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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지연전(해군 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해군작전은 6월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한국해군과 유엔해군이 해양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수행한 해상봉쇄, 함포지원, 상륙작전, 해상수송작전, 항공강습작전 등을 말한다.
전쟁 초기 해군은 게릴라 부대원을 싣고 동해안에 기습적으로 침투한 북한 함선 일부를 막아내지 못했으나 유엔해군이 한반도 해역에서 작전을 개시한 6월 29일까지 단독으로 고군분투하면서 38도 이남으로 침투하는 적 함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유엔의 한국에 대한 원조 결의가 통과된 후에 미극동해군 함정이 6월 28일 한국 해역에 도착하고 6월 29일에는 영국 함정, 30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함정이 도착하였으며 29일 묵호 앞바다에서 미국 주노함의 오폭에 의한 한국의 JMS-305정 침몰로 인한 합의에 따라 37도선 이남은 한국군이 그 이북은 유엔군이 수행하게 된다.
제 2 절 한국해군 작전
1. 부대편성 및 운용
해군본부에 '50. 6월 25일 09:00에 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있었으며 당시에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소장)은 PC(구잠함) 3척을 미국에서 구매하고 복귀하던중 하와이에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되고 김영철 댈령이 임시 지휘를 하게 된다.
해군본부와 전투사령부는 6월 27일 서울에서 수원으로 다음날 대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해군은 작전 공백을 없애기 위해 진해통제부를 설치하고 작전권을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6월 29일 국방부로 부터 한국은행의 금. 은괴를 수령하여 보관하라는 업무를 수행하여 헌병 1개 소대의 엄호를 받으며 트럭 2대에 금 1,5톤, 은 2.5톤 등 89상자를 싣고 서울을 27일 떠나 28일 대전-진해로 운반하게 된다.
한국해군은 전쟁 이전에 LST 1척(천안), AKL 1척(부산) 등 수송함 2척만을 보유했는데 전쟁이 발발 하여 교통부에서 운용중인 LST 7척과 FS(이후 AKL로 개칭) 7척을 징발하여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PC함은 3' 포를 장착하고 나머지 함정들은 37mm 대전차포를 장착하였다.
가. 동해안 작전
묵호경비부, 포항경비부, 부산경비부, 제2정대 등 부대들이 PC-701 1척, 그리고 YMS-503 등 9척, JMS-304 등 5척, LST 문산호 등을 이용하여 동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1)동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
진해에서 동해로 출한 명령을 받은 701함은 6월 25일 출발하여 6월 26일 대한해협에서 1,000톤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킨후 동해로 이동하여 포항근해에서 업무를 하였다.
하지만 동해의 높은 파도와 함정의 내파 능력과 포 사정거리 제한으로 인해 실효성이 제한되어 PC-701함등이 남해와 서해안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국 해역에 가장 먼저 도착한 미군 함정은 경순양함 주노함이였으며 6월 28일이다.삼척-강릉간 해역을 봉쇄하기 위해 묵호 앞바다로 진출중 오인으로 오폭사고가 발생도 한다. 6월 29일 23:11부터 최초로 울진에서 영해에 이르는 접근로상에 최초로 함포사격을 실시하였다.
(2) 구암산지구 전투
묵호와 포항경비부 육전대가 '50. 7월 11~17일까지 영천 북안 구룡산(675m)과 포항 죽장의 구암산(807m)부근에서 벌인 전투다. 6월 29일 북한군 제5사단과 경비 제1여단이 강릉을 점령하고, 제2사단과 제12사단이 춘천, 홍천을 점령한 후 양평 및 횡성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항에서 묵호경비부가 LST편으로 철수 중 죽변에 적이 침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7월 1일 죽변에 상륙하여 적군 10명을 사살한다. 또 7월 2일에는 포항경비부가 울진에서 적 탐색대와 교전하여 적 27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로를 획득하였다.
동해안 임원진 부근에 상륙한 적 제766게릴라 부대(3개 대대 규모) 중 1개 대대가 울진을 거쳐 7월 10일에 포항 북쪽 영해-영덕에 이르고 7월 11일에는 춘양방면으로 이동한 2개 대대에서 300여명의 게릴라가 구암산 방향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이들은 주로 보현산을 주된 거점으로 하여 아군과 대치해오다 북한군 주력이 남침해오자 이에 가세하여 후방교란에 열을 올렸다.
포항경비부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7월 11일 안강 지구로 출동시켰으며 적 1개 중대가 영천 구룡산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7월 13일 04:00에 구룡산 중턱 적 진지를 기습하여 적 사살 8명, 6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7월 14일에는 포항 죽장 방면으로 적을 저지하기 출동하다 기계 비학산(762m) 중턱에 100여명의 게릴라를 식별하여 추적을 시작하여 영일비행장(일제 때 건설되었으며 전투기 출격이 처음에는 제한 되었으나 미 공군 공병대의 활주로 보수공사로 7월 14일부터 활용가능)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7월 16일 500여 명으로 증강된 적이 구암산 남쪽 합덕리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하여 7월 17일 공격을 개시하여 구암산을 점령하고 적 생포 4명, 사살 161명의 전과를 얻었다.
(3) 탐사 및 탐문 결과
"칼이나 도끼로 무장한 적 게릴라 부대?"
합덕을 중심으로 북에는 구암산이, 서쪽에 보현산과 면봉산이, 남쪽에는 수석봉과 봉화산이 동쪽에는 침곡산이 서 있어 게릴라 부대의 활동이 원활한 지역이다.
백암산,일월산, 칠보산 등에서 내려서는 산악지대는 그 당시는 교통망이 제한되고 살아가는 주민들은 주로 화전수준의 어려운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게릴라 부대들의 잠입이 쉬웠고 약탈과 착취에도 별로 대항하지 못하는 실태라 보면 된다.
또한 게릴라들은 이미 전쟁전에 사전 침투한 게릴라들이 태백산맥을 타고 보현산에서 울산의 신불산까지도 침투했다는 설이 있고, '48년 4.3사건에서부터 10월의 여수-순천사건,11월의 대구 6연대 반란사건까지의 정황에서 지역프락치들이 내륙으로 숨어들어 사실 지역주민의 비호속에 일부는 자생하고 있었다는 추론에어 보면 그들의 무장정도는 가정집에 있는 농기구가 무기로 갖추어져 있었다고 본다.
"수석봉에 엎드려 죽은 용사들은 누구일까?"
나는 이러한 과찬(?)의 해군 육전대의 승전지를 찾아 나섰다.
초기 전투에서 전투의 대명사인 어느 육군도 북한군가의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데는 쉽지않앗다. 그런데 해군 육전대가 몇백명의 게릴라 부대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정말 적과 싸워서 이겼을까?" 이런 의문점을 들고 맨 처음 찾은 곳은 보현산이었다. 보현산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간 것이나니라 국군 제8사단이 영천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그곳의 가장 높은 산이 보현산이다. 수석봉은 보현산의 동쪽 자락이며 기룡산(961m)의 뒷산이다. 입암리에서 탐문활동 중에 수석봉 정상부근에 군인이 일렬로 죽어서 많은 인원이 묻혀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우리 전사에는 그렇게 많은 전사기록이 없으며 수도사단이 안강 기계로 철수하는 과정에 일부부대가 또한 재반격 작전에 이곳에 전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산밑에 교통호가 몇km 굴토되어 있고 어릴 때에 해골을 발고 차고 놀았다.
나는 안강 기계전투 관련 탐사 및 탐문을 위해 오가던 중에 영천 휴게소에서 잠사 휴식을 갔던 중에 한 어르신으로부터 보현산 관련 제보를 받았다. 이 어르신은 본인이 나이 15살에 보현산에 올라서 여기저기 널려있는 해골을 많이 보았다 한다.
그러나 지금 보현산은 천문대가 들어서 정상 부근에 원형은 다 사라지고 없는 실정이다. 짚차를 타고 정상에 올라 고지 정상 앞쪽의 안봉산(1,100m)에 이르는 구간을 탐사하고 기룡산을 오르려 내려오려는데 산불 감시원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유해발굴팀입니다. 혹시 이곳이 전투지역인데 알고 계세요?"
"저는 화북 월곡리 사람인데 전쟁이 7살에 났고 어려서 뭔지도 모르는데 우리 동네 뒷산인 방가산(756M)에서는 탄피도 보고 전쟁 이야기도 들었지만 이곳은 잘 모릅니다. 다만 여기저기 포탄구멍같이 움푹 패인 곳이 많이 있는데 능선이 아니고 정상 오르기전 바로 8~9부 정도에 많아요."
"기룡산은 옛날에는 능선에 사람뼈가 굴러다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합덕리에는 전투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고 구암산에도 별다른 흔적이 없는데 사살된 161명의 시체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입암으로 내려서 보현산 뒷골 두마리에 들어갔다. 전쟁시절부터 이곳에 살아왔다는 아저씨는 당시에 게릴라들이 전쟁전부터 들어와 머물고 있으면서 마을에 내려와 먹을 것도 가져가곤 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해봐야 동네에 한번 들어와 보곤 나가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되었고 오히려 이들이 마을사람처럼 느껴질 정도 였단다.
"안봉산에서 보현산에 이르는 구간에 얼마전까지도 사람뼈가 남아서 있었어."
"혹시 마을 입구 수석봉이라는 곳에 전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나요? 합덕리 안쪽 구암산지역에도 전투가 많았다던데."
"비행기가 불폭탄을 쏘아 많은 지역이 다 타버렸고 숨을 곳도 없었어.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가져가고 동네 사람들이 일부는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고 봐야지."
"그럼 지역주민이 올라가서 죽은 경우도 있습니까?"
"이동네에서 죽은 사람은 없어. 그런데 이야기는 많은 인원이 남한사람들로 서울이나 인천, 이천 여주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많았지요."
"저 산 밑으로는 예비군들이 투입되어 훈련한다고 교통호를 파기도 했고 천문대 앞으로 안봉산에도 호를 파기도 했어. 김신조가 오고 얼마 있다가 전쟁준비한다고 그렇게 했어요."
"그럼 수석봉에 많은 유해가 죽어서 묻었다고 하던데 마을 사람들이 간 적은 없습니까?"
"우리동네는 없어요. 아마도 입암리 사람들이 올라갔겠지. 우리는 주로 이곳 안면봉하고 보현산에 올랐는데 옛날에는 널려 있었다 하던데 난 별로 못 보았어요. 몇구는 묻었다고 들었지만."
"그렇구나! 보급에 유리하고 아군의 접근이 어려웠구나."
합덕리로 들어가 석계리까지 들어갔다. 죽장 상옥리에서 부남 중기리호 들어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구암산(807m)이 어떻길래 그 많은 게릴라가 진을 치고 살았을까?
산이 바위가 별로 없고 주변이 모두 산으로 되어 있으면서 기동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는 반면 주 도로에서 떨어져 있어 국군이나 경찰이 들어오기에 그리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이야기만 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 큰 전투가 일방적으로 우리가 이긴 전투가 있었는데 알려지지않았다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합덕에서 청송 현동면 으로 올라 하사리-상사리로 들어가 마을 회관을 찾아 혹시나 내가 듣고 싶은 제보를 얻을 수 있을지 노력했다. 들어가지만 하지 밖으로는 다시 온 길을 따라 나와야 하는 곳이였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농경지가 존재하여 그 당시에 먹을 것이 풍부했을 거란 판단이 섰다. 주식이 해결안되면 산악지형에서의 게릴라 활동은 제한을 받는다.
분명한 것은 이 일대에 사는 많은 인원들이 남긴 이야기는 게릴라의 일방적인 착취관련 이야기는 없었다. 상생하고 있었다면 좀 그렇고 어쨌든 그동안 내가 다니며 들은 이야기와는 달리 큰 상처가 남지 않았고 일부는 오히려 군과 경찰이 토벌대를 데리고 들어와 못살게 굴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무엇이 진실이며 정의였는지 의문점이 남는 탐문 활동 이었다.
"입암리일대와 수석봉에서 많은 인원이 죽었다."
그런데 입암리에서 만난 아저씨는 본인이 산에 올라가니 학생들처럼 교복을 입고 죽은 인원들이 대부분인데 동네 사람들이 올라서 파인 교통호같은 곳에 일렬로 묻었다는 제보를 받았고 우린 그곳을 집중 조사하여 2009년도에 수석봉 바로 밑 750고지에서 12구, 배고개 일대에서 11구 등 지금까지 40여구를 발굴 했다.
반면에 합덕리 지역에서는 한구도 발굴하지 못했고 안봉산에서 2구, 합덕리 밑의 방흥리 서쪽고지 등에서 10여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문제는 발굴된 지역에서 나오는 유품인데 사실 수석봉일원의 유해에서는 많은 유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구암산지역 주 전투가 이곳일대에서 벌어진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안강 기계전투간 다시 언급하겠다.
나. 서해안 작전
인천경비부와 제1정대, 해군인천병원이 LST-801, PC-701, YMS-501등 4척, JMS-302등 2척, PG-313 1척 을 가지고 서해안 방어 및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1)인천지구 방어작전
이작전은 전쟁 발발한 이후부터 7월 13일까지 인천지구로 침입하는 북한해군과 인민군을 방어한 작전이다.
6월 27일 김포를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30일 제13연대와 탱크를 앞세워 오류동과 영등포를 점령하고 인천방면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7월 3일 저녁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인천으로 진입하여 7월 4일에 점령한다.
반면에 우리 해군은 6월 28일 해군본부가 대전으로 이전할 때에 인천경비부는 야간에 LST-801함으로 군인가족등이 모두 철수하고 6월 30일에 헌병대장 등 선견대를 인천항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다시 7월 1일부로 나머지 병력이 철수를 개시하고 육상에는 송도의 해군군인천병원 외과 과장인 오원석 중위가 지휘하는 병원의 근무자, 경비부 헌병등 200여 명이 육상 방어를 하다 7월 3일에 인천시가에서 적 전차를 공격하지만 중과 부족으로 밀리어 다시 일부는 선박편으로 군산으로, 일부는 육로로 대전으로 철수하게 된다.
6월 25일 개전 당시에 제1정대는 강하도 일대에 북한군이 집결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7월 3일 502정이 강화 수로에서 적 군수 물자와 무장 병력을 수송 중인 40톤급 적선 4척을 격침시켰다. 한편 유엔해군과의 협약으로 우리는 37도선 이남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서해안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계속 임무를 수행하고 다만 해군병원에 남아 있는 환자와 잔류병력은 함선을 이용하여 7월 4일에 모두 군산으로 철수하게 된다.
(2)서해안 봉쇄작전
이 작전은 인천경비부와 군산경비부, 그리고 제1정대가 7월 5일부터 7월 14일까지 10일간 적 하선의 침투에 대비하여 서해 연평도에서 군산 위도 간에 이르는 해역에서 실시한 봉쇄작전을 말한다. 서해안에서 큰 해상전투는 없었지만 함정들의 주요 임무는, 어선과 범선으로 남하하는 피난민을 검색하여 위장 침투하는 적성 요원을 색출하는 것인데 3"포를 장착한 PC-701함은무려 62척의 선박을 검색, 단석하였다.
또한 7월 12일에는 육군 공병대와 협조하여 대천 철교 및 인도교를 완전히 파괴하여 군산방면으로 침공하는 적 제6사단의 일부를 저지하였다.
다. 남해안 작전
참가 부대는 진해통제부, 목포경비부, 제3정재 훈련정대로 함정은 AKL-901, PC-701, YMS-504등 9척, JMS-301 등 7척, LCI-105등 2척으로 편성되었다
(1)남해안 방어 및 봉쇄 작전
6월 25일 701함이 남해안으로 침투하는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발견, 격침함에 따라 해군본부는 적 선박이 남해상에 도달하였다고 판단하여 경비를 한층 강화 하였다.
해군은 제주 4.3사건으로 진주 방면의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던 해병대는 '49년 12월 28일에 제주도에 들어와 한라산에 은거중인 공비토벌작전을 하다 전쟁을 맞이 하였다.
이에 따라 공비들은 남서해안에 침투하게 될 북한군과의 연결 시도를 위해 선박을 이용한 남해안 침투를 기도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제주도 북쪽 해상에 함정 2~3정을 배치시켜 제주도를 출항하거나 입항하는 모든 선박을 검색하여 봉쇄토록 하였다. 주로 진해, 여수, 목포, 제주도 등 주요 항구가 있는 해상을 통제하였다.
(2)이승만 대통령 호송작전
대통령 호송작전은 목포경비부와 부산경비부가 YMS-514, JMS-309정을 이용하여 '50. 7월 1일 16:00부터 7. 2일 11:00까지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호송한 작전을 말한다.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6월 27일 03:00에 서울을 떠나 이날 대전에 도착한다. 이틀 후 6월 29일 수원에서 전선 시찰을 나온 맥아더 원수오 요담을 가지고 다음날 대전으로 복귀하였다.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관계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결국 부산으로 가지로 한다. 그러나 경부국도에 추풍령이 적 게릴라 부대가 선점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이리를 거쳐 목포로 내려가 안정성이 있는 해군 함정을 이용해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이 당시에 이미 유엔군이 6월 29일부터 한반도 전 해역에 대한 해양통제권을 장악함에 따라 안전성을 보장해 주었다
따라서 '50. 7. 1일 03:00에 충나지사 관저를 빠져나온 대통령 일행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뚫고 흙탕길을 온종일 달려 오후에 목포에 도착하여 7월 1일 16:00에 320톤급 YMS-514이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그 뒤를 JMS-309정(대동강)이 따랐다.
목포를 떠난 대통령 일해은 심한 롤링으로 배 멀미에 시달리며 7월 2일 11:00에 해군 부산보급창 부두에 도착하여 대기중인 승용차 편으로 부산 서구 부민동에 있는 경남도지사 관저로 도착한 것이 11:15분이었다.
"과연 추풍령에 지방 공산주의자나 침투해 있는 게릴라가 있었을까?"
아픈 역사일지지만 '48년 제주도의 4.3사건이후 이어진 10월 19일의 여수. 순천의 제14연대 반란 사건, 11월 1일의 대구 제6연대 반란 사건의 후휴증은 상당히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모두가 군에 침투한 북한 오열들의 침밀한 계획이였으며 심지어 연대장이나 대대장 중대장이 그 하수인으로 활약하고 주도자는 하사관으로 암약하며 내부에 심복들을 심어놓고 벌인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지방의 경찰조직도 한몫을 하여 일제시대 순경이란 잘못딘 이미지속에서 군과의 마찰이 전편에서 언급되었듯이 조병옥이란 경찰청장과 경찰 수뇌부의 자존심 대결과 결부되면서 애궂은 민초들이 이리흔들리고 저리흔들리고 하면서 준 내란사태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전쟁전에 무려 10여회의 북한군 유격군이 보현산까지 김숙히 침투하였고 그들의 주로 활동 무대가 지리산(태백산맥 능선이용 이동)일대 경북 영양의 일월산 장군봉, 문경세재 등이였다.
그러나 호남지역은 벌판으로 그들이 은거하기에 곤란하고 교통망이 발달 하지않았으며 잔당 중 일부가 은거하리라 판단되는 광주의 무등산, 화순의 화학산이나 영광의 불갑산 정도는 그들의 지휘체계가 미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분석하여 목포행 길을 택했다고 본다
라. 해병대 작전
해병대 작전은 전쟁이 터진 6월 25일부터 제주도에서 실시한 작전과 해병대 1개 대대가 군산지구 방어를 위해 군산에 도착한 7월 16일까지의 작전을 말한다.
1949년 12월 말 제주 4.3사건의 상황은 군.경 합동작전으로 사건이 진압되기는 했으나 아직 공비 100여 명이 한라산을 근거로 세력확장에 급급하고 있었다.
진주에서 '49년 12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해병대의 임무는 잔여 공비를 소탕하고 도민들의 민심 수습과 대원들의 교육훈련이었다. 이들은 약 6개월 동안 혹독한 교육훈련을 병행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등은 병력의 보충을 요구하였으나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1,200명을 넘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사실 6월 23일 집단으로 전역지원서를 해군본부에 제출하였는데 처리되기도 전에 전쟁이 나게 되었다.
해군본부는 7월 9일부로 해병대 증강을 위해 진해에서 함정근무자를 제외한 인원으로 500명을 선발하여 해병대원으로 편입시켰다. 이들을 교육시키기위해 제3대대 간부진이 LST 제천호 편으로 7월 10일 제주를 출발하여 7월 10일에 진해에 도착한다.
해군본부는 7월 12일 온양방면으로 남하하여 예산, 청양, 홍성을 거쳐 내려오는 적을 군산의 금강지역에서 저지하기 위해 해병대 1개 대대를 군산방면으로 출동토록 하여 고길훈 소령이 1개 대대를 지휘하여 제천호 편으로 7월 15일 제주를 출발하여 7월 16일 군산에 도착한다.
한편 제주도에 거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입대를 지망함에 따라 해병대사령부는 7월 중순부터 신병 3,000명을 도내서 모집하여 1개 연대를 편성하여 훈련 시켰다.
제 3 절 유엔해군 작전
1. 부대 편성 및 운용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에 극동지역에 있던 미군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미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휘하에 통합, 편성되어 있었다.
6월 27일 워싱턴에서 한국전장에 해군력과 공군력 투입이 결정됨에 따라 최초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4척, 함대소해함 6척으로 한국지원대가 편성되었다.
경순양함 주노함은 6,000톤 급으로 5인치 주포 12문을 탑재하고 있었으며 구축함 4척은 2,200톤급으로 5인치 포 6문을 탑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10척의 영연방 해군 세력이 수송함선의 호송과 북한 해역 봉쇄작전에 투입되었다
2. 봉쇄작전 및 함포지원
'50. 6월 27일 한국 지원대의 주노함은 일본 사세보항을 출항하였고 서해상에는 미국 시민 제1진을 싣고 인천항을 출항한 노르웨이 화물선을 드 해븐함이 호송하고 뒤이어 파나마 선박을 이용하여 미국 시민이 출항하게 되며 호송작전이 계속 된다
6월 28일 거제도 해역에 도착한 주노함은 자체 상륙 단정을 이용하여 거제도에 들어가 북한군의 침투여부를 확인 후에 동해안으로 북상하였다
바로 이시기에 6월 29일 상호 정보교환이 미숙하여 한국 함정 305정이 미 주노함의 오인 포격을 받아 침몰하게 된다.
"한국전 최초의 함포사격이 묵호 북방에 실시 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해군연락장교가 미군 함정에 탑승하게 되며 당일 23:11분에 묵호 북방의 적에게 5인치 함포 400발을 퍼부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한국전에서 최초의 주문진 해전이 발생하다."
1950. 7. 2일 미국의 주노함과 영국군의 경순양함 자메이커함, 호위함 스완함이 초계작전중에 주문진 근해에 북한 어뢰정 4척을 발견한다.
적 어뢰정은 탄약선 10척을 엄호하고 있었으며 먼저 적이 발견하고 소구경포로 공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효과가 없었고 주노함이 1,000야드에서 근접신관(VT)으로 사격하여 어뢰정들은 침몰하기 시작하여 모두가 격침되고 탄약선도 7척이 격침되면서 이 전투가 처음이자 한국전 동안 미지막 해전이었다.
이 후로 지원함대는 7월 4일 주노함이 삼척, 주문진 연안을 왕복하면서 함포사격을 하면서 주로 적 해안포대와 선박, 도로, 교량, 유류 탱크에 함포사격으로 무력화 시켰다.
하지만 울진 근해에서는 영국함정이 한차례 적 75mm 육상포로 반격을 받아 4명의 전사자와 8명의 부상자도 생겼는데 함정에는 지장이 없었다.
"청진~원산간의 해상을 봉쇄하고 철로선 상의 터널을 파괴하라"
이 작전 미군이 38도선을 넘어서 공격한 최초의 작전으로 '50. 7월 11일 주노함이 구축함 맨스필드호의 호위를 받으며 목표지점인 성진 남방 10마일 상에 접근하여 해군 UDT 4명이 단정에 올라타고 터널에 접근하여 60파운드의 폭탄을 장치하고 복귀하게 된다.
다음날 북한방송이 폭파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줄곧 "남한 선공설의 선전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계속되는 함포지원~"
한편 북한군 제5사단이 영해-영덕까지 진출하자 7월 12일 한국군 제3사단이 함포사격ㅇㄹ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7얼 13일 미군 포병장교 1명이 주노함에 퍄견되어 울진의 적 병력, 묵호의 철도 시설, 삼척항의 유류시설에 타격을 가했으나 견고한 교량에는 5인치 포가 비효과적이란 판다에 중순양함등 8인치 포 이상이 설치된 전투함의 투입이 제기 된다
"국군 제3사단의 일시적 영덕탈환과 제1기병사단의 포항상륙을 보장한 함포지원"
국군 제3사단이 영덕 일원에서 7월 14일부터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포항으로 입항하는 미군 제1기병사단의 시간을 확보할 때에 가장 기여한 것은 해군이였다.
7월 14일부터 유엔군 해군은 육군 정찰기의 도움을 받으며 해안도로상으로 이동하는 모든 북한군 트럭등 군수물자 수송을 파괴하고 야간에는 조명탄까지 틔우고 적 포병진지등에 엄청난 포탄사격으로 북한군의 전의를 상실 시켰다.
이러한 함포사격으로 적의 진출이 더디게 되는 가운데 7월 18일에 미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한 후에 22일 대전 동남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고전하는 미 제24사단과 교체하여 영동지역으로 투입되었다.
7월 21일에는 강력한 함포지원하에 국군 제3사단이 조명탄 지원아래 야간 공격으로 일시적 영덕을 탈환하게 된다.
그 후에 중과부족으로 22일 다시 재피탈되고 부득이 철수하게 되지만 이지역에서 무려 10일간 지연전이 가능한 것은 함포사격 이였다.
3. 해상 수송작전
서울 북방의 38도선으로부터 부산까지의 직선거리는 225마일이고 휴전선은 동서로 165마일이다. 미국 서부샌프란시스코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914마일이고 하아이 진주만을 경유하면 1,000마일이 늘어난 5,914일이 된다.
다행히 미군은 일본 요꼬스카에 3,00톤, 괌에 6,000톤의 탄약이 비축되어 있어서 서죤트 케슬리호와 카디날 오코넬호 편으로 6월 29일부터 한국으로 수송한다.
7월 1일 미 제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부산으로 공수된 후 제24사단 후속병력은 사세보와 세토나이카이 항구에서 일본 선박통제국 선박으로 수송하여 7워 6일에 제24사단이 한국으로 이동을 완료한다. 이어서 제25사단도 이동을 개시하였다.
전쟁 발발 후 10일이 지난 7월 초에 1만 5,000명의 병력과 1,700대 차량을 포함한 많은 화물을 탑재한 55척의 함선이 일본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입항한 것이다.
4. 포항상륙작전 : 미 제1기병사단의 7월 22일 상륙으로 부산교두선은 실현되었다.
계속적인 적의 압력에 국군과 미 제24사단이 뒤로 물러나는 상항에서 맥아더 원수는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이나 군산에 상륙시킬 계획을 지시한다.
그러나 대전지구의 전황이 급격히 악하됨에 따라 제1기병사단을 적의 측면에 투입보다는 우선적으로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병력을 조속히 대전 이남에 상륙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산항에는 55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고 더 많은 함선이 입항할 계획이었기에 부산항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다행히 포항은 동해안의 함포사격에 힘입어 아직 전선으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사용 가능한 비행장과 1,000야드 이상이 상륙가능한 해변이 있었다. 또한 대구를 거쳐 대구로 이어지는 철도가 있어 신속히 중부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장점에 7월 10일 맥아더의 승인을 거켜 "블루 핱트 작전"명을 7월 12일 부여하였다.
사전 선발대가 들어와 안전성을 점검하고 소해작전 결과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여 14일 선발대가 도착한다.
같은 시기에 전선은 한.미 지상군이 대전근교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적 4개 사단이 금강을 도하하여 미 제24사단이 위협에 처하여 있었다.
따라서 미군은 부족한 인력을 본토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오고 부족한 LST와 선박을 일본에서 지원받아 7월 15일 요코스카항을 출항하였다. 이 상황에 영덕은 포항 북방 25마일 지점에서 국군 제3사단이 함포의 지원을 받아 선전하면서 전선을 지탱하여 7월 18일에 포항해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함재기들이 북한의 원산, 흥남, 평강 등지를 강습하였다.
제1기병사단은 포항에 상륙하여 바로 기차와 차량편을 이용하여 중부전선으로 이동하여 7월 22일 대전 동남쪽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제24사단과 교대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의 국운은 살아남은 것이다.
5. 평양 및 해주 공습
미 극동군 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게 된 제7함대의 주력부대인 제77항모기동부대는 6월 27일 필리핀의 수빅만을 출항하여 북상하였다. 제7함대의 임무는 대만해협의 중립화(대만으로 밀려 내려온 장개석 지휘하의 부대들이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또한 중공군의 대만 기습을 억제하는 것)에 있었지만 지휘부의 토의를 거쳐 함재기들을 한국전쟁에 투입하여 평양과 해주에 있는 비행장시설, 유류저장소, 탄약고 및 인근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였다.
제77기동부대는 항공모함 밸리 포지함, 영국 경항공모함 트라이엄프함 등으로 구성되어 7월 1일 서해로 들어와 7월 3일 해주 남방 70마일에 도착하여 함재기를 발진 시켰다.
먼저 영국 함재기 들이 새벽 05:45분에 출격하여 해주 비행장과 주변의 철도 시설을 파괴하고 08:15분에 모두 귀환하였다.
한편 미군 함재기는 06:00에 출격하여 평양 상공으로 날아가 비행장과 활주로, 격납고는 물론 탄약고 등 모든 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적의 야크기가 출현하자 2대를 격추함으로써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7월 4일에도 발진하여 거의 초토화 시킴으로써 적 항공기 12대 격파, 2대 격추, 공항 주변시설 파괴로 중공과 소련의 북한군 지원계획에 제동을 거는 효과를 얻었다.
기간중 격추된 비행기는 없으며 다만 피해를 입은 미 함재기가 모함에 불시착하는 과정에 감속 장치의 고장으로 다른 항공기와 충동하여 항공기 3대가 파손되고 3대가 손상을 입는 불상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