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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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주현중 ―
2005년은
우리민족이 36년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광복60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음력 9월21일은 이십사절기 중 하나인 상강霜降으로서 첫 서리가 내린다는
날이다. 음력 21일이자 양력으로는 2005년 10월 23일인 일요일 저녁, 아주 뜻 깊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강
‘노들섬’에 특설무대를 꾸미고, 광복60주년을 기리며 미국어로 말하자면 트롯의 대명사격인 가수‘나훈아’氏가 특설무대가 꾸며진 한강‘노들섬’에서
잠들어 있는 선인들의 혼을 불러 들였다.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국민가수’, ‘대중가수’라는 말을 한다. 이렇듯 ‘국민가수’와 ‘대중가수’라는
말은 흔해도 ‘민족가수’라는 말은 들어 본 예가 기억으로는 극히 드문 뜻 하다. ‘국민’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한나라의 백성으로서, 다시 말하면
남국으로 갈려진 우리민족으로 보면 남한 아니면 북한의 백성을 국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만, ‘민족’이라는 말은 그 나라, 즉 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민족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백성’이란 말은 우리민족만을 가리켜 부르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흰
백(白)에 겨레 성(姓)자를 쓰는 것은 우리민족이 ‘백의민족’이기에 쓰는 것이다. 아마 타 국가에서는 ‘민족’이라는 말은 써도 ‘백성’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이 이렇듯 뜻글자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훈민정음’이 탄생되기 이전부터 한자漢字를 사용하였기에 그렇다. 한자漢字
자체가 뜻글자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한 예로 들어보자면, 순우리말인 ‘이슬’이란 말을 한자로 로(露=이슬 로)라고는 쓸 수 있지만, ‘이슬’이란
말 자체를 한자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순우리말은 뜻글자가 아니다. 작고한 필자의 친형님의 말을 빌자면, “‘육법전서’를
순우리말로 풀어 쓴다면 몇 배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이다. 굳이 앞서 말한 ‘이슬’이란 말을 풀이해 본다면, ‘새벽의 풀잎이나 나뭇잎에
생기는 작은 물방울’정도로 풀이가 된다. 그러나 이 풀이도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우리말은 쓰기는 쉬워도 배우기 어렵다는 외국인들의 말을 상기해 보아도 그렇다. 외국인들이 말하는 ‘한국어’를 배우는 애로점이란 것은
‘풀잎에 생기는 아침이슬도 이슬이라 하고, 기쁘거나 슬플 때 흘리는 사람의 눈물도 이슬이라고 표현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들어보더라도 우리말은 굉장히 복잡다양하다.
아무튼,
가수 ‘나훈아’氏는 다른 가수에겐 볼 수 없는 아주 깊은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정열과 심혼이 깃든 가수라고 생각이 된다. 표제를 『‘나훈아’의
아리랑』이라고 하였지만, 사실 ‘나훈아’氏가 한강 ‘노들섬’ 특설무대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열연한 공연 제목은 「‘나훈아’의 아리수」이다.
공연장에서 공연을 지켜보며 즉석에서 글의 전체적 흐름을 구술하면서 사실 ‘아리수’라는 말의 뜻을 몰랐다. ‘아리수’라는 말의 뜻을 몰라 하던
필자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국어사전을 뒤졌으나, ‘아리수’라는 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아리수’라는 말의 뜻을 몰라 고민하던 중 문득, 옥편에는 있겠지 하고 옥편을 뒤져본 결과 한자어로서는 찾을 있었는데, ‘아리수’라는 말은
漢字로 ‘아리수阿利水’였다. 이 ‘아리수阿利水’라는 말을 옥편에서 찾아보니, 대강 ‘언덕에서 흐르는 물’이란 뜻으로 풀이가 되었다. 정확한
풀이를 한 것인지는 모르나 필자가 풀어본 결과이다.
‘나훈아’氏가
공연장에서 부른 ‘아리수’라는 노랫말 중에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잇고’라는 노랫말이 나오는데, 이 ‘가시리’라는 말의 뜻은 ‘고려 가요의
하나로서 작자ㆍ연대 미상으로 이별의 애틋함을 노래한 네 연의 서정시의 귀호곡歸乎曲을 말함’이다. 그리고 필자는 ‘아리수阿利水’라는 말을
한자풀이와는 관계없이, ‘나훈아’氏가 부른 ‘아리수’라는 노랫말 중엔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랫말이 나오는데, ‘아리수’라는 말을
‘아리랑’이란 말과 연관시켜 보았다. ‘아리랑’하면 지난날 시골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진갑이나 환갑잔치 때 각 지방을 대표하는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부르던 이웃집 어르신들의 덩실덩실 거리던 어깨춤이 그려지는데, 이 덩실덩실 거리는 어깨춤이 마치 바닷물이 풍랑의 힘에 출렁출렁 거리는
것처럼 연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덩실덩실 출렁출렁 대며 곡예를 타고 유유히 잘도 흐르는 물 같다는 생각으로 ‘아리수’를 ‘아리랑’으로
불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원 공연제목인「‘나훈아’의 아리수」가 아닌 『‘나훈아’의 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나훈아’氏는 다른 가수들처럼 입으로만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아니었다. 물론, 모든 가수를 다 ‘나훈아’氏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부 가수들의 노래라는 것은 입으로만 쉽게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쉬게 귀로 들어 외우기 쉽고 부르기 쉽고 그저 무의미하게 가무에만
젖다가 지나가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그러한 노래들이라는 생각을 공연장에서 하게 되었다. ‘나훈아’氏는 입으로만 부르는 것이 아닌, 또한 인기에만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깊고 깊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혼으로 부르는 가수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특유의 철학과 사상이 숨 쉬고 있었으며, 아주 뜨거운 민족애가 서려 있다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해, 얼굴을 통해, 또한 그의 몸짓에서
느낄 수 있었다.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서 쓴 ‘트롯’이란 말은 본시 미국말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한 그는 ‘트롯’이란 말을 우리나라에서는
‘트롯트’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국말도 아니고 미국말도 아닌 변형된 일본말이라고 열변을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의 장르가 무어냐 묻기에 서슴없이 ‘아리랑’이라고 답변하였다고 하였으며, 그의 그 말을 즉석에서 공연 중이던 미국인이 사실이라고 증언을 해
주었다. ‘나훈아’氏가 말하기를 우리말이 있는데도 왜 미국말을 사용해야 하며, 왜 일본말을 사용해야 하느냐며 ‘트롯’이 아니라, ‘트롯트’가
아니라, ‘아리랑’이라고 말을 하여야 진정한 한국인이라고 열변을 하는 모습에 필자는 크나 큰 감동을 받고도 남았다.
그는
공연 도중 간간이 본인의 주관을 피력했는데, 요즘 현대사회 들어 노인괄시를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어릴 적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를
회상하며, 자전거 타는 것을 혼자서 배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물론, 간혹 혼자서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형ㆍ누나ㆍ아버지가 뒤에서 혼자서 탈 수 있을 때까지 잡아준다는 말을 하며, 자전거를 혼자 탈 때까지도 뒤에서 지켜보아주는 것은
어른들이며, 그 어름들이 지켜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젊은이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나훈아’氏는 타 연예인들에게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건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민족애 또한 철철 넘쳐나는 가수라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는 그를 ‘민족가수 나훈아’라고 부르고
싶다.
끝으로
누구나 시끄러운 것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조용한 것을 사랑하는 민족인 것은 추호도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가 내린다고 우산을 접고 있으면 내 주변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있어주지 않지만, 억수 같은 비가 내릴수록 우산을 활짝 펴고 비가 내리는
거리에 나간다면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이, 곁에 있어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또한, 요즘 후세대 청소년소녀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자신보다 밥그릇 수가 더 많은 선배나 어른들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선배들의 탓이라고, 어른들의 탓이라고 허구한 날 앉아서
탓만 하지 말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펴 판단하여 스스로 옳은 것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미를 가져주었으면 한다. 또한, 기성세대 역시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설사 느려터진‘아리랑’이 듣기 싫다고 에이! 하며 거실에서 자기 방으로 횅하니 들어가는 뒷모습을 가시 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말고, 청소년소녀들의 세계도 인정해 줄 것은 인정해 받아들여주는 것이 바로 현실세계 속의 ‘아리랑’이 아니겠는가.