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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한국(大漢國) 설’과 봉니문서(封泥文書) 미스테리
1. 한반도 대한국(大漢國)설의 중요성
가. ‘빙하기를 기억하는 명칭’
일단 좌계가 볼 때에는 이 명칭 자체는 아시아 대륙 전체가 빙하에 뒤덮어 있을 때 부터의 명칭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고조선 이전의 환국 시절 때부터의 명칭이 되겠지요.
이 처럼 아시아 대륙 전체가 빙하에 휩싸여 있을 때에, 황하든 양자강이든 오늘날 요하, 압록강, 대동강, 한강(漢江),
심지어는 일본 구주(九州)의 오늘날 축후천(筑後川) 역시 모두 하나의 ‘아리수’란 강으로 흘러서 오늘날 황해 평지
사이로 흘러갔겠지요.
아마도 현해탄과 구주는 빙벽(氷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동해(東海)는 하나의 ‘바다 호수’ 형태로 둥그런 모양으로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아리수’강을 고대인들은 ‘하늘의 은하수’와 동일시 여겨, 한수(漢水)로 불렀을 겁니다.
한(漢)은 ‘은하수’란 뜻이 원래의 뜻이니깐요.
그렇다면 이 ‘아리수’ 혹은 ‘대한수(大漢水)’라 칭해지는 옆에 바다호수인 동해(東海)를 끼고 있는 나라 이름을 고대
인들이 뭐라고 칭했을까?!
당연히 사천(史穿) 선생님의 말씀대로 바로 ‘대한국(大漢國)’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왜 새로운 지평(地平)이 되는가?!
(1) 북한 평양은 ‘대한국의 수도인 한성(漢城) 평양’이다.
먼저 오늘날 북한 땅에서 평양을 ‘고조선의 수도’ 혹은 ‘고구리의 평양성’이라고 비정(比定)하는데, ‘고구리(高句麗)의
평양성’은 이 싸이트(site)의 고증대로 ‘봉황성’이 실제로 있는 중국 화북 안국시로 좌계는 봅니다.
“그렇다면, 현 북한의 평양은 뭐냐?”는 것입니다.
좌계 생각에는 이미 ‘한성(漢城)’이란 각자(刻字)가 나왔기 때문에, 대한국(大漢國)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점 사천(史穿) 선생이 명쾌하게 밝힌 새로운 지평(地平)입니다.
(2) 대한국(大漢國)의 수장(首長) 명칭은 조왕(祖王)이다.
그렇다면, 실재로 대한국(大漢國)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 역사적 증거가 있는가?! 좌계는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리(高句麗)비에 나오는 조왕(祖王)으로 여겨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원 고구리 비에는 “고리(高麗) 대왕(大王)과 조왕(祖王)은.....”이란 명칭으로 시작되는데,
이 비(碑)가 새겨질 때까지, 대한국(大漢國)은 실재하고 있었다고 좌계는 봅니다.
이 조왕(祖王)이 세계(世系)를 있는 왕(王)인지, 아니면 화백회의에 의해 그때마다 몰려드는 여러부족 국가에서
선출했는지는 좀더 검토하여야하겠지 민, 분명한 것은 “조왕(祖王)이란 명칭 자체가 치우(蚩尤) 천왕 때부터 이미
있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좌계는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왕(祖王)이란 조강(祖江)-왕의 약자인 듯 하기 때문입니다.
조강(祖江)은 북한강, 남한강, 예성강, 임진강, 한탄강등 온갖 강이 모여서 합쳐져서 강화도에 이르는 직전의 강
이름입니다.
제일 긴 강을 조상(祖上)-강(江)인 조강(祖江)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강(江)들이 만나서 연합된 곳’ -
따라서 ‘새로운 조상 강’이란 뜻으로 명칭이 붙는 자체가 범상치 않는데, 이런 조강(祖江)과 같은 역할을 하는 왕이
바로 조왕(祖王)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3) 탁록대전이 작품화 안되는 이유와 조강(祖江)과 기(夔)의 문제.
이 조강(祖江)은 세계의 신화 상의 삼대전쟁 - 그리스의 ‘트로이’전쟁과 인도의 핵전쟁을 그린 ‘크르크세트라’전쟁,
그리고 치우천왕과 황제의 싸움을 그린 ‘탁록전쟁’임 - 의 하나인 ‘탁록전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두 전쟁의 발단과 전개과정이 모두 문학 작품화되었는데, 탁록대전 만 이상할 정도로 안 되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치우가 이겼는가?! 황제가 이겼는가?!”하는 것이 서로 모순된 자료(資料)가 흘러나오고, 또 이들 주인공이 일으킨
사건과 사건 사이의 핵심적인 의미(意味)가 ‘모호함’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기(夔)라는 이상한 동물 이야기이고, 또 하나가 신비한 조강(祖江)이란 신입니다.
황제는 연전연패(連戰連敗)하다가, 기(夔)라는 ‘외다리’ 짐승의 ‘뱃가죽’으로써 ‘북’을 치자,
치우천왕이 패전(敗戰)한 것으로 산해경에 묘사되어 있고, 그 출산지는 동해 속에 있는 한 섬 유파산(流波山)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좌계의 생각에는 바로 흑산도(黑山島)이며, 사천 선생님이 올린 사료에 의하면, 이는 문신국
(文身國)입니다.
(좌계는 이 기(夔)의 정체를 ‘가림토’를 결승(結繩)으로 다리에 걸고, ‘번지 점프’를 하던 여인국(女人國)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즉 여러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나라사람들을 결승(結繩) 형태로 ‘시각화’시켜 보여주는 여인을 기(夔)로 보았고,
그것이 ‘가림토’랑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기(夔)는 오늘날 말로 하자면, ‘국제 통역사’라고 할수 있는데, 이들을 국제 연합군인 치우의 통신을 맡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황제(黃帝)는 이들이 번지 점프하는 ‘작업대’를 태워 분사(焚死)시킴으로써 일거에 치우군에게 우세함을
획득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별도의 제목으로 긴 이야기를 써야하기 때문에, 나중에 혹 짬이 나면 이 싸이트(SITE)에 올려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황제(黃帝)가 조강(祖江)을 죽여버린 ‘흠비’라는 신을 응징하는 것이 역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좌계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탁록대전이 작품화가 안 되는 이유가 - 그 안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사건이 모호함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즉 조강(祖江) 왕 - 즉 조왕(祖王)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황제(黃帝)가 왜 치우와 대적하게 되었는지?
또 기(夔)에 적대적인 황제가 왜 나중에 치우(蚩尤)와 기(夔)에 대해 승복(承服)하게 되었는지? 하는 기본 관계가
온통 모호함 속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규명이 안 되고서는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는 별도의 문제라고 치더라도, 조왕(祖王)의 개념 자체가 이미 조강(祖江) 형태로 이미 탁록대전 때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좌계는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반도에 자리잡은 대한국(大漢國)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가림토‘를 결승(結繩) 행태로
시각화시켜 서로 다른 언어를 통역하게 한 기(夔)와 여인국(女人國)과의 관계 등등이 ’명쾌하게 규명이 안된 상태‘
- 다시 말하면 ’모호함‘ 속에 있기 때문에,
사천 선생님이 발견한 중차대한 새로운 고대사의 지평(地平)을 사학자들이 잘 볼수 없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모호함’을 해결할 수 있는 인근(隣近) - 과학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반도가 대한국(大漢國)이야?! 대한국(大漢國)이 뭔데??”라는 것이 머리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써
인정이 안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좌계는 이 ‘새로운 지평’을 위해 좌계가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음을 이미 ‘댓글’에서
올렸던 것입니다.
이런 ‘미리 사전에 밝힐 엉뚱한 이야기’를 뛰어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요약하더라도
대한국(大漢國)이 한반도에 ‘자리 잡은 것’은 실로 저 빙하기-탁록대전-충주의 중원 고구려비에 이르기 까지 유구
(悠久)한 역사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 지정학(地政學) 혹은 지리 경제학적 중요성
(1) 집단이주를 원활하게 하는 한반도
‘미리 사전에 밝혀야할 인근-과학의 이야기’가 없이 사천(史穿) 선생님의 ‘한반도 대한국(大漢國)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추후에 글을 올린다고 할지라도, 사천 선생의 탁견이 되는 이유는 명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국대륙에 여러 부족들이 집단이주를 해 들어갈 때, 이 한반도란 지역이 최고로 좋은 고속도로가 된다는
지정학적, 혹은 지리 경제학적인 중요성 때문입니다.
중국 남반부에 전란(戰亂)이 떠지면, 한반도로 경유해서 중국 북반부 즉 황화 지역으로 집단이주 코스를 바꿀수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2) ‘대륙 삼국설’의 짝이 바로 ‘한반도 대한국(大漢國) 설’이다.
따라서 좌계의 생각에는 ‘대륙 삼국설’의 짝이 되는 설을 ‘한반도 대한국(大漢國)’설로 보는 것입니다.
특히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이는 더욱더 대륙삼국의 짝이되는 학설로
자리매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러 제 민족이 집단이주해 올때, 이웃 부족과 평화스럽게 ‘잘 살것인가?’를 저울질 하는 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변한(弁韓)-신라(新羅)이고, 또 실지로 ‘같은 국제정치 판’에서 잘어울릴수 있는가?를 재어보는 저울판 역할을
마한(馬韓)-백제(百濟)가 하고, 이들을 안전하게 ‘국가 단위’로 만들어서 대륙에 침투시키고 나르는 역할을 저울대
역할을 맡은 진한(辰韓)-고구리가 있었다면, 반드시 한반도는 이를 뒤에서 빽-업(BACK-UP)시키는 역할을 맡는
어떤 오래된 국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대한국(大漢國)이지요.
그 역할은 중국대륙에 남쪽에 전란에 있으면, 광제(光濟) 님께서 발견한 감숙성 금성(金城)을 통해서 집단이주시키고,
북쪽에 전랸이 있으면, 한반도를 경유하여, 저 양자강을 통해서 민족 이주를 시키면 되니깐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좌계는 대륙 삼국설에 짝할 수 있는 아주 중차대한 새로운 고대사의 지평을 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3. 화하족(華夏族)이 한족(漢族)으로 바꾸게 된 원천(源泉)인 대한국(大漢國)
좌계가 동양 고대사를 접할 때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왜 전통적으로 화하족(華夏族)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한족(漢族)이라고 그 명칭을 바꾸게 되었는가?”하는 점입니다.
이 점은 세 부류의 고대 사서(史書)를 읽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문제입니다.
가. 상서(尙書), 환단고기(桓檀古記), 사기(史記)의 상이한 패러다임.
이 문제는 상서(尙書)를 정독(精讀)한 사람이 환단고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관련이 됩니다.
상서(尙書)는 요순(堯舜)임금을 ‘인류가 절대적으로 떠받쳐야할 이상세계’로 그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순(舜) 임금에게 두 딸을 준 요(堯)임금에 대한 아버지이신 유우(有虞) - 부도지에는 유호(有戶)로 나옴
-에 대한 평가가 두 역사책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있습니다.
상서(尙書)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유우(有虞)씨가 요임금에게 순임금이 가까이하는 것을 ’죽일려는
벌(罰)을 내리는 우매한 늙은이‘로 나타내고 있고, 그 딸들이 지혜를 발동해서 순(舜)임금이 아버지인 유우씨에
대해 효도(孝道)를 지키면서도 ’죽음을 모면하게 하는 지혜‘를 발동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반면, 부도지(符都誌)나 ‘환단고기’에는 이 유우씨가 순(舜) 임금이 요임금의 딸에 홀려서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장쾌하게 요(堯) 임금 세력과 싸워서 응징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상서(尙書)의 패러다임과 부도지, 혹은 환단고기의 패러다임은 서로 상극(相剋)적인 관점에 서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입니다.
일반인이 볼 때에는 사마천의 사기는 당연히 상서(尙書)-패러다임 즉 순(舜)임금을 좋게 보고, 그 아버지를 나쁘게
보는 ‘패러다임’ 즉 환단고기나 부도지의 패러다임이 전개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측 사고 방식 - 다시 말하여 유우(有虞)씨를 역(逆)으로 ‘이상 세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기(史記), 효문본기(孝文本紀)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齊)나라 태창령(太倉令) 순우공(淳于公)이 죄를 지어서 육형(肉刑)을 당하게 되자, 자신이 딸 밖에 없어서 자신의
억울함을 황제에게 고할수 없음을 한탄하자, 그 딸이 이 억울함을 상주(上奏)하자, 천자(天子: 한고조 유방 아들인
효문제)가 조서(詔書)를 내리는 첫 구절이 엉뚱하게도....
“유우(有虞)씨의 시대에는 범죄자에게 특수한 색이나 무늬있는 의관을 착용하게 하여 치욕의 표시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는 무슨 연유인가?!
다스림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법에는 육형이 세 가지나 있어도 범죄는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 잘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상서(尙書)의 패러다임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한(漢) 황제가 직접 상서(尙書)에서 이상시대로 그린 요순(堯舜)이 아니라, 이에 저항한 유우(有虞: 부도지에는
유호(有戶)로 나옴)를 이상시대로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지 않을수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나. 우리 사서(史書)는 조선(朝鮮) 시대때 왜 수거(收去), 탄압되었는가?!
상서(尙書) - 다시 말하면 정통적인 유학(儒學)-패러다임에 취해있는 사람에게는 요순(堯舜)시대가 이상사회이고,
이에 저항한 고대의 흔적이 있는 우리 사서(史書) - 나중에 환단고기(桓檀古記)로 통합이 된 여러 일서(逸書)들을
보면 - 정신적인 충격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요순(堯舜)시대?! 그거 이상사회가 아니라 환국(桓國)-고조선(古朝鮮)으로 내려오는 아시아 정통의 이상
시대에 대한 일종의 반역자이고, 배신자이니깐....”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이 일어나면, 의당히 “실제 한(漢)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게
마련인 것이지요.
그런데 보게 되면....엉뚱하게도 상서(尙書)의 패러다임은 ‘잘못된 패러다임- 즉 나쁜 질서’이고 우리 사서(史書)가
‘좋은 패러다임 - 즉 좋은 질서’라는 것이 위에서 들은 구체적 사건을 묘사하는 실 사례에 의해서 굳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유학 이념’을 통째로 흔드는 우리의 고대 사서(史書)가 수거대상이 되고, 또 탄압대상이 되었던 것이
지요.
그럴때 재판관 역할을 하던 것이 바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였다는 말씀을 좌계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외로 강호(江湖) 사학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다. 화하족(華夏族)을 한족(漢族)으로 바꾸게 한 대한국(大漢國)의 존재
왜 화하족(華夏族)이 갑자기 자신들의 명칭을 한족(漢族)으로 바꾸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한고조인 유방이 처음 왕(王)으로 봉(封)해진 것이 바로 한중왕(漢中王)이고, 초패왕하고의 싸움 끝에 결국
승리하자 이 한(漢)나라라는 명칭을 계속 쓰게 되었고, 이런 한(漢)나라의 백성이라는 뜻에서 한족(漢族)으로 불러
지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 즉 국가(國家)와 종족은 다른 것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그 당시 중국대륙의 원주인(原住人)들인 사람들이, 전란(戰亂)을 피하여, 한반도 즉 대한국(大漢國)
에 이동하여 살면서,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막대한 전쟁특수를 황하와 양자강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면서,
계속 ‘화백민주주의’로써 통합을 하는 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전부 같은 ‘아리수’ 즉 은하수(銀河水) 옆에 살던 사람들이 아닌가?!”하면서 배달화백을 했던
것이지요.
즉 한고조 유방이 천하통일을 한 것은 소한국(小漢國)과 한반도의 대한국(大漢國)으로 ‘말발’이 오가며,
이미 한반도를 경유해서 중국대륙을 에워싸고 있는 ‘큰 국가들 공동체’가 먼저 통일되고 나서, 이 도움을 받으면서
소한국(小漢國) - 다시 말해, 한(漢)나라가 통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배달화백(倍達和白)은 ‘민주적인 통합’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는 같은 은하수 민족이다.”라는 의식이 싹텄고,
따라서 “다시는 다른 종족 한테 혁사만하(虩使蠻夏) - 즉 오랑캐 화하족을 두려워 벌벌 떨게하자!”라는 구호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각성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족(漢族)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엄격히 말하자면 중국에 있는 한족(漢族)은 좌계 생각에는 ‘소(小)-한족(漢族)’이고, 우리는 ‘대(大)-한족(漢族)’이
라고 봅니다만..
이처럼 중국내란에 대한 빽업(BACK-UP)하는 지정학적 혹은 지리 경제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한반도에는 환국(桓國)시절부터 대한국(大漢國)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 북한 평양 근처의 봉니문서(封泥文書) 미스테리.
한반도 대한국(大漢國)설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한사군(漢四郡) 문제와 얽혀 있다고 봅니다.
좌계는 이 한사군(漢四郡)을 ‘식민지’가 아니라, 고조선이 승전 댓가로 중국 화북지역에 획득한 ‘국제 화백 특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병도씨가 원류(原流)가 되는 사학자(史學者)들은 한사군(漢四郡)을 식민지로 보고, 그 위치를 지금
북한의 평양 지방으로 보고 있으면서,
그 물증(物證)으로써 한사군(漢四郡) 명칭이 들어간 봉니(封泥)를 그 실증 자료로써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계가 볼 때에는 이 많은 봉니(封泥)가운데, 한(漢)이란 글자는 중국대륙의 한(漢)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에서 환국(桓國)시절부터 있었던 대한국(大漢國)의 한(漢)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문제하고 관련해서는 실로 어마 어마한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가. 봉니문서(封泥文書)란 무엇인가?
이 ‘미스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봉니문서(封泥文書)- 씨스템(system)이 어찌 움직이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듯합니다.
고대의 문서 수발 체계가 바로 이 봉니문서(封泥文書)인데, 보내는 측이 원통(圓筒)이나 혹은 푸대 형 - 물론 그
입구에는 각질(角質)로 된 테두리가 있읍니다만 - 안에 문서(文書)를 넣고, 다른 사람이 보아서 기밀(機密)이 누출
될 것을 우려해서 - 밀봉(密封)하게 됩니다.
이 밀봉은 진흙에다 아교를 섞고, ‘보내는 측’의 도장(圖章)을 찍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자(使者)가 ‘봉니문서(封泥文書)’를 가지고 오면, 접수(接受)하는 측은 일단 그동안 기밀이 유출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봉니(封泥)상태를 점검하게 됩니다.
뜯긴 형태가 있거나, 혹은 도장(圖章)이 틀리면, 이는 정보가 유출되거나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사자(使者)에게
자초지종을 물은 후, 어떤 조치를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봉니문서(封泥文書)가 왔다고 하면,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입회(入會)한 자리에서 뜯어보게 됩니다.
그래야만 정보가 신뢰성이 생기니 깐 말입니다.
문제는 이 봉니문서(封泥文書)가 1:1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유지(經由地)를 거칠때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럴 경우, 뜯어보고 나서, “선(先)-경유지(經由地)에서 이미 읽었다.”라는 뜻으로, 수(綏) 즉 ‘끈’ 혹은 ‘쪽지’를
넣고 나서, 다시 밀봉(密封)하고 도장(圖章)을 찍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도장(圖章)을 찍을 경우는 ‘똑같은 글자’ 예를 들어 한사군(漢四郡)이라는 ‘국제 화백 특구’에서 한(漢)
이란 글자가 전서(篆書)로 쓰여져 있으면, 대한국의 한성(漢城: 현 북한 평양)에서는 예서(隸書)로써 한(漢)이라고
새겨진 도장으로 봉니(封泥)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봉니문서(封泥文書)는 경유지가 있을 경우, 경유처(經由處)에 반드시 발신처(發信處)의 도장이 있게 마련
입니다.
단 이 경우 그 인장(印章)이 자체(字體)가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한사군(漢四郡)의 봉니(封泥)가 화북지역 이외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것은 봉니문서(封泥文書)-씨스템
(system)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경유지가 많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한 사람의 사자(使者)를 이 경유지 모두에 보내는 것이 업무상 효율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봉니(封泥)를 한 것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지요. 문서(文書)를 받는 순간 봉니(封泥)가 ‘깨트리게 되고’ 그 결과 봉니(封泥)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나. 봉니문서(封泥文書)의 두 가지 미스테리
좌계가 우리 고대사하고 관련해서 봉니(封泥)-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굉장히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서(文書)
내용이 공개(公開) 안 된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어떤 문서 내용이 오갔나?!”하는 것이 없이 그냥 봉니(封泥)가 찍혀있으니깐, 여기는 ‘한사군 식민지’이다.“
는 따위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이 없는’ 역사연구 방법입니다.
저 씰크-로드(silk-load)에서도 봉니(封泥)가 발견이 되는데, 이 경우에는 그 문서(文書) 내용이 봉니(封泥)를 뜯고
‘부패된 글자를 빼고 - 따라서 그 본문내용을 남아있는 문자를 기초로 읽고, 전 본문(本文)내용이 추정되어서
공개되는데....신기하게도 한사군 관련은 공개가 안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점 좌계의 정보 수집능력이 한계가 있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왜 봉니(封泥)가 있는 채로 봉니문서가 발견이 되는가?”하는 점입니다.
배달화백은 이륜구동(二輪驅動)식으로 ‘민주적 통합’을 하기 때문에, ‘더 큰 공동체의 국가’와 ‘작은 공동체의 국가’로
나눌수 있고, - 이런 정치 씨스템에서 근무하는 관료는 어쩔수 없이 ‘두 나라 모두의 관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 북한 평양땅에 있는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의 관료는 소한국(小漢國) 즉 한사군(漢四郡)을 통해
접속되어 있는 소한국(小漢國)의 관료도 되고, 또한 대한국(大漢國)의 관료도 되는 것이지요.
이럴 때, 양쪽에서 명령서가 오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한국(小漢國) 측 - 물론 한사군(漢四郡)이란 ‘국제 화백 특구’의 여과(濾過: filterring)을 겪어서 왔겠지만
- 명령서가 오고, 또한 대한국(大漢國)에서도 올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더 큰 공동체가 명령-우선권이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두 곳에서 ‘명령서’가 온 경우, 보다 더 크고, 상위(上位)의 공동체의 명(命)을 받들기 위해 봉니문서(封泥
文書)를 먼저 개봉(開封)하게 되고, 작거나 하위(下位)의 공동체의 명은 개봉(開封)은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군에서 소대장이 사단장과 연대장의 명령서를 동시에 받았을 경우, 사단장의 명령은 개봉하면서도
연대장의 명령서는 개봉(開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위(下位)의 ‘국가 공동체’를 맡은 봉니문서(封泥文書)는 봉니(封泥)가 ‘깨트리지 않는 상황’에서 유물(遺物)
로써 존재(存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시에 도착이 되었는데도, 하위-국가 공동체의 ‘명령서’를 읽었다.”는 자체가 상하위 국가-공동체의 ‘틈새’
를 읽고 어떤 정치적 처신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관료로써 일종의 반역(叛逆)-음모(陰謀)에 해당되게 됩
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 읽었다.”는 것이 충성심의 입증 자료도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봉이 안된 봉니문서(封泥文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좌계가 볼때에는 봉니문서(封泥文書)가 발견 된다는 자체가 ‘배달화백(倍達和白)’에 의해서 상하위 공동체로써
‘아시아 국가’들이 일반 백성들 - 다시 말하면 천독(天毒)들에 의해서 일괄되게 통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
(遺物)이라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봉니문서(封泥文書)의 존재 자체가 - 그곳에 한(漢)이란 글자가 들어갈수록 - 대한국(大漢國)이
실재했음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겠고,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삼한관경(三韓管境)혹은 화백(和白)이 역사상에서 실재했음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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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로버트 목사자(木獅子)와 ‘이끼’
맨처음 좌계가 우산국(于山國)에 대한 삼국사기의 글을 읽었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목사자(木獅子) 이야기였습
니다.
원문(原文)에는 분명히 항복 안하면, ‘밟아죽이겠다.’고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울릉도는 사면이 암벽으로 되어 있는데, 목사자(木獅子)가 이사부 장군의 선단(船團)을 뛰쳐나와 "해면(海面)으로
뛰어서, 이윽고 암벽을 올라가서 발로 막 밟아 죽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로버트’ 이야기입니다.
더욱 놀란 것은 이사부(異斯夫)는 분명히 무장(武將)인데, 태종(苔宗) 즉 ‘이끼’의 임금이란 묘한 칭호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닷 속의 이끼 - 조류(藻類)와 육지의 이끼’의 임금이 아닌 이상, ‘목사자 로버트’를 몰수 없는 그런 이미지를 받은
것이지요.
한(漢) 황제의 행열에 들어가는 황옥(黃屋), 서독(敾)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한(漢)나라 황제 행차 시에, 황옥(黃屋), 서독(敾)이란 행열을 지니는 것으로 사기(史記)에
묘사되어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을 황옥(黃屋)으로 보면, 오늘날 ‘독도’는 바로 서독(敾)이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 황제가 사는 곳을 배(背)로 했을때, 황옥(黃屋)인 ‘우산국’ 오른쪽(따라서 등을 북으로 했을 경우
서(西)임)인 독(纛)이 ‘독도’가 됨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산국(于山國)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이 중국 최고 통치자인 한(漢)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 신해경을 비롯한 신화(神話)에도 나타나는데, 왜 역사적 사료(史料)로써 안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기이하게 생각되었던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좌계는 이 황옥(黃屋) 서독(敾)의 기록을 보고, 혹시 “우산국과 독도에 있는 어떤 나라가 중국 한(漢)
나라 황실의 권위를 범-아시아적으로 인정해 주는 비밀스런 나라가 아니겠는가?!”하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엉뚱한 과학기술’과 ‘사회적 관계’로써 접근(接近)을 꺼렸던 나라들...
그래서, 좌계가 접할수 있는 사료(史料) 안에서 고대의 ‘엉뚱한 과학기술과 사회적 관계’에 주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입니다.
그래서 “아...이래서 한반도 주변에는 화하족(華夏族)이 일체 접근할수 없는 기제(機制)가 있었구나?!”하고 이해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사천 선생께서 의문점 해석을 원하는 글을 올린 것을 읽게 된 것입니다.
왜(倭), 문신국(文身國), 부상국(扶桑國), 여인국(女人國)의 거리가 황당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은 좌계의 견해로는
황당한것이 아니라,
위 나라들이 ‘어떤 특수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경로를 밟아야만 입국(入國)이 허용이 되거나’
혹은 ‘경유 경로’를 밟아서 어떤 싸인(sign)이 안 오면, 신성(神聖)모독으로 간주해서 무조건 배를 침몰하게 하는
그런 경로(經路)임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성겸 님의 직관적 해석은 이미 좌계가 말씀드린 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새로운 지평(地平)
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한반도가 대한국(大漢國)일때, 전세계에 거석문명(피라미드 문명)을 ‘고래가 끄는 용궁(龍宮)으로써 전파했다.’는
엉뚱한 과학기술과 사회적 관계를 좌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때까지 고민한 셈이지요.
아무튼 좌계는 사천(史穿) 선생이 “한반도가 대한국(大漢國)이다.”는 것을 질문(質問) 형태로 주장했다는 사실 만
으로도 우리 역사가 아시아, 내지 세계의 고대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설정해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운(水運)및 해운(海運) 왕국(王國) - 삼한(三韓)에 대해
이 싸이트(site)에서는 확실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속칭 ‘대륙삼국설’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최근 좌계는 이 대륙삼국의 전신(前身)인 삼한(三韓)에 관한 기록들을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통해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삼한(三韓)이 모두 수운(水運)과 해운(海運)을 중심으로 하는 인류학적으로
아주 흥미진진한 민주(民主)-왕국(王國)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강단(講壇)-사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삼한(三韓)에 대한 해석’들을 읽어
보고 몹시 당황스러워 했습니다.
1. 수운(水運)및 해운(海運) 왕국에서의 강역(疆域)과 성곽(城郭)의 개념.
가. 삼한(三韓)의 땅은 중국의 강(江) 가운데, 좋은 땅만 골라서 이를 네트워킹(networking)한 골라서
퍼져(=spray) 있듯이 존재했었다.
삼한(三韓) 가운데 제일 큰 마한(馬韓)에 대한 묘사에 이 나라가 ‘실로 어마어마한 수운(水運)및 해운(海運) 국가
였음을 들어내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마한(馬韓) 조(條)에 들어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
<馬韓>在西. 其民土, 著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해석(解釋) :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었는데, 그 백성의 땅은 식물들이 종자(種子)를 심었을 때, ‘뿌리 붙이기 좋은 =저(著)’땅이
었다. 그래서 뽕나무 심어 ‘누에’키우고, 베와 비단을 기를줄 알았다.
마한 사람들이 있는 각국(各國)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나라의 명칭’을 신지(臣智)라 했고, ‘그보다 못한
나라의 명칭’은 읍차(邑借)라고 했는데, (이런 나라들은) 산(山)에서 바다사이에 (띠엄 띠엄) 산재(散在)해 있었다.
(따라서, 각 나라들의 수도(首都)는) 성곽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좌계가 왜 이 문장을 끄집어 내는가 하면, 삼한(三韓)의 포괄적인 영역을 표시하는 다음 구절을 사람들이 엉뚱하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나. 한반도(韓半島)에 접속한 삼한(三韓)은 오직 마한(馬韓) 뿐이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귀뜸.
이처럼 중국의 중요하천에서 ‘농사짓기 좋은 땅만 골라서’ 네트워킹(networking)된 삼한(三韓)이 전부 현 화북에 있는
대방(帶方)의 남쪽에만 있었다고 했는데, “그럼 한반도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는 아주 흥미스러운 ‘귀뜸’을 해주고 있습니다.
원문(原文) :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
해석(解釋) :
마한(馬韓)이 최대(最大)였는데, (세 종류(種類)의 한(韓)인 마한, 진한, 변한)과 더불어 진왕(辰王)을 함께 세웠는데,
이 진왕(辰王)은 목지국(目支國)을 다스렸었고, 삼한(三韓)의 모든 지역((=三韓之地)에서 왕도(王道)를 다했다.)
(1) 마한최대(馬韓最大)의 함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의(注意)해 보아야할 점이 ‘마한최대(馬韓最大)’라는 구절입니다.
본디 최(最)란 글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과 취할 취(取)의 합성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최(最)란 ‘태양이 돌듯이 크게 빙 돌아서 볼 때에’라는 의미를 띄고 있고, “중국인 관점에서 시야(視野)에서
사라진 지점까지 논(論)한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측 최대(最大)는 지금까지 시야(視野)에 가려진 것까지 합하여 말하자면 ‘제일 크다’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좌계가 굳이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2) 한반도의 제주도의 고대 명칭은 주호(州湖)이지 탐라(耽羅)가 아니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조(條)에 들어난 다음 문장 때문입니다.
원문(原文)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噑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灳. 其衣有
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위 원문(原文) 가운데 앞부분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이 있습니다.
해석(解釋)하자면 다음과 같아지겠지요.
“또 주호(州湖)라는 나라가 마한(馬韓)의 땅, 서해(西海) 가운데 ‘큰 섬(=大島)’ 위에 있었다.”라고 쓰여져 있기 때문
입니다.
말하자면, 주호(州湖)는 오늘날 우리가 제주도라고 부르는 그 섬을 말합니다.
다. 중국 대륙에 사는 사람들의 사해(四海) 의식과 해동(海東)이란 말의 개념.
(1) 사해(四海)라는 말의 특수성
이 말은 중국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바다를 언급할 때, 동해(東海)는 무조건 황해(黃海)이고, 서해(西海)는 무조건
청해(靑海)이고, 또 남해(南海)는 남지나해이고, 북해(北海)는 가끔은 발해(渤海)를 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이칼’이라는 점이라는 것과 관련됩니다.
사해(四海)가 천하(天下)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설혹 발해가 물리적으로 크다고 해도, 청해(靑海)가 대해이고,
발해(渤海)는 소해(小海)가 되는 ‘세계 관념’이 아주 철저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사해(四海)가 ‘머리 관념상에 하나의 원(圓)’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해동(海東)하면, “바다가 있는 동쪽‘ 이란 개념이 되고, 해남(海南)하면 ’바다가 있는 남쪽‘이란 뜻이 됩니다.
만약 오늘날 해남도(海南島)를 남해도(南海島)라고 하면, 한학(漢學)을 한 사람은 그것이 대만(臺灣)인지, 해남도
(海南島)인지, 필리핀 인지 도무지 갈피를 못잡습니다.
왜냐? 한문(漢文)은 유난히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안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해(四海)인식은 한반도에도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전라도 끝의 ‘땅끝’을 해남(海南)이라고 하여야만 이해가 가지, 절대로 남해(南海)하면 ‘바다’로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2) ‘해동(海東) 삼국(三國)’과 산해경(山海經), 해곡(海谷)
흔히들 고구리, 백제, 신라를 ‘해동(海東)삼국(三國)’이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다 동쪽에 있는’ 삼국(三國)
이란 인식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산동(山東)하면 태행산맥 동쪽을 뜻하고, 산서(山西)하면 역시 그 기준인 태행산맥 서쪽이고, 하북(河北)하면
황하 북쪽이고, 하남(河南)이면 그 기준인 황하의 남쪽이긴 합니다.
그러나 사해(四海)가 곧 천하(天下)이기 때문에,
중국의 동해(東海)를 건너서 있는 한반도의 삼국을 표현하는 것은 절대로 “해동 삼국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산해경(山海經)에서 해외동경(海外東經)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지금 한반도 지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삼국(三國)을 굳이 바다 해(海)란 글짜를 넣어서 쓰려면, ‘해외동(海外東) 삼국’인 것이지요.
따라서 해동삼국(海東三國)이란 말은 무조건 ‘중국 동해안가에 있는 삼국(三國)’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한반도(韓半島)의 동해(東海)를 중굮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표현할 때 뭐라고 해야하나? ”입니다.
바로 해곡(海谷)이 되는 것이지요.
(3) 마한지서해(馬韓之西海)의 함의
따라서 중국 대륙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해(四海)를 넘어서 있는 지역을 이야기할때에는 할수 없이
“어디를 어느 정도가면 무엇이 나타나고 다시 그곳으로부터...하는 식으로 지리(地理)를 설명하는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사람들 입장에서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를 칭하기 대단히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사해(四海)는 그것이 관념 속에서 사각형(四角形), 혹은 원형(圓形)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남해(東南海)란 표현을 쓸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해(四海)가 아니고, 팔해(八海)가 되니깐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남해(東南海)에 있는 큰 섬 이러기도 대단히 힘듭니다.
바다를 나간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어떤 섬들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제주도인 주호(州湖) 마한(馬韓)의 서해(西海)라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이야기는 실로
어마 어마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
마한(馬韓)이 해운(海運) 국가(國家)로써, “한반도와 일본 구주(九州)에 접속이 되어 있음을 중국대륙에 있는 사람
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중국에서 오월(吳越)이라고 하면, 수거(水居)생활을 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칩니다.
그러나 이는 삼한(三韓)에 비하면, “양자강의 하류(下流) 지방에 있는 수운(水運) 국가(國家)임을 중국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4) 사해(四海) 인식과 ‘마한최대(馬韓最大) ~ 도목지국(都目支國)의 함의
따라서 중국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사해(四海) 넘어서의 세계는 논외(論外)의 세계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마한(馬韓)을 이야기 할 때에도 현 중국 화북의 대방(帶方) 남쪽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태양이 돌아서 숨어서 있는 지역까지 말하자면” - 이를 최(最)라고 하는데, 동쪽에는 “마한(馬韓)의 해운
(海運) 국가(國家)로써 접속이 되어 있는 땅이 한반도, 구주 등이 있음이 확실하고, 그 서해(西海)에 큰 섬이 있는데
주호(州湖)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강단(講壇) - 사학자(史學者)들이 “한반도에 삼한(三韓)이 있었다.”은 것이 전부 거짓임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오직 마한(馬韓)만이 최대(最大) 해운국가로써 한반도 전체와 구주에 접속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한(馬韓)은 목지국(目支國) - 이는 양자강의 길목인 오늘날의 숭명도(崇明島)를 다른 삼한(三韓)과 함께
진왕(辰王)을 ‘화백 민주주의로 옹립(擁立)하고’ 공동관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한(三韓)이 고대 중국대륙, 한반도, 일본열도 등을 포함한 최대(最大)의 수운(水運)및 해운(海運) 국가(國家)
였음이 들어나는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쌍알’계란(鷄卵) 구조를 띤 삼한(三韓) - 그 파워(power)의 핵심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을 함께 연관시켜 삼한(三韓)이 자리잡은 구역을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삼한(三韓)은 ‘쌍알’ 계란(鷄卵) 구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양자강 입구의 ‘큰 섬’인 오늘날의 ‘숭명도(崇明島)’ ‘목지국(目支國)’이라고 했으며, 그 위에 진한(辰韓)이
들어섰음을 위지(魏志) 동이전은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진한(辰韓)이 있었던 지역
이는 “삼국지(三國志) 권(卷)30-위서(魏書)30-오완선비동이전 제(烏丸鮮卑東夷傳第)30-한(韓(辰韓)-07/05)”에서
(1) 진한(辰韓) 사람들의 유래
“진한(辰韓)의 땅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의 늙은이(=기로(耆老))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
(秦)의 통일전쟁(=진역(秦役)’을 피하기 위해서 스며들듯이 한(韓)이라는 땅에 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의 언어가 달랐음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직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2) 진한(辰韓)이 산동(山東) 이남에 자리 잡음을 뜻하는 문귀
“ (이 진한(辰韓)사람의 말은) 진(秦)나라 사람의 말과 비슷했으나,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말과는 ‘사물에 대한
명칭’만 달랐다.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이 말의 뜻은 제(齊)나라가 자리잡은 지역이 오늘날 산동(山東)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밑인 강소성(江蘇省)에 “스며
들듯이 왔다.(=來適)”는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양자강 위 산동 밑이면, 이는 분명히 강소성(江蘇省) 이외의 지역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 변한(弁韓)이 있었던 지역.
그럼 다음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한(韓) 조(條)’는 변한(弁韓)에 대해서 크게 봐서 두 문단(文段)으로써
말하고 있는데,
(1) 변한(弁韓)의 ‘앞’ 문단과 ‘뒷’ 문단.
‘앞 문단(文段)’에서는 12개의 국명(國名)과, 정치 체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철(鐵) 생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뒷 문단(文段)’에서는 ‘언어, 풍속, 이웃 국가와의 관계’가 나오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요.
(2) ‘여진한잡거(與辰韓雜居)’와 ‘여왜접계(與倭接界)’의 함의
이 뒷 문단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자유로이 왕래(往來)하면서 ‘섞여서 거주(居住)한다.(=잡거(雜居))
그런데 성곽(城郭)이 있었으며, 그 의복(衣服)과 거처(居處)하는 방법이 진한(辰韓) 사람들과 같았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거처(居處)하는 방법이 같았다.(=居處與<辰韓>同.)”이란 말입니다.
왜냐? 진한(辰韓)사람들은 호수(湖水)가 많기로 유명한 강소성(江蘇省)에 자리잡았기에, 거처(居處)를 호수(湖水)
위의 선박(船泊)에서 문자 그대로 숙박(宿泊 - 이는 호수(湖水= 박(泊))에서 잔다는 것이 원뜻임)했었거든요.
그러니 진한(辰韓)사람들이 선박(船泊)을 타고 와서 자유롭게 양자강 아래에 있는 여러 호수(湖水) - 태호(太湖)
이며, 파양호(鄱陽湖) 등등에서 숙박(宿泊)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성곽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이 두 번째 문단(文段)에서 “ (12개의 진한(辰韓)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 왜(倭)와 더불어
경계를 접(接)하고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 는 기록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을 중국대륙에 있는 사람이 썻다.”는데 있습니다.
사해(四海)가 곧 천하이기 때문에, 동해(東海) 넘어서의 왜(倭)를 칭할때에는
어법상 반드시 “어디를 가면 무엇이 나타나고, 그다음에 얼마를 가면 어떤 왜가 나타난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한,
무조건 사해(四海)안의 왜(倭)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왜(倭)는 무조건, 중국대륙 남해안 쪽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진한(辰韓)의 영역이 양자강 아래 지역임이 여실히 들어나는 것은 바로 첫째 문단입니다.
다. 철(鐵) 생산으로 유명한 ‘선하령(仙霞領)’
(1) 철(鐵) 생산에 대한 기록(記錄)
중요한 구절이므로 좌계가 원문(原文)을 적고, 주(注)를 달아서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문(原文) :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주(注) 1 : 국출철(國出鐵)
여기서 국(國)은 소위 변진(弁辰)12국 전체를 뜻함. 이는 몇 개의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철(鐵)이 생산
됨을 뜻함.
왜냐하면, 한문(漢文)은 유난히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안되는 글인데, 앞에 변진 12국을 나열(羅列)했으면,
‘이 대부분의 국가들은’이란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중 한나라나 두나라 정도의 나라에 철(鐵)이 났다면, 이미 거론한 변진 12국이 있으므로, 그 국명(國名)을
반드시 거론하여야 합니다.
주(注) 2 : 제시(諸市)
제시(諸市)는 ‘모든 시장(市場)’임. 그런데 앞에 ‘변진(弁辰) 12개국’에서 철(鐵)이 나는데, 그 철(鐵)을 취해간 나라
이름들이 삼한(三韓) 전체를 뜻하는 한(韓)과 예(濊), 그리고 왜(倭)가 이 철(鐵)들을 모두 취해간다는 것임.
이 왜(倭)는 중국인들이 알고 있는 천하(天下) 즉 사해(四海) 안의 천하(天下)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왜(倭)도 포함
되는 것임.
따라서 당시대 삼한(三韓)과 예(濊), 나아가 왜(倭)들이 있는 시장(市場) 전부를 가르키는 말임.
주(注) 3 : 이군(二郡)
‘국제 화백 특구’인 조선오군(朝鮮五郡) 혹은 한사군(漢四郡)이 위지(魏志)가 거론할때에는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의 이군(二郡)으로 줄어들었음.
그런데, 이 낙랑(樂浪)은 당시 삼한(三韓)사람들이 ‘겨레’ ‘친척’의 개념으로 ‘박달’혹은 ‘배달’로 읽었다고 했으므로
‘박달’로 읽어야함.
전 문장 해석)
“변한(弁韓)이라는 나라 들은 (공통적으로) 철(鐵)이 났는데, (한반도, 구주를 포함한) 삼한(三韓)사람은 물론이고,
예(濊), 그리고 (중국의 사해(四海)를 넘어선 ‘필리핀’ 등지의 왜(倭)들이 모두 이 철(鐵)을 구해갔다.
(이런 광범위한 세계에 펼쳐진 - 삼한(三韓), 예(濊), 왜(倭)들의) 모든 시장(市場)에서는 ‘물건을 살 때(=(買))
이 철(鐵)을 썼는데, 이는 중국(中國)에서 돈(=전(錢)을 쓰는 것과 같았다.
(뿐만 아니라, ’국제 화백 특구‘인 박달(樂浪)과 대방(帶方)인) 이군(二郡)에 까지 이 철(鐵)을 공급했다.“ 라는 이야
기가 됩니다.
(2) 선하령(仙霞領)의 지리(地理)에 대한 이해.
좌계가 이 구절을 보고 몹시 놀라는 것은 문맥(文脈) 상으로 보면, “변진(弁辰) 12개국 대부분에서 철(鐵)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지역이 있는가? 있습니다. 바로 선하령(仙霞領)인 것이지요.
이 선하령(仙霞領)에 대한 지리(地理)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강의 흐름이 비록 완만(緩慢)하나마, 끝에 가서는
궤(几) 모양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하구의 목지국(目支國)인 영흥도를 통해서 동해(東海)로 빠져나간다는 사실
입니다.
남경이 양자강이 올라가는 왼쪽 어깨 부분에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궤(几)모양의 서쪽에 강서성(江西省)이 들어설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강서성(江西省)의 유명한 호수(湖水)가 바로 파양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양자강이 궤(几) 형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안휘성(安徽省)이 양자강을 양 옆으로 끼고 자리잡고 있습
니다.
절강성(浙江省)은 아시다시피, 양자강 하구 밑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강성 왼편에 남해(南海)에 인근해서 바로 복건성(福建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하령은 안휘성(安徽省)과 강서성(江西省), 그리고 복건성(福建省)에 걸쳐서 마치 반달 모양으로 성(省)
경계(境界) 사이에 산맥(山脈)으로 자리잡은 것이 바로 선하령(仙霞領)입니다.
따라서 선하령(仙霞領)-산맥(山脈)이라고 불러야 옳은 것이지요.
이 선하령(仙霞領)에서는 철(鐵) 생산으로 워낙 유명한 곳입니다.
(3) 전당강(錢塘江)과 금입택(金入宅)
‘삼국지(三國志) 권(卷)30-위서(魏書)30-오환선비동이전 제(烏丸鮮卑東夷傳第)30-한(韓(弁辰)-07/07)’에는 분명
변진(弁辰) 12개국의 대부분이 철(鐵)이 생산된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쉽게 말하여 변진(弁辰) 12개국은 ‘아시아 최대의 제철(製鐵)-국가 연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2개국 중 특정 국가 하나가 아님을 쓰고 있고, 이곳에서 나가는 철이 그당시 ‘아시아 전체의 모든 시장’에서 화폐로
쓰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하령(仙霞領)은 산서성(山西省), 안휘성(安徽省), 복건성(福建省)의 성 경계에 걸쳐서 반달모양 길게
뻗어있기 때문에, 철(鐵)이 나는 변진(弁辰) 12개국이 들어설만한 지역이라는 것이지요.
또, 양자강이라는 천혜(天惠)의 수운(水運)이 있기 때문에, 이 철(鐵)을 그 당시 모든 아시아에서 화폐로써 사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선하령(仙霞領)에서 결국 절강성(浙江省)의 상징인 절강(浙江) - 즉 전당강(錢塘江)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아시아 전체에서 사용하던 화폐였던 철(鐵)을 이 전당강(錢塘江)을 중심으로 해서 공급했겠지요.
문자 그대로 보면, 이 전당(錢塘)은 “돈(錢)의 연못(塘)‘입니다.
당연하지요. 아시아의 모든 시장의 화폐를 공급하는 강(江)이니깐 말입니다.
아무튼, 나중에 이 변진(弁辰) 지역에 신라(新羅)라는 나라가 들어서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보면 “돈(=금(金))이 들어오는 집”입니다.
마치 오늘날 은행(銀行)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명칭입니다.
그런데, 경제 인류학적으로 보면, 이 금입택(金入宅)은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언급된 신화적인 시장(市場)인
신시(神市)에로 들어가기 위해서, 일반 국가의 화폐를 환전(換錢)해 주는 일종의 외환은행이었음이 들어납니다.
이는 변진(弁辰) 12개국이 아시아의 모든 시장(市場)의 기축화폐를 공급하는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이 점 언젠가는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라. 변진(弁辰)은 결국 선하령(仙霞領)과 이 선하령(仙霞領)
- 산맥(山脈)으로 둘러싸인 오늘날 절강성(浙江省)이다.
따라서 변진(弁辰)의 위치는 이 선하령(仙霞領)과 또 이 선하령(仙霞領)으로 둘러싸인 오늘날 절강성(浙江省)임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저 양자강의 하구인 ‘숭명도(崇明島)’인 목지국(目支國) 위의 강소성(江蘇省) 지역이 바로 진한
(辰韓)지역이고, 이 목지국 밑의 선하령(仙霞領)과 그 안쪽의 절강성(浙江省)이 바로 변진(弁辰)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삼한(三韓)은 마치 계란 노른자가 두 개인 - 이를 흔히들 ‘쌍알’이라고 말한다.
- 쌍알이 목지국 상하(上下)로 있고, 그 주변에 흰자위로 둘러싸인 것이 마한(馬韓)이라 할수 있습니다.
마한(馬韓)의 서쪽은 아무튼 양자강의 모든 지류(支流) 가운데 백성들이 종자를 뿌려 땅에 그 뿌리를 내릴만한 가장
좋은 농토(農土)를 죄다 골라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 (= <馬韓>在西. 其民土, 著種植)
또한 동해(東海) 건너서인 한반도, 일본의 구주(九州), ‘오끼나와’인 류구(流球) 모두가 흰 자위인 ‘마한’의 관할 영역
이었다고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주호(州湖)라는 마한(馬韓)의 비밀 병기
좌계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읽고 몹시 경악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 제주도를 뜻하는 주호(州湖)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워낙 중요한 이야기가 내재(內在)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原文)을 먼저 싣고, 좌계가 주(注)를 단 후에,
통괄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문(原文)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豬. 其衣有
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주(注) 1 : 마한지서해중대도상(<馬韓>之西海中大島上)
마한이 해운(海運)으로써 접속하는 지역이 한반도, 일본열도의 구주(九州), ‘오끼나와’인 류구(流球)임을 들어냄.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제주도’인 주호(州湖)를 마한의 서해(西海)라고 할수 없음.
주(注) 2 : 곤두여선비 (皆髡頭如<鮮卑>)
여기서 ‘곤(髡)’은 ‘머리를 스님처럼 빡빡 깍은 것’을 뜻함. 따라서 곤두(髡頭)는 삭발한 머리를 뜻함.
‘선비(鮮卑)처럼 곤두(髡頭)를 한다.’는 것은 삼한(三韓)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제목
자체가 “오환선비동이전 제(烏丸鮮卑東夷傳第)30” 속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 앞에 선비전(鮮卑傳)이 미리 거론
되어 있는 것임. 따라서 이를 참조하라는 뜻임.
보주(補注) 1 : 선비전(鮮卑傳) 첫머리의 중요성
선비전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됨.
원문(原文)
[一]魏書曰:鮮卑亦東胡之餘也, 別保鮮卑山, 因號焉. 其言語習俗與烏丸同. 其地東接遼水, 西當西城. 常以季春大會,
作樂水上, 嫁女娶婦, 髡頭飮宴.
소주(小注) 1 : 선비산(鮮卑山)
대흥안령 산맥 위쪽의 산(山)을 뜻함. 선비족의 일파가 탁발씨(拓跋氏)인데, 이 선비족 탁발족의 발상지로 치는
‘알선 동굴’이 이 곳에 있음.
‘역사 평론가’로 이름을 떨치는 ‘이덕일’씨는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음.
-이하 ‘이덕일’씨의 글임 -
“북만주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설원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200km쯤 가면 내몽고 접경 눈강(嫩江)시가 나온다.
여기에서 북서쪽으로 비슷한 거리를 북상하면 악륜춘족자치기(鄂倫春族自治旗)에 닿는다.
아리하(阿里河)로도 불리는 도시이다. 아리하 서북쪽 산 중턱에는 선비족 탁발씨(拓跋氏)의 발상지인 알선(?仙)
동굴(洞窟)이 있다. 1000 명 이상이 들어가는 커다란 동굴이다.
‘위서(魏書)’ 오락후(烏洛侯) 열전에 따르면 북위의 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 재위 424~452) 때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있던 오락후국에서 사신을 보내 이 동굴이 탁발씨의 발상지라고 알렸다.
태무제는 즉각 중서시랑(中書侍郞) 이창(李敞)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알선동굴 벽면에는 “천자 신(臣)
탁발도(拓跋燾)는…”이라며 지상의 천자 태무제가 황천의 신(皇天之神)에게 제사 지낸 내용이 나온다.
북위 멸망 후 1500여 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알선 동굴은 1980년 7월 중국 현지 연구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순암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조선명호(朝鮮名號)’조에서 ‘동방(東方)은 곧 백두산의 기슭이고
백두산은 선비산으로부터 뻗어내렸다’라고 흥안령산맥과 백두산을 이어서 설명했다.“
소주(小注) 2 : 요수(遼水)와 요수(樂水)
좌계는 이를 새외(塞外)로 나갔다가 마치 물음표(?)처럼 흘러나오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로 봄.
난하(灤河)인 요수(遼水)가 곧 요수(樂水)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음가(音價)가 같고, 단지 요수(樂水)라고 할때에는
제천(祭天) 축제(祝祭)를 할 때에 부르는 별칭인 것 같음.
이렇게 보는 이유는 선비, 탁발족들이 5호 16국 시절에 대거 중국으로 이동해 들어와서 나라들을 많이 만드는데,
이 난하(灤河)가 중국 대륙에 진입(進入)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
제천 축제 때 이 난하(灤河)즉 요수(樂水)에서 크게 전 부족들이 모였는데, “이때에 딸을 시잡보내고, 부인(婦人)을
맞이했다. = 가녀취부(嫁女取婦)”고 위서(魏書)는 말하고 있음. 함.
소주(小注) 3 : 가녀취부(嫁女取婦)와 곤두음연(髡頭飮宴)
이는 선비족들이 제천 축제 때, 여러 부족들이 만났을때, ‘딸을 시집보내고, 또 부인(婦人)을 얻음을 뜻하는데,
이 때에는 ’머리를 스님처럼 빡빡 깍고 (=곤두(髡頭)), 술을 마시면서, 향연을 즐김을 뜻함.
문제는 왜 ‘딸을 시집보내고, 부인(婦人)을 얻을 때, 곤두(髡頭)하는가 하는 것임.
‘머리를 깍는다.’함은 ‘인연(因緣)을 끊는 것’을 상징함.
따라서 ‘시집보낸 딸’에게 아버지로써 ‘더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결의를 사둔 집에 보이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부인(婦人)을 얻을 때 역시 ‘본가(本家)의 의지(意志)에만 따르지 않고, 처가 집의 의지(意志)도 존중
하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깍는다고 좌계는 생각하고 있음.
이는 북천축(北天竺)의 풍습이라고 역시 좌계는 생각함.
해석(解釋) -
“[위서(魏書)]에서는 다음과 갈이 말했다. – 선비(鮮卑) 또한 동호(東胡)의 남은 무리들로, (오환과) 별도로 선비산
(鮮卑山)(의 ‘알선 동굴’에서 (조상(祖上)의 발원지(發源地) )의지하니 이로 인해 ‘선비’라 불리었다.
그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고, 그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접하고 서쪽으로 서성(西城)에 이른다.
항상 늦은 봄에 (이 요수(遼水)가 제천(祭天)할때의 명칭인) 요수(樂水) (행사를 일으켰는데, 이때에는 (모든 부족
(部族)들이) 크게 모여서, 딸을 시집보내고 아내를 맞이했는데, (작은 자기 부족에만 충성하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의미로 북천축(北天竺)의 관례(慣例)에 따라) 곤두(髡頭-깎은 머리)로 하고, (이것이 기꺼워) 제 부족들은
서로 음주를 하고, 향연(饗宴)을 즐겼다.“
- 이상 선비전(鮮卑傳) 인용을 마침 -
좌계가 선비전(鮮卑傳)을 보주(補注)를 상세히 달면서 까지 언급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주호(州湖)로 묘사하고 있는
제주도(濟州道)가 대해운국(大海運國)인 마한(馬韓)이 이 선비 탁발족을 선박(船泊)으로써 제주도에 까지 ‘집단
이민’시켰음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호(州湖)에 대한 설명과 선비전(鮮卑傳)의 내용은 서로 보완(補完)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를 인지(認知)하고서 원래의 주호(州湖)가 소개된 기사(記事: articles)를 주(注)를 다시 달도록 해봅시다.
- 이하(以下) 주호(州湖)에 대한 기사(記事)로 주(注) -
주(注) 3 : 단의위 (但衣韋) 와 천하이위명구(天下以爲名裘)
위(韋)는 동물의 가죽을 ‘목초(木草)액(液)’으로써 기름끼를 빼는 작업인 ‘무두질’을 마친 ‘가죽’을 뜻함.
고대에는 죽책(竹冊)을 이 위(韋)로 꿰멨음.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을 하도 읽어서 이런 위(韋)라는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함.
이를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함.
그러나 이 주호(州湖)의 사람들이 입은 옷이 이런 ‘무두질’한 긴 상의(上衣)의 가죽옷만 입은 것을 뜻해서,
대략 모습이 나체(裸體)로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고 있음.
이는 이 주호(州湖)의 사람들이 역시 해상(海上)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때 마다 잠수(潛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습속(習俗)으로 여겨짐.
얼핏보면, 이 ‘무두질한 가죽 코트(coat)’가 문화수준이 낮은 옷으로 보이지만, 이는 위에서 소개한 선비전(鮮卑傳)
글 다음을 보면 전혀 다름을 눈치챌 수 있음.
보주(補注) 1 : 선비전(鮮卑傳)의 천하이위명구(天下以爲名裘)
위에 이미 소개한 선비전(鮮卑傳) 다음에는 선비족 들이 기르는 동물들 이야기가 나온 직후에, 이들이 사냥해서
얻은 가죽옷인 구(裘) 이야기가 나옴.
그 이야기가 다음과 같음.
“ 또한 초(貂-담비), 놜(豽-원숭이 일종), 혼자(鼲子-다람쥐)가 있는데 그 가죽과 털이 부드러우므로 온 천하가
이를 이름난 가죽옷으로 여긴다.(又有貂、豽、鼲子, 皮毛柔蠕, 故天下以爲名裘.) ”
이는 당시대 때 최고의 가죽옷을 주호(州湖) - 오늘날 제주도 사람들이 입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천하제일의 가죽-옷’ 즉 천하이위명구(天下以爲名裘) 자체를 무역하는 것은 바로 마한(馬韓)이 틀림없
겠지요.
보주(補注) 2 : ‘가죽옷(=구(裘)’과 ‘고래기름’
좌계는 이미 이 싸이트(site)에 “(*) 고래: 우리 민족의 최초의 가축, 하이테크(high-tech)의 문(門) ” 란 제목으로
고래기름이 방냉제(防冷劑)로써 ‘가죽 옷’ 사이에 들어가서 추위를 이기게 하는 하이테크(high-tech)였다는 것을
피력한바가 있습니다.
선비족의 가죽옷이 천하제일(天下第一)로 치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래기름이 가죽 옷 사이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주호(州湖) 사람들이 가죽옷 상의(上衣)만 걸치고 사는 것은 하시(何時)라도 잠수(潛水)할 필요가 있는
삶을 살았는데, ‘찬 물’ 속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注) 4. 호양우급저(好養牛及豬)
이는 오늘날 제주도인 주호(州湖)에 사는 사람들이 “소와 돼지를 키우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제주도의 드넓은 초원(草原)에서 ‘소’를 키우는 것은 그들이 원래 선비족인지라, 우유(牛乳)를 먹기 위함이라고
단순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돼지를 키우기 좋아함은 바로 제주도에 유난히 뱀(=사(蛇))이 많기 때문에, 이 뱀을 잡아먹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안전성을 위해서도 좋기 때문에 이는 확살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소(=우(牛))의 종류가 무엇인지?”, “또 왜 제주도에 그리 많은 말(馬)이 언급되어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주(補注) 1 : 단우(端牛)와 각궁(角弓)
그런데, 이 주호(州湖)에 사는 선비인들의 이야기를 적은 선비전(鮮卑傳)에서 그들의 제천 축제 때, “딸을 시집
보내고, 부인을 얻을때 곤두음연(髡頭飮宴) 한다.”는 이야기 다음에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가 나옵니다.
원문(原文) :
其獸異於中國者, 野馬、羱羊、端牛. 端牛角爲弓, 世謂之角端者也.
이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겠지요.
해석(解釋) :
“(이런 선비들이 키우는 짐승은) 중국(中國)과 다른 이상한 짐승들이 있었다.
그것이 야마(野馬-야생마), 완양(羱羊-야생 산양), 단우(端牛)이다. 단우(端牛)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세간에서
이를 각단(角端)이라 일컫는다.”
이는 놀라운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제주도인 주호(州湖)에서 키우는 소가 바로 단우(端牛)이고, 이 뿔(=각(角))으로써 활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활을 만들 때 들어가는 ‘쇠뿔’은 바로 ‘물소’입니다.
이 ‘물소’를 주호(州湖)에서 대량으로 길렀다는 것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물소 뿔’로 만든 뿔을 흔히들 각궁(角弓)이라고 하는데,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을 쓸 당시에는 각단궁
(角端宮)이라고도 칭했음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더욱기 더 놀라운 것은 이 “물소’를 뜻하는 단우(端牛)가 결국 음력 5월 5일에 지내는 단오(端午)와 완전이 그 글자가
일치하고 있다.” 사실이지요.
바로 이점인 것이지요.
즉 단오(端午) 축제는 저 마한(馬韓)이라는 고대 아시아 최대의 해운(海運)국가가 저 선비족과 남방(南方)의 ‘물소’
- 즉 단오(端午)를 적절한 사육지(飼育地)를 찾았고, 그 적합지로써 오늘날 제주도와 난하(灤河) 근처임이 들어
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단오(端午) 축제는 이런 ‘물소’의 적절한 사육지(飼育地)와 또 이를 재료로 한 각궁(角弓), 그리고 이 ‘물소’와
‘활’의 축제였음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 이상 보주(補注) 1 마침 -
[참고 : 중국 사서(史書)를 읽을 때, 조심할 사항(事項) ]
중요한 것은 왜 위지(魏志) 마한(馬韓) 조(條)를 쓴 사람은 지금 좌계가 설명하는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좌계가 볼 때에는 이것이 중국 사서(史書)의 전통적인 기술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되, 장점(長點)이 뚜렷하게 들어나는 것은 피한다.”는 것이지요.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워낙 주변의 다양한 종족들이 계속 중국을 괴롭히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고....“장점이 뚜렷하게 들어나도록 적으면, 이는 이적(利敵) 행위가 되기 때문에” 저 사마천(司馬遷)처럼
궁형(宮刑)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 사서를 읽을 때는 “전후좌우 문맥을 보아서 ‘연결고리’를 찾고, 심층적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좌계의 지론(持論)입니다.
아무튼, 이 주호(州湖)에는 물론 마한(馬韓)이 저 동남아(東南亞)의 물소를 난하(灤河)와, 나중에 보면 들어나겠지만
- 울릉도인 부상국(扶桑國)에도 물소를 키우고, 오늘날 우리 들의 단오(端午) 축제를 즐기도록한 바로 그 나라임이
분명히 들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호(州湖) - 그러니깐 제주도(濟州道)에 있는 ‘조롱말’을 마한(馬韓) 사람들이 국제적인 해운(海運) 국가
(國家)로써 “선비족이 난하(灤河) 북쪽 - 그러니깐 새외(塞外)에서 키우던 야마(野馬)를 대량으로 방목하지 않았
을까?”하는 가정입니다.
보주(補注) 2 : 야마(野馬)와 ‘제주도의 조랑말’, ‘조로마리’ 주법(走法)
분명 마한(馬韓)의 해운(海運)에 의해서 연계된 선비족들은 야마(野馬)를 키웠음이 선비전에 들어 있습니다.
其獸異於中國者, “(野馬)”、羱羊、端牛. 端牛角爲弓, 世謂之角端者也.
위 문장에 야마(野馬)가 들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문제는 이 “야마(野馬)가 어떤 종류의 말인가?”하는 점입니다.
이것하고 관련해서, 저 몽고기병이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했을 때, 탄 ‘말’이 오늘날의 제주도 ‘말’과 같은 종류인데,
왜 이 말이 그다지도 유명한가를 살펴봐야할 듯 합니다.
소주(小注) 1 : 서양(西洋)말(馬)과 동양 말(馬)의 비교. - 언월도(偃月刀)와 ‘코신’
* 서양말과 동양말의 비교
먼저 서양말과 동양말을 비교해보는 것이 중요할 듯 싶습니다.
서양말이 동양말이 보다 힘이 쎄고,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런데, 이 서양말은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데에는 유난히 힘이 약합니다. 허리힘과 정강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동양 말은 서양 말에 비해서 산(山)을 잘 탑니다.
이런 특징 이외에 이 두 말을 탄 기병(騎兵)이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서양의 기사(騎士)들이 싸울때는 긴 창(槍)을 가지고 싸웁니다. 서로 빗겨가면 한참가서야 비로소
돌아와서 또다시 달립니다.
어찌보면, 물론 무겁디 무거운 완전 몸을 가린 중세(中世)시대의 중장비한 갑옷을 입고서 하는 동작이지요.
꼭 ‘미련 곰탱이’ 같은 기병(騎兵)입니다.
그래도 말이 크기 때문에, 힘이 좋아서 그 무거운 중세(中世)의 갑옷을 입은 기사(騎士)를 싣고 달릴 수가 있는 것
이지요.
* 큰 말(馬)의 비극과 ‘코신’
그러나 말이 크기 때문에, 쓸수 있는 무기가 사실은 장창(長槍) 이외에는 없습니다.
관운장처럼 언월도(偃月刀)를 쓰게 되면, 하하. 자신의 애마(愛馬) 목을 벨 수밖에 없으니깐 말입니다.
기사(騎士)의 무기가 휘드르지 못하고, 찌르기만 하는 것은 비극중 비극입니다.
아무튼, 동양의 말은 ‘키가 작기 때문에’ 휘두를수 있는 무기를 총동원할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기병(騎兵)들은
등자(鐙子)를 탈 때, 꼭 ‘코-신’을 신습니다.
신 끝이 ‘코’가 세워져서 말 고삐를 당기면, 반사적으로 기사(騎士)의 몸이 튕겨져 나가는데,
이때 ‘코’가 등자(鐙子)에 걸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코-신’이 있으면, 말을 타고 급회전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기사(騎士)들은 그 중무장에 불구하고도, 몽고병들은 말이 빗겨나가는 동시에 급회적, 상대방
뒤에서 일격을 가할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몽고 기병 뿐만 아니라, 고구리,백제,신라 기병들은 다 채용하고 있는 필수품인 것이지요.
소주(小注) 2 : 야마(野馬)와 그 훈련법인 ‘됴’, ‘조로마리’ 주법,
* 말(馬)의 지옥훈련 ‘됴’
선비족들이 키운 야마(野馬)는 새외(塞外)의 야산(野山)을 유난히 잘 올라가는 그런 말을 뜻합니다.
키가 작고, 허리힘과 정강이 힘이 좋은 말이지요.
좌계는 이범석 장군의 ‘우둥불’이란 자서전(自敍傳)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여기에 독립군으로써 말을 키우면서,
몽고 사람들이 ‘말’을 훈련시키는 방법인 ‘됴’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됴’는 말을 훈련시킬 때, 물과 음식을 점점 줄이면서 - 야숙(野宿)시키는 가운데 - 일은 점점 많이 시키는 말 훈련
방법입니다.
일종의 지옥훈련인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떤 혹한기나 설산(雪山)등을 잘 올라가는 말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몽고어를 잘 말하는 ‘박원길’ 교수와 이야기를 한 가운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 말(馬)의 세가지 주법(走法)
그것은 말의 주법(走法)이 ‘세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첫째는 말이 경보(競步)로 달릴 때인데, 이때에는 발 한쪽이 반드시 땅에 닿으면서, 아주 상쾌하게 달리는 것이지요.
둘째는 말이 질주(疾走) 할때인데, 이는 앞뒤의 양발을 모아서 마치 토끼가 질주하듯이 모은 두발을 합쳤다가 벌렸다
하는 식으로 달립니다.
그런데 이 두 주법(走法)은 말이 본능적으로 달리는 주법이지 훈련된 주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훈련된 주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로마라’ 주법(走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의 오른쪽 앞발과 뒷발을 서로 밧줄로 묶고, 또 말의 왼쪽 앞발과 뒷발을 서로 ㅏ밧줄로 묶어서 달리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가끔 군대(軍隊)에서 훈련소에서 보면, 꼭 왼쪽 손과 발을 함께 올리고, 오른 쪽 손과 발을함께 올리는 괴이한 사람
들이 나타나는데 - 하하 고문관이라고 합니다만 - 이런 식으로 달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이 이렇게 달리면, 허벅지 힘 이외에 등힘을 사용해서 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훈련에 성공하면, 하루에 평균 800리씩 달립니다.말하자면 훈련된 천리마인 것이지요.
몽고가 전성시에 역참(驛站)이 800리마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있었는데, 이는 바로 이 ‘조로마리’ 주법을 활용
해서 달리기 때문인 것이지요.
800리 등힘을 활용하고 여기에는 내적(內的)인 에너지가 나오는 말(馬)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인 독맥(督脈)이
있기 때문에 피곤함을 모르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다음날에도 또 800리 달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말을 훈련시킬때에는 독한 결심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말은 성격이 아주 급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질이 안맞는 것을 강요하면, 그 분을
이기지 못해, 낭떠러지에 떨어질 정도로 성질이 고약하고 또 급합니다.
따라서 “8마리 죽어도 좋다.” “2마리만 살아서 이 조로마리 주법을 익히면 된다.”라고 독한 결심을 하고 훈련을
시킵니다.
* 말(馬)의 야생(野生) 복귀능력 - ‘조롱말’과 관련
아무튼 성공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 이 주법이 몸에 배이도록 훈련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말은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가운데 가장 빨리 야생(野生) 상태로 돌아가는 동물입니다.
한 10일 정도만 안타면, 말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특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껏 익힌 조로마리 주법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조로마리 주법을 익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처럼 조로마리 주법을 익힌 말들 가운데 태어난 말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조로마리’ 주법으로 달릴줄 안다는 것이지요.
이런 조로마리 주법을 자연 습득하는 것을 박원길 교수의 말로 몽고말의 어원(語源)으로 볼 때, ‘조롱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호(州湖)는 아시아 최대의 해운(海運) 국가인 마한(馬韓)이 저 선비족의 야마(野馬)를 끌고 들어와서
“조로마리”주법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장소였음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소주(小注) 3 : 내구마(內廏馬)
구(廏)는 소나 말을 외양간에서 ‘먹이’를 주어서 키우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내구마(內廏馬)라는 것은 왕실(王室)에서 특별히 키운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마한(馬韓)과 같은 해운(海運) 국가에서 키운 내구마(內廏馬)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띱니다.
* 파고(波高)를 견디는 ‘됴’를 들인 말(馬)
그것은 말(馬)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을 경우, 울렁거리는 풍파(風波)에 시달리면, 금시 병(病)에 걸리는 치명
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운(海運)을 하는 나라에서 키운 내구마(內廏馬)는 일부러 이 말을 ‘됴’를 들일 때, 파고(波高)에 울렁거리는 배
속에서 ‘됴’를 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아무 말이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山)을 잘타는 말(馬) - 그래서 근육과 신경이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환경
에 잘 적응하는 종류라야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주호(州湖)에서 야마(野馬)를 키우는 것은 바로 파고(波高)에 견디는 마한(馬韓) 연맹의 왕가
(王家) 직속의 내구마(內廏馬)를 키우는 장소임이 들어난다고 할수 있습니다.
보소주(補小注) 1. 제주도의 ‘조롱말’과 ‘몽고의 일본열도’에 대한 사전 준비설
이런한 좌계의 이야기를 “그 제주도 조롱말은 몽고가 일본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 말을 키운 것 아닌가?”하면서
반문(反問)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반도 남부 부산(釜山)에서 잠깐 배(船)를 타고 가면, 구주(九州)이고, 일본 열도인데, “왜 지척(咫尺)을
두고, 멀리 배(船)를 빌려서, ‘조로마리’ 주법을 익힌 귀한 말들을 멀리 우회, 제주도에 방목해야하는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설혹 어떤 전략적 이유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주도에 ‘조로마리 주법’을 익힌 말이 들어온 것이 이 몽고의
대일본 전쟁의 사전준비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좌계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숨겨진 논리’대로 선비(鮮卑)의 야마(野馬)가 마한(馬韓)에 의해서 길러졌다.”
고 보는 것입니다.
- 이상 선비전(鮮卑傳)의 참조에 대한 주(注)를 마치고, 주호(州湖)에 대한 원문(原文)의 주(注)로 돌아감. -
3. 주호(州湖)의 ‘차별(差別) 거래’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
원문(原文)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豬. 其衣有
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이 원문(原文)을 다시 적고, 또다시 주(注)를 달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 문장에서 ‘기인차단소(其人差短小)’와 ‘승선왕래 시매한중(乘船往來, 市買<韓>中.)’이라는 구절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거래
1) ‘승선왕래 시매한중 (乘船往來, 市買<韓>中.)’의 함의
먼저 ‘승선왕래 시매한중(乘船往來, 市買<韓>中.)’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삼한(三韓) 사람들에게만, 물건을 매매(賣買)했다.”는 이상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당시 삼한(三韓)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주호(州湖)인들이 물건을 사지도 않고, (또 기록은 안되어
있지만) 팔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최고급의 ‘고래기름을 넣은 가죽옷’을 입은 사람 - 따라서 부유한 사람들이 왜 삼한(三韓)
사람들과 만 거래하지?”하는 의문이 있었고,
예리한 관찰력으로 보니깐, “그들이 결국은 저 선비(鮮卑)와 같은 말을 쓰며, 풍속을 지니고 있더라.
그러니 그들이 사고 파는 것 역시, 선비족들이 키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고급정보를 후세(後世)에게 전하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보니깐, “삼한인(三韓人)들이 그 당시 중국대륙에서 가장 탁월한 수운(水運) 및 해운(海運)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800리씩 달리는 천리마(千里馬)인 야마(野馬)를 타고, 또 각궁(角弓)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물건들이 분명 육지(陸地)를 통해서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저 주호(州湖) 사람들이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 그들은 오직 삼한(三韓) 사람들 하고만 거래하니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2) 기인차단소(其人差短小)의 함의 - 부석선(浮石船)의 제조공장과 관련
이는 “주호(州湖)사람들이 유별(有別)나게 키가 작고, 또 몸이 여렸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선비족(鮮卑族)은 장대(壯大)한데, “왜 같은 선비족 말을 쓰고, 또 풍속도 같은 저 주호(州湖)
사람만 저다지도 단소(短小)하지?”하는 의문(疑問)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 단소(短小)의 이유 = 부석선(浮石船) 시공(施工)을 위한 마한(馬韓)의 차출(差出)
바로 제주도에서 나는 화산(火山)의 영향으로 생긴 - 물에 뜨는 부석(浮石)이 있고, 이 부석(浮石)으로써 ‘미역’등을
붙이고, 안에는 ‘고래와 대화하는 어떤 장치’를 싣고는 ‘떠돌아다니는 섬’을 제작하는 곳으로써 안성맞춤인 곳이
바로 제주도인 주호(州湖)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석선(浮石船)을 만들려면, 잠수(潛水)를 자주해야하며, 때로는 수중(水中)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복잡한 시공(施工)을 해야합니다.
그러자면 장대(壯大)한 사람보다 아무래도 단소(短小)한 사람들만 차출(差出)해서 이 작업을 완수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한(馬韓)은 저 난하(灤河) 상류 - 나아가 선비산에 까지, 진출해서, 결국 유난히 단소(短小)한 사람만
골라서, 고래가 끄는 ‘부석선(浮石船)’을 시공(施工)시켰던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이제, 다시한번 주호(州湖)에 대한 원문(原文)을 싣고, 지금까지의 주(注)를 충분히 활용해서 그 숨은 뜻이 남김없이
들어나도록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한(馬韓)이 동남아의 ‘물소’ 그리고 저 새외(塞外)의 야마(野馬)등을 주호(州湖)에서 집중 재배했음을 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原文)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豬. 其衣有
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해석(解釋)
“(삼한(三韓)에 관해서 특이하게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아시아 최대의 해운(海運) 국인 마한이 돌아다니는 동해
저편의 한반도 및 구주, 필리핀 등지의) 마한의 서쪽 바다에 큰 섬이 있는데 그곳에 주호(州湖)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선비족(鮮卑族)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키가 작았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 그러나 이는 ‘고래가 끄는 부석선(浮石船)을 설치하기 위해, 시공(施工)을 위해 잠수하여 움직이기 좋기 위해서
마한(馬韓)사람들이 특별히 차출(差出)한 사람이다.
- 언어는 삼한(三韓)사람과 달라서 선비족 말을 썼으며, 또한 그 머리 역시 선비족들의 풍속과 같았다.
단, 그 옷은 천하의 최고급품인 ’고래기름을 넣은 가죽옷‘을 입었고, 수소문해보니 이 주호(州湖)라는 땅에서 그들이
각궁(角弓)의 재료인 물소와 돼지를 기르기 좋아한다.
최고급품 ’가죽 옷‘을 입는 종족인데도, 윗옷만 입고, 아래는 안입어 흡사 나체(裸體)위에 ’가죽옷‘을 덮어씌운듯
하다. 배(船)를 타고 왕래하는데, 오직 삼한(三韓)사람하고만 거래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저 삼한(三韓)사람들의 각궁(角弓)과 ’하루에 천리(千里)씩 가는 그 야마(野馬)는 이들이
공급한 것이 아닐까?!“
4.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삼한(三韓)에 대한 요약.
좌계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삼한(三韓)에 대한 것을 읽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 전체적인 모습 - ‘쌍알’의 계란형 구조.
1). 바다에서 양자강 입구로 들어오는 ‘숭명도(崇明島)’에 목지국(目支國)이 있다.
2). 이 목지국(目支國)을 정점(頂点)으로 해서 큰 원(圓)을 그리는 곳 서쪽으로는 황화와 양자강의 지류들이 만나는
태백산으로부터 모든 지류(支流)에 ‘농사짓기 좋은 땅만 고르되, 호수(湖水)나 포구(浦口)가 좋은 곳은 전부 마한
(馬韓)이 골라서 네트워킹(networking)해 있었고,
동해(東海) 건너서 저 선비산이 있는 곳부터, 한반도, 구주(九州), 필리핀 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수운(水運)및
해운(海運), 나아가 ’조로마리‘주법을 익힌 야마(野馬)에 의한 육운(陸運)까지를 담당하는 것이 마한(馬韓)이었다.
3) 그들의 비밀병기가 주호(州湖)라고 하는데, 이들이 각궁(角弓)과 야마(野馬)의 공급원으로 보인다.
4) 목지국 위에는 진한(辰韓)이 있었는데, 이 나라는 모국어(母國語)를 유지하면서, 급속히 서로의 언어를 익히는
‘사회적 고안’을 지니고 있었다.
5) 목지국 밑에는 변한(弁韓)이 있는데, 이 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제철(製鐵) 연합국이면서,
중원의 일부국가를 제외한, 모든 아시아의 기축화폐를 철(鐵)로 공급하는 국가였다.
6) 전체적으로 보면 목지국 상하에 ‘두 노른 자위’를 지니고, 그 주변에 이를 키울수 있는 마한(馬韓)이라는 흰자위가
있는 구조이다.
나. 삼한(三韓)에 대한 근본적 인식. - “그들은 큰 일을 냈고, 또 큰일을 낸 기반을 가지고 있다.”
결국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들어난 것은 다음 같은 사실입니다.
1. 삼한(三韓)의 핵심 파워(power)
결국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한(馬韓) -
중원(中原)을 황화와 양자강의 지류를 총괄하여 중원(中原) 내부를 관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또다시 에워싸는 아시아 최대의 수운(水運), 해운(海運), 육운(陸運) 국가 연합이다.
진한(辰韓) -
언어(言語)가 달라도 이를 ‘어린이’들이 ‘결승-가림토’로써 시각화시켜,
‘어른’에게 단기간에 집단적으로 학습시키는 능력이 있는 국가연합이다.
변한(弁韓) -
아시아 최대의 제철 연합국이며, 일부 화폐를 쓰는 중원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아시아 시장의 기축화폐를
공급하는 국가들의 연합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들의 후예가 그토록 강한 힘을 ‘중국 대륙’안에서 행사했고, 또 앞으로 행사할 것 같으니....
사서(史書)를 읽는 한족(漢族)들은 유념할 것 !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