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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IMF 때 뉴델리에 있었다
새해 벽두에 두어 곳에서 시무예배와 시무식에 참여하였다.
새해덕담과 소원을 나누는 시간에 사람들이 암담한 경제전망과 전쟁 위기에 대한 염려를 토로하였다. 코로나 때보다 더한 경제 위기로 더 많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파산하고 개인들의 삶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고였다. 또한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국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말미에서는 잘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언급을 하였지만 우울한 스토리가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마음이 짜하게 아파왔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직면한 현실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포장하며 왜곡한 유튜브가 그런 생각을 하도록 영향을 미쳤을까?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 중에도 유튜브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유튜브 영향이 지대함에 분명하다.
유튜브의 동영상 95%가 사실이 아니라고 팩트체크에서 통계를 밝혔지만 세뇌 된 사람들은 유튜브의 기사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을 타겟으로 하는 부정적이고 충격적이고 극단적이고 선동적인 유튜브의 영향으로 ‘안 된다’와 ‘힘들다’는 말이 우리 사회와 우리의 뇌와 정신을 지배하고 우리를 자기 그룹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컨트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바라기와 복지바라기가 된 사람들은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꼭두각시처럼 그들의 말을 반복한다. 갈수록 의심하지 않고, 의문 한 번 제기하지 않고 유튜브의 영상을 사실로 진리로 믿고 따르는 풍조가 만연하여 사회는 흑백논리에 갇혀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위기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수출입이 쉽지 않고 노동인력의 세계적 이동이 막혀서 모든 나라들이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의 내전 등이 악재가 되어서 세계 경제가 경색되고 있다. 한국은 이런 문제에 한술 더 떠서 남북대립으로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고 있다. 그림으로 보면 결코 밝은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 인간의 일은 인간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따라 해결이 가능하기도 하고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는 차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위기는 위기를 맞이하는 자세에 따라 절망과 죽음에 이르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전환과 도전,변화와 갱신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통찰력과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물질 위주의 방만한 삶을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무한 성장에의 욕구와 경쟁을 내려 놓을 것을 요구한다. 윈윈하고 공생하며 공존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변의 도움없이 살 수 없는 약자들을 돌볼 것을 권면한다. 대양을 횡단하는 대형선박이 폭풍우와 거친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배의 짐을 버리듯이 고난의 때는 버릴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배를 보전하기 위해서 같은 마음으로 배를 지키며 동료들의 건강과 생명을 서로 배려해야 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의 최대 위기는 1997년 말에 발생하였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나고 국가가 도산의 위기에 빠진 그 시기를 우리는 IMF 때라고 부른다.
나는 그 때 뉴델리에 있었다. 영화나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전개되었다. 강세가 된 달러가 한화를 여지 없이 짓밟았다. 인도로 떠날 때 한화의 가치가 1달러에 890원 정도였는데 순식간에 1달러에 1,500원정도가 되었다. 인도 루피로는 1루피 당 10원꼴이었는데 점차 올라가서 1루피 당 45원까지 올라갔다. 한국 돈이 폐지가 되었다. 누가 우리 돈의 가치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말인가?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는 돈이 폐지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돈의 가치가 반 토막이 되며 뉴델리 한인사회가 물 끓듯이 끓어올랐다. 아무 보장도 없이 믿음으로 무식하고 용감하게 인도에 온 나는 뉴델리 거지로 전락하는 느낌이었다. 두려웠다. 모국도 아닌 외국에서 맞이한 IMF로 ‘재수가 나빠서 들어오자마자 IMF’ 라고 탄식하였지만 불안과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날마다 회사의 지점들이 폐쇄되고 철수함에 따라 사람들이 줄줄이 철수하였다. 회사나 은행만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철수하였다.
개 교회가 파송한 사람은 개 교회의 소환으로 철수하였고, 선교회가 파송한 사람은 선교회가 소환해서 철수 하였고 노회가 파송한 사람은 노회의 소환으로 철수하였다. 이도저도 아닌 자기 열정으로 온 사람들은 자기의 판단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나는 인도에 온지 1년도 채 안되었지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인도사회의 계급차별과 빈부격차, 천차만별의 생활환경과 수천의 언어와 문화에 기가 딱 질려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IMF 충격으로 줄줄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고 특별히 소환을 당해 돌아가는 선교사들이 너무 부러웠다. 돌아가고 싶은데 나에게는 핑계거리가 없었다. 한국에는 나를 소환할 교회도, 선교회도, 노회도 없었다. 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자의로 결정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눈물로 밥을 삼고 불안을 반찬 삼아 먹으면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하였다는 좌절감으로 몸부림을 쳤다.
“하나님! 제게는 후원회도 없습니다. 제게는 선교 현장도 없습니다. 이제 인도 말을 배워서 언제 일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인도용이 아닙니다.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나라가 경제가 흔들리고,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제가 인도에서 무슨 선교를 하겠습니까? 사는 것도 힘든데 장차에 선교비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나라를 생각하면 마음이 심히 무겁습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도 마음에 걸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 지금이 무리함이 없이 조용히 돌아 갈 수 있는 돌아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부디 제발 돌아가서 마음 편히 한국교회를 섬기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은 아주 명쾌하였다.
내가 결단하고 자의로 인도에 왔으면 내가 돌아가는 것을 자의로 결정해서 돌아가고, 인도에 온 것이 당신의 소명에 응답한 것이면 당신의 사인이 있을 때까지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나는 바로 “하나님 당신의 부르심으로 왔으니 당신의 사인을 따라 움직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도 토를 달았다. “당신께서 제게 주신 약속을 꼭 지키십시오.”라고.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내놓은 주방용품과 가구들을 하나둘 사서 정착하는 집의 꼴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도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내핍생활로 생활비를 최소화하였다.
한국에서 수입 된 과자와 기호식품을 일체 끊었다. 과일이나 채소도 제철의 것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았다. 사탕과 과자, 빵 등 간식거리는 고아원이나 나환자 마을에 갈 때 구입하였다.
자가용도 없었지만 가급적 걸어 다녔고 학교에 갈 때는 오토릭샤를 타고 다녔다.
영화, 여행, 외식을 일체 삼갔고 특별히 대접해야할 손님이 있을 경우에는 식당을 이용하였다.
힌디와 영어를 배우는 일에 몰입 • 집중하면서 공부하는 기쁨으로 IMF 고난도 고통도 곧잘 잊어버렸다. 그리고 인도 사회와 문화와 종교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인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였고 인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비로소 떨구게 되었다.
이 때 내핍으로 다툼이 잦았지만 피 같은 후원금으로 생필품이 아닌 것을 사는 것을 내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듯 3년을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지내고 나니 한국이 IMF를 극복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하여 인도에 도착한지 4년 만에 남인도선교의 첫 걸음을 떼게 되었다.
IMF 때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절망과 고독, 고뇌의 시간을 버티고 견뎌낸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가난과 부에 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없으면 덜 먹고 있어도 아껴 먹는 생활이 일상화 되었다. 사역에 대해서는 없어도 있는 것처럼 넉넉하고 당당하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겸허히 끊임없이 펀드 레이징을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새 일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위한 예산을 이미 편성하였다고 믿고 담대하게 출발한다.
말이 그렇지! 생활비를 책임지고 송금해주는 후원회도 없고, 그렇다고 후원을 약속한 교회나 노회나 선교회도 없이 한국 경제 총체적인 파국의 시간에 외국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지 않고 힘들다고 하소연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 자주 하소연하였다.
“아버지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고 저는 일꾼입니다. 인도에 와서 보니 회사의 주인인 사장이 일꾼의 월급과 집을 다 줍니다. 삶을 보장해줍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아버지! 사랑하는 당신의 일꾼이 굶주리지 않도록, 낙심하지 않도록 제 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은 그때부터 사반세기 동안 종의 삶을 철저하게 책임져주셨고 뿐만 아니라 사역현장도 풍성하게 공급해서 많은 나눔과 섬김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고난의 시간에 나의 꿈과 욕망을 포기하고 비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맡겼다.
고난과 위기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빼앗고 고통과 절망을 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만 그것들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 절망에 빠진 마음이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결코 고난과 위기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IMF 때 한국 사람의 절반 정도는 죽었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였다.
고난과 위기는 시각의 문제다. 관점을 달리하면 재성장, 재성숙의 시간이 되고 도전과 혁신, 축복의 시간이 된다.
IMF 앞에서 무력해진 나는 꿈과 욕망, 인도선교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의 시간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알아서 쓰시라고 하였다. 생활고에 허덕거리지 않기 위해 안일과 편리를 버리고 불편과 검소를 선택하였다. 조급하게 성공하려는 마음, 성취하려는 욕망, 명예와 자존심을 버리고 그냥 살아서 버티기로 하였다. 아무런 열매가 없어도 인도 땅에서 견디며 지내는 것만으로 감사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버티고 견디다보니 고난이 더 이상 고난이 아니고 위기가 더 이상 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의 시간이 나를 포기하며 비우는 겸손한 삶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시켰다. 성숙시켰다. 위기가 축복이 되었다. 자기를 포기하고 비우는 축복, 범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 있음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는 축복, 고난 받을 수 있는 축복, 고난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축복,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축복,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는 축복, 은혜 받은 사람들을 만나는 축복,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생각하는 축복 등이었다.
인도에서 지속적으로 겪은 고난으로 터득한 것은 고난이 나와 세상을 살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고난은 고난 받는 자에게 새로운 전환과 변화,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이다.
코로나 이후 한국이 총체적으로 고난과 위기에 빠졌다면 하나님께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변화와 갱신,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것이다. 절망에 빠지라고 보내준 메시지가 아니고 살리기 위하여 보내준 메시지이다.
그러나 결코 나눔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 때 다른 사람들 또한 힘들다. 세상이 불경기에 빠질 때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아와 과부들이 더욱 힘든 것은 불안에 빠진 세상 사람들이 주머니를 닫기 때문이다.
IMF로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성스러운 밥 나눔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덜 먹고 덜 입고 하면 될 터이므로 스프리나의 소개로 고아원 두 곳을 선정하여 지속적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환자 자녀들이 모여 있는 뿌렘담고아원의 매씨원장의 안내로 나환자 마을 여러 곳을 다니게 되었다.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샌드위치와 야채전을 직접 만들고 바나나와 사탕을 사가지고 가서 나누며 함께 찬송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 때 손가락이 없는 삶의 불편과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환자들에 대한 연민과 자비가 가슴에 파고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뉴델리를 떠날 때 까지 고아원을 섬길 수 있었으며 한 곳은 중단된 건축을 재개하여 완성시켰다.
그 건축비는 과거에서 왔다. 내가 전도한 초등학생이 성장하여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게 되자 그 부모님이 너무 기쁜 나머지 나를 찾았다. 어느 날 이메일이 왔는데 자기아들을 신앙의 길로 잘 인도해준 것에 대한 감사헌금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다가 뿌렘담으로 연결시켜서 짓다가 만 건축을 완성시켜 주었다.
참으로 놀라고 신기한 것은 바바지 고아원이 세탁기와 컴퓨터를 구하였을 때 그 비용이 한국에서 온 것이었다. 뿌렘담 고아원에 아이들의 침대와 책상을 기증하고자 하였을 때고 그 경비가 한국에서 왔다. 고아원에 쌀이 떨어지면 쌀값이 왔고 학비가 필요하면 학비가 왔다.
비록 부분적인 작은 나눔과 섬김이었지만 IMF 때 뉴델리 고아원 경험은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임을 확인하는 놀라운 경험이었고 이 때문에 그 후로 세 개의 고아원의 운영을 지원하며 고아원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IMF 기간에 돈이 없어서 나눔을 포기한 일이 한번도 없었고 고아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분명히 빈손인데 나누고자 할 때, 도움 요청이 올 때는 거짓말처럼 한국에서 후원금이 왔다. 이 놀라움 경험 때문에 아무리 어려워도 나눔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과 나눔을 기뻐하고 그런 나눔을 하는 사람들에게 창세전부터 예비된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 인도 경험으로 말미암아 나는 늘 고아들과 과부들, 빈민 가정들과 병든 사람들,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이 어딘가에 준비되었다고 믿으며 나누고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노력한다. 그래서 일까? 코로나기간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식탁, 사랑의 쌀 나눔을 인도와 네팔, 미얀마까지 펼쳐서 무려 10여 곳을 지원하게 하셨다.
IMF 때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뉴델리에 있었다. 무서운 고독과 불안, 절망과 낙심, 고통과 두려움을 참고 견디는 사이에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께서 그 아픔으로 나를 새로이 빚어주셨다. 그렇다! 고난은 새로운 피조물을 빚는 하나님의 기회이다.
한국이, 한국 크리스천들이 고난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는다. 아직도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통해서하실 일이 있으시다.
2023.1.5.목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