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610. [역경의 열매] 최경주 (1-60) 암투병 후 신앙으로 재기… 기적의 KPGA 최고령 우승
갑상샘암 수술 후 체중·근육 빠져 신앙 집중하며 절제된 생활로 회복 올 SKT·시니어 오픈 잇단 제패
‘탱크 골퍼’ 최경주 장로가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가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5월 최고령 우승을 차지한 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 대회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이병주 기자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탱크 골퍼’ 최경주(54) 장로가 필드 위에서 보여 준 인생의 교훈은 사실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최고령 우승으로 재기에 성공한 최 장로가 골프와 신앙을 통해 빚어낸 ‘역경의 열매’를 들여다본다.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최고령 우승이었다.
2024 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 최종 라운드가 열린 지난 5월 19일, 나는 이날 5타 차 선두로 경기에 돌입했다. 경쟁자였던 박상현은 나보다 7타 뒤진 공동 6위로 출발했다. 당연히 우승 달성을 원했지만 막판으로 갈수록 체력 부담을 느끼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11번 홀(파4)까지 보기 2개와 버디 2개로 흔들렸다. 결국 마지막 7개 홀에서 보기 3개를 추가로 범해 3타를 잃었고, 이날 버디 4개로 4타를 줄인 박상현과 함께 1~4라운드 합계 3언더파 281타 동타를 이뤄 연장에 돌입했다.
사실 17번 홀(파3)부터 극적 승부의 연속이었다. 티샷이 그린 옆 벙커에 빠진 상황에서 벙커샷을 핀에 붙여 파를 지켰으나 18번 홀(파4) 두 번째 샷이 다시 벙커로 향한 끝에 보기를 범해 연장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 순간 ‘아 이건 우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18번 홀 1차 연장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 앞 개울(워터해저드)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공은 개울 내 작은 섬 같은 러프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 순간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다. 벌타를 피한 나는 세 번째 샷을 다시 핀에 붙이며 기사회생했다. 나는 1m 거리의 파퍼트를 넣어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5월 KPGA투어 SK텔레콤 오픈 대회에서 아이언샷으로 온 그린을 노리고 있는 최경주 장로. KPGA 제공
그로부터 약 두 달 뒤 7월 영국 커누스티 골프 링크스에서 열린 더 시니어 오픈에서 남자 선수로는 최초로 두 자릿수 언더파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우승 이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몸 관리 비결이었다.
사실 5년 전 갑상샘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했었다. 수술하고 몸무게도 79㎏까지 빠졌다. 수술 이후 근육도 많이 빠졌다. 드라이버 헤드 속도를 재보니 원래 111마일까지 나오던 것이 아무리 쳐도 102마일밖에 안 됐다.
나이 50에 겪은 암으로 은퇴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건강 회복을 위해 제일 먼저 한 건 술을 끊는 것이었다. 커피와 탄산음료도 끊고 근육을 채우는 데 집중했다. 하나님 안에서 좀 깨끗한 사람이 되자는 다짐도 했다. 태어날 때는 깨끗하게 태어났는데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요즘은 햄버거를 먹을 때도 콜라 대신 물과 먹는다. 지금은 전성기 몸무게인 92㎏으로 회복했다.
투병하고 다시 몸을 만들면서 피해의식도 생겨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기도가 큰 힘이 됐다. 동시에 삶의 기준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술을 끊고 나니 밤에 술 마시자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자연스럽게 가정과 신앙에 집중하게 됐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최고령 우승 기록을 19년 만에 갈아치우게 된 것도 이런 생활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역경의 열매’ 코너를 통해 ‘탱크 골퍼’ 최경주만이 아닌 ‘신앙인’ 최경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약력=1970년 전남 완도 출생, 1993년 KPGA 입회, 프로 통산 31승, 2002년 한국인 최초 PGA 투어 우승,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2020년 도쿄 올림픽 골프 남자부 한국대표팀 감독, 2024년 KPGA 투어 최고령 우승, 현 최경주재단 이사장, 온누리교회 장로.
* [역경의 열매] 최경주 (1) 암투병 후 신앙으로 재기… 기적의 KPGA 최고령 우승 * [역경의 열매] 최경주 (2) 공부보단 운동에 소질… 등록금 부담에 학교 역도부 가입 * [역경의 열매] 최경주 (3) 좌우 줄서기로 갈라진 운명 "너는 왼쪽, 골프부야" * [역경의 열매] 최경주 (4) 생애 첫 샷이 멋지게 비행 "골프 이거 매력 있네" * [역경의 열매] 최경주 (5) 연습에 또 연습… 골프 실력 일취월장 * [역경의 열매] 최경주 (6)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 죽기 살기로 운동에만 매달려 * [역경의 열매] 최경주 (7) 재능 알아본 사장님 “경주야, 이제 진짜 골프장 가자” * [역경의 열매] 최경주 (8) 입문 5개월 만에 ‘싱글’… 광주 시내 ‘골프 괴물’로 소문 * [역경의 열매] 최경주 (9) 골프로 배운 인생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자" * [역경의 열매] 최경주 (10)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운명처럼 만나 서울 유학 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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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역경의 열매] 최경주 (2) 공부보단 운동에 소질… 등록금 부담에 학교 역도부 가입
부모님 농사·바닷일 도우며 자라 부지런하고 알뜰한 삶 몸에 익혀 중학교 입학, 본격 역도훈련 시작 입상 욕심 컸으나 실력 늘지 않아
전남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를 잇는 장보고대교. 최경주 장로는 전남 완도군 완도읍 화홍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연합뉴스
골프의 기역(ㄱ)도 모르던 내가 프로 골퍼가 된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970년 5월 19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화홍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인 완도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곳이다. 3남 1녀 중 장남인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부모님은 농사일과 고기잡이 일을 하셨기에 1년 중 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두 분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릴 적 학교를 다녀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기가 무섭게 밭에서 아버지가 “경주야, 물 보러 가거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무 대야를 들고 개펄로 향했다. 하교 후 친구들이 마을 공터에서 공을 차자고 붙잡았지만, 나에겐 아버지의 쟁쟁한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도와 화홍포 뻘밭에 2m 간격으로 나무 꺾쇠를 박아 덤장그물을 치는 게 내 일이었다. 개펄에 물이 빠질 때가 되면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털어 담아왔다. 물때가 오기 전 서둘러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고무 대야에 달린 끈을 허리에 동여맨 채 덤장에서 바닷가까지 1㎞ 정도 되는 거리를 빠르게 빠져 나와야 했다. 그렇게 집에 오면 아버지는 또다시 밭에 거둬 놓은 작물을 가져오라고 시키셨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었지만 친구들과 놀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오봉산 상황봉 자락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면 후딱 집안일을 돕고 뛰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공부보다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한 촌놈인 줄 안다. 집안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미역 양식부터 쌀 녹두 콩 농사를 지었고, 장어 낙지 소라 김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을 먹으며 자랐다. 생활비는 뻘밭에서 잡은 고기를 팔아서 충당했다.
초가집 단칸방에서 생활했던 여섯 식구는 전깃불을 아끼느라 저녁 식사가 마치기 무섭게 소등했다. 카메라가 없어 그 당시를 남긴 가족사진 한 장 없지만 불평불만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운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소리에 어린 나는 불안해졌다. 아버지에게 현금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동네 형이 쏠쏠한 정보를 알려줬다. 역도부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안 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육성회비 8900원만 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미리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역도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기를 한 번에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야 하는 인상 종목은 하체가 짧고 팔이 긴 내 체형엔 맞지 않았다. “까짓것 하면 되지, 한 번 끝까지 해보자”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운동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 좌우 줄서기로 갈라진 운명 “너는 왼쪽, 골프부야”
운동 그만두고 공부했으나 스트레스만 선장 되려고 완주수산고등학교 진학 처음 본 골프연습장, 닭장으로 오해도
최경주 장로의 완도수산고등학교 졸업 사진.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역도는 결국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그만뒀다. 몸무게 48㎏의 세 배가 넘는 158㎏ 역기를 들어 올리던 나였다. 허벅지 두께는 28인치를 자랑했다. 체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후배들한테 밀려 후보선수가 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춘기 소년의 자존심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 의지로 그만둔 게 아니라 강제로 잘렸기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운동을 그만두고 나서야 처음으로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영어 시간이었는데 영어를 처음 접하고 느낀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매 수업 시간이 스트레스였다. 당시에는 선생님이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하면 두껍고 딱딱한 출석부로 맞는 시절이었다. 열여섯 최경주에게 학교는 맞으러 가는 곳이었다. 나는 스스로 “공부는 내 길이 아니여”를 반복해 되뇌었다.
학교도 잘 안 가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땡땡이도 쳤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이 끝날 무렵 고등학교에 가려니 대책이 서지 않았다. 공부도 안 돼 있고 기본도 안 잡혀 있었다. 그런데 완도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광주로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야, 니 광주 가서 뭐 하려고 그러냐. 수고나 가서 배나 타지”라고 하시길래 완도수산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당시 완도에서 출세의 기준은 원양어선이나 상선의 선장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기관장이 되고 싶어 기계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학식 날이었다. 갑자기 체육 선생님이 단상에서 “역도를 해봤거나 하고 싶은 녀석 있으면 앞으로 튀어나와” 하고 외쳤다. 나는 속으로 ‘웬 횡재냐’ 싶었다.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단상으로 뛰어나갔다. 나를 포함 열 명 정도가 나왔다. 선생님이 한 명씩 지목하면서 두 줄로 나눠 서게 했다. 내 차례가 됐다. “너는 왼쪽.”
영문도 모르고 서라는 데로 섰다. 이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왼쪽은 골프부, 오른쪽은 역도부다.”
“골프가 뭐시여?” 골프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친구들도 골프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포함 모두가 수군거렸다. 나는 몰래 오른쪽으로 옮기려다가 선생님한테 딱 걸렸다. “어이 최경주, 니 왼쪽으로 안 가냐. 김기석 김성훈 박현준 정대경 최경주. 니들은 오늘부터 골프부여.”
이날부터 운동부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이 시기 한국은 88서울올림픽으로 개발이 한창이었다. 어느 날 학교 근처에 철근 구조물이 들어섰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퍼런 어망 같은 게 쳐졌다. “이야 뭔 놈의 닭장이 저렇게 크다냐.” “야 이 무식한 놈아, 닭이 그렇게 높냐? 저건 꿩 울타리여.”
매일 등하굣길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친구들과 논쟁이 붙었다. 결국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늦은 밤 몰래 그곳으로 모인 우리는 닭이나 꿩이 놀랄까 봐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망을 들추고 들어갔다. 근데 웬걸. 눈에 보인 건 닭도 꿩도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 생애 첫 샷이 멋지게 비행 “골프 이거 매력 있네”
창공 가르는 공보며 골프 매력에 빠져 하루 1000개 이상 공 주웠지만 행복 아버지 반대 속에도 골프 포기 안 해 낮엔 학교와 집안일, 밤엔 골프 연습
최경주 장로가 졸업한 전남 완도수산고등학교 전경. 완도수산고 제공
안으로 들어가자 하얗고 올록볼록한 둥근 게 발에 거치적거렸다. “저게 다 뭐 대?” “나도 몰라야. 근데 뭐가 저렇게 많냐.” 한눈에 봐도 바닥에 깔린 공이 수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닭이나 꿩 한 마리 잡아 와야겠다 했는데 아무 성과 없이 나왔다.
얼마 후 “골프부는 4교시 끝나면 학생과로 와라.” 그 말을 들은 나와 친구들은 “우짜냐. 우리 뭐 잘못한 거 있냐? 큰일 났다야” 하며 학생과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벽 앞에 차렷 자세로 나란히 선 우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선생님이 오시더니 골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설명이 끝나자 우리 각자에게 책 한 권을 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포니 엑셀 승용차를 타고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늦은 밤 친구들과 몰래 갔던 꿩 사육장이 알고 보니 골프 연습장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골프채를 하나씩 주고 무작정 연습을 시키셨다. 발에 거치적거린 정체는 골프공이었다. 연습이 끝나면 여기저기로 날아간 골프공을 줍는 게 일이었다. 기계가 없던 시절인 탓에 바구니를 들고 넓은 곳을 돌아다니며 공을 주워야 했다. 대략 6000개 공이 깔려 있었다.
얼마 후 선생님은 임무 하나를 주셨다. 핀 위에 올려진 공을 쳐서 그물망을 넘기면 그날 골프공을 줍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나는 7번 아이언을 들었다. 과거 야구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 야구채 잡듯 그립을 잡고 힘껏 쳤다. 그 순간 창공과 푸른 산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공이 너무 예뻤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선하다. “골프 이거 매력 있네.”
그때 친 샷이 지금의 최경주를 만들었다. 다른 친구처럼 땅볼이나 헛스윙을 했으면 골프에 재미를 못 붙였을 것 같다. 지금까지 한 운동과는 달랐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재밌었다. 매일 1000개가 넘는 공을 주워도 불평하지 않고 연습에 집중했다. 사실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하게 됐다. 골프를 사랑하면 미치게 된다.
2개월 후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아버지가 경운기를 타고 연습장까지 찾아와 반대 시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일이 산만큼 쌓였는데 골프가 밥 먹어주냐며 반대하신 것이었다. “농사를 하면 돈이라도 벌지. 니는 무슨 골프가 좋다고 돈도 안 되는 거 종일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아버지는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항상 아들 편이 돼주셨다. “니가 그렇게 좋아하면 그거는 계속해라.”
나는 담판을 짓기로 했다. “아부지, 내가 해 떠 있을 때 집안일 다 도와드리면 밤에 하는 거는 괜찮은 겨? 괜찮아?” “그래라 그럼.” “오케이, 약속 꼭 지키셔.”
하교 후 나는 연습장 대신 집으로 가 농사일을 도왔다. 고구마 양파 배추 등을 심고 거두는 일부터 무거운 것도 옮겼다. 부모님이 하라는 일을 다 끝내고 어둑어둑해지면 자전거에 올라타 40여분을 달려 연습장으로 향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 연습에 또 연습… 골프 실력 일취월장
하교 후 매일 4시간 골프 연습 매진 골프 연습장 사장님과 사제 연 맺고 극한 훈련 고됐지만 체력으로 버텨 골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최경주 장로가 2010년 모교인 전남 완도 화흥초등학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개인지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4시간을 한시도 쉬지 않고 쳤다. 빛이라고는 희미한 형광등이 전부였기에 공은 보이지도 않았다. 느낌에만 의존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가자 골프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골프는 공을 멀리 쳐 내는 운동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학교 테니스장 한쪽에 작은 구멍을 파고 테니스공이 담긴 통을 묻더니 ‘홀(hole)’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홀에 공을 굴려 넣는 ‘퍼팅(putting)’ 연습을 시키셨다. 골프는 홀에 누가 제일 먼저 공을 넣는지를 겨루는 운동이었다. 되돌아보면 최경주 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기가 막힌 인도하심이다.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골프에 빠져들었다.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테니스장에서 퍼팅 연습을 마치면 언덕 위 골프연습장으로 갔다. 당시 프로 골퍼에게 지도를 받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연습장 주인인 추강래 사장님이 지도해 주셨지만 그분도 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골프를 향한 열정만큼은 여느 프로 골퍼 못지않았던 사장님은 개인적 친분이 있는 골퍼를 초청해 특강을 시켜 주셨다. 그마저도 어려울 때는 잭 니클라우스의 골프 강좌를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교재를 보며 연습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사장님과 골프부 학생들은 ‘사부와 제자’가 돼갔다. 나는 사장님을 사부라고 부르며 따랐다. 사부가 시키는 훈련은 만만치 않았다. 매일 2교시 수업이 끝나면 곧장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훈련 루틴은 이랬다. 골프 체조를 하고 스윙, 퍼팅 연습과 체력 훈련을 했다.
폐타이어를 머리만 살짝 나오게 땅에 파묻고 쇠파이프로 때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쇠로 된 수도 파이프 끝에 쇠뭉치를 달아 연습용 클럽을 만들어 사용했다. 솨파이프가 워낙 무겁다 보니 자연스럽게 허리의 회전을 이용해 때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하면 골프채는 플라스틱 장난감과 다름없었다. 덕분에 나는 유연하면서도 강한 스윙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스윙 연습이 끝나면 언덕 위에 있는 연습장으로부터 200m 아래에 있는 도정공장 사거리까지 기어 내려갔다가 오리걸음으로 올라오는 체력 훈련을 했다. 경사는 30~50도로 완만했다가 가팔라지기도 했지만 하체 힘이 남달랐던 나는 맨 뒤에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밀어주면서 오르곤 했다.
퍼팅은 사부님이 특별 제작한 기계를 활용해 연습했다. 퍼터의 헤드보다 1㎝ 정도 폭이 넓은 기다란 쇠틀 연습기를 만들어 그 안에서 공을 굴리는 연습을 했다. 퍼터를 똑바로 안 치면 헤드가 쇠틀에 부딪혀 소리가 나는 구조였다. 연습에 집중하지 않아 소리가 나면 사부님한테 야단맞기 일쑤였다. 한 사람 당 공을 200번씩 굴려야 쉴 수 있었기에 골프부가 제일 싫어하는 훈련이었다.
이즈음에서 골프에 대한 생각을 얘기하고 싶다. 골프라는 운동은 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월드컵과 올림픽을 제외하고 개인 종목 가운데 대한민국을 알리는 데 골프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골프가 사치스러운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대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골프를 통한 스포츠 외교에 대해서 한 번쯤은 칭찬해 줬으면 한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6)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 죽기 살기로 운동에만 매달려
명사십리 모래사장은 최적의 연습장 벙커샷 칩샷 퍼팅 비거리 등 연습 덕분에 바람과 벙커 두려워 않게 돼 나인 홀 공군 골프장서 첫 필드 밟아
최경주 장로가 고교시절 처음으로 간 광주 공군 광주체력단련장 내에 있는 골프장. 해병닷컴 캡처
운동 외에 다른 길이 없었던 나는 죽기 살기로 했다. 친구들은 장난을 치거나 꾀를 부리며 쉬엄쉬엄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부가 시키는 훈련은 무조건 다 마쳤다.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노는 걸 보면서 이따금 흔들렸던 건 사실이다. 잭 니클라우스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던 나는, 골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완도 옆 신지도에는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다. 파도에 밀려나는 모래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린다고 해서 ‘명사십리’다. 지금은 산지대교가 있어 완도읍에서 차로 20여분이면 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골프장에 갈 수 없어서 대체할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명사십리가 생각났다.
명사십리는 바닷바람이 불어 생긴 모래구덩이가 많았다. ‘벙커샷’을 연습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의 모래는 아주 곱고 부드럽지만 썰물 때가 되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진다. 하루에 서너 편 뜨는 배를 타고 가서 두세 시간 후에 다음 배가 들어올 때까지 연습을 하고는 했다. 뱃고동 소리가 들리면 3~4㎞ 거리를 공을 주우면서 항구로 갔다. 이렇게 훈련한 덕분에 바람과 벙커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내 벙커샷만큼은 부러워한다.
명사십리가 골퍼에게 좋은 연습 장소인 또 다른 이유는 클럽의 비거리를 정확하게 잴 수 있다는 점이다. 골퍼에게 있어 상황에 알맞은 클럽을 선택하는 건 경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수시로 변하는 환경을 보면 자연이 훈련 코스를 짜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모래가 곱고 부드럽다가도 탄탄해져서 페어웨이와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칩샷과 퍼팅 연습도 할 수 있다. 모래 언덕은 그린과 같아서 다양한 코스를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 모래 위에서 샷을 하면 디봇이 생겨서 스윙의 궤도를 알 수 있다.
프로 골퍼는 자기 클럽이 상황에 따라 낼 수 있는 비거리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클럽의 비거리가 내는 오차 범위를 최대한 좁히는 사람이 최고가 될 수 있다. 나는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 샷 연습은 잔디보다는 맨땅에서 하는 게 좋고, 맨땅보다는 모래사장에서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명사십리에서 하는 게 최고다.
처음으로 필드를 밟은 건 골프에 입문한 지 4개월이 지나서였다. 광주 송정리에 있는 9홀짜리 공군부대 골프장이었다. 처음 필드에 나가기 전날 밤, 그린 구경은 해본 적도 없는 나는 너무 설레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완도에서 광주까지 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나서야 공군부대에 도착했다. 부대 내 시설이라 민간인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정문에서 예약 확인 후 군용 트럭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꿈에 그리던 순간이었다. 골프 가방을 품에 꼭 안고 잔뜩 긴장한 채 짐칸에 올라탔다. 필드가 가까워져 오자 초록색으로 뒤덮인 잔디가 펼쳐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트럭에서 내려 첫발을 딛자 폭신한 잔디가 우리를 맞이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7) 재능 알아본 사장님 “경주야, 이제 진짜 골프장 가자”
첫날 108타, 둘째 날 10타 줄여 98타 사장님 인도로 정규 골프장 라운딩 후 그린피 벌기 위해 손님 심부름 도맡아
최경주 장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라운딩을 돈 정식 골프장인 전남 곡성군 광주컨트리클럽 전경. 광주컨트리클럽 제공
우리 중에는 본인 클럽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클럽 한 세트를 나눠 썼다. 샷 연습을 한 번이라도 더 하기 위해 한 홀에서 공을 두세 번씩 날리기도 했다. 첫날엔 108타를 쳤다. 9홀을 두 번 돌았다. 두 번째 나갔을 때는 10타를 줄인 98타였다. 사부님은 나한테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셨다.
“경주야, 이제 진짜 골프장에 가자.”
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드디어 제대로 된 골프장 잔디를 밟는다는 사실에 밤잠 이루지 못했다. 그날부터 연습량을 늘렸다. 연습장에서 공을 멀리 쳐 내면 줍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물망에 바짝 다가서서 스윙 연습을 했다.
한 달이 지났다. “내일 새벽 6시에 티오프 할겨. 옥과까지 갈라믄 3시간 걸리니께 새벽 3시에는 출발해야 헌다. 알겄지?” 드디어 광주 컨트리클럽에 가는 날이 다가왔다. 전남 유일의 18홀 코스 골프장이었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너무 설레서 자정을 훌쩍 넘겨서 간신히 잠들었다.
1986년 5월 초 내 생애 처음으로 정규 코스 티잉그라운드에 섰다. 어렵게 나간 라운딩이라 한 번만 돌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당시에는 18홀 라운딩을 마친 뒤에도 원한다면 플레이를 더 할 수 있었다. 한국에는 이제 막 골프가 알려지기 시작한 때라 클럽 회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라운딩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골프를 치다 보니 힘든 줄도 몰랐다.
컨트리클럽을 다녀온 후 나는 그린피를 벌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골프 연습장에 오는 손님들의 차를 세차하기도 하고 클럽을 닦거나 잔심부름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집에서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고 품삯을 나눠 받기도 했다. 나는 개인 클럽이 없어 연습장에 오는 손님들이 연습할 때 옆에서 눈치껏 빌려 쓰곤 했다. 연습하다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실 때까지 싹 고쳐놓을 게라”하고 넉살 좋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를 혼내거나 하는 어른은 없었다.
“어허, 이놈 봐라. 재밌는 녀석이야. 어디 이거 한번 쳐 봐라.” 나중에는 손님들이 오랫동안 안 쓰고 보관해 두었던 채를 찾아 주면서 쳐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나한테서 프로 골퍼의 싹을 본 사부님은 고민 끝에 연습장에 오는 유지들에게 부탁하셨다. “경주, 갸가 공을 곧잘 치는데 말입니다. 필드에 자주 내보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사장님이 가실 때 한 번씩 그린피를 대 주시면 안 되겠소?”
“그라제. 언제 우리 갈 때 데꼬 갈랑게. 그때 준비하라 하소.”
그렇게 해서 사장님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에게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유지들이 어떻게 하면 최경주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의논하기도 했다. 쉰 넘은 큰 아버지뻘 되시는 분들이 모여 팀이 만들어졌다. 당시 골프 재미에 빠져서 틈만 나면 컨트리클럽을 찾으신 이분들 덕분에 신이 난 건 나였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8) 입문 5개월 만에 ‘싱글’… 광주 시내 ‘골프 괴물’로 소문
골프장 데려오고 그린피 내주신 어르신들 덕으로 맘껏 골프 연습 아침부터 쉬지 않고 하루 63홀 세 라운드 돌고도 9홀 더 돌아
최경주 장로가 2005년 열린 나이키 골프 주최 행사에서 꿈나무 골퍼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고 있다. 연합뉴스
초로의 신사들과 열일곱 소년이 한 차에 타고 새벽길을 달렸다. “돈은 우리가 알아서 낼 테니까 너는 열심히 연습햐. 우리랑 붙어 다닐 필요도 없어. 우리는 나이도 있고 천천히 노니면서 할 테니께. 너는 니 맘대로 돌아다녀야.” 그때는 그린피 1만2000원만 내면 주니어는 얼마든지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해줬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곧바로 필드로 나가 한 라운드를 돌고 오면 어르신들은 9홀도 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곧바로 두 번째 라운드를 돌았다. 집에 가기 전 한 홀이라도 더 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라운드를 도는 데 평균 4시간이 걸린다. 라운드 한 번 도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세 라운드는 돌아야 적성이 풀렸다. 아침 6시 반부터 쉬지 않고 돌았는데 최고로 많이 돈 것이 63홀이었다. 통상 18홀을 한 라운드로 치는데, 나는 세 라운드를 돌고도 9홀을 더 간 것이다.
“저 자식 웃긴 놈이여. 아야, 잘 봐 둬라. 나중에 뭐라도 될 놈이여.” 어르신들은 나를 보며 껄껄 웃기도하고 혀를 내두르면서도 기특해 하셨다.
이후 나는 엄청난 연습량 덕분에 골프 시작 5개월 만에 78타를 기록했다. 파(par)는 홀마다 정해 놓은 기본 타수를 말한다. 예를 들어, 파3는 공치기 세 번 만에 홀에 공을 넣어야 파가 된다. 18홀은 기본적으로 파3가 4군데, 파4가 10군데, 파5가 4군데로 구성돼있다. 기본 타수만 계산하면 72타가 된다. 핸디캡이란 기본 타수를 넘겨서 더 친 횟수를 말한다. 핸디캡이 18이면 홀마다 보기를 하는 실력이라는 뜻으로 ‘보기 플레이어(bogey player)’라고 부르고 10에서 17 정도면 잘 치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핸디캡이 1에서 9 사이의 한 자리 숫자면 ‘싱글 핸디캐퍼’라고 하는데 매우 잘 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프로 골퍼는 핸디캡이 없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골프에 입문한 지 5개월 만에 싱글 핸디캡 스코어를 냈으니 광주 시내에 ‘골프 괴물’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른들이 어깨를 들썩이는 동안 나는 골프에 대한 감을 익혀갔다.
골프는 스코어다. 18홀 성적을 모두 합한 숫자로 평가된다는 의미다. 이 말인즉슨 18홀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을 아무리 멀리 쳐도 그 기록이 스코어카드에 올라가지는 않는다. 첫 타를 실수해서 꼭 보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한 타 한 타 정성을 다해 마지막 홀인까지 해야 비로소 스코어가 정해진다. 그러니 좌절할 것도 들뜰 것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까지 꾸준히 성적을 내기 위해 실수를 줄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라운딩을 하다 보면 광주 지역 고등학교 골프부 아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번지르르한 자가용을 타고 와서 18홀을 가뿐하게 돌고 클럽하우스에서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어린 마음에 솔직히 부러웠다. 나는 그늘집에서 혼자 간단하게 허기만 채우고 바로 필드로 나갔다. 새벽에 나를 태워서 광주까지 데려오고 그린피를 내주신 어르신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9) 골프로 배운 인생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자”
뒤처지다가 언제든 역전 가능하고 앞서다가도 추월당할 수 있는 골프 인생 오르막 내리막이랑 닮아있어 미리 포기하거나 쉽게 덤비면 안 돼
최경주 장로가 2022년 경남 양산 에이원골프클럽에서 열린 제65회 KPGA 선수권대회 ‘with A-ONE CC’ 1라운드 2번 홀에서 드라이버 티샷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가 프로 골퍼가 되기까지 많은 분의 작고 큰 도움이 있었다. 어르신들이 도와주시기 전까진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거나 차를 빌려 타곤 했다. 한 번은 사부님이 소를 싣는 트럭을 빌려 오셨다. 자리가 비좁아 나는 클럽을 안고 짐칸에 타야 했다. 지나가는 차마다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내게 손을 흔들며 웃어 대서 어찌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넉살 좋은 녀석이라지만 그것만은 부끄러웠다. 시커멓고 우락부락하게 생겼어도 열일곱 사춘기 소년이었다.
나는 골프가 좋았다. 그래서 연습에만 매달렸다. 골목대장 노릇 하며 친구들을 몰고 오봉산 자락을 누비던 내가 친구도 포기했다. 무언가 얻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대신에 쉰이 넘은 어르신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어깨너머로 지혜를 배우고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18홀 코스 안에는 나무, 벙커, 연못 등 여러 장애물과 오르락 내리락하는 언덕이 있다. 오르막이라고 힘겨워 포기하거나 내리막이라고 쉽게 보고 덤비다가 넘어져서는 안 된다. 뒤처지다가도 언제든 역전이 가능하고 앞서가다가도 추월당할 수 있는 게 골프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어르신들이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신 이유를 살아가면서 깨달을 때가 많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날, 광주 컨트리클럽에서 캐디 없이 36홀을 혼자 돌고 난 뒤에 골프 카트를 반납하려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돌아서는 길에 무심코 앞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옥상에 깨끗한 새 카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카트는 다 낡고 더러운 줄로만 알았다. 별세계를 보듯 몽롱해졌다.
가까이 가서 보니 카트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당시 국가대표와 상비군으로 이름을 날리던 광주 출신 골프 선수들의 이름이었다. 물론 내 이름은 없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지금도 그 이름표가 잊히지 않는다. 부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오기가 생겼다.
“나도 최경주 이름 석 자를 붙인 내 카트를 기필코 갖고야 말겠다. 반드시 최고의 프로 골퍼가 될 테니, 두고 봐라.”
혈기왕성했던 나는 승부욕이 발동했다. 스스로도 운동만이 살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골프가 마냥 재밌기만 했던 때였다. 그런데 비로소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 것이다. ‘내 이름표가 붙은 카트 갖기.’
그해 9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화홍리 골프연습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옷차림은 말쑥한 신사분이었다. 한눈에 봐도 서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공을 치러 왔는데요. 공 좀 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어서 오세요. 공 내드릴께라.” 공 한 상자를 내드리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연습했다.
“프로님, 스윙 폼이 참 예쁘십니다.” “저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저 프로 아닌 데라. 저기 보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학생인데요. 그리고 골프 시작헌 지도 6개월밖에 안 됐어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은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0)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운명처럼 만나 서울 유학 꿈 키워
평소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조언 따라 서울 갈 작전 세우고 교통비 마련하려 골프연습장 손님들 골프채·신발 닦아
최경주 장로가 골프인생의 은인으로 꼽는 김재천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한서고등학교 제공
그분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껄껄 웃으며 구수한 말투로 친근하게 말씀하셨다. “아따 그라냐 근데 어쩜 공을 그렇게 이쁘게 친다냐. 내 폼 좀 봐 줄 수 있나?” “아 그라시죠. 어디 한 번 해보셔요. 그럼 제가 봐 드릴 게라.”
나는 6개월 동안 터득한 대로 가르쳐 드렸다. “거 참, 신통허네. 한 마디 한 마디가 달라. 잘 배우고 간다. 나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의 이사장이여. 수학여행 갈 만한 데 찾으러 왔다가 골프 선생을 만났구먼. 혹시 서울 올라오믄 전화해라, 잉.” 그리고 명함을 내미셨다. “우리 학교에 오믄 일주일에 두 번씩 필드에 나가게 해 주마 니도 알겄지만 연습장에서 하는 거와 필드에서 하는 거가 천지 차이다잉. 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올라오거라잉. 내가 다 알아서 해 줄랑게.”
나는 보통 사업가나 일반 사람이 그냥 자기 명함을 주나보다 하고 무심코 책가방에 넣어뒀다. 2주가 지나고 어느 날이었다. 방에 누워 자고 있는데 그분 이름이 문득 생각이 났다. 가방을 통째로 털자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한서고등학교 이사장 김재천’이라고 쓰여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서고 설립자였다.
순간 이사장님이 하셨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당시만 해도 완도에서는 누구네 집 아들이 광주로 유학 간다고 하면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서울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께 엄청나게 잘해드렸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했다. 명함을 보자마자 서울로 가야겠다 싶었다.
옛날부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다. “고기는 큰물에서 놀지, 조그만 데 가믄 고기가 없다. 남들이 가는 곳에 가 봐야 그것이 그것이여.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가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는겨. 남들 안 하는 일을 먼저 하는 넘이 뭐라도 한당게.” 아버지를 따라 멀리 가다 보면 진짜로 거기에 고기가 있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최경주의 경이 서울 경(京)자인 이유가 있었다. 서울을 두루두루 다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단 차비를 벌어야 했다.
6개월 사이 골프연습장에도 손님이 많이 늘었다. 그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가 먼저 다가서야 했다. 손님들의 골프채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골프채가 지저분하면 공도 커브를 그리며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튄다. 공을 올바른 방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수시로 닦아줘야 한다. 손님들도 자신의 골프채가 깨끗하게 정돈돼 있자,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른 한 두 명이 “야 너 뭐 필요한 거 있냐”고 물어왔다. “내가 말한 대로 다 줄랍니까?” “허허, 말해봐라. 이놈아.” “제가 사실은 서울을 가려고 하는데 차비가 없당게요.”
서울을 많이 다녀와 본 어른들은 5만원을 건넸다. 어린 나는 이분들이 뭘 해주면 좋아한다고 생각해 골프화 관리도 했다. 옛날 골프화 뒤꿈치에는 쇠징이 박혀있었다. 스윙하면서 힘이 쏠리다 보면 한쪽 뒤꿈치가 닳는데 나는 쇠징을 무료로 갈아줬다. 처음에는 교체하는지도 모르지만, 치다 보면 미묘한 달라짐을 눈치챌 때가 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1) 로스트볼 주워 파는 재미에 푹… 김재천 이사장과 첫 독대
18홀 돌며 날아간 공 다 쓸어모아 많게는 한 홀에 30개 넘게 줍기도 일반 골프숍의 절반 가격으로 판매 모은 돈으로 서울 왕복 차표 끊어
최경주 장로가 골프를 배우기 위해 전학을 희망했던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서고등학교 전경. 한서고 제공
그때 알았다. 진심으로 다가가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도 마찬가지다. 두드리면 들린다. 그 옛날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에도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니 마음이 열려서 뭔가 나오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걸 이야기하고 그것을 얻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생존력도 생겼다.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돈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당시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 손님들의 골프채와 골프화를 관리해주면서 용돈을 받았다. 요즘으로 하면 팁 제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른들이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더 나아가 세차도 하고 필드 이곳저곳에 날아간 공도 찾아줬다. 손님들의 공을 새 골프공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필드에 굴러다니는 수 천 개 공 가운데 새 공이 많았다. 나는 공을 줍고 닦아주면서 손님들한테 몰래 새 공을 바꿔서 주기도 했다. 혈기왕성한 나이였기에 남들이 들어가지 않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공이란 공은 다 쓸어왔다. 하나의 홀을 돌면 많게는 골프공 20~30개를 모을 수 있다. 18홀을 다 돌면 공만 100개를 주웠다. 가방엔 공으로 가득했다. 공 찾아서 필드에 나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나는 주운 공을 수건으로 하나하나 닦아서 골프연습장을 찾는 손님한테 판매하기도 했다. 일반 골프숍에서는 1만원에 팔았지만, 나는 5000원만 받았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소문이 퍼졌다. 어차피 똑같은 공인데 경주한테 사면 반값에 살 수 있으니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종종 손님이 잔돈이 없어서 1만원을 내면 나는 “제가 지금 잔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5000원은 내일 거슬러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반응은 두 가지다. 그냥 가는 부류와 끝끝내 잔돈을 받아가는 부류다. 전자 손님이 다음에 공을 또 구매할 경우 서비스로 15개를 더 줬다. 후자 손님인 경우엔 일부러 공 한 개씩을 뺐다.
당연히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아야, 니는 왜 편애를 허냐. 저놈은 15개 주고 나는 왜 9개냐.” “저분은 다음에 더 좋은 공 있으면 달라면서 1만원 주고 가셨고 사장님은 5000원 꼬박 받아가셨지라.” 손님은 깜짝 놀라면서 다음부터 잔돈을 안 받아갔다.
라운드가 기뻤던 또 다른 이유는 공을 많이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꽤 모았던 나는 돈 쓰는 데 맛 들여 친구들을 모아놓고 막 사줬다. 쉽게 돈을 벌었더니 아무렇게 쓰게 된 것이다. 결국 5만원을 손에 쥔 나는 광주에서 서울까지 왕복 1박 2일 표를 구매했다. 드디어 17살 소년 최경주와 김재천 이사장의 첫 독대가 이뤄졌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2) 골프 꿈 위해 전학 결심 “나 자퇴서 내고 서울 갈라요”
이사장 만나 전학 문제 확답받고 온 후 서울 전학 폭탄선언 하자 학교와 갈등 배신자 낙인에도 꺾이지 않은 의지 보여
최경주 장로가 2013년 경기도 성남 지구촌교회 분당성전에서 열린 ‘2013 셀(Cell) 콘퍼런스’에서 신앙간증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호기롭게 이사장님을 찾아갔지만 막상 독대하려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사장님은 평소에 골프를 쳤던 어르신들과 비슷한 연배이기에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편하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학생으로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사장님, 저 왔는데요”하고 인사하면서 집무실을 들어갔다.
이사장실에서 비서도 없이 둘만 앉아 서로를 마주 봤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기 이사장님, 제가 골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서울로 오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사장님은 바로 옆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직원을 불렀다. 직원은 내 신상정보를 상세히 물었다. “경주야, 내가 전학의뢰서를 써줄 테니 서울교육청에 전화 걸고 수산고등학교에 보여주면 된다.”
나는 이외에 전학에 필요한 정보를 물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이사장님은 “야 걱정하지 마라. 너 자는 거 학교 다니는 거 뭐 장학금도 줄게. 10만원씩.”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다 메모해서 집으로 내려갔다. 마음속에는 이제 서울로 올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설렜다.
하지만 학교 측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서울로 전학 가겠어라.” “꽃도 안 핀 놈을 누가 사 간단 말이여? 니는 꽃 필라믄 아직 멀었응게 잔말 말고 붙어 있어라, 잉.” 내가 느닷없이 폭탄선언을 하자 체육 선생님이 노발대발하셨다. 도 교육위원회에 선수 등록 신청을 해놓은 상태라며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떠나면 학교 골프부가 해체될 수도 있다며 염려하셨다.
광주 골프장까지 나를 데리고 다닌 어르신들도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있나”하며 역정을 내셨다. 내가 고향에 남아 완도와 전라도를 빛내는 선수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서울에 간다고 완도 출신이 서울 출신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오히려 큰물에서 성공하면 더 좋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왕 골프를 시작한 거 제대로 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이후 4개월간 학교와 갈등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골프도 칠 수 없었다. 의도치 않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학교에도 잘 출석하지 못했다. 그 기간 집에서 일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자퇴와 퇴학, 유급 등 여러 선택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야 했다.
아무리 설명하고 간청해도 학교에서 전학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몰래 감춰 놓았던 비상금을 탈탈 털어 고급 양주를 사 들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무리해야 되니께 어떻게든 해결을 봐라. 2월 말까정 전학이 안 되믄 받아 줄 수가 없당게.” 이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더 조급해졌다. 마침내 최후통첩하기로 했다.
집안 어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큰아버지부터 작은아버지, 고모, 이모 등 40여명은 모인 것 같다. “아버지. 나 자퇴서 내고 서울로 갈랑게요.”
***[역경의 열매] 최경주 (13) 친척 어른들과 학교 설득…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전학
우물 안 개구리로 살 순 없다며 집안 어른 만류에도 끝까지 설득 작아진 아버지 뒷모습에 가슴 아려 절대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
최경주 장로가 202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페블비치 골프링크스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스 투어 퓨어인슈어런스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뒤 미소를 지으며 트로피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나를 꼬실라 하지 말고 보내주쇼.” “그라믄 경주야 완도에 유지들 잘 아는 고모도 있고 하니 우리가 교육청에 손 닿는 데도 있고 잘 풀어보자.” “야 이놈아 우째 한 번에 그렇게 가냐.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 있고 의리가 있는 건데 어떻게 니 좋다고 그냥 다 때려치고 가냐.”
집안 어르신들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 한 마디씩 거드셨다. 이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큰아버지가 나한테 왜 서울에 가려고 하는지 물으셨다. “경주야, 완도에 있으면 다 괜찮을 긴데 니 얘기 좀 해봐라.” “큰아부지, 완도에는 나한테 맞는 골프장이 없당게요. 이건 현실이제. 아니 골프 선수를 할라믄 훈련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야 하는 거 아닌교. 라운드 돌 수 있는 골프장도 필요하고 그런데 완도에는 없어유. 서울에는 사람이 많은데 선수는 경쟁해야지 성장한당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주장을 펼쳤다. “농사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자그맣게 하니까 모르지. 나주나 저기 가보쇼. 우리가 하는 농사가 그게 농사여. 거기는 평야도 있어.”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어르신들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에 성공한 것이다. “경주 말이 맞네. 형님 이거 빨리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 기간 나는 골프 연습장도 갈 수 없어 신지도행 배를 타고 명사십리를 찾곤 했다. 그곳에서 온종일 혼자 샷 연습을 하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학교도 시끌시끌했다.
얼마 후 도저히 나를 설득할 수 없겠다고 판단 내린 학교는 전학에 필요한 서류를 내줬다. 결국 2월에 전학하기로 학교와 합의를 봤다. 드디어 서울행이 확정됐다. 1987년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숙소를 둘러보고 그날 밤 같이 주무셨다. “밥 잘 챙겨 묵고, 어데 아프지 말고. 알았냐.” 아버지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셨다. 농사일, 물일을 함께했던 장남이 듣도 보도 못한 골프에 미쳐서 저 혼자 서울 가겠다고 난리를 치니 괘씸하기도 하셨을 텐데 섭섭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다.
다음 날, 터벅터벅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아버지의 크고 넓은 어깨가 문득 너무 작고 좁아 보였기 때문이다. 울컥하는 순간 조금씩 흔들리는 아버지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쇼. 내가 알아서 잘할게라.” 1분 1초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만약에 완도에 계속 있었다면 어찌어찌 선수가 됐더라도, 지금의 최경주가 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4) ‘여호와 이레’… 미리 계획된 것처럼 골프선수로 이끈 삶
뱃사람 되려고 수산고 들어갔는데 골프부 생기고 연습장 사부님 만나 후원받고 김재천 이사장 만남까지 톱니바퀴처럼 완벽한 하나님 계획
최경주 장로가 2023년 경기도 여주시 페럼클럽에서 열린 KPGA코리안투어 현대해상 최경주인비테이셔널 2라운드 18번 홀 그린에서 신중하게 라인을 파악하고 있다. KPGA 제공
내가 서울로 전학한 다음에 고향 완도에서는 여러 일이 벌어졌다. 체육 선생님이 염려하시던 대로 완도수산고 골프부가 해체되고 추 사부님이 운영하시던 골프연습장도 문을 닫았다. 이 때문에 나만큼이나 열심히 했던 골프부 친구 박현준이 골프를 계속하지 못하고 원양어선을 탔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현준이 생각이 난다.
‘김재천 이사장님이 연습장에 찾아왔을 때, 현준이가 같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아니, 내가 아니라 현준이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마치 누군가가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던 것만 같다. 모든 일이 미리 계획된 것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돌아갔다. 뱃사람이 되려고 수산고에 들어갔는데 골프부가 생겼고, 꿩 사육장인 줄로만 알았던 골프연습장에서 사부님을 만났다. 사부님 덕분에 후원해 주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김재천 이사장님을 만났다. 마치 내게 골프를 가르쳐 주려고 한동안 모였다가 흩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 절묘한 타이밍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만약 골프부가 1년만 늦게 생겼더라면 나는 지금쯤 원양어선을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학년 때는 배 타는 실습 시간이 많아서 골프부에 지원하기 어려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일곱 소년의 서울 정착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완도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환경에 여간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평생 넓은 바다와 산, 들판만 보고 자란 시골 소년에게 서울은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신호등 하나 없는 시골 촌 동네에서는 차가 안 오면 건너면 됐지만 서울은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버스 지하철 타는 건 왜 이리 복잡한지, 차선은 어찌나 많은지….
유혹 거리도 많았다. 술집부터 시작해서 남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는 야구부와 같은 숙소에서 생활했다. “야, 그래도 우리 촌놈끼리 여의도광장은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겄냐.” 어릴 적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서 궁금했다.
야구부 친구 중 한 명은 “경주야. 너 저 63빌딩 10층 이상 보면 돈 내야 된다. 그러니까 그 이상은 절대 보면 안 돼.”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겁이 난 나는 1층부터 10층까지 한 층, 한 층을 셌다. “야 이놈아 건물은 건물이지. 무슨 돈을 내냐.” 알고 보니 시골에서 왔다고 골탕 먹이려고 놀린 것이었다. 내가 너무 순수한 탓이다. 야구부 학생은 박장대소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5) 한눈 안 팔고 연습에만 몰두… 한 번에 프로 입문
유혹 거리 많았지만 운동에만 올인 기본 체력도 좋은 데다 연습량 많아 늦게 시작했지만 빠른 성장세 보여
최경주 장로가 2012년 ‘코리안 탱크 최경주’를 펴내고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국민일보DB
그렇게 어이없이 속을 만큼, 운동 말고는 아는 게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갈 시간도 없고 그런 데 쓸 돈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친구들이 나이트클럽에 다녀와서 열을 올리며 같이 가자고 꼬드겼지만, 골프 외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만큼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기본 체력이 좋은 데다가 연습량까지 더해지니 성장 속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골프를 비교적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 입문은 재수나 삼수 없이 한 번에 바로 할 수 있었다.
서울로 전학 오기 전 김재천 이사장님을 찾았을 때 그분은 나에게 충분한 지원을 약속하셨다. 나는 이것저것 묻고 약속을 받아뒀다. 이사장님은 당신이 약속한 것을 하나하나 다 지켜 주셨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지에서 믿을 사람은 이사장님밖에 없었다.
“제가 서울 오믄 밥은 먹여 주실라요. 우리 집은 나한테꺼정 돈 부쳐줄 형편이 안 되는 데라….” “오냐, 내가 다 해 줄 것이여. 걱정할 것 없다. 대신에 니는 우리 학교를 빛내 주면 돼야.” “좋습니다. 그람, 저도 믿고 오겄슴다. 제 몫은 확실하게 할 것이요.”
매번 골프채를 빌려서 연습하니까 영 불편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사장님을 찾아갔다. “근데 골프채가 없으니까 연습하기가 여간 불편하당게요. 이사장님이 사 주신다고 했으니, 사 주셔야지요. 누가 사 주겠습니까.” “그르냐. 그람 내가 사줄게.”
이사장님이 흔쾌히 사주신다고 했지만 차마 새것을 살 수는 없어서 발품을 팔아 중고품을 알아보고 다녔다. 여의도 63빌딩에 있는 매장에 좋은 물건이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벤 호건 아펙스’ 세트를 손에 넣었다. 중고인데도 금액이 70만원이나 했다. 학교 용품으로 산 거라 엄밀히 말하면 내 것은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길들일 수 있는 나만의 채를 가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며 감격했다. 이사장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셨다.
내가 전학한 한서고등학교에는 원래 골프부가 없었기에 야구부 합숙소에 한 자리를 얻어 생활했다. 처음에는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졌다. 한 팀을 강조하는 단체 생활에 나 혼자 따로 움직이자니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에는 선배가 후배의 기강을 잡는다며 얼차려를 주거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곤 했는데 잠자리에 누워서 ‘퍽퍽’ 매 맞는 소리를 듣자니 심장이 벌렁거려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이사장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6) “공부보단 골프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이사장과 담판
야구부와 합숙 어려운 점 털어놓고 골프 연습장으로 숙소 교체 요구 수업에서도 해방 시켜주면 학교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 약속
최경주 장로가 2017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클럽 하늘코스에서 열린 ‘2017 SK텔레콤 오픈 재능나눔 행복라운드’ 3번홀에서 벙커샷을 하고 있다. 뉴시스
나는 당시 2층 침대를 사용했는데 야구부원들이 맞을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어야만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나는 무턱대고 이사장실을 찾아갔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너머에서 “들어와”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장님 근데 매달 10만원씩 준다고 해놓고 왜 안 줘요. 내가 지금 학교 온 지 2~3개월이 다 돼가는데 이사장님 거짓말하고 약속 안 지켜도 되는교.” 나는 따지는 투로 얘기했다. 이사장님도 어른이 그랬다면 혼을 냈을 텐데 한참 어린 학생이 그러니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 “경주야, 미안하다. 학교 재정이 참 어렵다. 니가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 되겄냐. 내가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까 몇 개월 치는 주마.” 이사장님은 직원을 불러 밀린 지원금을 지급했다.
“그나저나 너 지내는 데 어려움은 없냐.” 안 그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사장님이 먼저 물어봐 줘서 다행이다 싶었다. 고자질할 수는 없으니 직접 얘기하지 않고 돌려서 설명했다. 당시 운동부원 사이에서 ‘최경주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기류 같은 게 흘렀었다. 하나님 만나기 전이라 험한 말도 쓰고 몸이랑 힘도 훨씬 좋았다. 얼굴은 또 어찌나 우락부락했는지 믿음이 없을 때라 인상이 악마 같았다. 야구부 감독도 나를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제가 한 몇 개월 살아 보니까 야구하고 골프는 전혀 다르대요. 종목 성격도 다르고 생태도 다르당게요. 먹는 것부터도 너무 달라서 저는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끼리 있어야 되겠당게요.” “그라믄 어떻게 하면 좋겠냐.” “저기 밑에 김포 골프 연습장이 있는데 우리 선배 아버지가 거기 사장님이에요. 저 그냥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골프도 치고 할 테니께 편의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학업과는 담을 쌓았었다. 수산고 기계과에서 갑자기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니 교과서부터 달랐다. 쓱 훑어보니 이건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다. 마치 유치원생한테 성경을 주면서 공부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이해도 안 됐다. 나는 ‘도대체 이게 뭔 말인 걸까’ 하면서 시간만 보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이사장님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골프 선수가 되기로 작정했으니 저를 믿고 수업에서 해방시켜주면 학교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해볼랍니다.” “니가 정 그러면 그렇게 해라.” 이사장님은 골프연습장 사장님을 만나 “우리 경주가 여기서 운동 할 수 있게 편의 좀 잘 봐주시오”하고 부탁하셨다. 이사장님은 학교에서 가까운 골프연습장에 숙소를 마련해주셨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연습도 할 수 있고, 개인 지도를 하는 프로 골퍼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공부가 됐다.
하지만 기대만큼 대회 성적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자신감 하나로 버티며 ‘골프 괴물’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7) 골프연습장 허드렛일 자청… 진심 통해 사장님께 신임
영업 마치면 철탑 위 공도 줍고 찢어진 그물망 찾아 일일이 꿰매 손님들 클럽이나 골프화도 정비 이쁨받아 ‘완도최’란 애칭도 생겨
최경주 장로가 2020년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블랑 워윅 힐스 컨트리클럽에서 개막한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스투어 앨리 챌린지 2라운드 11번 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때부터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연습 외에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이다. 수산고 기계과 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도 있었다. 골프연습장에는 멀리 나가는 공을 막기 위해 그물망이 설치돼 있었다. 멀리 나간 공을 가져오기 위해 철탑을 올라가기도, 찢어진 그물망을 메꾸기도 했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으면서도 나를 신임하게 됐을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연습을 늦게까지 해도 넘어가 주셨다.
영업이 끝나면 연습장을 쭉 한 바퀴 돌면서 공이 빠져나갈 만한 구멍 같은 곳이 없이 없나 살피고 일일이 다 꿰맸다. 당시 창고에는 100여개의 클럽이 있었는데 딱 보면 자주 오는 사람, 가끔 오는 사람을 단번에 구분할 수 있었다. 자주 오는 손님의 클럽은 일부러 앞쪽에 두고, 그렇지 않은 손님의 클럽은 뒤쪽에 놔뒀다. 또 손님의 골프클럽을 정리하면서 더럽거나 정비가 안 된 골프채가 보이면 다 닦아주기도 했다.
다음 날 연습장을 찾은 손님이 골프채를 꺼내면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아니 누가 자꾸 내 채를 닦아 놓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아 그거 최군이 닦아 놓은 겁니다.” 사람들은 고향인 완도와 성 ‘최’씨를 붙여 ‘완도 최’라고 불렀다. 어른들의 애칭인 셈이었다. 나도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존중받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자네가 내 채를 닦았는가.” “네. 옛날에 완도에서 공칠 때 채가 지저분하면 공도 지저분하게 간다고 배웠당게요. 이렇게 잘 닦아놓으면 마음도 정신도 채도 깨끗하니까 1%라도 잘 맞을 확률이 높아지지요. 일거양득이지요.” “허허, 이놈 봐라.” 감동을 한 손님은 수고했다고 용돈을 주셨다.
서울도 완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손님의 골프화 쇠징을 갈아주고, 골프공을 싸게 주고 했던 터라 이때의 경험을 그대로 살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손님을 진심으로 대했다. 과거 경험을 살려 매일 저녁 손님들의 골프화 뒤꿈치를 갈아줬다. 조금만 상해도 정비해줬다. 처음에는 ‘이놈이 나한테 뭘 바라나’ 했던 어르신도 내 진심을 깨닫고는 마음을 차츰 열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저기요, 누가 내 신발 뒤꿈치를 갈아주는 거 같은데 도대체 누가 해주는 거예요.” “그거 최군이 밤마다 사무실에서 가는 거예요.” “아이고 이거 감동이네.” 이 손님은 나중에 나를 위한 골프채를 선물해주셨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8) 골프대회 첫 출전… 예선 탈락 충격에 밤낮없이 연습
졸업 앞두고 나간 서울시장배 대회 본선 진출 기대했다가 떨어져 충격 실력 부족 깨닫고 남보다 배로 연습
최경주 장로가 2023년 미국 오하이오주 아크론의 파이어스톤컨트리클럽에서 열린 PGA 투어 챔피언스 콜릭 컴패니스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티샷한 뒤 볼 방향을 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렇게 2년을 연습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서울시장배 골프대회에 출전했는데 예선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아무리 서울에서 가장 큰 대회라고 해도 본선에는 진출할 줄 알았는데 예선에서 떨어지다니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사장님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완도 어르신들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비참했다.
“니는 우리 학교를 빛내 주면 돼야.” 나를 믿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셨던 이사장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기대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졸업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우승컵을 들어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처참하게 맛본 실패의 경험이 내게는 쓴 약이 됐다. 입술을 깨물고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패인을 분석했다. 결론은 실력 부족이었다.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 실력은 절대 훌륭하지 않아. 오히려 한참 뒤떨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연습이다. 평소에도 연습량이 부족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을 인정하고 난 후 실력 부족은 연습량 부족이라는 생각에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렸다. 계속되는 연습에 골프 연습장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다른 사람이 공 100개를 치면 나는 200개를 쳤다. 어떤 사람이 밤 10시까지 연습하면 나는 자정까지 연습하고, 아침 7시에 나오면 나는 6시에 나갔다. ‘한 시간 빨리, 한 시간 늦게. 연습량은 무조건 두 배’는 내 기준이 됐다. 그 이후로 어디를 가면 그곳에서 누가 가장 부지런한지 파악하는 습관이 생겼다. 얼마나 지독했던지 ‘경주가 연습할 때는 건들지도 마라’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물론 타향살이의 설움도 있었다. 프로로서 자리 잡기 전까지는 연습장과 협소한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연습을 해야 마음 편히 집중할 수 있었다. 손님들 개인 지도를 하고 연습장 관리를 다 마치고 나면 늦은 밤이 됐고, 그때 연습을 하다 보니 주변 주택가에서 시끄럽다는 불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연습을 거르기라도 하면 다음 날 “그 청년 어디 아프대요. 어젯밤은 조용하던데”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난처한 상황이 생긴 적도 있다. 골프연습장 사장님 아들도 연습생 신분으로 같이 연습했는데 사람들이 나와 그 친구를 비교하면서 쑥덕거리니 눈치가 보인 것이다. 일이 고된 것은 견딜 수 있어도 마음이 힘든 것은 참기 어려웠다. 서글펐다.
“이 넓은 서울 땅에 내 몸 하나 누울 곳 없겠어.” 할 일을 다 하면서도 눈칫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다른 연습장을 찾아 번호들을 종이에 빼곡하게 적어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갔다. 옆에는 10원짜리 동전 50개를 쌓아놨다. 한 통에 20원이니 25통은 걸 수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19) 20통 전화 끝에 연습생 신분… 평생지기 이경훈 프로 만나
연습장 오픈 시간보다 일찍 나가 새벽 5시 대걸레질로 하루 시작 최선 다하니 필드 라운드 제안도
최경주 장로가 2018년 경남 김해 정산CC에서 열린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2라운드 15번홀에서 트러블샷을 하고 있다. KPGA 제공
“혹시 연습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한 통, 두 통, 세 통…. 20통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달랑 100원뿐이었다.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남은 건 20원뿐. 수화기를 든 손이 떨렸다. 같은 질문을 건넸다. “혹시 연습생이 필요하십니까.” “글쎄요, 한번 와 보시든지.”
곧바로 가방 하나만 챙겨서 서울 장안동에 있는 대원골프연습장으로 달려갔다. 가는 동안에 내 자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들 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보니 그곳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일주일만 저를 써 보십시오.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일주일 동안 제가 일하는 걸 보고 나서 결정해 주십시오. 그때 가서 나가라고 하시면 나가겠습니다.”
다행히 박찬영 사장님은 기회를 주셨고 나는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거기서 연습생으로 있던 이경훈 프로를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됐다. 고향이 그립던 차에 전주 출신 동년배를 만나니 너무 기뻤다. 나보다 먼저 골프를 시작한 이 프로는 실력도 좋고 세련돼 보였다. 여러모로 나보다 앞선 친구라 배울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이 무척 좋았다.
손발이 꽁꽁 얼 만큼 추웠던 겨울밤, 난로에 넣을 땔감을 줍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또 연습장 창고 뒤편에서 토막잠을 자야 했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든든했다.
“최 프로,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있나. 코스에 한번 나갑시다.”
장안동 시절 아직 연습생이었던 나를 ‘프로’라고 불러 주던 분들이 가끔 필드에 데려가 주셨다. 연습생 처지에 비싼 그린피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으니 이분들의 제안은 정말로 가뭄에 단비 같았다. 아직 프로 골퍼도 아닌 나에게 필드 라운드를 제안해 주신 것이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왜 저를 코스에 데려가십니까.” “흠, 그건 자네가 대걸레질을 아주 잘하기 때문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장안동 시절에도 나는 오랜 습관처럼 아침 6시에 문을 여는 연습장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5시에 나가 바닥의 고무매트를 대걸레로 깨끗하게 닦아 두곤 했다. 첫 손님이 연습장에 들어섰을 때 상쾌한 기분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손님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한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성격상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했다.
이런 모습이 손님들이 보기에는 대견했던 모양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걸레질을 성실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더라는 분들이 많았다.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최선을 다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다시금 배웠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0) “먼저 베풀면 그만큼 돌아온다” 일찌감치 깨달아
고향 동네 사람들 서로 농사일 도와 품앗이로 배운 삶의 지혜 평생 실천 돈 욕심 안부리고 ‘돕는 삶’ 이어가
최경주 장로가 과거 출전한 한 대회에서 드라이버 스윙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어린 나이에 공짜로 무언가를 해주는 게 아깝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단 한 번도 아까운 적이 없었다.” 내가 자란 시골은 동네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누군가 닫아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웃이 고구마를 캐야 한다고 하면 40명씩 다른 동네에서 와서 힘을 보태 오전 중에 싹 도와줬다. 그다음에는 다른 집으로 가 배추를 뽑아주며 품앗이하듯 일손을 보탰다.
하루는 아버지가 힘들어하셔서 “경주야, 니 저 동네 누구누구네 집에 가서 밭 4마지기 로타리(논을 고르는 일)를 치면 돈을 줄 거니 도와주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로타리를 다 쳤다. 밭 4마지기를 치려면 6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그 어린 나이에 혼자 가서 다 하고 왔지만 아버지는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한테 물었다. “아부지. 그 밭 누가 갈았어요.” “니가 했지.” “그러면 돈은 누가 받아야 합니까.” “야, 그거는 내거로 니가 했으니까 그게 다 아부지 거지.” “그라믄 다음부터 사람을 써서 하시랑게요. 그러면 아부지가 60%를 갖고 40%는 일꾼한테 줄 텐데 그렇게 하려면 하시랑게. 나는 20%만 받으면 충분하당게요.” 나는 아무리 아들이라도 정확히 내가 일한 몫에 해당하는 품삯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협상을 잘했다. 적당히 바랐다. 내가 원하는 건 10%에서 15%, 많아도 20%였지만, 그마저도 안 주면 내가 돈을 건넬 때 미리 빼고 줬다.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그대로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프로가 돼서도 마찬가지다. 우승 상금을 받아도 그대로 아내에게 가져다 줬다. 한 번도 내가 먼저 봉투를 열어본 적이 없다. 이런 습관은 완도에서 살았던 어릴 때부터 이어져 왔다.
여느 시골 사람처럼 돈에 욕심이 없었다. 자연이 주는 대로 흥할 때도 있고 흉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잡은 고기를 나눠 먹고 동네 어른들 노동을 도울 때 쌀 한 가마니를 갖다 주고, 잡은 물고기는 우리끼리 나눠 먹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돈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오가며 농사일을 도왔다. 그래서 어릴 때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가 먼저 남을 도우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영어로 말하면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인데 여기에서도 기브가 먼저 나온다. 내가 먼저 베풀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먼저 주라는 복음을 알려주시지 않았나.(행 20:35) 지금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돕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1) 자주 할 수 없는 라운딩 대신 ‘123골프’ 두 세 번 돌아
이사장님, 조금도 다그치지 않고 편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 졸업 때 “프로 되기 전 꼭 우승” 약속
최경주 장로가 2008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24회 신한동해오픈 참가선수 공동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환하게 웃으며 답하고 있다.뉴시스
‘골프인생 은인’ 김재천 한서고교 이사장님이 졸업 전에 우승컵을 선물해주고 가라고 하셨기에 나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이사장님은 학교 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편하게 운동하라고 하셨다. “이사장님, 제가 완도에서는 잘 친다고 해서 상경까지 했는데 서울놈들 너무 잘 쳐요. 내가 시합을 나간다 한들 순위권에도 못 든당게요. 내가 실력을 좀 더 쌓아야 되니께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어쩌면 시합을 한 번도 못 나갈 수 있어요. 그건 좀 알고 계쇼.” “그래. 그건 니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얘기가 되고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만약에 이사장님이 왜 이것밖에 못 하느냐고 조금이라도 다그쳤다면 마음이 쫓겨 아마 연습에도 지장이 생겼을지 모른다.
이사장님은 ‘123 골프’를 제안하셨다. 123 골프는 롱홀 1개, 미드홀 2개, 쇼트홀 3개 등 6홀로 구성된 작은 골프장이다. 라운딩을 자주 나갈 수 없는 나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123 골프장을 두세 번 돌며 연습했다. “아니 이사장님, 1번홀에서 18번홀로 끝나는 정식 코스가 있는 골프장을 데리고 가야죠. 이렇게 조그만 데서 연습하면 실력이 늘겠어요.” “이놈아, 작아도 합쳐서 18홀 돌면 그것도 골프 친 거지.”
감사한 마음은 한결같았지만, 똑같은 코스를 여러 번 반복해서 돌자니 재미가 없었다. 어찌 됐든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졸업식 날이었다. 나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갔다. 내 순서가 되자 이사장님이 졸업장을 안 주시는 거였다. “이사장님 왜 안 줘요.” “야 인마, 너 학교에다 뭘 해주고 가야지. 그 골프채도 반납해야지.” 나는 그 순간에 잔머리를 굴렸다. “이사장님 내가 프로 되기 전에 학교를 위해서 꼭 우승하겠습니다.” “니 그 약속 반드시 지켜야 된다잉. 그리고 골프채는.” “에이, 그 채는 이미 다 부서져 버렸죠.” “그래. 알았다.” 1990년 2월이었다.
졸업 후 나는 바로 군대에 가기로 했다.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서 군 면제를 받는 건 상상도 못 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면 빨리 다녀오자는 생각이었다. 신체검사에서도 1급 판정을 받아 무조건 현역으로 가야 했다. 군대에 가는 것에 대한 반감이나 이런 건 없었다. 다만 군 복무 기간을 하루라고 줄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골프채를 잡지 못하면 그동안 했던 연습과 스윙의 감이 떨어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부지. 나 좀 도와주쇼.” “뭔데 그러냐잉.” “저 완도에서 방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주쇼.” “그래. 알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정부에서 전 해안가 지역 초소 경계병을 각 지역 출신으로 배정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내 본적지는 전남 완도 화흥인데 그곳에도 초소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1급 현역에서 방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2) 고향서 방위병 입대… 초소 근무 중 소총으로 스윙 연습
골프채로 스윙하고 싶은 마음에 솔방울 올려놓고 연습하다 적발 소대장 배려로 영창 위기 벗어나 취사병으로 지원, 6개월간 근무
최경주(오른쪽) 장로가 2008년 충남 계룡대에서 임충빈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육군 홍보대사 위촉장을 수여받고 있다. 뉴시스
힘쓰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경주야, 니 안 그래도 정부에서 그 동네 사람들은 다 방위로 빼라고 영장 나왔다잉.” 나는 곧바로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광주 31사단에서 방위 교육을 받고 완도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사실 군대 이야기는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할 이야기가 많다.
군 복무를 하며 나에게 벌어진 일을 다 듣고 나야 하나님께서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믿게 된다. 정말 기가 막힌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대 초소에서 복무하다 보니 손이 너무 근질근질했다. 골프채를 잡고 스윙을 하고 싶어 참느라 힘들었다. 도저히 참지 못한 나는 소총을 거꾸로 잡고 바위 위에 솔방울을 올려놓고 스윙 연습을 했다.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다. 동초 근무를 설 때는 항상 서 있어야 했다. 어느 날 선임 몰래 소총으로 연습을 하던 도중 소대장에게 걸린 것이다.
짧은 순간에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어떡하지, 나 이러다가 영창 가는 거 아니야.’ 당시에는 5공 시절이 끝난 직후라 공기가 달랐다. 아마 완도가 아니었다면 진짜 영창에 갔을지도 모른다. 동초 근무자가 소초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됐다. 윗선에서는 면담을 통해 영창을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조사가 시작되고 나는 개인 신상과 취미, 진로까지 상세하게 다 적었다. 이후 소대장과 면담에 들어갔다. “너 골프 선수였나.”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소대장님, 정말 죄송한데유. 여기는 우리 지역 아닙니까. 설령 북한 놈이 오면 제가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골프가 치고 싶어서 참고 참다가 딱 한 번 쳤습니다.” “한 번은 넘어가지만 다음부터 근무 제대로 서라. 또 걸리면 그때는 봐주고 하는 거 절대 없다.” “감사합니다. 소대장님.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은 없을 거랑게요.” 천만다행으로 소대장님이 내 마음을 이해해주셨다.
또 다른 해프닝도 있었다. 후임 중에 취사병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하루 밥을 하면 이틀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다. 이상하게 여긴 나는 그 후임을 따로 불러 물었다. “야, 니 밥 하고 나면 어디로 그렇게 사라지는 거여.” “취사병은 하루 근무하면 그다음 이틀은 근무에서 배제해줍니다.” “이야, 그러냐잉.”
나는 곧바로 소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소대장님. 저도 취사병 하고 싶은데 어떻게 그쪽으로 배치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소대장은 생각보다 흔쾌히 취사병으로 보직을 바꿔주셨다. 군 생활 18개월 중 6개월을 취사병으로 복무했는데, 병사들의 밥을 만들면서 생각보다 많은 걸 배웠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3) 근무 중엔 나라 지키고 근무 마치면 골프 연습과 레슨
군 복무 중 돈 벌 방법 고민하다 동네 사모님 대상 골프 레슨 시작 수입 중 절반 아버지께 용돈 드려 전역 후 서산에서 골프 연습 매진
최경주 장로가 2008년 경기도 용인 레이크사이드CC에서 열린 신한동해오픈 골프대회 최종라운드에서 승리한 후 갤러리들의 환호에 모자를 벗어 답하고 있다. 뉴시스
당시 현역 근무 기간이 30개월인 것에 비해 방위는 18개월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군 복무를 하는 와중에도 돈 걱정은 떨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말을 잘하는 은사가 있었다.
돈을 벌 방법을 고민하다 나는 동네 사모님을 대상으로 골프 레슨을 하기로 했다. 먼저 골프에 관심을 보이는 사모님을 모집했다. 사장님은 바쁘니 사모님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예상은 적중했고 금방 20명을 모았다. 대신 레슨비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1인당 5만원만 받았다. 아침 7시에 부대에서 교대 근무를 마치면 곧바로 골프연습장으로 향했다. 레슨은 9시에 시작하니 그 전에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면 시간이 딱 맞았다. 나는 레슨을 할 때마다 숙제를 내주고 하루 걸러서 만났다.
레슨 인원이 많다 보니 순식간에 100만원이라는 돈이 주머니에 들어왔다. 나는 레슨비를 선지급제로 받았는데 사모님들은 나를 무한 신뢰했다. 군인이 어디로 도망갈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월초에 100만원을 받으면 절반을 뗀 50만원을 아버지께 용돈으로 드렸다. 갑자기 출처 모를 돈을 받은 아버지는 놀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셨다. “야, 너 요즘 부대에서 뭐 하고 다니냐. 너 무기 파냐. 도대체 무슨 일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어디 나쁜 일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 방위병이 이렇게 큰돈을 어디서 번다냐잉.”
나중에 소문이 퍼져 모든 동네 사람이 알게 됐고, 군인이 돈을 벌어다 주는 건 처음이라며 칭찬했다. 완도에서 자라며 생존력이 강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배운 인생의 지혜는 거리감과 속도감이었다. 이는 골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군 생활은 초반 해프닝을 제외하고는 평탄했다. 근무 시간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집중하고 오후에 일이 없을 때는 연습에 집중했다. 레슨도 꾸준히 하고 아버지 용돈도 드리다 보니 집안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군복도 항상 단정히 입었다.
시간이 흘러 소집 해제 날이 다가왔다.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역 후 서울로 올라갔다. 친구들과 골프 연습할 곳을 찾다가 충남 서산에 있는 연습장을 발견했다. 하루에 8명 밖에 없는 곳이었기에 한산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떨어진 폼을 끌어올리는 데 힘썼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나를 유심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프로님, 내가 전에 본 프로들이랑 스윙부터 다르네요. 동네에서 볼 좀 치는 지인 불러서 테스트라도 한 번 해보실래요.”
나는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다음 날 라운딩을 나갔는데 차 안에서 손님과 친구들은 자기 자랑을 하기 바빴다. 그들에게 곧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른 채.
***[역경의 열매] 최경주 (24) 어른들과 내기 골프… 300m 장타 선보이며 큰돈 벌어
밑천이 없어 내기 골프 걱정했지만 핸디캡 받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게임 첫 홀부터 12만원 벌어 종잣돈 확보 67타 압도적 실력으로 230만원 따
최경주 장로가 2008년 경기도 용인 레이크사이드CC에서 열린 신한동해오픈 골프대회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가 한 달 만에 서산지역을 다 평정했어. 제아무리 프로라고 해도 여기서는 힘을 영 못 쓴다니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잘하길래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거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만만찮은 능구렁이였다. ‘이분들은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까.’
내 호주머니에는 딱 5000원만 있었다. 왠지 어른들이 내기하자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 명이니 한 사람당 최소 10만원씩 깔 텐데, 총 30만원은 필요했다. 당시에는 믿음이 없어서 기도 대신 다짐을 했다. 나는 먼저 9홀씩 계산을 하자고 하려고 했다. 그 정도면 대략 실력이 나올 거로 생각했다. “서산에서는 어떻게 계산합니까.” “우리는 스트로크 하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스트로크는 내기 골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방식이다. 1타당 정한 금액을 각자 스코어의 차이를 곱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주는 방식이다. 하수에게 불리함을 만회해주기 위해 핸디캡에 해당하는 금액을 미리 내 놓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못 해도 70대는 칠 거로 생각하고 한 사람당 10만원은 딸 수 있겠다고 계산했다.
“사장님. 골프장에서는 프로가 오너인거 아시죠. 먼저 치시죠.” “그럴까. 그럼 내가 먼저 치지.” 어른들이 먼저 티샷을 치고 내 차례가 됐다. 모두가 간과한 것이 있다. 당시 나는 혈기왕성한 시기라 공을 쳤다 하면 멀리 나가던 시절이었다. 공이 그냥 멀리 가는 게 아니었다. 젊을 때 잘 나가갈 때는 300m 이상 치기도 했다. ‘장타 하면 최경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드라이브를 치자 어른들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완전히 놀란 것이다. 첫 타에 공이 그린 앞까지 간 것이다. 표정을 보니 ‘큰일 났다. 이거 어떻게 하냐’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부터 어른들은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헛스윙을 날리기도 했다. 그렇게 첫 홀에서만 12만원을 벌었다. 두 번째 홀에서는 더블을 쳐서 번 돈이 두 배가 됐다. 시작부터 종잣돈이 확보된 것이다. 초반 흐름을 탄 나는 버디를 하기도 했다. 남들이 어떻게 치든 관심이 없었다.
어른들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공을 치기도 전에 자진 납세했다. 나중에는 골프 가방에 돈을 넣을 곳이 부족해 바지 뒷주머니에까지 넣는 지경에 이르렀다. 속으로는 너무 기뻤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돈을 딴 것이다. 라운딩이 끝난 후 라커룸에서 돈을 세어 보니 무려 230만원을 벌었다. 무엇보다 기록이 너무 잘 나온 것이 가장 기뻤다. 그날 평생 처음으로 67타를 쳤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5) 사흘 연속 내기에서 진 어른들, 실력 인정하고 항복
괴물 나타났다며 오기로 재도전 삼일 연속 60대 타수 치며 승리 엄청난 실력에 모두 레슨 요청 처음 3명서 한 달 만에 30명까지
최경주 장로가 200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웰스 골프리조트에서 열린 ‘LG 스킨스게임’에서 우승 후 트로피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당시 나와 골프를 치던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우리 둘 사이에는 반드시 지키는 규칙이 있었다. 내기를 통해서 번 돈을 절반으로 나눠 갖는 것이었다. 내가 번 230만원에서 캐디피, 식비 등을 제외하고 반을 나누자 108만원이 남았다. 돈을 비닐봉지에 넣어 친구에게 건넸다. 그날 친구는 골프를 치지도 않았는데 하루에 큰돈을 번 셈이다.
내기는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충남 서산에서 나를 실력으로 이길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어른들은 오기가 생겼는지 강원도 홍천과 충남 대산읍 등에 있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괴물이 나타났다고 빨리 서산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약자만 상대하다가 ‘강적’을 만나자 흥미로움과 승부욕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프로도 아니었고 군 전역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홍천팀 상대로도 20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었다. 타수도 60대를 쳤다. 이틀 만에 현금으로 큰돈을 번 우리는 바에 가서 노래도 한 곡 하고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야, 서산 좋다잉.”
그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이 난데 내일 또 라운딩 돌자고. 이제는 서울로 가는 거 어뗘.” 나는 흔쾌히 응했다. 삼일 연속으로 라운딩을 돌게 된 것이다. 다음 날에는 경기도 용인 플라자CC(구 프라자CC)에서 게임을 했는데 이날도 60대를 쳤다. 기준인 72타에 비하면 잘 치는 쪽에 속하는 스코어였다. 60대를 삼일 연속으로 친다는 건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도 수입이 짭짤했다. 근데 연달아 번 액수가 크다 보니 어른들한테 돌려드려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주머니에서 한 번 나간 돈은 다시 넣지 않는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나는 속으로 너무 감사했다. 나와 친구는 이 돈을 기반으로 다음 훈련지 정할 계획을 짰다.
서산으로 돌아온 나는 ‘최 박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것이다. 이제는 나에게 레슨을 받겠다며 먼저 레슨비를 제안하기도 했다. 골프장 레슨비는 인당 5만원이었는데, 나는 6만원을 제안했다. 번뜩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케이. 최 박사 실력을 보니 1만원 올려줘도 괜찮을 거 같어.”
사장님은 내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레슨비가 6만원이면, 손님이 거스름돈이 없어 10만원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거스름돈 4만원을 끝까지 받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받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4만원을 더 받게 되는 셈이었다. 대신 해당 손님을 레슨할 때는 남들보다 더 자세히 열정을 담아 가르쳐드렸다. 처음에 세 명으로 시작한 레슨은 2주 차에 15명, 한 달이 되자 30명으로 늘어났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6) 레슨생 60명까지 늘고 주말엔 한꺼번에 100명 몰려와
레슨비 10만원 돼도 고객 더 늘어 주말엔 중앙에서 시범 보이며 레슨 교회 목사님, 좋은 자매 만남 주선
최경주 장로가 2009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골프장 오션코스에서 열린 2009 SK텔레콤 오픈 골프 2라운드에서 12번 홀 아이언 티샷을 하고 있다. 뉴시스
어느 날 한 사모님이 “왜 저 사람은 25분을 받고 나는 15분밖에 못 받았냐”며 항의했다. 나는 침착하게 장부를 보여드리며 설명했다.
“사모님, 저분은 10만원을 주시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고 대신 ‘조금만 더 봐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10분을 더 봐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4만원을 받아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모님은 깜짝 놀라며 “이런 프로는 처음 본다”고 했다. 처음엔 약간 언짢아하며 기분 나빠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사모님, 저를 냉정하다고 하지 마세요. 저 역시 사람이라 누군가 더 주면서 요청하면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당게요. 혹시 압니까. 다음 달에 사모님이 10만원을 내시면 제가 똑같이 해드릴지요.”
사모님은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다음 달이 되자 사모님은 10만원을 내셨다. 6만원짜리 레슨이 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10만원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모님들이 친구를 한 명씩 더 데려왔다. 레슨생은 3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모든 레슨생에게 똑같이 15분을 배정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연습하거나 다른 사람의 레슨을 경청할 것을 주문했다. 주말에는 더 붐볐다. 한꺼번에 100명이 몰려온 적도 있었다. 타석이 20개뿐인데 말이다. 결국 연습장 그린 한가운데에 모두를 둥글게 모아 놓고 내가 중앙에서 1시간 동안 시범을 보이며 레슨했다. 잘 치는 스윙과 못 치는 스윙, 공을 어떻게 치면 페이드·드로우로 가는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이런 레슨 방식에 항의할 법도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그러지 않았다. 평일에는 또다시 15분 개인 레슨을 진행했다. 그렇게 7개월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시골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송금하고 또 결혼 자금도 모았다.
어느 날 손님이 나에게 “최 박사”라고 부르며 다가오셨다. 평소에 공도 잘 치고 항상 돈이 많다고 생각한 분이었다. 그분의 골프채를 차에 실으려고 트렁크를 열었는데, 그 안에 성경책 두 권과 부흥 집회 포스터가 있었다. 그제야 이분이 목사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용히 물었다. “목사님이셨습니까.”
그러자 손님은 웃으며 “맞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자연스럽게 대해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은 내게 좋은 자매를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 자매가 최 박사를 간접적으로 사모하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매인데 어떻게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는 순간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7) 목사님 소개로 만난 자매와 결혼 전제로 정식 교제
동그란 눈매의 자매 첫인상에 호감 평소 생각하던 결혼 상대와 딱 맞아 교제 마음먹고 자매 부모님 찾아봬
최경주 장로가 2013년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열린 ‘최경주 CJ인비테이셔널 골프대회’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목사님이 나와 그 자매를 이어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매는 믿음이 신실했지만, 나는 믿음도 없고 살고 싶은대로 사는 형제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자매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나의 재능이 크게 쓰일 것이라는 기대도 하셨을 것이다.
도대체 이 자매가 나를 무엇을 보고 사모했다고 했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22살이던 나는 만약 교제할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결혼할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마냥 순수하고 어렸다. “목사님, 잘 되든 잘못되든 책임지셔야 합니다.”
자매의 연락처를 받아달라고 부탁한 지 일주일 만에 목사님은 번호를 주셨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추웠던 겨울 어느 날, 메모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소개받은 최경주인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자매와 만날 날을 잡았다. 1992년 말이었다.
나는 운동에 전념하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될 사람은 나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웠으면 했다. 나중에 생길 자녀에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대신 나는 운동으로 성공해서 가족을 굶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만남의 조건이 “우리 사귈래요”가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조건은 보지 않았다. 집안 배경과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둘이 사는 거니 부차적인 조건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매의 첫인상은 좋았다. 눈은 동글동글했고, 똑똑해 보였다. 저런 눈이면 뭐라도 해내겠다 싶었다. 키가 작은 건 둘째 문제였다. 사연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자매는 단국대 법대 2학년 재학 중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직업도 없고 집안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골프로 밥 벌어 먹고사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방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겠다 싶어 찾아뵐 날짜를 정했다. 그날이 다가왔다. 문득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밥상에 차려진 음식을 다 먹어야 사랑받는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부모님은 “아니, 이렇게 식성 좋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매우 놀라셨다.
22살의 최경주는 단순히 공을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살벌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눈에서 광채가 났다. 인상도 강했고 기도 세 보였다. 다부진 20대 청년이었다. 만나는 어른마다 “저놈은 뭐라도 할 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하나였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라고.
***[역경의 열매] 최경주 (28) 자매 아버지께 “우승하는 날 데리러 오겠습니다” 장담
5년간 준비 끝에 서울시장배 대회 출전 개인 2관왕 오르며 이사장과 약속 지켜 프로 테스트 합격 KPGA 정식 회원 돼
최경주 장로의 아내 김현정(왼쪽) 권사가 2009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GC 오션코스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에 출전한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세 자녀와 함께 방문해 기념촬영하고 있다. KPGA 제공
자매의 이름은 김현정이다. 자매의 아버지께서 “골프로 현정이를 먹여 살릴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우승하는 날 현정이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여러 어른이 앉아 계셨던 자리에서 얼떨결에 내뱉었다. 무슨 생각으로 당시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참 당차기도 했지만 안면이 두꺼웠다.
“대신 몇 년이 걸릴지는 장담은 못 합니다.” 어른들은 아마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이후에는 거의 집에 가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92년 3월 처음 서산에 자리를 잡은 후 10월까지 8개월 동안 이곳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중 5개월 동안 연달아 언더파를 쳤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확신이 생겼다. 시합에 나가도 등수는 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등수에 들어 트로피를 꼭 받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트로피를 안겨주겠다고 이사장님과 했던 약속도 지켜야 했다.
여주에서 열리는 서울시장배 대회에 출전 신청을 했다. 무려 5년간의 준비 끝에 참가한 것이었다. 나는 대회에서 개인 우수상과 일반부 개인 우승,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를 제치고 2관왕을 한 것이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이사장님께 약속을 지켰다고 자랑했다.
이사장님은 너무 자랑스럽다면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곧바로 한국남자프로골프협회(KPGA)에 전화해 프로 테스트 신청을 했다. 11월에는 세미 테스트를 보고, 이를 통과해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세미 테스트에 한 번에 합격한 후 이듬해 3월 열린 정식 테스트도 2등으로 통과했다. 가을에는 정규 리그에 들어가기 위한 시드(출전자격)를 받기 위해 65명만 뽑는 테스트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다.
프로 테스트 마지막 날, 3홀을 남겨뒀을 때 언덕 위에 큰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현정이였다.
“아니, 오늘 졸업시험이라면서 어떻게 왔어. 그러다가 졸업 못 하는 거 아니야.” “이것도 시험만큼 중요하니까요.” 나를 위해서 중요한 시험도 포기하고 오다니 놀라면서도 고마웠다.
드디어 오랫동안 꾼 프로의 꿈을 이루고 1994년 KPGA 투어에 합류했다. 첫해에는 17등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선배 선수들은 내년에 바로 우승할 수 있겠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투어에 합류한 지 1년만인 1995년 5월에는 인천에서 열린 KPGA ‘코리안투어 팬텀 클래식’에서 생애 첫 프로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 트로피와 그린 재킷을 받고 여자친구인 현정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29) 교제 허락과 함께 신앙의 길로… 3년간 연애 끝에 결혼
옆에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평생 함께할 든든한 동반자 생겨 결혼 후 영적 문제로 많이 부딪혀 ‘펄수저’ 근성으로 이겨내려 했지만…
최경주 장로의 아내 김현정 권사가 2002년 미국프로골프(PGA) 컴팩클래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후 귀국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광주MBC 유튜브 캡쳐
현정이의 부모님은 내가 찾아뵙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셨다. 드디어 정식으로 교제 허락을 받은 것이다.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현정이에게 정식으로 만나자고 했더니 단서를 하나 붙였다. “같이 교회를 다니면.”
내 귀를 의심했다. 교회에 다녀야 만난다니. 교회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같이 다니는 거에 대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기꺼이 다니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닌 지 일주일, 한 달이 지나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1992년 처음 만난 우리는 3년간의 연애 끝에 1995년 결혼에 골인했다. 몇 년간의 타향살이 설움이 아내를 만나면서 다 씻겨 나갔다. 우승하면 가장 먼저 기뻐해 줄 사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옆에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결혼 후 인생의 새로운 세계를 접했지만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영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현정이는 영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었다. 교회에서는 문제없이 잘 지내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부딪히는 순간이 생겼다. 나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로 인해 많은 개인적 사건과 사고가 생겼다. 혼자 방황하며 집을 나가기도 했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시합에서도 성적이 나지 않았고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죽하면 회개해야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회개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나름 여자친구를 따라서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했다. 교인으로서 주일을 잘 지키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자부했지만 내 오만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영적인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180도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흙수저도 아닌 뻘밭(개펄)에서 자란 ‘펄수저’였다. 펄수저는 녹이 슬고 거칠고 상처가 많았다. 흙수저는 털면 그만이지만 펄수저는 상처와 오만 가지 물건들이 뒤섞여 있어서 이를 다 뽑고 닦아내야 한다. 펄수저의 근성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상적인 일에는 적용됐지만 영적으로 부딪히니 해결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프로 골퍼가 되면 서러움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오히려 아마추어 때보다 높은 벽과 깊은 수렁을 마주했다. 골프 연습장마다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선후배 관계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실력보다는 연줄이 우선되다 보니 나처럼 골프 황무지에서 무에서 유를 이룬 사람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를 이끌어 줄 고향 선배, 학교 선배도 없었고 밀어줄 뒷배도 없었다. 가물에 콩 나듯 기회가 생겨도 내 노력만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0) 선배들 텃세 견디기 힘들어 밤낮 없이 연습에만 몰두
연줄 없이 들어와 눈엣가시 신세 노력해도 좋은 관계 맺기 어려워 강한 정신력으로 이 악물고 견뎌
최경주 장로가 20대 시절 프로 데뷔 후 출전한 대회에서 스윙을 하고 있다. 최 장로 제공
“93년도에 프로가 된 최경주입니다. 여기서 근무하게 돼 인사드립니다.” “누가 여기서 일하래.”
골프연습장 사장에게 채용이 돼도 실질적인 운영자인 헤드 프로에게 인사를 하면 찬바람이 쌩 불었다. 선배의 소개를 통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관례를 따르고 싶어도 완도 출신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심한 텃세 때문에 배겨 내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일 년에 열 곳을 넘게 전전하기도 했다.
프로만 되면 인생의 탄탄대로가 열릴 줄 알고 열심히 했건만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고향에 내려갈 순 없었다. 이끌어 줄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헤쳐 나가면 된다. 오기가 나서 죽기 살기로 연습에 매달렸다.
“경주야, 연습 그만하고 레슨 좀 해.” 연줄 없이 들어온 신입 프로가 밤낮없이 공만 치니 모두에게 눈엣가시였던 것 같다. 보다 못한 동료가 눈치껏 하라고 말리기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 가슴에 응어리가 맺혔다. 아무도 배려해주지 않는 상황이 서럽고 힘들었다. 프로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인지 연습생 때보다 더 심적으로 힘들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프로의 세계에서는 절대 남의 도움을 기대하면 안 되고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스스로 꽃피우지 않으면 비싼 값에 팔리기는커녕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뽑힐 뿐이라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강한 정신력을 갖고 이를 악물고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과정이 나를 성장시키는 좋은 밑거름이 됐지만 상황 자체가 좋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도 좋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인생은 수평선과 같다. ‘프로’라는 수평선을 향해 열심히 달려서 도착해 보니 출발점인 ‘연습생’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멀리서 수평선을 봤을 때는 내가 있는 진흙탕과는 다르게 맑고 깨끗해 보이지만 죽어라 열심히 노력해 목표 지점에 도달한 그곳에도 진흙 천지일 수 있는 것이다.
수평선은 추한 모습을 밑바닥에 감추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하는 자만이고 교만이다. 프로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해야 하고 그 힘으로 겸손해져야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는 필수다. 내게 닥친 현실이 힘들어도 참고 이겨 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금의 고통이 저 멀리 수평선 아래 숨어있는 더 강력한 고통을 이겨낼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끝까지 가야 했고 멈추지 않고 도전해야 했다.
결국 텃세가 심한 서울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1) 공 살 돈 없던 프로 초년 시절, 빌린 공으로 첫 우승
생애 첫 우승 상금으로 빚 갚으니 뿌듯 상금왕 이어 각종 최소타 기록해 주목 1997년 국가대항 월드컵골프대회 출전
최경주(왼쪽) 장로가 2011년 제주 서귀포 핀크스골프코스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 프로암 경기’에서 박노석 골퍼의 축하를 받고 있다. 뉴시스
나는 인천의 구월연습장으로 옮겼다. 그곳은 프로 골퍼가 많지 않은 곳이어서 진짜 골퍼가 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진심으로 나를 배려하고 응원해주는 구월연습장 회원들이 정말 고마웠다. 맨바닥에 헤딩하는 것처럼 막막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암담한 상황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제 실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살펴 주는 분들을 만나니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당시 골프채는 반도골프에서 후원받았지만 공은 직접 사서 써야 했다. 공 살 돈이 없어서 빌려 쓰곤 했다. 팬텀에서 후원을 받던 김완태 프로가 자기 이름이 이니셜로 새겨진 공 두 상자를 줘서 그걸 들고 나가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우승보다 더 기쁜 건 무려 2700만원이나 되는 두둑한 상금이었다. 빚을 갚고 나니 500만원밖에 안 남았지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듬해 1억4000여만원을 벌어 상금왕이 됐고, 그다음 해에는 상금왕뿐만 아니라 9홀 최소타, 36홀 최소타, 54홀 최소타, 72홀 최소타 등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연습만 한다고 눈총을 받던 내가 ‘한국 골프계를 뒤흔들 무서운 신인’으로 불리게 되면서 주변에서 대하는 것도 달라졌다.
1997년 11월 국가대항전인 월드컵골프대회에 박노석 프로와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인근의 고급 리조트 키아와 아일랜드 오션 코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차 난생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오션 코스는 골프 코스 디자인계의 거장 피트 다이의 작품으로, 미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코스로 악명 높지만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황홀한 경치에 감탄하다가 드라이빙 레인지에 들어선 순간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고무매트 대신에 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잔디 연습장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해 봤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따, 잔디 죽인다.” “그런데 여기서 막 땅을 파도 될랑가. 잔디가 상하면 워째.” “한국서 온 촌놈들이 잔디 다 망쳐 놨다고 쫓아내면 안 되니께 조심해서 칩시다.”
한국에서는 샷을 날리다가 골프채로 잔디를 뜨게 되면 대역죄인처럼 구박을 받던 때였다. 잔디는 안 건드리고 공만 치려다 보니 계속 톱 볼만 나왔다.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기까지 꺾일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자 드디어 다른 나라 선수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척하면서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 그들이 연습하는 걸 곁눈질하며 지켜봤다. “저게 뭐여. 경주야, 쟈들은 잔디를 다 파는구먼.”
외국 선수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잔디를 떠내며 시원하게 샷을 날렸다. 박 프로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마주 봤다. “뭐해. 빨리 연습하자고.”
***[역경의 열매] 최경주 (32) PGA투어 도전 목표로 아내와 함께 체계적으로 준비
한국과 다른 선수 대우와 연습 환경에 큰 충격 받고 귀국길에 미국 진출 꿈꿔 시기상조라며 주변 반대에도 도전 결심 아내 내조로 영어 공부 등 철저히 준비
최경주 장로가 2009년 브리티시 오픈을 앞두고 스코틀랜드 턴베리에 있는 턴베리골프장에서 연습하고 있다. 뉴시스AP
그제야 미국에서는 잔디 걱정할 것 없이 마음껏 쳐도 된다는 걸 알았다. “형님, 어제 못 갔던 거까지 오늘 몽땅 다 파 부립시다.” 우리는 잔디를 다 파 버릴 듯 신나게 샷을 날렸다. 실제로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됐다. “경주야, 너는 좀 제대로 알고 얘기하지 그랬냐. 이게 뭐여. 2시간 동안 잔디 대가리만 쳤잖여.” “아따, 형님. 누가 알았나.”
천연 잔디에서 공을 찍어 치는 짜릿함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미국은 선수에 대한 대우나 연습 환경이 달랐다. 골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미국 남자프로골프(PGA) 투어에 가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미국에 가야겠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것을 말하자 곧 고개를 끄덕였다 “5년 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생각이야.” “그래요, 해봐요. 기왕 하는 거,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아내는 첫째 호준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조리 중이었는데도 흔쾌히 동의하며 웃어줬다.
당시 내 계획을 듣고 격려해 준 사람은 아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내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할 수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여자 골퍼는 몰라도 남자는 안 된다고 했다. 되지도 않을 일을 왜 하려고 하냐고 했다. 다들 ‘달걀로 바위 치기’라거나 ‘시기상조’라며 혀를 끌끌 찼다. 프로가 되면서부터 느꼈던 벽이 점점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백도 없는 내가 스스로 꽃피우기 위해 노력해서 이제는 한국 최고를 넘보게까지 됐지만 가슴은 여전히 꽉 막힌 듯했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학연, 지연 같은 인맥 따윈 필요 없는 곳에서 맨몸으로 부딪혀 갈 데까지 가보고 싶었다. 도전해서 성공한다면 내 힘으로 꿈을 이루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게 꿈과 용기를 나눠 줄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 진출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어느 날 아내가 불렀다. “호준 아빠, 우리 약속서부터 써요.” “약속서라니.” “미국에 가자면서요. 구체적으로 준비해야죠. 서로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얘기하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약속해요. 우리.” “좋은 생각이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준비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 이거지.”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 바라는 것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적어 내려갔다. 담배 줄이기, 영어 공부하기, 하루에 최소 8시간씩 연습과 훈련 반복하기 등의 약속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다. ‘난 할 수 있어(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PGA 투어와 유러피언 투어에 간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3) 본격적 미국 적응 훈련… IMG와 계약하고 Q스쿨 도전
체력 유지와 몸에 맞는 식단 정하고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시차 극복도 Q스쿨 예선 탈락하며 새 전략 세워 정확도와 비거리 늘리려 체력 보강
최경주 장로가 2015년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시스
다짐을 영어로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약속서는 식탁 유리 밑에 넣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보면서 다짐했다. 아내 말대로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해 나가니 자신감이 쌓였다.
본격적으로 미국 적응 훈련에 들어갔다. 먼저 어떤 음식을 먹어야 체력이 잘 유지되는지 실험했다. 18홀을 다 돌 때까지는 식사할 수 없으니 경기하는 동안 배고프지 않고 지치지 않아야 한다. 소시지와 달걀 프라이 같은 양식으로 먹어 봤다가 어떤 날엔 밥에 국과 찌개를 곁들인 한식을 먹어 봤다. 돌아가며 시도해 보니 양식을 먹었을 때 든든함이 의외로 오래갔다. 미국에서 경기하더라도 먹는 것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다음엔 시차 극복 훈련을 했다. 미국 각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부지런히 다니려면 시차 적응은 필수다. 스스로 몸을 괴롭혔다. 2시간, 3시간, 9시간을 잔 다음에 라운딩을 해봤다. 잠자는 시간이 짧으면 피곤하고 괴로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누우면 금세 잠드는 스타일이라 수면 시간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문제는 영어였다. 기초 실력이 없는 상태에서 말과 글을 동시에 배우려니 버겁고 졸리기만 했다. 고민 끝에 영어 공부할 시간에 연습을 더하고, 대신 고3 영어 과외까지 했던 아내만 믿기로 했다.
1998년 퀄리파잉(Q)스쿨에 도전할 채비를 하던 차에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MG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게 됐다. “우선 유러피언 투어에서 뛰게 해 주십시오. 1년에 열 군데 정도는 출전하고 싶습니다.”
계약을 위해 찾아온 IMG 이정한 이사에게 조건을 제시하자 최대한 많이 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해줬다. 체계적인 매니지먼트를 받게 됐으니 이제 세계 무대를 누비며 다닐 일만 남았다. 호랑이가 될 준비가 된 것이다.
같은 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노에서 열린 Q스쿨에 도전장을 냈는데 예선 1차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탈락 원인 분석에 나섰다. 우선 터프한 러프가 문제였다. 미국의 러프는 1타 만에 빠져나오는 게 감사할 정도로 길다. 러프에 빠지지 않으려면 샷의 정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또다시 연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음 원인은 한국과 다른 미국의 코스 길이였다. 당시 나는 평균 비거리가 290야드(265m)를 넘나들어 국내 최장타자였다. 1997년엔 드라이빙콘테스트에서 326야드(298m)를 날려 우승한 적도 있다. 비거리를 더 늘리기 위해선 체력을 보강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보다 빠른 그린 스피드가 문제였다. 5배 정도 빠른 것 같았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저만치 달아나서 당황스러웠다. 퍼터 잡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마음을 다잡고 전략을 다시 짰다. 유럽과 아시아 쪽으로 우회해서 미국 진출의 기회를 잡아 보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4) 손모아 기도하자 선명하게 보이는 퍼팅라인 “할렐루야”
6년 만에 세례받고 믿음 키워 기린오픈 출전, 기도의 힘 느껴 연장 승부 끝에 해외 첫 우승 일본 투어 상금순위 3위까지 올라
최경주 장로가 2016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클럽 오션코스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 1라운드 2번홀에서 파세이브를 성공한 뒤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체력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다듬는 시간도 가졌다. 아내와 결혼 전에 한 약속대로 서울 용산구에 있는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믿음이 뭔지는 몰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새신자 교육 7주 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1999년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 내친김에 교회와 기도원을 오가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후 일본 기린오픈 대회에 출전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아버지처럼 의지하는 피홍배 ㈜삼정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 부탁을 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 회장님이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오픈 이후 허전했던 마음이 꽉 채워지는 것 같았다.
연습 라운드 당일 아침, 좁은 침대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면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 때문에 처자식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기도가 절로 나왔다. 다행히 본 경기는 잘 풀렸다. 비 때문에 3라운드가 취소되고 최종 라운드에 들어섰다. 인도의 지브 말카 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마지막 홀에서 네 발자국 거리의 파 퍼팅에 성공해야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경기 중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잔디 위에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공에서부터 홀컵까지 호미로 판 것처럼 길이 나 있어서 그대로 공을 치기만 하면 됐다. 이런 신비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딸깍.’ 공이 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스코어 접수처에 장갑과 야디지북(홀별 코스 정보를 담은 공략 수첩)을 놓고 오는 바람에 연장전에서는 맨손으로 경기를 해야 했다. 결과는 우승, 첫 해외 우승이었다. 아내에게 “저기 선수들 서 있는 거 보이지. 가서 줄 서 있으면 상금을 줄 거야. 받아 오면 돼”라고 말하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 정신없이 인터뷰하고 돌아왔더니 아내가 큼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우승 상금이에요. 현찰로 바로 주던데요.” “이게 다 돈이라고.” 입이 떡 벌어졌다. 1200만엔이나 되는 상금을 현금으로 바로 지급해준 것이다. 그렇게 어렵던 해외 우승을 한 번 하니 물꼬가 트인 듯 연이어졌다. 2주 뒤 열린 일본 우베 고산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 우승 상금은 2000만엔, 약 2억에 달했다. 연이은 우승에 일본 투어 상금 랭킹 3위로 순위가 급상승하고 언론에서는 ‘반짝’하고 사라질 줄 알았던 최경주의 선전을 앞다퉈 보도했다.
개인적으론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우베 고산 오픈에서 동반 라운드를 했던 일본 선수에게서 고급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투어 상금 랭킹 10위 안에 들면 미국 PGA 투어 Q스쿨 최종전으로 곧장 갈 수 있어.”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해 가며 알려준 선수에게 너무 고마웠다. 미국 진출의 문이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암흑 속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5) 한국 남자 프로 골퍼 최초로 미국 PGA 투어 진출
가장 힘들 때 버팀목 돼준 피홍배 회장 2년간 미국 정착 위한 모든 경비 지원 기도와 조언 등 물심양면 도와주셔 1999년 동양인 유일 Q스쿨 최종 통과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남자 골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최경주(왼쪽) 장로가 현지 골프코스에서 열린 연습 라운드에서 왕정훈 선수와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당초 목표로 삼았던 유럽과 아시아를 뒤로하고 약 7개월간 일본 투어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1999년 12월에 있을 퀄리파잉(Q)스쿨 최종전 신청을 하려면 9월 둘째 주까지 서류를 접수해야 했다. 8월 말 상금 랭킹 10위로 일단 진출 기회를 확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티켓이 세 장밖에 없어서 상위 랭커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일본프로골프투어(JGTO)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못지않게 활성화돼 있어서 일본 선수는 굳이 미국 진출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상금 랭킹 1~6위까지 모두 불참 선언을 했고 7~8위는 출전하겠다고 해서 딱 한 장의 티켓만 남아 있었다. 9위였던 호소카와 가즈히코 선수가 결혼식을 이유로 불참을 선언해 기적적으로 진출권을 따냈다.
현지 적응을 위해 10월 중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최종전을 2주 앞두고 플로리다주 잭슨빌 시내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TPC 소우그래스에 간 적이 있다. 미국 PGA에서 직접 운영, 관리하는 코스로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대회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헤드 프로를 찾아가 한국에서 온 프로 골퍼라고 인사하고 연습 삼아 코스를 이용하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노(No)”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코스 입장을 거절당하자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가 발동했다. 미국 진출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안 된다”며 고개부터 저었다. 하지만 큰 무대에서 뛰려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짱 두둑해 보였겠지만 나라고 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럴 때 버팀목이 되어준 분이 있었다. 피홍배 회장님과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부자지간 같았다.
피 회장님은 아버지처럼 나를 위한 기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라 경기가 안 좋았음에도 기꺼이 사재를 털어 투자해 주셨고 그 덕분에 일본 투어를 나갈 수 있었다. “남자가 한 번 마음 먹었으면 죽기 살기로 해봐야지. 골프 하나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길 수가 없어.” 피 회장님은 내가 미국에 정착할 때까지 2년간 모든 경비를 지원해주셨다.
1999년 11월 22일, Q스쿨 최종 6라운드가 펼쳐졌다. 전날 5라운드를 5언더파로 마친 나는 합격선인 7언더파 공동 30위 안에 들기 위해 3타를 줄여 8언더파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0번 홀에서 출발한 나는 전반에 버디 2개와 보기 1개, 후반에 버디 2개를 범해 3언더파를 보태 6라운드 합계 8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나와 같은 8언더파를 기록해 마무리 샷을 하는 두 명뿐이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버디를 하면 나는 탈락이었다. 하지만 기도가 이뤄졌다.
“만세!”
대한민국 남자 프로 골퍼 최초로 미국 PGA 투어에 진출한 것이다. 동시에 그해 Q스쿨 통과자 중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제 진짜 목숨 걸고 호랑이를 잡아보자.”
***[역경의 열매] 최경주 (36) PGA 높은 벽에 눈물… 말씀 통해 극복하고 ‘톱10 진입’
언어·차별·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3회 연속 컷 탈락하고 크게 좌절 김기동 집사 간증 테이프 말씀 중 “늘 하나님 함께하신다”에 큰 울림
최경주 장로가 2016년 경기도 용인 88컨트리클럽에서 열린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파이널라운드 18번홀에서 갤러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2000년 미국 진출 첫해에 만난 첫 매니저는 미국인이었다. 매니지먼트를 맡은 IMG에서 현지 사정에 훤한 미국인을 배정해 준 것이다. 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더구나 전담도 아니고 선수 여러명을 동시에 관리하는 시스템이라서 무엇 하나 부탁하기가 힘들었다.
3개월 단위로 일정이 잡히다 보니, 매니저가 팩스로 대회 일정과 대회장 안내 등을 기록한 서류를 보내줬다.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한 문장씩 해석했다. 이어 대회장 인근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지도를 펴 대회장까지 가는 길을 찾았다. “이 길로 가다가 여기서 빠져 나와서 이렇게 가면 되겠다.”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당시엔 종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대회장에 도착했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이, 아임 케이제이 초이(Hi, I’m KJ Choi).” “후(Who)?” “프롬 차이나(From China)?” 용기 내 인사를 해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동료들이 야속했다. 선수뿐만 아니라 경기 위원도 보이지 않게 차별했다. 나한테는 걸핏하면 경고 카드를 내밀고 미국 선수는 그냥 넘어갔다. 항의하고 싶어도 말이 안 되니 너무 답답했다. 혼자 있을 때라도 좀 편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돈이 궁했기 때문에 매니저에게 늘 1박에 70달러 이하의 숙소 예약을 부탁했다.
2000년 8월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PGA 투어 입성 후 치른 첫 대회 ‘소니 오픈’부터 연달아 세 대회에서 컷 탈락을 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네 번째 대회인 ‘투산 오픈’에서 처음으로 3라운드 진출하고, 2001년 3월 초 ‘도랄라이더 오픈’에서 최고 성적인 공동 21위를 기록한 다음엔 큰 변화가 찾아올 줄 알았다. 이대로 탄력을 받으면 금방이라도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PGA의 벽은 높았다. “내가 왜 미국에 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벌어 놓은 것도 있는데 그만 돌아갈까.” “여보, 그러지 말고 우리 조금만 더 해 봐요. 곧 잘 될 거예요.” 뭔가 해 보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리지 않는 상황을 아내만큼은 이해해줬다. 다음 날 아내가 녹음테이프 5개를 주며 들어보라고 했다. ‘고구마 전도왕’으로 유명한 김기동 집사의 간증 테이프였다. 세 번째 테이프를 듣던 중 성경 구절을 읽어 주는 부분에서 마음과 영혼에 울림이 있었다.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이었다. “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같은 해 9월 ‘에어캐나다 챔피언십’에서 공동 8위에 올랐다. 대한민국 남자 프로 골퍼에게 미국 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믿었던 시절에 톱10 진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7) 자만에서 겸손으로… 힘들 때마다 기도로 울부짖어
상금 랭킹 떨어져 Q스쿨 다시 도전 예배드리며 하나님만 의지하다 보니 컴팩 클래식과 탬파베이 클래식 우승 대한민국,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최경주 장로가 2017년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에서 열린 ‘제네시스 주니어 스킬스 챌린지’에서 한 참가자에게 그립 잡는 법을 교정해주고 있다. 뉴시스
자신감은 곧 자만으로 변했다. 운동선수에게 자신감은 필수지만 겸손을 잃으면 곧 교만이라는 맹독으로 변해 스스로를 공격하게 된다. 겸손함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하나둘 드러났다. 매일 자신에게서 모자란 부분을 발견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문제를 털어놓고 상의할 사람이 없으니 답답함은 커졌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대장부가 호텔 방구석에 혼자 앉아 우는 것은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인근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부르짖으며 기도하기로 했다. 당시 내 기도는 절망의 울부짖음이요,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데도 2000년 상금랭킹은 134위로 끝났고 지옥의 레이스인 퀄리파잉(Q) 스쿨에 다시 도전해야 했다.
두 번째라고 해서 절대 쉽지 않았다. 합격 문턱 앞에서 마지막 퍼팅만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 여기까지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대로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저를 이렇게 보내시렵니까. 제 마음을 붙잡아 주세요.” 짧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공에서부터 컵까지 하얀 선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닌가. 칠판 위에 그어진 분필처럼 선명했다. ‘딸깍’ 퍼팅을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공동 31위로 올라섰다. 순간 눈이 부셔서 앞이 아른거렸다. 마치 빛이 나를 반기는 듯했다.
PGA 투어 첫 승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가왔다. 2002년은 한일월드컵 4강 진출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그해는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해이다. 5월 컴팩 클래식과 9월 탬파베이 클래식에 연달아 우승컵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컴팩 클래식 3라운드를 마치고 혼자 하루를 마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편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이상하게 긴장도 안 되고 우승 생각도 들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가 열리는 날 17번 홀에서 치핑을 성공시키고 나서 리더 보드를 확인했더니 맨 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남은 홀은 하나인데 5타나 앞서 있었다.
‘우승이구나.’
그토록 바라던 PGA 첫 우승인데 이상하게 담담했다. 우승 퍼팅에 성공하자 아내가 두 팔을 벌린 채 울먹이며 그린 위로 올라왔다. 나는 멋들어진 세리머니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골프가방에 꿰매 붙인 태극기에 부끄럽지 않은 국가대표가 됐다. 동시에 한 해에 2승을 거둔 최초의 동양인 선수가 됐다. 한 동료 선수가 “너는 나라에서 스폰서 해주냐”라며 짓궂게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맞다. 태극기를 달고 다니면서부터 우승하기 시작한 걸 보면 대한민국은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8) 고향 완도에서부터 해외까지… 팬들 사랑은 언제나 큰 힘
변함없는 지원과 응원해 주시는 케빈 정 회장님과 해외 교민 팬 골프 가르치고 처음부터 지켜본 추 사장님과 완도 어르신 도움 커
최경주 장로가 2017년 경남 김해 정산CC에서 열린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 1라운드 12번홀에서 어프로치샷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해외 교민 팬들의 사랑은 눈물겹다. 이들의 사랑은 2012년 출간한 자서전 ‘코리아 탱크, 최경주’에도 담을 정도로 큰 힘이 됐다.
2008년 소니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미국 언론에 내 아버지로 잘못 소개되기도 했던 케빈 정 하와이한인골프협회 회장님은 PGA투어 진출 이후 처음 만난 교민 팬이다. 2000년 PGA 투어 데뷔 첫 경기인 소니 오픈에 응원차 찾아왔다가 그 뒤로 성적이 좋든 나쁘든 변함없는 지원을 해주셨다. 첫째 호준이의 분윳값까지 걱정해주신 감사한 분이다.
“내가 빨간불에 걸려 멈춘 날은 최 프로 성적이 신통치 않더라고. 그래서 신호 대기하고 있다가 파란불이 켜지기가 무섭게 달리기 시작해서 대회장까지 신호등 4개를 거쳤는데 하나도 안 걸리고 도착했어. 오늘은 분명히 잘 될 거야.”
그분은 실제로 우승이 확정되자 나를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추셨다. 정 회장님은 평소에 “내가 최 프로처럼만 살았으면 후회할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우승할 때마다 레스토랑을 하나씩 내겠다고 하셨다. 특히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PGA 투어 8승을 거두고 바로 그다음 주 월요일 기다렸다는 듯이 8번째 레스토랑을 오픈했는데, 알고 보니 오픈 준비를 다 해 놓고 내가 우승하기만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최 프로, 나 힘들어. 이제 우승 그만해.” “저는 10승은 채울랍니다. 2개 더 준비하는 게 좋을걸요.”
이 밖에 수많은 교민 팬들이 내 경기를 보기 위해 휴가를 내고, 편도 4시간 이상 운전하는 불편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경기를 보며 이국땅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떨쳐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뭉클해졌다.
지금 내가 있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 지켜봐 준 팬은 바로 고향 분들이다. 골프가 뭔지도 모르는 시커먼 고등학생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준 이들이다. 2008년 하와이에서 열린 소니 오픈 때 완도 고향 몇 분을 초대했다. 나의 골프 첫 스승, 추강래 사장님과 열일곱 최경주를 광주 골프장으로 데려다주곤 하셨던 어르신이다.
당시엔 마지막 라운드 때 늘 검은색 셔츠를 입었다. “워메, 보기만 해도 덥네. 더위 타면 힘들어야. 우리가 까만색으로 입을랑게. 니는 시원허니 흰색으로 입어라이.”
어르신들은 노란색 단체복을 벗어 버리고 모두 검은색 셔츠를 입고 나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다니셨다. 살신성인한 사랑 덕분에 소니 오픈에서 PGA 통산 일곱 번째 우승을 거뒀다. “이야, 내가 최 프로가 미국에서 우승하는 걸 보다니 살면서 가장 보람차네.”
***[역경의 열매] 최경주 (39) 담배 유혹에 빠져 다시 흡연… 국내 대회 예선전서 탈락
백인 노인의 일침에 금연 결심 SK텔레콤 오픈서 다시 흡연해 시합 날 컨디션 난조로 컷 탈락 이후 25년째 금연 약속 지켜내
최경주 장로가 2012년 제주 핀크스골프장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에서 경기를 마치고 인터뷰 하고 있다. 뉴시스
2001년 초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열리는 투산 오픈에 참가하러 가던 중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잠시 들렀다. 식당에 차를 세우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한마디 건넸다. “최 프로, 그 담배 끊었으면 30야드(약 27m)는 더 나갈 거야.”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담배를 끊으면 뭐 얼마나 더 나간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몇 시간 뒤 대회장에 도착해 몸을 풀고 연습 그린으로 향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200m 정도 되는 길목에 수많은 갤러리가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케이제이(KJ) 이리 좀 와봐”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백인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앞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벽에 붙인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세계 3대 골퍼인 잭 니클라우스, 아널드 파머, 개리 플레이어가 마스터스 연습 라운드 때 티 박스에 서 있는 모습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었다. 세 선수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60년대에는 선수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어. 근데 요즘은 안 피워. 이제는 안 피운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네” 하고 대답한 뒤 그린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할아버지의 말이 귀에 꽂혔다.
톱 랭커들이 담배를 안 피우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연하기로 했다. 담뱃갑과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넣고 봉투를 묶어 호텔 밖 쓰레기장에 던졌다. 나는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는 중독자였다. 아내는 해마다 하루에 피우는 담배를 열 개비씩만 줄여 보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금연을 결심한 날은 공교롭게도 아내의 생일 이틀 전이었다. 나는 담배 대신 금연 껌을 씹었다.
3개월 후인 2001년 5월 ‘SK텔레콤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귀국했다. 오랜만에 맡는 담배 연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 이번에만 피우고 미국에 돌아가면 다시 끊는 거야.” 호텔 방에서 담배를 물었다. 재떨이에 꽁초가 쌓일 때까지 피우고 또 피웠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대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컷 통과에 실패한 것이다. 미국 PGA 투어 선수가 국내 대회 예선전에서 탈락하다니. 주최 측인 SK텔레콤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담배를 괜히 피웠다.”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는 담배를 입에 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후에도 몇 번 유혹의 고비가 있었지만 끝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SK텔레콤 오픈 이후 24년간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물지 않았다. 금연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건강과 시간의 자유, 성취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0) “아내의 기도는 지금의 최경주를 만든 비밀병기”
연애 시절부터 결혼 후 지금까지 철저히 내 위주로 생활하고 있지만 아내의 격려·조언 덕분에 꿈 이뤄
최경주 장로가 2017년 인천 송도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코리아에서 열린 ‘제네시스 주니어 스킬스 챌린지’에서 초등학생 골프 유망주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프로는 사랑받으면 성과를 내게 돼 있다. 사랑받는 게 기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사랑받는 기쁨을 알게 해 준 사람이 있다. 내 아내 김현정 권사다.
어느 스포츠 기자가 “김현정 없는 최경주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다. 김 권사는 나에게 로또이자 선물 같은 사람이다. 오직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어떤 어려움도 묵묵히 견디는 사람, 내가 골프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잡다한 모든 것을 짊어진 사람이다. 지금도 아내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해낸다. 아내, 엄마, 친구, 누나….
나는 나쁜 남자에 가까웠다. 연애하던 시절, 연습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다. 데이트하다가도 연습할 시간이 되면 주저 없이 “연습해야 하니까 이제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뿐만인가. “일요일에 같이 예배드리면서 얼굴 보면 됐지. 괜히 오지 마. 연습에 방해되니까.” “영화는 친구들하고 봐, 난 운동해야 해.”
결혼 후에도 철저히 내 위주로 생활했다. 아내는 산후조리조차 혼자 했다. 서운할 법도 한데 오히려 내게 필요한 격려와 조언을 아낌없이 해줬고 막연하기만 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왔다. 언젠가 왜 나와 결혼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는 “당신 곁에서 당신을 돕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인 줄 알았죠”라고 답했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아내의 기도와 섬김을 먹고 살아왔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신혼 때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내가 침대 발치에서 내 두 엄지발가락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자는 척하기도 민망하고 누워서 기도한다는 게 낯설어서 다음 날부터는 다리를 펴고 앉아서 기도를 받았다. 누웠을 때는 몰랐는데 앉고 보니 아내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뭐라고 이 사람이 날 위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걸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아내에게 발가락 대신 손을 내밀었다. 마주 보고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했다. 기도라는 걸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날이었다.
아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 대회장에 갤러리가 아무리 많아도 내 사람은 한눈에 들어온다. 작은 배낭을 메고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천천히 걸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시장통에서 정신없이 놀던 어린아이가 엄마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놓인다. 아내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떤 어려움도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힘과 믿음이 생긴다.
아내의 기도. 지금의 최경주를 만든 비밀병기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1) PGA 마스터스 출전… ‘동양인 최초 톱3’ 기록 세워
난이도 최상인 ‘아멘 코스’ 직전 아내 격려에 한결 마음 편해져 번번이 보기 범하던 11번 홀에서 이글 잡고 6언더파로 경기 마쳐
최경주 장로가 2016년 제주 핀크스골프클럽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 3라운드 11번 홀에서 세컨드샷 후 환하게 웃고 있다. 뉴시스
2004년 세계에 태극기와 최경주(KJ Choi) 이름 석 자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프로골프(PGA)에는 4대 메이저 대회가 있다. ‘마스터스 토너먼트(마스터스)’ ‘PGA 챔피언십’ ‘US오픈’ ‘디오픈 챔피언십(브리티시 오픈)’이다. 이중 마스터스는 매년 4월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다. 특히 11 12 13번 홀 코스가 숲을 시계 방향으로 끼고 있는데 ‘아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어려워 선수들에겐 ‘아멘 코스’로 불린다.
나도 최종 4라운드 때는 너무 힘들어 아멘이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려운 11번 홀에서 이글을 잡았다. 역대 세 번째 기록이다. AP통신은 ‘2004 마스터스 최고의 샷’으로 꼽았다.
사실 11번 홀 티 박스에 올라설 때까지만 해도 선두권과 거리가 멀었다. 4라운드 전반에 2오버파를 친 뒤 10번 홀에서 어렵게 파 세이브를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10번 홀에서 11번 홀 티 박스로 가는 길에 아내가 불쑥 나타나 샌드위치를 건넸다. 코스의 성격상 갤러리들이 잘 오지 않는 길인데 아내가 나타나자 기분이 좋았다.
“괜찮아요. 잘하고 있으니까 편하게 치세요.”
아내의 웃는 얼굴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싱긋 웃어주고는 티 박스에 올라서서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이번에는 공에 진흙이 안 묻게 해주세요.” 지난 사흘 내내 티샷 한 공에 진흙이 묻는 바람에 번번이 보기를 범했다. 샷을 하고 가 보니 다행히 공이 깨끗했다. ‘감사합니다.’
당시 캐디였던 앤디가 그린까지의 거리가 215야드(약 196m)라고 알려줘서 4번 아이언을 달라고 했다. “KJ, 5번 아이언으로 풀스윙하면 충분해. 믿고 쳐 봐.” 앤디는 채를 짧게 잡으라고 했다. 나는 노련한 캐디의 조언을 믿고 5번 아이언을 손에 쥐었다. 11번 홀에선 대개 공이 떨어지면 물이 있는 왼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감안해 페이드샷으로 쳤다. 공이 깃대를 향해 날아가는 걸 보고 처음으로 파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린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그린 위에 공이 없었다.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부르며 하늘을 향해 높이 뛰었다. 이후 13번 홀에서는 버디를 기록해 아멘 코스에서만 3타를 줄이고 14 16번 홀에서도 버디를 보태 6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세계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마스터스에서 단독 3위를 기록했다. 동양인 최초 톱3 입상이었다. 톱3 기록은 2020년 후배 임성재가 공동 2위를 기록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 성적으로 남았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2) ‘케이제이 초이’… 언제든 우승 가능한 선수로 인정받아
골프계 전설 잭 니클라우스가 주최한 메모리얼 대회에서 우승컵 들어 올려 시합 전 예배 도중 아내의 우승 확신에 마음 평안해지며 징검다리 버디 행진
최경주 장로가 2012년 제주 핀크스골프장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에서 4번 홀 세컨드샷 후 볼 방향을 확인하고 있다. 뉴시스
2007년은 나의 골프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해로 꼽힌다. ‘골프계 전설’ 잭 니클라우스와 타이거 우즈로부터 약 한 달 간격으로 우승 트로피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서전 ‘코리안 탱크 최경주’에도 밝혔듯이 두 사람이 각각 주최한 대회에서의 우승은 최경주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5승과 6승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전까지 나는 ‘우승 몇 번 해 본 선수’였지만 황제들이 주최한 대회를 계기로 ‘언제든 우승이 가능한 선수, 케이제이 초이(KJ Choi)’로 인정받게 됐다.
잭 니클라우스는 골프계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니클라우스가 주최한 메모리얼 토너먼트는 과거부터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경기였다. 니클라우스와의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그해에 은퇴를 선언하고 자신이 주최하는 대회에 선수 자격으로는 마지막으로 출전했는데, 운 좋게 그와 같은 조로 1, 2라운드를 치렀다. 당시 그의 은퇴는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스코틀랜드 왕립은행(RBS)이 그의 디오픈 챔피언십(브리티시 오픈) 마지막 출전을 기념해 5파운드 지폐를 2만장 한정 발행했을 정도다.
나도 2라운드를 마친 뒤 아들 호준이에게 주려고 새 장갑에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받은 장갑은 액자에 끼워 보관할 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만큼 잭은 나에게 큰 존재였고 그가 주최한 대회에서 우승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2007년 6월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이들과 함께 미국 오하이오주 더블린 뮤어필드 골프클럽에 왔던 아내는 대회가 시작되기 전날 가족 예배를 드리던 도중 갑자기 한마디를 했다. “당신, 이번 주에 우승할 테니 걱정 말고 치세요.” 속으로 ‘아니, 이게 어떤 대회인데 내가 우승을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대회는 3라운드까지 예상대로 진행됐다. 아담 스콧이라는 선수가 3라운드에서만 10언더파를 몰아치면서 선두로 치고 나갔다. 나는 5타 차 공동 7위로 나름 선전했지만 우승까지는 부족해 보였다. 그날 저녁 내 입에서 “아담 스콧이 10언더파를 쳤으니 저는 7언더파만 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대회 마지막 날, 나는 평소처럼 라운드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고 마음이 평안했다. 덕분에 파와 버디를 번갈아 하는 징검다리 버디 행진을 펼쳤다. 전반 9홀에서만 6언더파를 치고 스코어 보드를 확인했는데 맨 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마음이 흔들리면서 샷도 불안정해졌다.
위기가 찾아와도 스코어는 달라지지 않았다. 11번 홀에는 버디 하나를 추가했고 16번 홀에서는 그린 근처 깊은 벙커에 빠졌다. 17번 홀에서는 두세 번째 샷을 잇달아 실수했다. 마지막 홀도 두 번째 샷이 그린 앞 벙커에 들어갔다. 하지만 확신이 있었다. 자신 있게 휘두른 샌드웨지에 공이 붕 떠서 홀에 가깝게 붙었고, 파 퍼팅을 성공시키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7언더파 스코어도 지켰다. 기자들이 2006년 8월 크라이슬러 챔피언십 이후 10개월 만에 5승을 한 것에만 집중할 때 나는 니클라우스에게 감사를 전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3) 경기 내내 말씀에만 집중…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느껴
타이거 우즈 주최 AT&T 대회 참가 컷 통과 목표였는데 1, 2라운드 선두 중압감에 주춤…성경 외우며 정신 집중 PGA 6승, 미국 진출 이후 첫 역전승
최경주 장로가 2007년 미국 메릴랜드주 콩그레셔널CC에서 열린 에이티앤티(AT&T) 내셔널 2라운드 8번 홀에서 티샷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07년 7월 골프계 취재 열기가 또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잭 니클라우스의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는 ‘새로운 황제’ 타이거 우즈가 에이티앤티(AT&T) 내셔널 대회를 주최했기 때문이다. 대회장이 미국 워싱턴DC에 있어 골프 팬이 많았고, 우즈도 최고의 대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코스는 어렵기 이를 데 없었고 선수들은 어느 때보다 우승 의지를 다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5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휴가를 즐기고 난 뒤여서 우승에 대한 욕심은커녕 컷 통과만 하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편하게 경기에 임한 탓인지 1, 2라운드 선두를 달렸다. 언론의 관심은 요란했다. 3라운드에서 잠시 주춤해 선두를 빼앗기고 2타 차로 뒤지게 됐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나를 따라다녔다. 그날 저녁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마지막 라운드는 잘될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16절 말씀을 외우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더니 “내일 가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마지막 날에 대회장에 가도 되냐는 건 ‘우승 할 수 있겠냐’는 뜻인데 나도 모르게 “그래, 와”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마친 뒤 성경 구절을 찾았다. 2시간 가까이 잠도 못 자고 중얼거리다 결국 머릿속에 넣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말씀을 외워보니 입에서 술술 나왔다. 드라이빙 레인지, 퍼팅 그린에서도 잘 외워졌다. 그런데 티 박스에 올라서니 중압감이 밀려오면서 긴장되기 시작했다. 티를 꽂고 샷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간밤에 외웠던 말씀을 중얼거렸다. “너희가….” 머릿속이 하얘졌다. 스윙하고 공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너희가 다음이 뭐더라’하는 생각뿐이었다.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14번 홀에서 3퍼트로 보기를 하고 15번 홀 티 박스로 걸어가다가 스코어 보드를 올려다 봤다. 그런데 웬걸. 내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경쟁자였던 스튜어트 애플비로부터 선두를 빼앗아 역전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지켜주고 계시구나.’ 미디어의 관심으로 흔들릴 수 있는 마음을 보시고 아내를 통해 성경 구절을 알려주셔서 정신을 그곳에만 쏟게 하신 거였다. 내 뒤에는 하나님이라는 강력한 백이 있다는 확신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15번 홀 티샷을 자신 있게 마치고 계단식으로 된 티잉그라운드에서 두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토록 떠오르지 않던 성경 구절이 막혔던 수문이 열리듯 단번에 생각났다. 자신감이 차오르면서 스윙이 견고해졌다. 버디를 하고 17번 홀에서도 1타를 줄였다. 18번 홀은 매우 까다로웠다. 2위에 3타 앞선 선두였지만 트리플 보기 한 번이면 공든 탑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성경 구절을 외웠다. 사방이 물로 둘로 둘러싸인 그린을 공략할 때 나는 홀을 직접 노려 가깝게 붙이려고 했지만 캐디는 그린에 올리기만 하라며 8번 아이언을 주더니 저 멀리 가버렸다. 공은 그린에 안착했고 2퍼팅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결과는 3타차 우승이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6승, 미국 진출 이후 첫 역전승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달려와 안겼다. 우즈에게 트로피를 받으며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했다. 다음에는 우즈와의 일화를 풀고자 한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4) 우즈와 함께 라운딩하며 “브러더”라 부를 만큼 친해져
마스터스 토너먼트 경기 치르며 나흘 동안 계속 같은 조에 편성 나의 인터뷰 내용 전해 들은 후 한국말 물어보며 친근하게 대해
최경주 장로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10년 미국 조지아주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열린 마스터스 토너먼트 3라운드에서 손을 맞잡고 서로 격려하고 있다. AP뉴시스
나는 타이거 우즈와 동시대에 선수 생활을 했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마주치기 일쑤였다. ‘골프의 황제’로 불리는 선수와 함께 경기한다는 건 나에게도 의미가 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0년 미국 조지아주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열린 마스터스 토너먼트다. 4일 내내 1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 우즈와 같은 조에서 경기를 치렀다. 심지어 최종 순위도 똑같은 공동 4위를 기록했다. 당시 우즈는 의문의 교통사고와 성 추문으로 활동을 중단한 후 5개월여 만에 공식 복귀한 무대에서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라운드 13번 홀에서 14번 홀 사이 그린 재킷을 입은 관계자 세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양해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2라운드에서 우즈와 같은 조에 편성됐기 때문에 18홀이 끝나면 많은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예상대로 18번 홀에 도착하자 약 50명의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들은 “타이거 우즈와 함께 라운드를 치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여러분은 우즈가 잘 치길 원하나, 아니면 망가지길 원하나”라고 되물었고 “(우즈가) 잘 치길 원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골프장 밖의 일은 골프장으로 가져오지 마라. 그것이 선수를 위한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우즈가 내 인터뷰 내용을 전해 들었는지 그 이후로 나에게 더욱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자신을 따라다니는 극성 갤러리로 인해 나한테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파를 할 때마다 다가와 “아주 잘했다”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결국 패트론(Patron)이 우승의 발목을 잡았다. 패트론은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로, 단순한 관중을 넘어 골프 대회와 골프 문화를 후원하고 존중하는 관중을 의미한다.
최종 라운드 ‘아멘 코너’의 마지막 홀인 13번 홀에서 티샷을 하던 중 백스윙 톱에서 다운스윙하려는 순간 뒷조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필 미컬슨이 버디를 잡자 패트론들이 내지른 함성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집중력이 떨어져 티샷은 러프 깊숙이 날아갔고 보기를 범하고 말았다. 이후 급격한 샷 난조에 빠지면서 공동 4위로 대회를 마쳤다.
12번 홀까지 선두를 달리며 동양인 최초로 대회 우승에 한발 바짝 다가섰기 때문에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움과 신기함이 교차하는 대회로 기억에 남아있다.
우즈의 한국어 실력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KJ, 나한테 한국어 좀 알려줘.” “한국어 알려 달라고. 그럼 형님 해봐, 형님.” “혀엉니이임. 이게 무슨 뜻이야.” “브러더(brother)를 한국에선 형님이라고 해. 형님이라고 해봐.” 우즈는 절대 형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볼 때마다 “헤이, 브러더”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표현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5) 외국인 트레이너와 원활한 소통 안 돼 몸 관리에 비상
언어적 한계로 아파도 정확히 전달 못 해 허리 통증 점점 심해져 US오픈 컷 탈락 서울 자생한방병원 신준식 원장에 ‘SOS’
최경주(왼쪽) 장로가 2022년 자생한방병원 설립자인 신준식 박사와 경기도 광주 이스트밸리 CC에서 열린 건강지원금 전달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운동선수에게 건강 관리는 숙명과도 같다. 2007년 두 번의 우승으로 상금 랭킹이 5위까지 급상승하고 나니 자신감이 붙고 의욕이 높아졌다. 몸 관리를 잘해서 더 좋은 성적을 내자고 다짐했다. 당시 체중이 92㎏까지 나갔는데 7㎏ 정도만 빼면 몸놀림이 더 날렵해지고 경기력이 향상될 것 같았다. 그런데 호주인 트레이너에게 몸 관리를 받으면서 영어로 대화하자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등 위쪽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이 백 이즈 타이트(high back is tight)” 정도가 전부였다. 트레이너가 내 짧은 영어를 듣고 나름대로 애써 줬지만 결국 그해를 마지막으로 결별하고 한국인 트레이너를 영입했다. 2008년 1월 소니 오픈에서 7승을 거두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이상했다. 몸통이 지나치게 돌아가는 것이다. 적당히 꼬였다가 반동으로 풀어지면서 임팩트에 힘이 실려야 하는데 끝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몸이 돌아갔다. 균형을 잃고 힘이 떨어지면서 허리에 통증이 생겼다. 너무 아파서 서 있지 못할 때가 있었다. 면도칼로 생살을 찢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서울 자생한방병원에 골퍼를 위한 척추 클리닉이 있다는데 한번 가보시면 어때요.” 매니저의 권유를 받고도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시즌 중반을 지날 무렵엔 한계가 왔다. 6월 US오픈을 앞두고 매니저에게 “안 되겠다. 자네가 말했던 그 병원 원장을 초대하자”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인데도 흔쾌히 와 주셔서 감사했다. US오픈은 컷 탈락했다.
그전까지는 의사에게 내 몸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없다. 운동선수가 자기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아픈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이 망가져 버린 것 같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간의 일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들은 신준식 이사장님은 당장 운동을 중단하라고 했다. “침과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3~5개월이 지나면 통증이 일단 사라질 겁니다.”
1년이 지나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재기할 수 있도록 이사장님이 끝까지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나는 클럽 무게에 매우 민감하다. 열일곱에 전남 완도에서 골프를 배울 때 어른들에게 채를 물려받아 쓰곤 했는데, 역도로 다져진 엄청난 힘에 비해 너무나 부드러운 채였다. 가진 힘대로 휘둘렀다간 공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니 정확하게 공을 맞히는 연습을 해야 했다. 자기 힘에 비해 부드러운 채를 쓰려면 리듬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 리듬감을 찾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서 치면 백스윙 가는 속도와 다운스윙 내려오는 속도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허리가 아팠던 그 무렵 스폰서가 제공해 준 클럽과 공이 내게 맞지 않았다. 설상가상이었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자기 스폰서의 제품과 맞지 않아서 못 쓰겠다고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허리 부상에 장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시기였다. 이듬해인 2009년엔 ‘한국인 최초 메이저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까지 날아갔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6) 부상 여파로 상금 랭킹 급락… “한물갔다” 악플도
아내, 온라인상 악의적 댓글·평가에 내가 상처받지 않게 각별히 신경 써 선교집회 간증 요청 받고 청년들에게 진심 전하기로 다짐
최경주(왼쪽) 장로가 2017년 인천 송도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네시스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후배 양용은 프로와 1번 홀 티샷 후 볼의 방향을 살피고 있다. 뉴시스
허리 부상으로 인해 2009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상금 랭킹이 93위까지 떨어졌다. 대회를 한 번 치를 때마다 랭킹이 15계단씩 뚝뚝 떨어졌다. 허리와 장비 문제만 해결되면 회복은 시간문제라고 여겼지만 매주 큰 폭으로 떨어지는 랭킹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던 와중에 후배 양용은 프로가 그해 8월 열린 PGA 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누구보다도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주변에서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KJ, 축하해. 드디어 너희 나라에서도 메이저 대회 우승자가 나왔네.” “그렇게 후배들 챙겼는데 너도 기분 좋겠다. 축하해.” “그래, 고마워. 나도 무척 기뻐.”
평소에 선후배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 동료 선수들이 부러워했다. 미국 PGA 투어에 후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내가 겪었던 고생을 그들은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섬세하게 챙겨주곤 했다. 언젠가 “아시아 선수도 메이저에서 우승할 수 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곧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간절히 염원했던 ‘한국인 최초 메이저 대회 우승’을 놓친 것이다. “나는 정말 뭐 하나 쉽게 얻는 게 없네.”
그 당시 온라인에서는 나에 대한 평가가 냉정했던 모양이다.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꼼꼼하게 챙겨보는 아내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물갔다’는 표현은 기본이고 ‘그동안 운이 좋았다’ ‘나이 먹은 퇴물’ 등 악의적인 표현이 넘쳐났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나와 관련된 기사는 잘 챙겨보지 않는다. 인터넷도 잘 하지 않는다. 어쩌면 속 편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내는 부정적인 기사가 눈에 띄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줬다.
세상이 나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니 아내의 상처를 알 리가 만무했다. 아무에게도 못 하는 하소연을 아내에게 쏟아 내곤 했는데, 아내는 아무 내색 없이 평소처럼 다 받아주고 응원했다. 돌아보니 그때 가장 힘든 사람은 아내였겠구나 싶다.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적이 안 나오고 몸이 말을 안 들어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온종일 연습에 매진했다. 가족과 보낼 시간도 몽땅 연습에 쏟아부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시즌 중반이 넘어갈 무렵 세계선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12월 말 미국 뉴욕에서 청년 4000여명이 모이는 선교 집회에서 간증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랭킹도 추락한 마당에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줄까 싶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해야 진짜가 나오지요. 그래야 더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꼭 와 주세요.” 간절한 부탁에 거절할 수 없어 일단 알겠다고 했다. ‘이 상태로 가면 거짓말밖에 안 될 것 같아. 새벽기도를 나가야겠어.’
집회 20여일 전부터 댈러스 집 근처의 한인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새벽예배에 나오는 사람이 많아 놀랐다. 청년들에게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7) 선교 집회서 간증… 청년들 기도·열정에 큰 힘 얻어
집회 후 말레이시아 오픈서 우승하면 상금 전액 기부하리라 하나님께 약속 환대 속 우승, 상금 기부 깜짝 발표 경기력 다시 살아나며 랭킹 끌어올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본부가 있는 곳이자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미국 플로리다 TPC 소우그래스 전경. TPC 소우그래스 인스타그램 캡쳐
집회 날이 됐다. 간증을 시작하자 청년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무엇보다 수천명의 청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열정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묘한 사명도 생겼다.
뉴욕 집회를 끝내고 댈러스로 돌아가면서 두 달 전인 10월에 열렸던 아시안 투어 말레이시아 이스칸다르 조호르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매니저가 말레이시아에서 초청장이 왔다고 했을 때 나를 왜 부를까 하는 생각에 “초청료를 확 높게 불러 보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주최 측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말레이시아로 떠나면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만약에 이번에 상금을 주신다면 모두 기부하겠습니다.”
도착하니 대회 관계자뿐만 아니라 갤러리들이 모두 나를 환대했다. 열띤 호응 속에서 신나게 플레이하다 보니 우승까지 했다. 우승 트로피를 받는 자리에서 깜짝 발표했다. “상금을 말레이시아 지역의 필요한 곳에 모두 기부하겠습니다.” 매니저조차도 몰랐던 일이라 현장에 있던 이들은 매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시기에 다시 일어설 힘을 안겨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는 손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드려준 기도, 특히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이 내게는 큰 응원이었다.
2010년부터 경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3월 초 말레이시아 오픈에서 2위, 3월 중순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트렌지셔스 챔피언십에서 2위를 해 랭킹이 47위로 뛰어올랐다. 마스터스 토너먼트 출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캄캄한 터널을 걷는 것 같았는데 희미한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출전을 앞두고 마음을 비운 채 막바지 준비에 집중했다. 대회장 코스가 워낙 까다로워서 그동안 언더파를 제대로 쳐본 적이 없어 욕심을 낼 수가 없었다. 이 대회는 5대 메이저라고 불린다. 4대 메이저보다 못한 대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프로 골퍼 사이에선 오히려 가장 우승하고 싶은 대회로 꼽힌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를 통틀어 상금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2011년만 해도 총상금 규모가 950만 달러(약 137억4080만원)였다. 게다가 다른 메이저대회와 달리 PGA 투어가 직접 주관하는 대회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 of America)와 미국프로골프투어(PGA Tour)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프로골프협회는 미국 남녀 프로 골퍼를 회원으로 두고 교육과 골프 사업 등 전반적인 분야를 다룬다면, 투어는 토너먼트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로 시드권을 가진 선수들만이 멤버가 될 수 있다. 토너먼트 참가가 직업인 투어 선수들에겐 미국프로골프협회가 아닌 PGA 투어가 소속사인 셈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8) 우승 가뭄 3년 만에 단비 “하나님 감사합니다”
선수라면 꼭 우승하고 싶어 하는 PGA 투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 승부 끝에 극적으로 우승 세계랭킹도 19계단이나 수직상승
최경주 장로가 2011년 미국 플로리다 TPC 소우그래스에서 열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AP연합뉴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미국 플로리다 폰테베드라비치의 TPC 소우그래스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내 집 안마당에서 펼치는 잔치’라고 할 수 있다. 관람권 판매 등을 비롯한 각종 수익 사업을 통해 자선기금을 모으고 선수 이름으로 지역사회에 기부하며 끈끈한 정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선수들이 꼭 우승하고 싶어하는 대회인 이유이다.
이 대회 우승은 절대 쉽지 않다. 우승은커녕 ‘마의 홀’로 불리는 파3의 17번 홀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2011년 대회 전까지 해당 홀에서 버디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회를 앞두고 캐디인 앤디 프로저에게 “컷 통과만 합시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2라운드를 25위, 3라운드를 5위로 마쳤다. 프로저는 “우승도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우승은 무슨, 여기가 얼마나 어려운 곳인지 모르나’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나는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작지만 단단한 사나이, 데이비드 톰스였다. 선두 조가 무너지는 사이 공동 3위였던 톰스와 5위였던 내가 선두 자리를 두고 각축전을 펼쳤다. 15번 홀까지 내가 1타 뒤진 상황이었는데 16번 홀 티샷을 마친 뒤 보니 내 공은 러프에, 톰스의 공은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코스가 워낙 까다로우니 러프에 떨어지면 페어웨이보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아, 우승은 물 건너갔구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프로저가 입을 뗐다. “KJ, 긍정적으로 생각해. 남은 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그 순간 톰스가 우드를 들고 두 번째 샷을 하려는 게 보였다. 그린에 바로 공을 올리려는 전략이었는데 거리와 그린 주변을 고려했을 때 무리한 시도 같았다. 공은 물에 들어가 버렸고 톰스는 그 홀에서 보기를 했다. 나와 그가 공동 선두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나는 ‘마의 홀’로 불리는 17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1타차 단독 선두로 나섰지만, 톰스가 18번 홀에서 10야드(9m)나 되는 긴 버디 퍼트에 성공해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첫 번째 홀인 17번 홀에서 티샷을 홀에서 12m가량 떨어진 곳에 보낸 뒤 첫 번째 퍼트를 홀 약 1m 옆에 붙였다. 무난하게 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톰스도 나와 비슷한 거리에 볼을 가져다 놨지만 볼은 야속하게 홀을 돌아 나왔다. 이제 내 차례다. 우승 퍼트만 남았다. 침착하게 공을 굴렸다.
‘쨍그랑.’ 우승이었다.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프로저와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우승 가뭄을 3년 만에 날려버렸다. 매니저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꿈만 같아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하나님, 제 기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회는 PGA 투어가 선정한 2011년 시즌 가장 힘들었던 우승으로 꼽힌 12개 대회에 들어갔다. 내 세계랭킹도 15위로 19계단이나 상승했다. 한국 선수는 물론 아시아 선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였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49) “내가 받은 은혜와 도움, 미래 꿈나무들에게 도움 주고파”
최경주 재단 설립… KJ 주니어팀 운영 일찌감치 국제무대 경험할 기회 제공 미래세대를 세우는 것이 ‘제2의 사명’
최경주재단이 창립 15주년을 맞아 2023년 서울 강남구 슈페리어 세계골프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행복한 하루’ 행사에서 최경주(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장로와 장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경주재단 제공
우승 상금은 171만 달러로, 당시 우리 돈으로 약 19억원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라고 이렇게 큰돈을 주시지는 않았을 텐데….” 상금을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는 워낙 금액이 커서 마음가짐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당시 토네이도가 미국 남동부를 휩쓸고 간 뒤라 그 지역의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해 복구에 보탬이 되도록 우승 상금 중의 일부를 기부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가 내 기부에 대한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언론사에 보내면서 나를 칭찬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미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됐다.
내가 받은 은혜와 도움을 생각하면 이렇게 도울 수 있고 나로 인해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골프를 처음 시작했던 17살 청소년기부터 필요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이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을 혼자 이겨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럴 때 내밀어 주는 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골퍼를 꿈꾸는 미래의 골프 꿈나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었다.
2007년 메모리얼 토너먼트와 AT&T 챔피언십 우승으로 부와 명예를 얻게 됐을 때 그 모든 영예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프로 골퍼로 활동하면서 여러 사회복지단체를 통해 기부해 오곤 했지만 그저 후원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길 바랐다.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이 땅의 청소년과 청년이 꿈을 잃지 않고 희망을 품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의 뜻을 지지해 주고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과 함께 그해 11월 ‘최경주 재단’ 설립을 발표, 2008년 창립했다.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을 하고 나의 기부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찾는 모습을 보며 내가 다시 일어설 힘의 원천이 희망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인지했다.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사랑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나눌 때 서로에게 더 큰 힘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도 누군가의 어두운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붙여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가 확고해졌다.
재단 설립 이후 지금까지 청소년과 청년에게 다양한 지원을 제공했다. ‘KJ 주니어 골프팀’ 운영을 통해 골프 꿈나무를 육성하고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대회 참가를 지원해 일찌감치 국제무대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장학 사업도 재단의 주요 활동 중 하나다. 2014년부터 SK텔레콤과 협력해 매년 15~20명의 저소득층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금까지 300명 이상의 장학생을 배출했다. 아울러 지역 아동들을 위한 도서관 설립과 공부방 지원을 비롯해 의료 후원 협약을 통한 골프 꿈나무 건강 관리 등 사회공헌 및 교육 지원 활동도 꾸준히 전개했다. 청소년 최경주가 성공한 프로 골퍼가 돼 나 같은 처지에 있는 K-꿈나무 골퍼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 이는 나에게 주어진 ‘제2의 사명’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0) 강인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에게 배짱과 용기 배워
초5 때 불장난하다 지붕 태웠을 때 불호령 대신 따뜻한 말로 안심 시켜줘 바닷일 하며 다져온 강인함과 용기 아이 셋 아버지 된 지금 그 사랑 깨달아
최경주 장로의 아버지 최병선(오른쪽)씨와 어머니 서실례(왼쪽)씨가 2002년 전남 완도의 자택에서 아들의 경기를 보며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열세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추운 겨울이라 바닷바람이 살을 에었는데 아버지는 맨손으로 미역을 건져 올리셨다. 나는 두툼한 장갑을 끼고 아버지를 따라 바닷물에 손을 담갔는데 칼끝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져 왔다. 잠시 일하다 보면 손이 얼어 감각이 없어졌다. 밀물이 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므로 언 손을 녹일 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느새 밀물이 들어오는지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리는 것 같은데도 아버지는 계속 미역을 따서 배에 실으셨다. 배가 가라앉을까 봐 겁이 난 나는 그만 가자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하셨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 “아버지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파도의 높이를 계속 보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배를 돌리셨다. 뭍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퍼렇게 변한 손을 녹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를 저으셨다. 아버지에게서 배짱과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모습과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봤다. 나이 쉰이 넘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내게 주신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
앞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에 불이 나서 동네가 발칵 뒤집혔던 일이 있다. 범인은 바로 나였다. 친구와 팔각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뜬금없이 창고 지붕 위의 짚에 불붙이기 놀이를 시작했다. 친구가 지붕 끝자락에 불을 붙이면 내가 얼른 끄고 내가 불을 붙이면 친구가 냅다 끄면서 시시덕거렸다. “크크, 진짜 재밌다. 그치.”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어 손쓸 틈도 없이 불길이 지붕을 타고 높이 올라갔다. “야야, 큰일 났다. 언능 물바가지 좀 가져와.” 타닥타닥 불꽃이 피는 소리가 나더니 허연 연기가 하늘을 자욱하게 덮었다. 동네 어른들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큰 소리로 우리 부모님을 부르셨다. 친구와 나는 깜짝 놀라 뒷동산으로 도망쳤다. “경주야, 니네 아버지 힘이 장사 아니시냐. 우리 이제 맞아 죽게 생겼다.” 부모님이 지붕 위에 올라서서 불을 끄시는 모습을 나무 사이로 지켜보면서 입이 바작바작 타들어 갔다. 다행히 불은 더 번지지 않고 지붕만 홀라당 태운 뒤 꺼졌다.
해가 지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배가 고파지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터벅터벅 산을 내려가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불을 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고 앉아 눈을 질끈 감고 불호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는데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머스마가 그럴 수도 있지. 앞으로는 절대로 볏짚에 불붙이지 마라. 잘못한 걸 알았으면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진짜 멋이다. 경주야, 알았냐.”
순간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졌다. 나이가 들수록 그때의 아버지 목소리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맴돈다. 아버지는 마음이 넓고 지혜로우셨다. 그 무엇보다 아들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되고 보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한 마디는 잔소리 백 마디, 회초리 수십 대보다 힘 있었다. 아무리 훈련이 고돼도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바람 잘 날 없는 섬에서 바람 분다고 고기 잡는 일이나 미역 따는 일을 미룰 수 없던 것처럼 말이다. 상황은 내가 바꿀 수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내 몫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1) PGA 투어 잠시 휴식… 세 아이 양육에만 집중
야구로 진로 잡은 첫째와 막내아들 매 주말 야구장서 훈련 도우며 응원 감독·코치 부당한 대우에 골프 전향 6년간 아이들 꿈을 위해 시간 보내
최경주(오른쪽 두 번째) 장로의 가족 사진. 최 장로 제공
시간이 흘러 나도 세 자녀의 아빠가 됐다. 선수로서 한창 활약하던 시절, 인생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꿈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모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어린 시절은 두 번 다시 안 돌아오기 때문에 부모로서 이 시기를 같이 보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중에 ‘아빠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다니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뭐 해줬냐’와 같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PGA 투어는 잠시 쉬고 세 아이의 양육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느 날 큰아들 호준이가 야구를 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아빠가 골프 선수인데 야구를 하겠다니 솔직히 당황했다. 야구는 전혀 모르는 영역이었다. “호준아, 아빠는 야구를 모르니까 (못 도와주는데) 골프를 하면 도와줄 수 있지만.” “아빠, 난 야구를 하고 싶어.” 강력한 의견 피력에 아이의 열정을 꺾지 않기로 했다.
아들이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이 야구를 배운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리틀야구부터 시작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시스템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원정 경기를 다니고 포지션별로 레슨을 받으며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주말마다 야구장을 오가며 파울볼을 잡아줬고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아이를 응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점점 벽에 부딪혔다. 실력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감독과 코치들의 부당한 대우도 잦았다. 결국 큰아이는 스스로 야구를 포기하고 골프로 전향하겠다고 했다. 골프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안도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골프는 내가 잘 아는 분야였지만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골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그의 훈련과 대회 준비를 돕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내 연습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큰아이가 대학 골프팀에 들어가게 되자, 나는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아 정말 뿌듯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막내아들인 강준이도 야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와 달리 막내도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고 결국 나는 다시 야구장을 오가는 삶을 시작했다. 막내와 함께한 2년 동안 주말에는 야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막내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야구 대신 골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두 아이 모두 골프에 집중하게 됐다.
아이들을 위해 보낸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호준이와 강준이가 각각 다른 시기에 야구와 골프를 병행하며 보낸 시간만 해도 거의 6년이었다. 그동안 내 선수 생활은 자연스럽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PGA 투어에서 계속 활동하던 내가 갑자기 모습을 감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최경주가 경기에 나오지 않느냐며 여러 가지 추측을 했지만 나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는 결정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2) 암 수술 후 체력 떨어져… 가족들 응원과 기도로 이겨내
갑상샘암으로 선수 생활 위기 코로나19 터져 홀로 훈련하며 가족과 시간 보내며 회복 전념 2021년 우승하면서 재기 성공
최경주 장로가 2021년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페블비치 골프링크스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스 투어 퓨어 인슈어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렇게 아이들의 입시를 성공적으로 끝냈고 선수로서 복귀를 위해 훈련 도중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항상 피곤함을 느꼈기에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다. 2017년 건강검진에서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이듬해 수술을 받았고 이후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수술 이후 근육이 빠지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골프 스윙 속도도 현저히 줄었다. 원래는 드라이버 스윙 속도가 109마일(175㎞) 정도였는데 아무리 세게 쳐도 102마일(164㎞)을 넘기지 못했다. 거리는 240~250야드(약 228m)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선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래서 선수들이 은퇴하는구나.’ 그 순간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일어설 것인가.’ 나에게 은퇴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근력 강화 운동을 시작했고 먹는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PGA 투어에서 젊은 선수들과 경쟁하기에는 여전히 거리 차이가 너무 컸다. 초청 대회에 나가보면 그들과의 격차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강했고 나는 예전과 달랐다.
어느덧 PGA 챔피언스 투어에 출전할 나이가 가까워졌다. 챔피언스 투어는 만 50세 이상의 선수들이 경쟁하는 무대다. 나는 이 무대를 목표로 삼고 철저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약 2년 동안 꾸준히 훈련하며 내 몸을 다시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다. 코로나19가 터진 것이다. 한순간에 세상이 멈춰 버렸다. 대회는 취소되거나 연기됐고 연습장과 체육관은 문을 닫았다. 집에서 혼자 훈련을 이어가야 했고 가끔 연습장에 나갈 때는 거리두기를 지켜야 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제한된 상황에서 홀로 훈련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다시 필드 위에 설 것이다’라는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려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의 힘 덕분이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큰 위로와 힘이 됐다. 세 자녀는 각자의 꿈을 찾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과정을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로서의 책임감과 동시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단순히 가족과의 추억뿐만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한 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2021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에서 열린 PGA 챔피언스 투어 퓨어 인슈어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선수 최초의 PGA 챔피언스 투어 우승이었다. 우승컵을 들어 올린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사람들은 “최경주가 부활했다” “KJ가 회춘했다”며 환호했지만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다시 필드 위에서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의 시간,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 그리고 기도 덕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3) “나도 양아버지처럼 아낌없이 사랑 주는 사람 되고 싶어”
하늘이 맺어준 양아버지 피 회장님 남다른 안목으로 나의 가능성 발견 프로 골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 크리스천으로서 ‘나눔의 덕’도 배워
최경주 장로와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피홍배 삼정CW㈜ 회장. 최경주재단 제공
나에게는 양아버지가 있다. 바로 피홍배 삼정CW㈜ 회장님이다. 피 회장님은 88컨트리클럽 사장이셨던 여명현 장군님 덕에 만나게 됐다. 피 회장님은 1964년부터 골프를 쳤을 만큼 골프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안목을 갖고 계셨다. 평소 골프 인재를 발굴해서 함께 키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던 여 장군님과 피 회장님은 프로 초년생이었던 나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해 주셨다.
자서전 ‘코리안 탱크, 최경주’에도 썼을 만큼 피 회장님은 내가 타고난 테두리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힘을 북돋워 주신 분이다. 벽에 부딪힌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내 손에 장대를 쥐여 주고 “네 힘으로 뛰어넘어라”하며 채찍질하셨다. 장대를 쥘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막막할 때는 사다리를 세우고 “내가 붙잡아 줄 테니 어서 넘어가라”하고 등을 떠미셨다. 사업가로서 수차례 위기를 이겨 내신 분이라 자기경영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셨다.
피 회장님은 내가 프로 골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라도록 도와주셨다. 늘 ‘사람을 키우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하시던 피 회장님은 “아들 최경주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낙”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십여 년 전부터는 나에게도 ‘사람을 키우는 즐거움’을 배우라고 하셨다. 운동선수로서만이 아니라 한 시민으로서 사회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가장의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됐다는 이유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피 회장님은 돈에 대해서도 특별한 철학을 갖고 계신다. “지금 내게 있는 돈은 하나님이 나한테 잠시 맡기신 거지 본시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진 것을 망설임 없이 나눠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 또한 나눔의 덕을 입었다. 내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내가 다 해결해 줄게”라고 하시더니 내가 요청한 액수의 두 배나 되는 후원금을 만들어 주셨다.
“후원금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새끼손가락 10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부분일 뿐이야. 부담스러워 할 것 없다. 앞만 보고 가거라. 지금까지 나는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나가며 살아왔다. 네 뒤에도 하나님이 계시니 반드시 너를 지키고 돌봐 주실 게다.”
하늘이 맺어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얘기를 들을 만큼 각별하게 사랑해 주시는 피 회장님으로부터 아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등불을 비춰 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배운다. 피 회장님은 현재 최경주재단의 회장을 맡아 재단 운영의 중심을 잡아주고 계신다.
나는 큰 상금을 타면 돈을 많이 번다는 기쁨보다 넉넉히 나눌 수 있는 주머니가 채워진다는 사실에 덩달아 마음이 풍성해지는 걸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골프채를 쥐고 죽어라 연습하고 있을 후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응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4) 뜨거운 안수기도에 성령 임재… 하나님 사랑·위로 받아
나의 영적 아버지인 하용조 목사님 영의 눈으로 내 마음 훤히 뚫어보시고 어려울 때마다 기도로 위로와 격려 영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데 큰 역할
미국 진출 초기의 최경주 장로(왼쪽)와 고 하용조 목사. 최 장로는 자신이 어려운 순간마다 기도 요청을 했던 하 목사를 ‘영적 아버지’라고 부른다. 두란노 제공
고 하용조(1946~2011) 목사님은 나의 영적 아버지다. 나는 아내를 따라 오랫동안 온누리교회를 다녔지만, 하 목사님을 직접 뵌 건 8년이 지나서였다. 2002년 컴팩 클래식과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연달아 우승한 후였다.
내 신앙이 겉으로는 좋아 보였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정체기가 길었다.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 목사님도 나의 이런 영적 상태를 잘 아셨던 것 같다. 마치 영의 눈으로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것 같았다.
수년 전 시즌 도중 잠시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온누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어딘가를 급하게 가려는데 하 목사님이 붙잡고 기도해주셨다. “하나님, 우리 최 형제를 겸손케 하시고 매 순간 마음을 지켜주세요.” 내심 당황스럽고 뜨끔했다.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부족함을 깨닫곤 했다.
다른 일화도 있다. 내가 너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다. 당시 성적이 너무 안 나와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민하다가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목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고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뜨겁게 기도를 받고 일어나니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왔다.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돌아보면 하 목사님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잘 아시는 분이셨다. 단순히 설교만 하시는 분이 아닌, 성도 한 명 한 명의 영적 상태를 살피고 돌보시는 영적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목사님의 기도 덕분에 지금의 최경주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훨씬 힘든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 목사님은 내 신앙 여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셨다. 목사님의 영적 지도와 기도는 인간 최경주가 육신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사님이 위독하십니다.”
2011년 8월 1일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하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었다. 전화기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월드골프챔피언십(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이었지만 대회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15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목사님은 이미 눈을 감으신 뒤였다. 아내와 교회에 차려진 빈소를 찾았는데 영정 사진 속 목사님이 웃으며 반겨주시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목사님은 어떻게 내 사정을 아시는지 필요할 때마다 위로가 되는 말씀을 알려주시고 기도해주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 10:27)
***[역경의 열매] 최경주 (55)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 하 목사님께 배운 소중한 유산
창립 4주년 행사에 온 가수 윤복희 하용조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일정 비워 둔 덕에 행사 초대 성사
최경주 장로가 2011년 미국 조지아 애틀랜타 애슬레틱클럽(AAC)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챔피언십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렇게 의지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허망했다. 조문을 끝내고 대회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여러 생각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말이 없다는 것, 말을 해주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살아있을 때 뭐든 하기로 다짐했다. 나에게 내일이 없을 수도 있으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하 목사님은 내 어깨가 무거울 때마다 “최 형제, 항상 낮은 곳에서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를 지키는 게 중요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걸 내려놓고 편안하게 치면 우승도 하는 게 골프다. 지금도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른 아침 미국 오하이오에 도착하자마자 경기에 들어갔다. 시합 내내 공을 치는 건지 꿈속에서 헤매는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동료 선수들이 하나둘 다가와 위로를 건넸다. “KJ,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매우 유감이야. 기운 없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 “네가 이렇게 힘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네. 힘내라, KJ.” 결국 대회는 59위로 마쳤다.
몇 달 후 또다시 울컥한 일이 생겼다. 2011년 11월 11일 최경주재단 창립 4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 윤복희 선생님을 초대 손님으로 초청했는데 그날 무대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골프를 잘 몰라요. 최경주 프로도 잘 모르고요. 내가 어떻게 여기 와있느냐고요. 하루는 하용조 목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오늘 꼭 나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죠. 죄송하지만 해외공연 일정과 겹쳐서 안 되겠다고 했더니, 무리인 줄은 알지만 일정을 조정하면 안 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30여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신 건 처음이었어요.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정말 어렵게 일정을 조정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시간은 비워 뒀는데 만날 사람이 없어진 거죠. 때마침 최경주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야 깨달았어요. 하 목사님이 이 자리에 꼭 오고 싶어 하셨다는 걸요. 당신 대신에 나라도 와서 최 프로를 만나라고 하시는구나 하고요.”
하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3주 전쯤에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재단 후원의 밤에 윤 선생님을 초대하고 싶으니 주선해 주십사 부탁드린 적이 있다. 그게 마지막 전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윤 선생님이 ‘여러분’을 불러주셨는데 들으면서 울컥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목사님은 내게 끝까지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곁에 없어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목사님에게 배운 소중한 믿음의 유산이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6) 경주마처럼 살아온 길, 놓친 것 많아 아쉬울 때도…
앞만 보고 달린 탓에 지나쳐 온 것 많아 꿈 이루기 위해 내 중심으로 살다 보니 공부·친구, 특히 가족 잘 살피지 못 해
최경주 장로와 최경주재단 소속 골프 유망주들이 지난달 미국 댈러스에서 진행된 동계훈련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 장로 제공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경주마처럼 살아왔다. 골프가 내 길이라는 걸 안 뒤로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목표를 세우면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약해지는 게 싫어서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공 100개를 치는 것이 어려우면 150개로 높였다. 그래야 100개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 옛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살 것이다. 골프를 하게 된 건 최고의 행운이었다.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진 않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린 탓에 놓친 것들도 분명 있다. 지나쳐 온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운동선수는 학교 수업 빼먹는 것을 특권으로 여길 정도로 공부엔 소홀했다. 공부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너무 성급했다. 어른이 돼서 보니 공부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들을 살피지 못하고 철저하게 내 중심으로 살았던 것도 아쉬움이 남는다. 신혼 때도 대회를 핑계로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었다. 옆을 묵묵하게 지켜준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공존한다. 나는 가까운 사람을 배려하는데 서툴렀는데 정작 나는 남의 도움을 발판 삼아 이만큼 성장했다. 힘들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위로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는지 잘 안다.
최경주재단에서 골프 꿈나무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골프를 배우겠다고 모인 아이들의 얼굴에서 뭔가 말 못 할 고민과 불안이 보였다. 예를 들어 억지로 운동을 하고 있거나 매일 집이나 연습장에서 야단맞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골프가 좋아서 죽어라 했던 나와는 다른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 꼭 이겨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주눅 든 꿈나무들이 많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어른들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실력에 따라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과 비교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이의 노력을 인정해주면서 순위를 정해 주면 나도 언젠가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1등만이 최고이고 그 아래를 무시하는 건 상처만 남긴다. 아이가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그날 배운 걸 제대로 기억하고 습득했는지 물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그저 스코어와 순위만 궁금해하는 건 장기적으로 건강하지 않다. 세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느낀 것이 있다. 엄마가 혼내면 아빠한테 온다. 좋은 말로 타일러서 마음을 풀어주면 금세 자신감을 회복한다. 아이들을 다그치면 좌절감과 패배감, 수치심만 느낄 뿐이다. 보기 더블보기 더블파를 했다고 라운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골프는 기다리고 인내하며 멀리, 넓게 봐야 한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7) 꿈나무들 대상 동계훈련… 골프뿐만 아니라 인성 교육도
공정하게 선발된 아이들의 멘토 돼 골퍼로서 쌓아온 노하우 집중 전수 공만 잘치는 법 가르치는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살 수 있게 지도
최경주 장로와 최경주재단 소속 골프 유망주들이 지난해 12월 미국 댈러스 최 장로 자택에서 진행된 동계훈련에서 각자 각오를 적는 시간을 갖고 있다. 최 장로 제공
매년 겨울이 되면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집으로 최경주재단 꿈나무들을 초대해 동계훈련을 한다. 최경주재단 골프 꿈나무 지원 사업은 골프에 꿈과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청소년들이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했다.
2010년부터 미국과 태국, 중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동계훈련을 이어오다 코로나 팬데믹을 기점으로 2020년부터는 댈러스 집에서 진행하고 있다. 일종의 ‘베이스캠프’인 셈이다. 지난해 12월 26일부터 5주간 진행된 훈련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오는 3월엔 미국 주니어골프협회(AJGA)와 협약해 진행되는 ‘K.J Choi 파운데이션 주니어 챔피언십’이 댈러스에서 열린다. 미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주니어 대회다. 지난해 동계 전지훈련을 한 꿈나무들을 대상으로 최근 선발전을 치러 출전 선수 3명을 확정했다.
동계훈련은 프로 골퍼로서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골프 꿈나무를 위해 집중적으로 전수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프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인성 교육도 겸한다. 아내는 이 기간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본다. 직접 식사를 만들어 먹이는 것은 기본이다.
훈련 온 꿈나무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훈련한 내용과 느낀 점을 A4용지에 적어 봐라.” 아이들에게 여기에 왜 왔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골프를 잘 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가라”고 말한다. 순간 아이들이 당황해하면서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내가 너희를 여기에 부른 목적은 단순히 공 잘 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야.” 나는 골프 꿈나무들에게 잘 생각하고 잘 생활하고 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 “너희들 스스로 생각해 봐. 내가 골프를 왜 하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살아갈 건지.” 이렇게 말하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은데요’ 등과 같은 대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자기 인생의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오로지 매진하겠다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부모님이나 코치가 하라는 대로 하며 끌려온 결과다.
재단 꿈나무 한 명 한 명은 엄격하고 공정한 선발전을 거쳐 선발되는 만큼 마음을 다해 아이들의 멘토가 되려 한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품어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늦으면 늦는 대로 제힘으로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어른들이 알을 대신 깨주면 아이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지 못한다. 부모나 코치의 눈치를 보며 망설일 뿐이다. 적당한 칭찬과 격려, 충고를 들으며 자란 꿈나무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이겨낸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8) 골프 인생 38년 ‘최고의 동반자’ 캐디 ‘앤디 프로저’
처음 소개받았을 땐 미덥지 않았지만 경기 시작하자 정확한 분석력 발휘 대회 신기록 세우며 최초 한국인 우승 8년여간 PGA 투어에서 7승 합작
최경주(오른쪽) 장로가 8년여간 함께한 ‘필드 위 동반자’ 캐디 앤디 프로저. 연합뉴스
어느덧 골프 인생 38년차다. 그 사이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프로 골퍼로서 내겐 또 다른 좋은 동반자가 있었다.
골프 경기는 하루에 4시간 넘게 진행된다. 코스 대부분은 혼자 묵묵히 보내지만 내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가 있다. 바로 ‘필드 위 동반자’로 불리는 캐디다.
캐디는 단순히 골프백을 옮겨주는 사람이 아니다. 일종의 로드 매니저다. 골프백을 운반하고 클럽을 관리하고 대회 일정을 모두 챙긴다. 선수보다 한발 앞서 코스 답사를 하고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때론 선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냉정하게 조언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코스에서 유일한 내 편은 캐디뿐이다. 우승 상금의 일정 부분을 나눠줄 만큼 맡은 역할이 크다.
과거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나는 캐디를 가장 자주 해고하는 사람으로 소문난 적이 있다. 미국 진출 초창기엔 실제로 그랬다. 2004년 앤디 프로저를 영입하기 전까지는.
2003년 9월 유러피언 투어 린데저먼 마스터스에 출전했을 때 처음 프로저를 소개받았다. PGA 투어에서만 29승을 만들어 낸 베테랑이라는데 영 미덥지가 않았다. 당시 프로저는 체력도 부족해 보였다. 더구나 당시 집안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어깨를 다쳐 가방도 메기 힘들어했다. 이틀 동안 연습 라운딩을 했는데 연습하는 내내 조언 한마디 하지 않았다. 코스 방향만 알려주고 그냥 치라고만 할 뿐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내가 언덕 위 그린에 티잉그라운드 앞에서 물이 있는 파3 5번 홀에 선 후 8번 아이언을 달라고 하자 프로저가 차분히 말했다. “9번 아이언을 쓰는 게 어때. 연습 라운드 때 보니까 9번 아이언 145야드(약 133m) 나가던데 풀스윙을 하면 핀을 지나 그린 위에 떨어질 거야.” 그의 조언대로 쳤더니 버디를 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프로저는 이틀 동안 내가 몇 초 안에 스윙을 마치고 몇 번 아이언으로 얼마의 거리를 내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느낌대로 스윙하는 편이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과 거리만 알려주면 딱 맞춰서 칠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맞았고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필드 위에서 나만을 위한 맞춤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동반자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결국 그 대회에서 22언더파로 대회 신기록을 1타 경신하며 유러피언 투어 역사상 최초 한국인 우승을 거머쥐었다. 프로저와 8년여간 합작한 PGA 투어 우승은 7승이다. 그는 2011년 60세가 되면서 체력적 한계로 사실상 은퇴를 선언했다. 나로서는 너무나 아쉬움이 컸다. 가능하다면 내가 선수 은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고 싶은 최고의 동반자였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59) 2024 SK텔레콤 오픈 우승은 하나님이 만들어 낸 기적
연장 라운드서 워터해저드에 빠졌지만 도착해 보니 해저드 안 작은 섬에 안착 야디지북 첫 페이지에 말씀 적어놓고 힘든 순간엔 성경 말씀 통해 위로받아
최경주 장로가 지난해 5월 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최고령 우승을 기록한 후 우승컵을 들고 있다. 최 장로 제공
2024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 우승 이후 삶에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기자들의 달라진 질문’이다. 우승 이후 언론 인터뷰를 위해 미디어 센터에 들어섰다. 기자 50여명이 있었는데 한 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최경주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발언은 기자단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발언한 당사자는 오랫동안 골프계를 취재한 베테랑 기자였다. 사실 그의 발언에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다.
54번째 생일이기도 했던 SK텔레콤 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경기는 극적으로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18번 홀 1차 연장에서 두 번째 샷이 그린 앞 개울(워터해저드)로 향했다. 공은 개울 내 작은 섬 같은 러프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다. 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 공은 당신이 주신 선물입니다. 제가 여기서 좋은 샷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말 기적처럼 샷에 성공했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 순간은 평생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놀란 이가 있었다. 미디어센터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발언을 한 그 기자였다. 그는 경기 마지막 날 나를 따라다니며 밀착 취재했다. 최경주의 우승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최경주가 믿는 하나님이 만들어 낸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2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지만 많은 기자는 신앙에 회의적이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기자가 나의 우승으로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이런 일이 있기까지 긴 담금질의 시간이 있었다. 힘든 순간에는 성경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특히 로마서 말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합 때 사용하는 작은 공책 ‘야디지북’이 있다. 야디지북은 골프 코스의 거리와 지형, 각 홀의 거리, 그린의 경사도, 장애물 위치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야디지북 첫 페이지에 ‘위의 것을 생각하라. 영의 사람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을 적어뒀다. 또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적었는데 이는 내게 충격과 위로가 됐다. 아무리 다른 선수들이 방해하거나 어려운 상황이 와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승 후 많은 사람이 생활 방식에 대해 궁금해 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성직자처럼 산다고 재미없지 않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남몰래 호텔에서 혼자 마시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목사님과 말씀 공부를 하고 가족과 말씀 나누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육적인 즐거움과 영적인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집에 일찍 귀가해 아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골프를 치러 가는 일상은 참으로 소중하다. 세상의 즐거움을 찾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역경의 열매] 최경주 (60·끝) “골퍼 아닌 신앙인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 나누고 싶어요”
골프는 내게 기본 갖춰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 우승의 기쁨을 넘어 신앙의 더 큰 의미 전달하는 사명 감당할 수 있길
최경주(오른쪽) 장로가 2023년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장로 취임식에서 아내 김현정 권사와 꽃다발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 장로 제공
요즘 새 시즌 시작을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 중이다. 지난 시즌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하지만 과거에 취해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게임을 쉽게 풀어가기 위해 지난해보다 비거리를 10야드(9m) 더 내는 걸 목표로 잡고 체력 증진에 집중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몸이 아파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한다. 체력 훈련 외에 따로 특별히 기술적 훈련은 하지 않았음에도 비거리가 다소 늘어난 것을 보면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 올해는 2개의 국내 대회를 통해 팬들과 만날 예정이다. 타이틀 방어전이 될 오는 5월 제주도 핀크스GC에서 열리는 SK텔레콤 오픈과 10월에 경기도 여주 페럼클럽에서 개최되는 현대해상 최경주 인비테이셔널이다.
골프만큼 정직한 운동도 없다. 누가 경기를 하든지 상관없이 공이 홀에 들어가야만 경기가 끝나고 심판이 없는 대신에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핸디캡’ 규정 덕분에 남녀노소, 체력을 불문하고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운동이다.
골프는 진실한 게임이기도 하다. 골프는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줬다. 똑바로 멀리 가지 않는다고 공을 손으로 집어 들고 갈 수 없는 건 편법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그립을 잘해야만 제대로 스윙할 수 있다는 점은 기본을 갖춰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신중하게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을 때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때로는 배짱 좋게 모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스윙도 중요하지만 목표를 향해 세트업 하는 준비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 흔히 하는 말로 ‘장갑 벗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등도 골프를 통해서 배운 인생 교훈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막내아들 강준이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 동반 출전하는 것이다. 강준이는 미국 듀크대 골프부에 소속돼 있다. 강준이가 프로에 진출하기 위해선 실력을 더 갈고닦아야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언젠가 이뤄질 그 날을 위해 나도 쉬지 않고 공 치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다.
선수생활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내게 주어진 역할은 다음세대에게 골프가 가진 깨끗한 정신을 전수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골프계에 많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우승의 기쁨을 넘어 신앙의 더 큰 의미를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지면을 통해 골퍼 최경주만이 아닌 ‘신앙인’ 최경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동안 내가 받은 은혜의 열매를 국민일보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골프채를 잡은 순간부터 나이 50을 넘어 맞이한 제2의 전성기까지, 평탄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지금 돌아보니 내 인생은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신 진정한 ‘역경의 열매’다. 하나님은 역경을 통해 우리를 다듬어가고 그분이 원하는 열매를 맺으신다. 결코 우리가 달리는 걸 멈추면 안 되는 이유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독자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