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대종회 유래(安東權氏大宗會 由來)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 내의 서재에 있는 대종회
시조 태사공께서 안동권씨로 사성賜姓받은 이래 낭중공郎中公으로 부터 9세에 이르기 까지 성화보成化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헌 및 묘소를 540년간 실전失傳하여 오다 성종조成宗朝 1470년 평창군사平昌郡事 17세世 옹雍께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에서 의하여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시조묘소를 확인한 즉시 봉분封墳을 높이고 비석을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들 의 시조에 대한 관심이 제고提高되어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한식일寒食日과 10월 중정일中丁日에 묘사墓祀를 봉행하며 수많은 후손의 합의에 의하여 능동陵洞에 족회族會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종사宗事를 이어왔다. 그후 효종孝宗 4년, 1653년에 경상 감사慶尙監司 우土禹께서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위토를 늘여 많은 자손이 참여 하여오다 숙종肅宗 3년, 1677년 12월에 능 동재사에서 각파 대표가 회의하여 종약宗約을 제정하고 족회族會를 설하여 이를 다시 대종약소大宗約所로 개정하고 유사有司를 선임하여 종사를 주관하였다. 대종약소 밑에 비각소碑閣所, 별비소別備所, 노인소老人所, 화수계花樹계 등의 기구를 두어 소관별 종사를 집행하면서 숭조경로崇祖敬老와 애친돈목愛親敦睦으로 향례享禮를 봉행奉行하고 재산관리, 족보간행, 문헌 편찬을 주관하여 오다 그후 각소를 축소 통합하고 다만 화수계만 존속시켰다. 그리하여 전례의식을 준수하고 비각 및 재사와 종재宗財를 비롯하여 모든 유적과 시조 묘소를 수호하면서 후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한 사명감에서 전통을 영원히 지속시킬 책임과 의무를 후손에게 전승시키며 근 500년 동안을 정성을 다하여 종사를 처리하여 왔다. 근세에 들어서는 1972년 임자壬子 11월 22일에 종약소를 안동권씨대종회로 개칭하고 규약規約을 개정하여 정관으로 바꾸어 총5장18조 부칙附則 3조로 통과 시키고 본회에 관리위원회를 두어 모든 종사를 통할 운영해오면서 갑인甲寅 1974년, 병진丙辰 1976년, 신유辛酉 1981년,무릇 3회에 긍亘하여 정관을 개정하였고 그후 1986년 병인丙寅의 한식 당회堂會에서는 정관이 운영면의 실제와 부 합符合되지 않으므로 총 7장35조 부칙으로 전면 개정, 확정하였다. 이로써 후손들에게 자손된 도리를 행하는 덕목과 긍지가 높이 평가되도록유도하면서 정관에 정해진 바의 자격과 의무를 다해 전통과 의무를 영원히 수호하고 지속케 함에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대종회는 정관 제3조의 목적 및 제4조의 사업에 명기한대로 명실 공히 대내외적으로 안동권씨의 최고 대표기구이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 안동권씨태사공실기(安東權氏太師公實記)
제1대시조태사공 태사공묘소의측면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태사공 묘소 후면에서 본 태사공 묘소의 전망
한여름의 능동재사(陵洞齋舍):중요민속자료 183호로 지정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 왕릉을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크고 유서가 깊은 재사이다. 효종(孝宗) 4년 1653년에 마루와 고방(庫房) 등 16간을 세우고 숙종9년, 1683년에 누각7간을 세웠는데 두차례에 걸친 화재로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 별당, 곳간채 등 총 70여간이 거의 다 소실되고 임사청(任事廳)과 전사청(典祀廳) 등 수간만 남은 것을 건양(建陽)원년, 1896년에 중건한 것이다.
시조 태사공의 유품 혁과대
1. 태사공(太師公)의 선계(先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처음 성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 (金氏)이다. 종성은 왕실(王室) 성씨를 지칭한 말이고 종실(宗室)이라 쓰기도 한다. 종성이란 말은 종족(宗族)의 성씨로 쓸 때에는 같은 겨레붙이의 성씨, 즉 성씨가 같은 일가붙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라의 종성이 라 하였기 때문에 국성(國姓), 즉 왕성(王姓)을 말한다. 신라의 국성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이 김씨인데 고대에 경주와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두 김씨가 있었다. 경주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퍼졌고 김해의 김씨는 가락국(加洛 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여 퍼졌는데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김씨는 다 이 두 김씨에서 분적(分籍)되어 독립된 본관을 갖게 된 성씨들이다. 그리고 우리 안동권씨는 신라 의 종성에서 권씨로 환성(換姓)하였으므로 또한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것인데, 이를 분적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은, 분적이란 그 성은 그대로 두고 본관만 바꾸어 독립할 때에 지칭하는 말이고 성과 본관을 다 바꿀 때는 완전히 타성으로 되어 통혼(通婚)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동성혼(同姓婚)을 안함에 있어 분적을 한 동성끼리는 좀체로 혼인을 안하지만 분적 환성을 한 성씨와는 구애없이 통혼을 하되 외가 성씨에 대해 친근한 정서를 갖는 것처럼 이를 더 선호하면 하였지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신라 56왕 가운데 박씨 10왕 석씨 8왕을 뺀 38왕이 김씨인데 그 가운데 한 왕이 우리 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예조(藝祖)라 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여왕 3위는 후손이 없거나 있더라도 타성이 되었을 터이니 제외하고 남왕 중에도 14왕이 기록상 사왕자(嗣王子)가 없으며 말왕(末王) 경순왕은 태사공과 동시대인이니 제외하여 이들 18왕을 다시 빼면 태사공의 선조가 될 수 있는 임금은 20왕이 되는 셈이다. 김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난 서기 65년으로부터 태사공이 권씨로 득성(得姓)한 930년까지는 865년이 되고 미추왕 의 즉위가 서기 262년이니 그로부터 930년까지는 668년이 된다. 사람의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계산하면 태사공은미추왕으로부터는 22∼23세손이 되겠고 김알지의 28∼29세손이 될 것이다. 태사공과 동시대인인 경순왕이 김알지의 28세손이라 하니 대략 태사공도 알지 시조의 30세 이내로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태사공의 태어나고 돌아간 생몰(生歿) 연대와 그 부친 및 배위(配位)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신라 왕실의 종성(宗姓)으로서 신분이 존귀하며 명망이 커서 당세의 관민(官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걸이었음을 미루어 알 뿐이다.
2. 태사공(太師公)의 득성(得姓) 태사공은 본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성명이 김행(金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에는 성명이 권행(權行)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 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태사공이 덕업(德業)을 쌓고 공훈을 세워 사성(賜姓)과 작위(爵位)를 받은 일은 사서(史書)나 각 집안의 문헌에 반복 되어 나오는 것이 수없이 많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의 기록이다. 동사강목은 조선 영조(英祖) 때 안정복(安鼎福)이 아동의 교과용으로 지은 역사책으로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 말(高麗末)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송(宋)나라 주자(朱子 :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을 참고하여 편술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3년 기축(己丑 : 929)[후당(後唐) 천성(天成 : 明宗 연호) 4년 견훤(甄萱 : 후백제) 38년 12월에 견훤이 고려(高麗 : 신라)의 고창군(古昌郡 : 안동)을 포위하니 고려 임금 건(建 : 왕건)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와 구원하였다. 경순왕 4년 경인(庚寅 : 930)[후당 장흥(長興)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 임금 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파(大破)하니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창을 구원하러 와 예안진(禮安鎭 : 안동시 예안면)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워 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상(大相 : 고려초의 문무관 2품)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을 좇아 가야지 죽령(竹嶺)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하니 반드시 먼저 사잇길을 닦아야 합니다." 하였다. 장군 유검필(庾黔弼)이 말하기를,
"병(兵)이란 흉기(凶器)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니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 계책이 없은 연후에 가히 승패를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늘 지금 적 앞에 임하여 싸우지는 않고 먼저 북으로 꺾일 것을 염려함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지금 고창을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3천여의 무리가 손을 맞잡아 읍하여 적을 맞아들일 터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칠 것을 원합니다."
하니 고려왕이 이를 좇았다. 병술일(丙戌日)에 고려왕의 군대가 고을의 북쪽 병산(甁山 : 안동시 臥龍面 西枝里)에 이르렀는데 훤(萱)의 군대는 석산(石山)에 있어 상거가 5백보가 되자 드디어 접전하였다. 저물 때까지 격전을 벌였는데검필(黔弼)이 경병(輕兵)을 이끌고 저수봉(猪首峰)에서 분격해 치니 훤이 패해 달아나는지라 그 시랑(侍郞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것이 8천여인이었다. 고려왕이 고창에 입성하여 검필에게 말하기를,"오늘의 승첩(勝捷)은 경(卿)의 공이다."
하였다. 견훤은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 : 풍산)를 쳐 침략하고 인호(人戶)를 약탈해 가지고 갔다. 고려왕이 곧 순주로 행차하여 성을 수복(修復)하고 주(州)를 격하하여 하지현(下枝縣)을 삼고 원봉(元奉 : 성주)을 잡았는데 [백제에 항복했으나] 전에 세운 공이 있으므로 용서하였다.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 고려 초기 문무관 1품)으로 삼고 김행(金幸)과 장길(張吉 : 장정필)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 풍산) 하곡(河谷 : 안동시 임하면) 직명(直明 : 안동시 일직면) 송생(松生 : 청송) 등 30여 고을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이때 병력이 점점 강해지고 나라가 동쪽으로 넓혀져 바다에 연한 주군(州郡)과 부락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니 명주(溟州 : 강릉)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 울산)에 이르기까지 총1백10개 성이었다. 김행(金幸)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리와 모의하기를,
"훤(萱 :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 :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설해(雪解)치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 하고 권(權)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이하생략)참고문헌: 안동권씨태사공실기(安東權氏太師公實記)
제2대낭중공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 낭중공의 단소: 경북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구룡산에 있다. (사진 좌측에 있는 석등 위쪽 산등성이에 권릉이 있다.)
다른 위치에서 본 단소
청도운문(淸道雲門)의 권릉(權陵). 신도비각
2세:자(子) 인행(仁幸)·낭중공(郎中公)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이다. 모든 안동 권씨가 이 자손이며 2세조로서 아시조(亞始祖)라고도 부른다. 휘(諱)는 인행(仁幸)이다.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를 알지 못한다. 그 휘자(諱字)에 부친의 행(幸)자를 넣어서 어찌 촉휘(觸諱)하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는 설이다. 고려 후기의 명유(名儒)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말에 '신라 사람이 조(祖)와 자손 간에 같은 이름자가 있는 것은 당시의 세속이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부자간에 같은 이름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이를 휘피(諱避)하게 된 것은 고려의 초중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조자손 간에 같은 자로 이름을 지은 예는 대표적인 것이 고려 태조와 그 부조(父祖) 3대의 경우이다. 고려 태조의 본디 성씨를 모르거니와 그 5대조가 되는 국조(國祖)는 호경(虎景)이고 그 증손이 작제건(作帝建)이고 다음이 용건(龍建)이며 다음이 왕건(王建)이다. 용건은 뒤에 왕륭(王隆)으로 성명을 바꾸고 사후에 세조 의덕대왕(世祖懿德大王)으로 추존되지만 이렇게 3대가 건(建)을 돌림자로 써서 이름을 지은 것은 당시의 도참비설(圖讖秘說)에 3건, 즉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세 사람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 돌아 거기에 맞춘 것이라 한다. 그러면 이 시절에 대를 내려 같은 자를 써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고귀하거나 특수한 신분의 경우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관직은 낭중(郎中)이다. 이 관직명으로 공을 낭중공이라 부른다. 낭중은 본디 신라 후기에 집사성(執事省)과 병부(兵部)·창부(倉部)에 딸린 벼슬로서 17관등의 13품직인 사지(舍知)로부터 11품직인 내마(柰麻:내마에도 7등급이 있음)까지가 이 직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남북 왕조 시대의 발해(渤海)로 가서는 정부 각 부(部)의 장관이 되었고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서는 광평성(廣評省)과 각 부처의 중하위관이 되었다. 직위 는 중하에 속하지만 해당 부서의 실무를 맡고 있는 요직이었다. 고려 태조는 서기 918년에 궁예의 포학을 그치게 하고 개국하였지만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면서 이 낭중이라는 직함을 중앙의 경직(京職)뿐이 아니라 지방의 향직(鄕職)으로도 부여하였다. 향직은 나중에 고려가 중앙의 왕정 집권화(王政集權化)가 강화·확립되면서 쇠퇴하여 각기 그 지방의 서리(胥吏), 즉 아전(衙前)으로 전락하지만 초기에는 경관과 대등하였거나 아니면 그 고을과 지역에서의 실권이 막강하여 각지역의 분립된 영주(領主)와 같은 존재였 다. 그와 같은 지방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장에게 고려 태조가 이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6대 임금 성종(成宗) 2년, 983년에 이를 바꾸어 호정(戶正)으로 하였다. 이 호정은 당시 9등급으로 나눈 향직의 제4위였다. 한편 낭중은 성종조 향직 개편 후에는 병정(兵正)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병정은 고려 시대 지방 관아의 한 부서로서 군병의 일을 맡은 사병(司兵)에 딸린 향직 이름이었다. 이 이름으로는 조선 초기에도 각 지방에 향리직을 둔 바가 있다. 또 성종 초에 병부(兵部)의 경(卿)을 병정이라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 관아 의 부서로서 병사를 맡아 보던 사병(司兵)에는 당시의 향직인 병정(兵正)·부병정(副兵正)·병사(兵史) 등이 있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성격의 낭중에서 공이 정확히 어떤 직임의 낭중을 역임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서기 930년에 태사공이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이룰 때에 청장년기에 있었을 것을 상정한다면 공이 낭중의 직함을 받은 것은 고려 개국 13년 이후로부터 성종이 이를 호정으로 고칠 때까지인 서기 983년의 기간을 넘지 않는다. 이것은 공이 향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경우이다. 그런데 또한 공이 경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가설(假設)은 공이 병산대첩을 전후하여 고려 태조에게 볼모로 견질(見質)되었을 경우를 상정하여 성립된다. 당시는 신약(信約)의 보증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볼모를 반드시 보냈으며 대등할 때는 서로 볼모를 교질(交質)하였다. 전자는 신라가 고려에 스스로 볼모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후자는 고려와 후백제가 화호의 뜻으로 각기 그 임금의 사위나 조카를 보낸 것이 실례이다. 고려 태조 는 복속하거나 귀부해오는 각처의 영주(領主)에게서 반드시 그 자제를 볼모삼아 유학(留學) 등의 명목으로 서울 송도(松都)에 머물러 두었다. 안동은 영남 동북부의 요충(要衝)이자 웅진(雄鎭)이다. 주변 고을이 모두 고려와 백제에 귀부해도 홀로 끝까지 남아 있다가 전략적으로 고려군과 연합하기 위해 일시 귀부하여 국적 견훤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본의는 종국(宗國) 신라에 있지 고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안동의 영주 3태사의 자제를 고려 태조가 볼모하였을 것은 필지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의 볼모에게는 좋은 예우가 따른다. 그리하여 명민한 자질의 공에게 경직(京職)의 낭중이 배수(拜授)된다. 이 가설이 성립되면 공의 혼사(婚事)에 대한 의문이 풀릴 수가 있다. 공의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공암 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의 딸이다. 지금의 서울 강서(江西)와 양천구(陽川區)에 해당하는 옛 공암촌은 한강 하류의 한 나루터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곡창 지대였다. 여기에 어떤 연유로 정착하여 큰 문호를 이룬 허선문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예로 알려졌다. 당시의 혼사는 아직도 엄격한 골품제적 신분을 본위로 하여 이루어졌을 터이려니와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 영주의 아들인 공과 공암의 촌주인 허선문의 딸은 서로 어울리는 혼반(婚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와 같은 난세(亂世)의 교통 여건에서 어떻게 영남 안동의 공이 경기의 한강 하류까지 와서 공암 촌주 허선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을 것인가. 여기에서 공이 송도에 와 볼모살이를 하고 그러면서 경직을 받았다면 정부의 권유나 주선 등으로 이같은 혼사를 이루었을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공이 송도의 경직으로 종생(終生)토록 사 환(仕宦)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낭중이란 그리 높은 직위가 아니고 공 또한 고향에 귀환하고 싶은 염원에서 현달을 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공이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성장한 자제를 또 서울에 머물러 두어 볼모로서 유학을 할 수 있게 만든 연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합의 초기로서 왕권과 중앙 집권화가 견고히 정착될 때까지의 일이었다. 다음은 공이 안동에서 어느곳으로도 움직임이 없이 지내면서 향직인 낭중에 안주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벽상공신(壁上功臣)의 외아들에게 세습시킨 향직의 작위로서는 우선 소홀하고 미흡한 감이 있다. 그리고 공이 안동에서 향직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어떤 행적도 남긴 것이 없는데 뒤에 공의 장자 책(冊)이 스스로 구하여 안동 고을의 호장(戶長)이 되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안동 고을의 향직을 받은 것이 공의 아들 대에서부터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세번째의 가설은 공이 안동도 송경(松京)도 아닌 제3의 지역에 가서 신라 시대 촌주(村主)나 촌장(村長)과 같은 의미의 낭중으로서 한 고을의 원을 지낸 경우이다. 이 가설로 성립되는 것이 공이 청도(淸道)의 공암 촌주(孔巖村主)를 지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러면 첫째로 전제되는 조건이 이곳이 그 부인 양천 허씨의 처향(妻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도에 있는 또하나의 공암촌은 신라의 서울 경주(慶州)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천연의 높은 산줄기가 외부와 차단해 이룬 길고 큰 계곡으로서 신라의 화랑도가 수련하던 운문사(雲門寺)가 그 안에 있고 계곡을 흐르는 동창강(東倉江)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옛적의 곡창으로 알려진 곳 이었다. 신라의 경순왕이 백관과 회의를 열어 사직(社稷)을 고려에 바치기로 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통곡하고 거기에 따르지 않는 무리 3천을 거느리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에 공도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에서 받는 세습의 향직에 안주하지 않고 서라벌에서 가까운 청도의 공암촌으로 들어가 종국(宗國) 신라를 복고(復古)시킬 뜻을 키웠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의 공암이 고려 태조에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을 댄 공을 세웠을 당시 이미 90세를 넘은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선향(先鄕)이었다던가 하는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설에 대해서도 아직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증이 나온 것이 없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 안동권씨태사공실기(安東權氏太師公實記)
일 반 상 식
권씨(權氏)는 단일본(單一本)인가?
한국의 권씨는 모두 본관(本貫)이 하나라고 합니다. 본관이란 본디 성씨가 발상한 고향입니다. 그곳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이라서 안동권씨(安東權氏)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면 우리나라에는안동권씨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꼭 안동권씨 하나의 명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영가(永嘉)나 화산(花山) 등으로 권씨의 본관을 일컫는 수가 있습니다. 영가와 화산은 다 안동의 옛이름이니 안동의 이칭(異稱)이 될 뿐이지 그렇게 부른다고 본관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성(開城)을송도(松都)나 개경(開京)·송경(松京)·송악(松嶽) 등으로 불러도 다 개성을 일컫는 것은 마찬 가지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천권씨(醴泉權氏)는 이와 다릅니다. 경북 예천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예천권씨의 조상은 성이 흔(昕)씨였습니다. 그런데 고려(高麗) 29대 충목왕(忠穆王)의 이름이 흔(昕)으로서 즉위하니 국휘(國諱)가 되어 이를 쓸 수 없게 되었으므로 왕명(王命)에 따라 그 외가(外家)의 성 권씨로 바꾸게 되고 본관은 그대로 예천으 로 하니 예천권씨가 되었습니다. 그 시조(始祖) 권섬(權暹)은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10세외손(世外孫)이 되는데 그 어머니가 권씨일 뿐만 아니라 증조모(曾祖母)와 5대조모도 권씨였습니다. 이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동성이본(同姓異本)이자 내외손(內外孫) 관계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통혼(通婚)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천권씨가 주로 경북의 예천지역에서만 세거(世居)하여 왔고 인구도 안동권씨의 약 3백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게 알려지지를 않은 것입니다. 또 양주권 씨(楊州權氏)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른 이름은 안동권씨의 정승공파(政丞公派)인데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세자 시절의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귀화한 중국인 학사 권상재(權尙載)가 안동권씨 태사공의 14세손인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의 사위가 되면서 왕상좌(王上佐)로 임금에게서 사성명(賜姓名)을 받으니 그 후손을 왕상좌파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조(朝鮮朝) 개국 후에 정헌공 왕후의 손자대에서 고려의 국성(國姓)인 왕씨에서 본디의 안동권씨로 복성(復姓)하였는데 왕상좌파도 고려의 충목왕이 권상재를 총애하여 왕씨로 사성하고 왕후의 사위만이 아닌 아들이 되 게 한 뜻에 따라 정헌공의 본손(本孫)이 되니 예천권씨와 달리 안동권씨의 외손이 아닌 본손으로 입적(入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양주권씨라 세칭(世稱)한다고 해서 양주가 정승공파의 세거지이지 본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정승공파와는 우리 모두가 다 계촌(計寸)이 되고 통혼을 하는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이상과 같이 예천권씨와 정승공파는 비슷한 시기에 왕명(王命)에 따라 탄생하였고 안동권씨의 외손인 것도 같은데 전자는 동성이본으로 그 독립성을 유지했고 후자는 정승공 왕상좌가 고려인으로 귀화한 것처럼 그 후손도 권씨의 외손에서 본손으로 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예천권씨가 이처럼 엄연히 있으니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득성유래(得姓由來) :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안동권씨는 본래 신라(新羅)의 종성(宗姓), 즉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근자에 신라김씨(新羅金氏)로도 칭하는 경주김씨는 금궤(金櫃)에서 태어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대보공 '알지'는 신라 4대 석탈 해왕(昔脫解王) 때 서라벌(徐羅伐)의 시림(始林)에 강림한 난생(卵生)의 설화로 탄생하였는데 이때 닭이 울어 이를 알렸다고 해서 시림은 계림(鷄林)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알지'를 왕이 궁중에서 길러 사위를 삼고 왕위도 물려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보에 그쳤는데 그 6대손이 13대 미추왕(味鄒王)으로 즉위하여 신라의 56왕 가운데 김씨가 35왕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국호(國號)가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가 지나 국운이 쇠퇴하 여 민심이 이반(離叛)하고 각처에서 도적(盜賊)이 일어나더니 사방의 고을에서 모반(謀叛)과 부용(附庸)을 일삼으며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게 되었습니다. 상주(尙州) 출신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 군대에 들어가 장수가 되자 무리를 키워 완산(完山)에서 도읍해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옛 백제의 원수를 갚는다고 내세우며 끊임없이 산맥을 넘어 가까운 영토를 침공하고 북쪽에서는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서 버림받은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서 도읍해 옛 고구려를 회복한다면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우고 신라를 원수로 하며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북의 너른 영토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로 포악한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축출되고 고려(高麗)가 송악(松嶽)에 도읍하여 이를 대신하자 신라와 고려는 서로 교빙(交聘)하고 이윽고는 일종의 동맹을 맺어 견훤이 침공해 오면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려가 1만 병력을 보내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 궁예와 많이 싸운 견훤은 왕건의 고려가 서자 신라보다 먼저 교호(交好)코자 하여 선물을 보내고 서로 볼모도 교환했는데 이는 신흥 고려와 화친해 먼저 신라를 멸한 뒤에 고려를 쳐 후삼국을 통일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신라와 동맹 하여 오히려 신라를 구하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니 격분한 견훤이 경애왕(景哀王) 4년, 927년에 왕도(王都) 경주(慶州)로 대군을 몰고 쳐들어가 잔인무도하게 유린하였습니다. 경애왕은 후비(后妃)와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중이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이궁(離宮)으로 피신했고 견훤은 궁궐에 들어가 군사를 시켜 약탈과 능욕을 자행케 하고 임금 내외를 찾아내서는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등으로 눈앞에서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몸소 능욕하였으니 이는 유례가 없이 무도 한 만행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의 표제(表弟)(외사촌 아우)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를 다음 임금으로 세우고 그 아우를 볼모로 삼아 데려갔는데 이때 백관(百官) 가운데 많은 고관과 귀족 자제·부녀자와 온갖 보화는 물론 병장기 등 재물을 모두 털어내 가지고 회군하였습니다. 이에 급보를 받은 고려의 태조(太祖)왕건이 5천 정병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으나 분탕을 끝낸 견훤군은 퇴각한 뒤였으므로 대구(大邱) 동남쪽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맞아 회전(會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또 고려군이 견훤군에게 대패하여 고려태조는 가까스로 탈신(脫身)하여 나오고 명장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 謙)이 왕을 살리고 전사했습니다. 무기와 군마(軍馬)가 충족하고 힘이 더욱 강해진 견훤의 후백제군은 이르는 곳에 적이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 이태 뒤인 경순왕 3년, 929년 12월에 견훤은 영남(嶺南)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하에 있는 고창군(古昌郡)(안동)을 공략하여 신라와 고려의 연결을 끊고 영남지역에서 고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나왔습니다. 이때 신라 고유의 영토인 영남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개의 고을이 그 성주(城主)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다 만 고려에 항복하거나 후백제에 점령되기를 반복할 뿐 신라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북 영남의 중심인 고창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적군이 함부로 넘보지 못했는데 이곳을 공략하면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견훤이 이를 노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해서는 조만간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여 이를 저지코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창 고을을 놓고 후백제와 고려는 자웅을 겨루는 대회전을 다시 벌이게 되었습니다. 고창의 성주는 김선평(金宣平)(김태사로서 안동김씨의 시조)인데 이때 이곳의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는 신라의 종실(宗室)(왕실 종친)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김행(金幸)'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인 장길(張吉) (장태사로서 안동장씨의 시조이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로서 3인이 그 지주(支柱)가 되고 있었습니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구원병을 거느리고 온 고려 태조는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2년 전에 공산(公山)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한데다 만약 여기에서 패하면 죽령(竹嶺)의 산맥이 막혀 퇴로(退路)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창의 신라군은 의병(義兵)이 많아 정병(精兵)이 아니므로 외로운 항전으로 오래 부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려군이 싸움에 밀려 퇴각할 경우는 이미 죽령을 넘는 길이 백제군 에 차단되어 넘어갈 수가 없어 사잇길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같은 형세를 보고 '김행(金幸)'공이 분연히 일어나 '훤(萱)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병력이 적은지라 힘으로 능히 보복할 수가 없는데다 또한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즉 종당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쾌히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하고 모두를 설득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부(歸 附)해 고려군을 맞아들였습니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決死抗戰)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 태조는 의기가 치솟아후백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전을 벌였습니다. 고려군은 고창 북쪽 10리쯤의 병산(甁山)에 진치고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쳤는데 거리가 5백보였습니다. 드디어 격전이 벌어졌는데 종일을 싸운 결과 고창의 신라 의병과 연합한 고려군이 크게 이기고 견훤은 대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히고 죽은 자가 8천에 이르러 그 시체로 냇물이 막혀 거꾸로 흘렀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모두 고려의 것으로 되면서 대세가 후백제의 승세에서 고려의 것으로 기울었습니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고려태조는 '김행'공을 보고 '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밝혀 귀순(歸順)하 였으니 권도(權道)(형편에 따라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일을 행하는 도리)의 적절함에 통달(通達)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권씨(權氏)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습니다. 이렇게 임금이 성을 내려주는 것을 사성(賜姓) 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달리 성을 얻는다는 뜻의 득성(得姓)이라고도 합니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봉공수작(封功授爵)(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내림)할 때에 공에게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삼공의 으뜸)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그 식읍(食邑)(조세를 공신이 받아 쓰도록 한 고을)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새로운 성명이 '권행(權幸)'으로 된 공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安東權氏), 즉 안동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권씨의 시조(始祖)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領主)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世襲)하게 되었습니다.
권씨는 가장 먼저 족보를 만들었는가?
안동권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族譜)를 만든 것이 자랑입니다. 그것이 '성화보(成化譜)'라는 한국 최초의 족보인데 이조 성종(成宗) 7년 병신(丙申), 서기 147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때가 중국 연호(年號)로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것인 성화(成化) 12년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서기(西紀)를 쓰듯이 당시 중국 연호를 썼기 때문에 이 시기를 성화연간(成化年間)이라 하고 성화연간에 나온 족보라는 뜻으로 '성화보'라 세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달리 '성화병신보(成化丙申譜)'라고도 하는데 본디 명칭은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입니다. 이 성화보가 나온지 1백여년 뒤에 문화유씨(文化柳氏)의 ' 가정보(嘉靖譜)'가 나왔습니다. 가정은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입니다. 이로부터 각 성씨의 족보가 잇따라 나와 우리나라로 하여금 세계에서 따를 자가 없는 족보의 선진국이 되게 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족보로써 우리나라를 이길 나라와 민족은 세계에 없습니다. 중국에서 성씨보(姓氏譜)는 대개 우리나라보다 4세기쯤 앞선 11세기 북송(北宋) 시대에 일반화된 것으로 알 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 방면에서 뒤에 훨씬 더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처음에는 가(王家)의 계보(系譜)만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왕가의 계보는 단선적(單線的)인 것이어서 이를 족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려(高麗) 시대로 들어와서 백성이 모두 성씨와 계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문화 정책을 펴 이것이 없는 자는 시험을 보아 관리 등으로 취직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기의 계대(系代)를 증명하는 세계표(世系表)를 만들어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가첩(家帖)이라는 등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가첩 또는 가승(家乘)은 각자가 그 직계(直系)만을 단선으로 적어 내려오고 그 방계(傍系)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모두 모아 종합해서 가까운 방계는 물론 안동권씨 전체를 총괄하는 '족보'를 만들어 책자로 출간한 것이 '성화보'입니다. 이것은 인류사적으로 의의가 아주 큰 발명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계보를 최초로 민주화시킨 쾌거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민족은 족보를 제2의 호적으로, 때로는 세속의 호적보다 한 차원 높은 불변의 기록으로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나 학계에서는 이같은 족보를 괄시하며 한국인의 버려야할 인습처럼 생각하여 마지 않습니다. 급속히 변화하는 세대(世代)는, 특히나 외래종교인들의 경우는 아직도 족보를 챙기는 우리 겨레의 습성을 부끄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일본 신민화(臣民化) 하려던 일제의 암흑기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서적이 족보였습니다. 이처럼 족보에는 우리의 근본과 주체를 지키려는 얼이 서려 있습니다. 지금 외세와 외래 정신의 대변자와 같은 지식인·학자·교육자·정치사회지도자들이 아무리 족보를 백안시하고 퇴출시키려 하여도 우리나라에서 절대량의 족보는 계속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족보 선진국의 명성을 좀체로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남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처럼 족보가 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와 문화가 무형에서 유형의 가치를 발휘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 관념이 큰 괴력을 발휘하여 남이 따를 수 없는 민족의 저력이자 하나의 국가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원천이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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