과는 다른 의미의 純潔을 지녔으니 이 시집은 시집으로서보다도 友情의 記念앨범으로 삼으려는 마음과 더 眞實하고 높은 시를 위해서 감추어둘 永遠한 草稿로 삼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뛰어오르라’ 내가 激勵하는 것은 먼저 이 한 마디가 있을 따름이다.
거센 暴風과 힘차게 鼓動하는 脈搏이 生命의 表現이듯이 고요한 물결과 서글픈 한숨도 生命의 表現이다. 그러므로 뜨겁고 서늘한 모든 것을 샅샅이 깨닫기 전에는 生命의 眞髓는 把握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生命의 章’은 君들의 詩에 대한 사랑의 盟誓가 되어야 한다. …‘思慕하라’ 나의 忠告는 이것 뿐이다.
一九五五年 三月 二十五日
서울 城北洞에서 趙芝薰 識
56년 꿈 많은 고교 시절을 마친 문학청년은
전체 성적의 5% 이내이면 응시할 수 있는 무시험 특차 전형에 응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그와 동시에 박두진 선생님을 만나 문학수업을 계속하여,
그 해 12월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에
「아이와 우체통」을 응모하여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그리고 이듬해인 57년 11월 『현대문학』에 혜산 선생님의 추천으로
「바다가 내게 묻는 말」로 1회 추천을 받고,
「석화(石花)」를 거쳐 58년 4월 「혈화산(血花山)」으로
정공채, 박희연과 함께 추천을 완료한다.
6개월만에 3회 추천을 완료하였으니, 까다로운 혜산 선생님으로서는 특별히 빠른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제2의 청록파로 문학세계를 지켜가려는 뜻이 계셨음을 후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지,
「혈화산」을 읽어보자.
산이 숨어서 부르는 소리/
소리치다 목이 쉬어 끊어져 오는 소리/
둥 둥둥 둥 둥/
산이 물러나며 자욱하게/
黃山벌 북소리가 溪谷으로 밀려온다//
머리 딴 신라 화랑의 무리가/
높은 창을 세우고/
백강을 돌아/
구비구비 산등을 타고/
아람드리 고목을 쿵 쿵 넘기며/…
―「血火山」 부분
둥 둥둥 둥 둥 백제의 북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혜산 선생님의 「시천후평(詩薦後評)」은 그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바다가 내게 묻는 말」 「石花」 등 一連의 바다의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바 있는 유경환 君은 一轉하여 이번에는 「血火山」에 맞섬으로써 그의 滿滿한 覇氣를 보여주었다. 안으로부터 울리어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의 시의 純粹質과 독수리나 사자새끼 같은 捕獲慾이 앞으로의 그의 詩作業 위에 줄기차고 다구지게 具現될 때 가위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제야 세 詩人은 마음 놓고 달리고 싶은 벌을 달리고 날고 싶은 하늘을 날으라. 이제부터야말로 選者는 별다른 意味와 責任感에서 君들의 앞날을 빈틈없는 눈으로 注視하여 마지 않을 것이다. 각기 주어진 天分을 스스로 啓發하여 시의 使命에 대한 올바른 自覺과 시의 道에 대한 一段의 嚴格을 促求하면서 大成을 빌어 마지 않는 바이다.
―박두진, 「시천후평」부분
유경환 시인의 추천완료 소감문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에 화살을 꽂으며」는 고성(古城)과 석관(石冠), 석문(石門) 등의 상징을 많이 써서 부드러웠지만, 날카로웠다. 정립(定立)과 반정립(反定立), 정재(定在)와 사재(斯在) 등의 형이상학적 용어도 들어가 있어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팽배하여 있던 모더니즘을 향하여 순수의 깃발을 높이 흔들고 있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쯤해서 유경환 선생님을 직접 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권의 시집은 K교수가 분석해낼 것이었다. 원고 마감일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전화를 드려서 일요일 오후 2시 댁으로 찾아뵙기로 한다. 일산의 강촌마을까지는 1시간 반은 걸린다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얇은 모시 한복을 입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선생님의 수필 중에 ‘눈부신 모시옷으로 의관을 제대로 차려 입은 노인이 두루마기 자락 날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한길에서 만난다면 그 의젓한 기품과 멋은 얼마나 눈부실까?’ 하는 구절이 생각났다. ‘수필은 기교보다 정신에서 바른 격(格)을 찾는다. 기교는 돌아보는 세월의 때를 타나, 기교가 아닌 정신의 향기는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다.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 향기는 문장 속에 녹아 있는 향기다. 수필은 이런 문향(文香)을 중시한다.’는 글을 읽으며 나는 중절모를 쓴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 냈었다.
혜산 선생님의 글씨가 전면에 걸려 있는 거실에는 연꽃이 그려진 동양화 두 점이 걸려 있어 낯선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혜산 선생님은 말씀이 적으신 대신 행동으로 가르치는 분이셨다고 한다. 시도 열 편쯤 써서 보여드리면, ‘이것이 좋다’는 한 말씀 이상 하시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렵고 정의로운 일에는 늘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입학 후에도 공부를 잘하였던지 정법대학 최고 득점자가 되어 채플시간에 장학금을 수여받기도 하고, 4학년 1학기 때 전학년 과정의 162학점을 모두 수료한 뒤, 외무고시 준비를 위하여 절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데, 사상계사에서 처음으로 신입사원 공채를 실시하니 시험을 치루지 않겠느냐고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는 공무원이 되거나, 고시를 치루거나, 신문사, 은행 등 몇몇 기관을 제외하고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마땅하지 않던 때였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학생에게 Time지나 Newsweek를 집어 Science난의 토픽을 번역하라는 것으로 면접을 겸하여 영어 시험을 치루고, 나의 신념을 기술하라는 백지 논술 시험을 치루었다. 1주일 후에 발표가 나서 나가보니 신입사원은 시인 한 사람밖에 뽑지 않았다.
59년 10월부터 68년까지 10년을 근무하였다. 15년 사상계 역사 중에서 10년을 지킨 것이다.
60년대 초가 사상계의 전성기였지요. 조선·동아 일간지가 8만부쯤 찍을 때였는데 사상계는 9만 8천부까지 찍었으니까요.
당시의 사상계가 4·19에 얼마나 직간접적인 영향을 크게 주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다만, 그 당시 내가 사는 시골에까지 사상계를 소중히 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다름이다.
사상계사에서 벌인 ‘한일굴욕외교 반대 서명 운동’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몇 분 문인들에게 어려움을 드렸다고 말씀하신다. 박두진 선생님께서는 분연히 1차로 서명을 하셨으며 많은 문인들이 동참하셨는데, 서울신문에 근무하시던 박성룡 시인은 그것으로 해서 사직을 하셔야 했고, 마해송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마침 전화를 받은 마종기 시인은 공군 현역 장교로서 자진 서명을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전역하자마자 미국 이민을 가야 하는 정황에 이르렀다. 통화가 녹음되는 바람에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상계 사장 장준하가 동대문 을구에서 옥중 출마로 국회의원에 당선 되자, 국회의원 겸직금지 규정으로 사장에서 물러나고, 편집부장이었던 시인은 장준하와 동서로서 새로운 사장의 견제 끝에 직위해제를 당한다.
그래서 3개월을 쉬고 선우휘 선생님의 천거로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22년을 근무하며, 주간조선 주간,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이 되었다. 그때가 갓마흔 살이었는데, 가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때에 만물상을 이규태 선생님과 하루 걸러 발표하였다 하니, 아마 그때에는 나도 열심히 시인의 칼럼을 읽었으리라. 그러는 사이 하와이 대학의 동서문화센터에 연수도 가고, 풀부라이트 교환교수 자격으로 미시간 대학에서 재충전의 기간도 갖고, 89년에는 신문방송학으로 박사학위과정을 마치셨다.
그 후 문화일보로 옮겼다가, 연세대학교 신방과에 겸임교수와 추계예술대학교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셨다. 그 동안 시인이 겪은 장준하의 죽음 등 정치적이거나 인간적으로 복잡한 과정은 모두 백지로 남겨두기로 한다. 삶은 그렇게 쉽게 정의하고 논술할 만큼 단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정 속에서도 시인이 필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솔직하고 담백한 시인의 수필집은 나에게 가슴이 찌르르한 감동을 주며 다가왔다.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도 바로 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틀니」 등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느끼는 심정이 마치 보이는 자연을 그린 그림처럼 곱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2003년에 받은 <지용문학상>을 시인은 어떤 상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다. 은사 혜산 선생님이 바로 제1회 지용문학상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그 수상작은 「낙산사 가는 길 3」이다.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낙산사 가는 길 3」 전문
추계예술대학교 출강을 끝으로 강의를 끝내신 후 오대산에 머무는 날이 많아지시면서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자연을 관조하는 마음이 그대로 꾸밈없는 시가 되어 샘솟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를 읽으면서 50년 가까운 세월 저편의 학원 입선작 「호수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런 일이리라.
시인의 시 중에는 「산절 오르는 길」의 ‘연당에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드는/ 풍덩 소리/ 목 없는 돌부처/ 듣고 있다’처럼 쉬운 듯하지만, 다정다감한 서정을 맑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아마도 시인의 마음이 순수한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데뷔 10년에서 20년까지는 폭발할 것 같았지요. 그래서 시 속에도 울분이 들어 있고, 이것 저것 욕심 부린 자국이 보입니다. 욕심이 들어가 있으니, 시가 어려워지지요. 한 40년 되니까, 비로소 짧아지고, 쉬워지고,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깊어야만 물이 맑은 것이 아니지요. 그림도 그리다 보면, 한번 갈아 그리는 것과 두 번 갈아 그리는 것이 다릅니다. 심성이 혈압 재는 것처럼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침에 보는 산과 저녁에 보는 산이 틀립니다.
―문학에 대한 집념과 표현기법의 개발, 그리고 사유세계의 깊이가 문학의 높이를 결정하게 됩니다. 연마하고 갈고 닦으면 가슴에 발화점(發火点)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승화(自己昇華)가 아닐까요?
―Creation이 창작이고, 남이 한번 쓴 표현을 다시 쓰면 그것은 Recreation(오락)이 됩니다. 결국 내 세계를 내가 개척해가는 것이지요. 작품세계도 그러합니다.
―작품은 100년 동안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살았을 적의 50년 동안과 죽은 다음 50년의 평가를 통해서입니다.
시인은 <지용문학상> 이외에도 <현대문학상> <소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받으셨고, 이번에 다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의 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번 나의 기록은 어쩐지 문학 소년 때의 기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특히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유한식과 김순학의 7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 개성시 선죽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고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옷장을 뒤집으니 ‘조선어독본’과 태극기가 나오던 이야기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중학교에 입학한 이야기를 빼먹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슬하의 1남 2녀와 손주 5명의 다복한 이야기도 독자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나로서는 7살 이전에 70%가 형성된다거나, 17살 이후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교육학자들의 말을 믿는다. 유경환 선생님의 일생을 들으면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여섯 시가 되고 있었다. 가끔 중절모를 쓰시는지, 그때는 언제인지 여쭈려던 것을 접고, 내려온다. 백일홍과 다알리아가 옛 뜨락처럼 피어 있는 아파트 앞뜰에는 고추잠자리 수백 마리가 운동장의 아이들처럼 날고 있었다. 고추잠자리는 모두 한 살짜리다. 다들 벌거벗은 채 커다란 선글라스를 머리를 뒤집어 썼다.
선생님께서 주신 <자화상>에는 머리 속에 예쁜 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시인들의 머리통 속에는 한 마리씩 예쁜 소리로 노래하는 새가 들어 있어야 마땅할 터였다. 내 머리 속에는 울지 않는 새가 들어 있다. 목을 비틀거나, 울리는 대신, 울기를 기다리는 것도 미덕이겠지….
‘어머니,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겨우 정오라고’라고 시작되는
타고르의 시 「정오」가 생각났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천천히 오르다 보면, 저 높은 언덕에 이미 서 있을 것이니까.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춤 추는 오대산>에는 정오에도 개이지 않는 안개가 신령스러웠다.
“동승/ 산길 쓸 듯 // 햇빛/ 낮길 쓸고 // 달빛/ 밤길 쓴다 // 마음으로 쓰는/ 길도 있다
(「낙산사 가는 길 5」)” 고추잠자리들이 하늘길을 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