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헌 론
이동민(대구의 수필가에서)
김시헌(1925-2014)은 1925년 안동시 임하면에서 태어났다. 안동농림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한동안 제도사와 측량 기사로 근무하였다. 경북대학교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중등교원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안동에서 근무하다 1963년에 대구로 옮겼다. 그는 줄곧 교육자로서 평생을 보냈다.
교직에 근무할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시와 소설을 썼다. 수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세 때였다. 처음 읽은 수필은 ‘나의 종교와 인생’이라는 일본어 판이었다. 6.25 직후 ‘하루살이’라는 수필집을 읽고 나도 수필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31세 때부터 대구의 일간지 ‘매일신문’ ‘영남일보’ ‘대구일보’와 경상북도 기관지 ‘도정월보’에 글을 발표하였다. 1966년에 ‘현대문학’에 수필 ‘사담 私談’을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수필문단에 등단하였다.
김시헌은 대구 수필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영남수필문학 창립에 참여하였다. 장인문의 회고에 의하면 이화진 여사와 김시헌이 만나자고 하여 양지다방에서 만났다. 세 사람은 수필문학 동인 모임을 갖기로 뜻을 모우고, 사람들을 영입하였다. 그때 모인 열 두 명이 영남수필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초대 회장은 최정석 교수가 맡았으나 창립 때 딱 한번 나오고 말았다. 김시헌이 마지 못해 2대 회장을 맡았다. 실질적으로 초대 회장이었다.
김시헌은 오늘의 영남문학의 뿌리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흑구 선생을 회원으로 영입하기 위하여 포항까지 찾아가는 열정을 보였다.
김시헌은 비교적 다작하는 작가이다. 1972년에 3인 수필집 ‘산문산책’을 출간한 이후 수필집을 여러 권 출간하였다.수필 뿐아니고 수필잡지에 수필이론과 수필 평에 관한 글을 많이 발표함으로 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다.
1982년에 ‘수필공원’에 ‘수필에서 허구’라는 글을 발표함으로 수필에서 ‘허구’는 80년 대와 90년 대의 가장 큰 논점이 되었다. 이 글은 이후에 수많은 수필가들이 참여한 수필에서의 허구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의 반대편에 선 사람은 허구를 찬성한 정진권이었다. 정진권과의 논쟁은 수필문학사에서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영남문학회 뿐아니고 대구문인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부지부장의 직위를 맡았다. 이 시기의 수필가들은 대체로 문단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때만 해도 수필을 지식인의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아마도 수필가들이 문단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스스로를 전문 문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았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김시헌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수필이 문학이라는 확신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1972년에 밝간한 3인 수필집 ‘산문산책’은 대구 수필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며, 또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1990년 대에 서울에서 ‘산문산책’을 조명하면서, 3인 수필집을 발간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산문산책’을 모르는 후대 수필가가 수두룩하다. 우리도 뿌리 찾기를 하여야 하리라.
1975년에는 5인 수필집 ‘인생의 묘미’를 발간하였다.
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수필문학상도 여기저기서 여러 번 수상하였다. 경북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금이야 문학상이 너무 흔하여 수상의 의미가 높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문학상 수상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에게 주는 영예였다.
김시헌은 선비 고장인 안동에서 태어나서 오랜 동안 교직생활을 함으로써 그의 수필은 보수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수필가들이 대체로 수필쓰기에만 전념하는 반면에 김시헌은 수필이론을 깊이 탐구하였다. 수필 전문지에는 김시헌의 수필론 또는 평글이 부수히 실렸다.
김시헌이 직접 말하는 수필문학론을 인용해봄으로써 그의 수필이 어떤 경향의 글인지, 그의 사유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 문학이라고 하지만 형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문학이다. 무형식의 형식이야말로 수필이 갖고 있는 특이한 창조성이다.”
나는 수필을 처음 공부할 때 이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러나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형식의 형식’이란 말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말인지도 가늠이 안된다. 형식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의미 전달이 불분명하다. 초기의 수필이론에 이런 방식의 언급이 많았다. 지금의 수필이론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시헌론을 말하면서,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초기의 수필이론은 이런 방식의 언급이 많다. 우리는 단순히 초기 이론가를 소개만 할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찾아야 하리라. 새로운 길을 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김시헌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수필을 발표하였다. 그가 스스로 꼽는 대표작은 ‘고목, ’석고상‘ ’아들‘ ’인생의 의미‘ ’해는 다시 돋다.‘ 이다. 수필의 제목만 보아도 글의 내용이 가볍지 않으리라고 느껴진다.
유병근은 김시헌의 수필을 평하여 ’단순한 묘사 표현이 아닌 짙은 사색의 꾸러미 풀기‘라고 하였다. 김규련은 그의 수필을 평하면서, ’그의 수필에 더러는 허튼 소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했다. 허튼 소리는 수필에서 파격을 의미한다. 수필이 지나치게 엄숙하고 정직함으로 독자는 식상함을 느낀다. 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김시헌의 수필이 너무 엄숙하여 재미가 느껴지지 않은다는 뜻이다.
교직을 떠나 경기도 안양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영남수필‘에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
김시헌은 오래 동안 수필교실에 강의하러 다녔다. 그만큼 수필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한 수필가이다. 지금에 와서 그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대구의 수필문단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수필가들이 대구수필문단의 역사에 너무 무관심하다.
초기에 수필가라면서 글을 쓰신 분들의 대부분이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시는 분이 많았다. 국어는 글쓰기와 가깝기 때문에 수필을 쓰지만 수필을 위해서 몸을 바치시는 분은 거의 없었다. 김시헌 선생은 수필을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신 분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필가라고 생각한다. y
작품집과 저서
방황자(세대 46, 1967)
3인 수필집(산문산책 -김진태. 김시헌, 장인문) - 형설출판사. 1972.(당시 500원)
5인 수필집(인생의 묘미 ) - 광동출판사. 1975
빛을 아는 사람 – 창조사. 1982
두만강 푸른 물에 – 범우사 1985
오후의 산책 -- 교음사 1990
3인 수필집 (김진태, 김시헌, 장인문, 산문산책 2) - 교음사 1993
해질 무렵 -- 교음사 2000
수필을 말하다. -- 수필과 비평사 2000
생각하는 사람 --- 선우 미디어 2001
허무의 표정 --- 수필과 비평사 2003
마음의 산책 --- 소소리 2007
하늘과 땅과 나 -- 좋은 수필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